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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려면 몽골과 손잡아야”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0-11-28 조회수 : 2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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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전문가 박원길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려면 몽골과 손잡아야”

동북공정의 원조는 몽골을 대상으로 한 북방공정… 고구려 유물 있는 동몽골 등 공동연구 시급


“오늘(3월 6일) 몽골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3월 내내 함박눈이 왔답니다.” 박원길(朴元吉·49)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역시 정상급 몽골 전문가다웠다. 조선일보 출판국에서 만나자마자 따끈따끈한 몽골뉴스부터 전해주는 걸 보면 말이다.

어떻게 몽골 소식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몽골에 있는 지인과 제자들이 날마다 메일로 몽골 뉴스를 전해줍니다.”
그는 요즘 몽골 관련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3월 20일 서울 서초구청 옆 외교센터 12층에서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열리는 이 학술대회는 주제가 ‘한국·몽골 국가연합에 관한 연구’다. 여기서 그는 토론자로 나선다.

그는 “한국과 몽골은 미래에 역사·문화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과 몽골은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좋은 예로 원나라 초기의 학자인 요수(姚燧)의 ‘목암집(牧庵集)’에는 역사상 몽골과 고려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대도(大都?膨ざ?때 수도, 오늘의 베이징)의 절반이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3자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던 거죠.”
그는 “우리 민족이 북방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며 “하지만 북방민족의 역사나 문화를 구체적으로 다룬 논저는 희귀한 편에 속한다”고 말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그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 학계의 풍토가 중국사 연구 일변도로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의 문화 형성에 최초의 토대이자 지주가 되었던 북방 기원의 문화 원형조차 중국적인 시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논리적 모순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및 주변의 역사를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북방유목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몽골을 알면 고구려가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동몽골에는 고구려의 시원(始源)을 알려주는 전설과 유물이 많이 있어 한국과 몽골의 공동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몽골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작업인 ‘동북공정’은 몽골을 대상으로 하는 ‘북방공정’이 원조입니다. 중국은 몽골의 중요성에 대해 1911년에 이미 눈을 떴습니다.”
알다시피 중국은 다민족 국가다. 황하 유역의 중원(中原)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몽골이 떨어져 나가면 티베트, 칭하이성(靑海省)도 떨어져 나가고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되죠. 그래서 중국은 원나라가 몽골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런데 원나라가 어째서 중국 역사입니까? 몽골 역사죠.”

그는 “중국은 몽골을 자국 안에 끌어안기 위해 남북조 이론까지 개발했다”며 “중국은 남조(南朝)이고 몽골은 북조(北朝)라는 게 중국식 남북조 이론”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내친 김에 과거 중국의 영토 안에 있던 민족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편입시키고 있다. 우리 고대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러시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터키도 과거에 칭기즈칸과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다스린 영토였으므로 미래에 중국의 땅이 됩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문화적 뿌리가 비슷한 한국과 몽골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왜곡을 막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몽골과 인연이 깊다. 박 교수가 몽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광개토대왕이라고 생각했는데 프랑스인 르네 클로세가 쓴 칭기즈칸 전기를 읽고 칭기즈칸에 매료됐어요.”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할 때 졸업논문의 주제도 당연히 칭기즈칸으로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몽골사를 전공한 학자가 국내에 없어 논문 지도를 받기 어려웠어요. 일본 자료 등을 보고 논문을 썼습니다. 일본만 해도 칭기즈칸에 관한 연구가 엄청나게 축적돼 있었거든요.” 



 
 
▲ 칭기즈칸의 후예 몽골의 어린이들.



그는 1986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다. 국립정치대학에서 세계적인 몽골학의 권위자 하칸촐로(Hakan chulu) 교수를 만나 사사했다. “은사님(하칸촐로 교수)은 몽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분이었어요. 본인 이름을 한자로 쓰는 걸 싫어했습니다.” 그는 이 때 중국식 사고에서 탈피해 북방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게 된다. “제가 일찍부터 몽골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저도 모르게 중국적인 시각에서 우리나라와 우리 이웃의 역사를 바라봤던가 봅니다. 이런 습관을 대만에서 고쳤습니다.”


그가 부인 김원자(金元子·44)씨와 결혼한 사연은 더 기막히다. “집사람이 어릴 때 몽골 꿈을 꿨답니다. 몽골군이 쳐들어와 겁이 나서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몽골군이 집사람을 낚아채갔다지 뭡니까.” 그의 아내는 왜 이런 꿈을 꿨는지 오랫동안 이유를 모른 채 살아왔다. 이 의문은 1986년 7월에 풀렸다. “어떤 지인이 참한 색시가 있다고 해서 집사람을 만났어요. 두 번째 만났을 때 예비 장인어른이 전공이 뭐냐고 물으시길래 ‘몽골사’라고 대답했더니 놀라시는 거예요. 하긴 그러시겠죠. 어릴 때 딸이 몽골 꿈을 꾼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겠죠.”


장인은 그 자리에서 날을 잡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만남 때 약혼을 했다. 초스피드로 결혼한 셈이다.
그는 우리가 몽골과 같은 북방민족이면서도 몽골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고 우려했다. “일본은 육군본부가 펴낸 몽골어사전까지 포함, 몽골어사전만 5~6개나 됩니다. 우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나마 2년 전에 몽골 국립대에서 한몽사전을 펴낸 게 전부입니다.”


그는 “고대에는 우리 민족이 동몽골에서 몽골족과 어울려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살면서 먼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오늘날의 영토 개념으로 과거의 두 나라 관계를 보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몽골에 대한 호칭으로 중국인이 몽골을 비하해서 붙인 ‘몽고(蒙古)’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써온 것도 우리가 그만큼 중국의 시각에서 몽골을 바라봤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는 ‘몽고’ 대신 ‘몽골’이라는 정식 국호를 우리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 몽골과 관련해서 그가 쓴 책만 10권이 넘는다.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언어에 조예가 깊다. 외국어만 해도 몽골어는 물론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돌궐어, 인도 고대어, 아르메니아어 등을 할 줄 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몽골의 역사서인 ‘몽골비사’에 대한 주해서를 펴내고 한국과 몽골 간 민간교류에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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