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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감대’가 된 섬들…싸울수록 미국이 좋아한다 - 한겨레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2-05-26 조회수 : 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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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감대’가 된 섬들…싸울수록 미국이 좋아한다 
등록 : 2012.05.25 21:05 수정 : 2012.05.25 22:00 

[토요판] 뉴스분석 왜? 
동아시아 영토분쟁 100년사
중국-필리핀 해군함정이
스카버러섬에서 대치하자
필리핀은 미국과 대규모 훈련
중국은 러시아와 해상훈련
일주일 뒤엔 일본까지 나서
분쟁 최대 수혜자는 미국
중국과 다투는 나라들은
대개 미국과 군사동맹을 해왔다


가수 정광태씨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은 지난 1982년이었다. 그해 6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일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검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했다고 쓰인 부분을 ‘진출’했다고 고치도록 한 이른바 ‘교과서 파동’을 일으킨다. 당장 한국과 중국 등이 들고일어나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문제가 주변국을 뒤흔드는 심각한 외교 사안으로 발전하자,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관방장관은 그해 8월26일 ‘교과서 문제에 대한 관방장관 담화’를 발표해, 근현대사 교과서를 검정할 때 아시아 이웃 나라들을 배려한다는 이른바 ‘근린제국조항’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이 조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교과서 파동은 거듭됐고,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후소사, 지유사의 노골적인 우익 역사 교과서들이 출판돼 주변국들을 자극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과 역사를 둘러싼 치열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정씨와 같은 평범한 한국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독도였다는 사실이다. 정씨가 동료들과 함께 코미디 프로에서 처음 이 노래를 부르자 음반제작사가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그 뒤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 노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국민가요’가 됐다. 김장훈씨 같은 유명 연예인은 사비를 털어 미국의 유명한 신문에 독도 광고를 내며, 적잖은 사람이 편도 여덟 시간에 이르는 뱃멀미를 참아가며 독도를 찾는다. 독도는 한국인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국제정치에서 한 나라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성감대’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인들이 독도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듯, 일본인들은 북방 4개 섬을 떠올리며 눈물짓고, 중국인들은 대만과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얘기가 나올 때마다 침을 튀기며, 베트남인들은 파라셀제도(중국명 시사제도, 베트남명 호앙사제도)와 스프래틀리군도(중국명 난사제도, 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를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인다. 각국의 영토 분쟁이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동아시아의 바다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뜨거운 바다’다.


중국, 필리핀 대사를 세번이나 불러 경고
중국, 베트남, 필리핀, 대만,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주변 6개국의 영유권 주장이 맞서고 있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를 보자.

지난달 8일 중국과 필리핀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스프래틀리군도의 부속 도서인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 주변 해역에서 중국의 해양순시선과 필리핀의 해군 함정이 일촉즉발의 대치를 벌였다. 필리핀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스카버러섬 주변에서 벌어진 중국 어민들의 조업이 문제였다. 필리핀 함정이 중국 어선들의 조업을 단속하려 하자, 주변을 경계하던 중국 순시선이 이를 막아섰다. 양국 정부는 서로를 맹비난하며 도발 행위를 멈출 것을 요구했다.

얼마 뒤 필리핀의 ‘큰형님’ 미국이 나서 중국에 공개적인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입을 연 것은 미국 태평양 해병대 사령관 두에인 티선이었다. 그는 지난달 22일 미국과 필리핀의 정기 군사훈련인 발리카탄(어깨를 나란히)을 진행하며, 이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양대 강국(G2)의 지위에 오른 막강한 힘을 활용해 필리핀을 압박하고 있는 중국한테 자중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훈련을 진행한 장소도 하필 스카버러섬에서 가장 가까운 필리핀 영토인 팔라완섬 주변 해역이었다.

그에 맞서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 러시아와 지난달 22일부터 엿새 동안 서해 산둥반도 칭다오 남쪽 공해상에서 연합 해상훈련을 벌였다. 서해에 대한 러시아의 욕망을 잘 아는 중국이 러시아 함대의 서해 진입을 용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동안에도 두 나라 사이에 연합훈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소규모였고 비공식이었다. 이번엔 양국 모두에서 20척 넘는 전함이 출동해 사상 최초의 대규모 공식 훈련을 진행했다.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이 흐른 지난 1일 이번엔 미국과 일본이 나섰다. 두 나라 정상은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성장한 중국의 위협을 ‘미-일 동맹’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전략적 목표로 지목했다. 이제 일본의 자위대는 중국의 해양 진출을 적극적으로 경계·감시하는 ‘동적 방위군’으로 거듭나고, 미군은 중국의 대규모 선제공격을 받아 전력이 궤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핵심 병력을 오키나와-괌-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분산 배치한다. 중국과 필리핀의 해상 대치는 한달째 계속돼 지난 8일 중국 정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베이징 주재 필리핀대사를 세번째 불러 경고했다. 중국은 이번엔 타이(태국)를 끌어들여 9일부터 광둥성 부근 해역에서 해군의 합동훈련을 시행한다고 밝혔고,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진행자 허자는 “필리핀은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말했다가 사과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도대체 동아시아의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세계지도를 펼쳐 동아시아 지역을 살펴보자. 중국 대륙은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중국은 서해를 끼고 한반도, 동중국해 너머 대만과 오키나와(일본), 남중국해에서는 베트남과 필리핀과 맞서 있다. 중국 대륙 전체가 바다 너머 주변국들에 포위된 모습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엔 구멍이 많았다
바다를 사이에 끼고 중국 대륙과 접해 있는 나라들은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과 오랜 시간 군사동맹을 유지해온 국가들이라는 점이다. 한국과 미국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미국과 필리핀은 그보다 조금 앞선 1951년, 미국과 대만은 1954년 각각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헌법상 군대를 가질 수 없는 일본은 1960년 상호방위조약이 아닌 안전보장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성격의 조약을 맺었다. 한때 미국과 전쟁(1964~1975)을 벌인 베트남만 상호방위조약을 맺지 않았는데(베트남은 어느 나라와도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있다), 두 나라는 지난해 9월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선언한 바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이 모두 중국과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중국과 센카쿠열도의 영유권 문제로 맞서 있고, 베트남은 파라셀제도와 스프래틀리군도의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소규모지만 전쟁도 벌였다. 필리핀 해군은 스카버러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한달 넘게 지금도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바다가 처음부터 뜨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섬의 대부분은 사람이 정주하기엔 너무 좁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토로서 큰 의미는 없다. 그래서 주변국들은 너른 바다에 산재해 있는 섬들의 영유권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은 채 수백년을 살아왔다. 물론 일부 섬 주변에는 좋은 어장이 형성돼 어부들이 몰려들기는 했다. 실제, 센카쿠열도의 중국식 이름인 댜오위다오(釣魚島)는 ‘고기를 낚는 섬’, 즉 고기가 잘 잡히는 섬이란 뜻이다.

이런 섬들이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각국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게 된 매우 큰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이었다. 이 나라들은 한때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일본의 점령을 경험했다는 세번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근대국가를 성립한 뒤, 적극적인 해외 침략에 나섰다. 1894년 청나라와 조선의 종주권을 둘러싼 전쟁(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대만을 취득했고, 1904년 다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과 쿠릴열도(일본명 지시마열도)의 영유권을 획득했다. 이후 1910년 조선을 병합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필리핀과 인도차이나반도를 석권한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 해전과 1942년 8월 시작된 과달카날섬의 격전에서 일본을 무찌르며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얼마 뒤 미·영·중 3국 정상은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일본 패망 이후 아시아-태평양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 큰 원칙을 정한다. 카이로 선언을 통해 확인된 전후 처리의 가장 큰 원칙은 “폭력이나 탐욕에 의해 일본이 탈취한 지역에서 일본을 쫓아낸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는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그대로 계승된다. 1951년 9월 체결된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의 영토는 “혼슈, 홋카이도, 규슈와,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여러 섬”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빈틈이 많고 불완전했다.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되는 “일본이 폭력이나 탐욕에 의해 탈취한 지역”을 어디까지로 볼지, 또 일본의 영토로 남는 “연합국이 결정하는 여러 섬”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지를 두고 이해 당사국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터진 싸움은 ‘어디까지가 일본의 영토인가’였다. 독도(일본명 다케시마)와, 일본과 러시아가 갈등을 벌이고 있는 북방 4개 섬이 여기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였을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조문을 들여다보자. 이 조약 2장(영토)의 2조 (a)항은 한국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은 이 조항에 따라 “제주도(Quelpart), 거문도(Port Hamilton), 울릉도(Dagelet)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그러나 조문에 독도가 어떻게 되는지 명기되지 않은 점이 다툼의 불씨가 됐다. 한국은 조항에 독도가 명기되지 않았으나, 독도를 둘러싼 그동안의 역사적 경위를 생각해 볼 때 독도는 한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명기되지 않았으니 일본의 영토로 남았다며 맞서고 있다.

 
위 사진은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대만,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주변 6개국이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중국명 난사제도, 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 아래는 중국과 대만, 일본이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영유권 구별 안한 지 수백년
일본 침략이 분쟁의 씨앗
남중국해 석유 300억톤 등도
민족감정 명분 못잖은 이해관계
‘자원의 보고’ 스프래틀리군도
중·베트남 등 6개국이 혼전
센카쿠열도는 중-일 맞붙어
중 “미해결로 해결”서 강경 선회 


일본은 왜 독도의 국제분쟁화를 노리나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울까? 지금까지 확인된 ‘팩트’만 놓고 보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1947년 3월 초안부터 1949년 2월 초안까지는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가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 인사였던 미국의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가 미국 국무부에 “독도를 일본의 땅으로 남겨놔야 한다”는 의견서를 보낸 뒤 독도가 조문에서 빠지게 된다. 이후 1951년 8월 데이비드 딘 러스크 극동 담당 국무차관보는 양유찬 주미 대사에게 보낸 서한(이른바 ‘러스크 서한’)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한 영토 가운데 독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미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 온다. 독도 문제를 조문에 대한 해석이라는 ‘법적 관점’이 아닌,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얘기지만, 일본은 이에 근거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해결하자고 60년 넘게 주장하는 중이다.

일본과 러시아가 다툼을 벌이는 북방 4개 섬도 비슷한 논쟁이다. 조약의 2조 (c)항을 보면, 일본의 영토에서 쿠릴열도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을 제외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쿠릴열도의 홋카이도 쪽 마지막 4개 섬인 에토로후, 구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제도 등 4개 도서는 쿠릴열도가 아닌 ‘남쿠릴열도’기 때문에 일본이 포기한 영토가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둘째로, 일본이 포기한 영토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느 나라의 영토로 할지 귀속처가 모호해 생겨난 갈등이 있다. 조약 2조 (f)항에 규정된 스프래틀리군도와 파라셀제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섬들을 근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의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서였다. 스프래틀리군도의 일부 섬에 철광석이 난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일본 기업들이 1918년부터 채굴에 나섰다는 기록이 있다. 베트남을 경영하던 프랑스도 이후 스프래틀리와 파라셀의 일부 섬들을 확인해 베트남의 지방 행정구역의 일부로 편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이후 일본이 스프래틀리군도를 점령해 신난군도(新南群島·새로 취득한 남쪽의 군도)라는 이름을 짓고 1938년 12월23일 각의 결정을 통해 이 섬들을 당시 일본의 영토였던 대만 가오슝의 일부로 편입한다. 그 때문에 스플래틀리군도에서 가장 큰 섬인 이투 아바(중국명 타이핑다오)에는 이 시절 일본이 개발한 수로 시설이나 죽은 넋을 달래기 위한 관음당 등의 시설이 남아 있고, 지금도 대만의 실효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쫓겨나자 문제가 터졌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이 이 섬들을 포기한 것은 분명하지만, 귀속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60~70년대 이뤄진 해양 조사를 통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지역은 석유가 생산되는 중동과 극동 지방을 잇는 가장 짧은 해로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향하는 수입 원유의 80%가 믈라카(말라카) 해협을 지나고, 해협을 빠져나오면 남중국해를 거쳐 동중국해에 이른다. 바다의 전략적 중요성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베트남은 원래 이 땅이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의 영토였기 때문에 당연히 베트남이 영유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견줘 대만은 일본이 이 땅을 대만의 일부로 편입했기 때문에 대만의 영토라고 맞섰고, 중국은 “대만은 곧 중국”이라는 논리로 이 땅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중국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한나라 시대의 기록까지 찾아내 주변국들한테 제시하는 중이다.

스프래틀리군도의 일부인 스카버러섬 등 9개 섬을 영유하고 있는 필리핀은 이곳이 필리핀 고유 영토로 스프래틀리군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 밖에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도 자국 쪽에 가까운 바다 또는 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논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체적인 갈등의 폭은 크지 않았다. 1974년 1월 중국이 당시 남베트남이 점령하고 있던 파라셀제도의 일부 섬을 무력으로 탈취하고, 1988년 3월 스프래틀리군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베트남이 충돌했지만 전쟁은 국지적으로 끝났다. 


강대국간 자존심 대결 된 센카쿠열도
동아시아 영토 분쟁 지역에서 강대국 사이에 전면적인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은 센카쿠열도다. 세계의 2, 3위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과 일본이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 지역의 갈등은 효율적으로 관리된 편이었다.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72년 두 나라가 중일전쟁 이후 지속된 국교 단절 상태를 끝내고 국교 정상화 회담을 벌일 때였다. 센카쿠열도는 두 나라 국민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국교 정상화를 진행하기에 앞서 어떻게든 양국이 의견을 정리해야 했다.

특히 중국 쪽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되는 1879년 3월 이후부터지만, 중국은 우리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세종실록 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을 내세우듯, 수많은 문헌 증거들을 통해 이 땅이 중국의 영토임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일의 의견 대립은 결국 이 섬이 대만에 속하는가, 오키나와에 속하는가의 문제였다. 중국인들에게 대만은 일본 대륙침략의 상징이자, 중국의 통일 과업이 여전히 미완성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본은 오키섬의 어민 나카이 요자부로의 청원을 구실삼아 러일전쟁이 진행중이던 1905년 2월22일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센카쿠열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즉, 오키나와 상인 고가 다쓰시로가 낸 청원을 10년째 묵혀두고 있다가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이 돼서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에 편입한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센카쿠열도는 일본이 중국의 고유 영토를 실효지배하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중국인들의 심정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독도를 지금껏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정작 중국 정부가 취한 태도는 “해결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한다”는 유보론이었다. 인도, 소련과 차례로 국경 분쟁을 겪은 중국은 영토 문제가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세기의 화해’를 한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과 불필요한 마찰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는 중국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저우: 양국은 대동(大同)을 추구하고 소이(小異)를 극복해야 한다.

다나카: 저우 총리의 얘기를 잘 이해하겠다. 구체적 문제에 있어서는 작은 차이를 버리고 대동을 추구하자는 저우 총리의 생각에 동의한다. 센카쿠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주변에 여러 얘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저우: 그 문제는 이번에 얘기하고 싶지 않다. 지금 그것을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석유가 나오니까 문제가 됐다. 석유가 안 나오면 대만도, 미국도 문제 삼지 않는다.

중국의 이런 자세는 이후 1978년 8일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을 때도 이어진다. 당시 중국의 부주석이던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방문한 소노다 스나오 일본 외상에게 센카쿠열도 주변에서 벌어졌던 월경 사고에 대해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설명하며, 센카쿠 문제를 보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 세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시간이 흘렀고, 30여년 전 덩 부주석이 언급했던 ‘우리의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가 마침내 도래했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는 2011년 11월16일 보도한 ‘엔에이치케이 스페셜-국경의 바다’에서 최근 급증한 중국과 주변국들 사이의 영토 분쟁에 대한 중국 현역 장교들의 육성을 날것 그대로 전했다. 일본 자위대 퇴역 장교들의 모임인 ‘중국정경간담회’와 매년 여는 정기모임 자리에서 중국 장교들은 “남중국해 문제를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푼다 해도 중국이 해양영토를 지키는 권력을 포기할 순 없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해상 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주변 해역에 매장된 엄청난 자원을 개발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항공모함 보유 여부에 대한 질문에 한 중국의 장교는 “이것은 해군의 숙원사업”이라며 “미국과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미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덜레스 국무장관, 북방 4개섬 해결을 가로막다
중국의 달라진 태도는 2010년 9월 확인됐다. 중국 어선이 일본 해양순시선에 충돌해 선장이 체포된 사건에 대해 외교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강경 대응을 거듭한 것이다. 중국은 일본 정부가 선장을 “일본의 국내법대로 처리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군사관리지역에 허가 없이 침입했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을 구속하고, 광물의 비타민이라 불리는 희토류 수출까지 중단하는 강경조처를 취해 결국 일본의 백기를 받아 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의 강경 노선이 미국에 다양한 지정학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미국은 아태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의 영토문제 해결 노력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1954년 말 52대 일본 총리가 된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할아버지) 총리는 소련과 국교 정상화 회담에 돌입했다. 당시 이 회담에 전권대사로 나섰단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은 소련과 북방 4개 섬 가운데 시코탄과 하보마이제도 등 2개 섬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1956년 8월18일 런던에서 만난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으로부터 뜻밖의 압박을 받게 된다. 그는 “만약 일본이 2개 섬으로 만족해 소련이 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얻게 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중이었다)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면 오키나와를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개 섬 우선 반환론’에서 ‘4대 도서 일괄반환론’으로 선회했고, 이후 60년 가까이 러시아와 평화조약를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센카쿠열도 사건 이후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입지는 크게 강화됐다. 취임 직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내걸었던 ‘중국을 중시하는 아시아 중심 외교’는 막을 내리고, 다시 전통적인 미-일 동맹의 질서가 강화됐다. 그 완성이 지난 1일 발표된 미-일 공동선언 ‘미래를 향한 공동의 비전’이었다. 일본의 보수 언론들은 환영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마이니치신문>은 “2009년 민주당 집권 후 삐꺽거리던 미-일 관계가 이번 선언으로 그동안의 이견을 좁히고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평했고, <요미우리신문>은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 후 하토야마 전 총리가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를 잘못 다뤄 미-일 관계가 위기에 빠졌고 간 총리 때도 제자리걸음이 계속되는 등 두 사람의 죄가 깊다”며 “민주당 정권 아래서 혼란과 정체 상태에 있던 일-미 관계가 겨우 개선의 흐름을 타게 됐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8일 스카버러섬에서 중국과 필리핀의 대치가 시작된 뒤 필리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지난 1일 필리핀한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쾌속정을 제공하겠다고 하자, 알베르트 델 로사리오 필리핀 외무장관은 한술 더 떠 초계정, 초계기, 레이더시스템 등까지 요구했다. 1992년 필리핀에서 철수했던 미군은 재주둔을 검토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인 ‘영토 분쟁’이 수십년 전에 일본인들이 뿌려놓은 침략전쟁의 유산이라는 것, 그리고 그 유산으로 인해 가장 큰 지정학적 이익을 보고 있는 게 70년 전 그들과 싸웠던 미국이라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한 아이러니의 하나일 것이다. 중국 <신화통신>은 7일 남중국해에 매장된 석유 매장량이 최대 300억t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각국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엄청난 명분과 그에 못지않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한데 엉킨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은 앞으로 이 지역의 안정과 성장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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