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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7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9-10-27 조회수 : 4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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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는 중국 상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 땅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단국대 윤내현 교수 등의 “기자는 고조선 영역에 들어와 제후국 개념의 나라를 이끌었다”는 주장에 중국학자들은 “고조선은 설화 속에만 있는 실존하지 않은 나라다. 따라서 고조선이 곧 기자조선인데,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웠으니 고조선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이 들어와 쿠데타를 일으켜 기자조선의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때 준왕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조선과 기자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면 쿠데타를 당한 준왕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갈 수 없다. 준왕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려면 그는 요서 지역에서 배를 탔어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고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판단해왔다. 고조선(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4군을 설치했다. 이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들은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었다.
옛날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은 문서(주로 목간이나 죽간)를 주고받을 때,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가 문서를 열지 못하도록 진흙을 발라 봉인했다. 이를 ‘봉니(封泥)’라 하는데 북한의 평양지역에서는 낙랑군 태수의 봉니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로써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봉니는 보내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도 갖고 있을 수 있다.
낙랑군과 함께 4군으로 꼽히는 것이 임둔군이다. 발해에 면한 요녕성 조양시 남쪽에는 ‘여아하(女兒河)’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 호로도(葫蘆島)시 남표(南票)구 여아가(女兒街) 태집둔진(邰集屯鎭)이라는 마을이 있다. 
1997년 중국학자들은 이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발굴하다 2개의 봉니를 발견했는데 이 중 하나가 임둔군 태수의 봉니였다. 그때까지 임둔군은 실존이 불분명한 존재였는데, 봉니 발견을 계기로 임둔군은 실재한 것임이 밝혀졌다.
토성은 중국인들도 쌓았다. 그러나 이 봉니가 출토된 토성은 청동기 시대의 토성과 형태가 달랐다. 요서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토성은 지형지물을 따라 토성이 흘러가나, 태집둔진의 토성은 네모꼴이었다. 방형(方形·네모꼴) 토성을 쌓은 것은 중국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태집둔진의 토성은 황하 문명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쌓은 것이 분명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임둔군 태수의 문서를 주고받았다. 이곳이 임둔군이 있던 곳이라면 위만조선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 태수 봉니가 발견되었기에 북한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한다면, 임둔군 태수의 봉니가 발견된 태집둔에는 임둔군이 있어야 한다. 낙랑군과 임둔군은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북한의 평양과 중국의 호로도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대에는 육로보다 뱃길이 훨씬 더 수월한 통로였다. 호로도시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면 금방 요동반도 남단에 도달할 수 있다. 요동반도 동쪽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쉽게 대동강 하류에 도착할 수 있다. 요서나 요동반도에 있는 낙랑군은 뱃길을 통해 대동강 지역과 교류한 것이 아닐까.
한국보다 주체성 강한 북한의 고조선 고구려사 인식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졌을 때 많은 사람은 ‘북한 급변 사태시 중국은 북한을 점령하거나 북한을 중국 영향권에 집어넣기 위해 동북공정을 추진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북한을 중국의 속국으로 보는 의견인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북한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할 때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북한은 고구려사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06년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손영종 박사를 필자로 해서 펴낸 ‘조선단대사(고구려사 1)’는 한4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비롯해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거론되지 못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한국 역사학계는 삼국사기를 ‘바이블’로 여기기에 삼국사기를 근거로 광개토태왕을 동명성왕의 12세 손(孫 : 손자라는 뜻, 왕의 서열이 아니다)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시절 건립된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광개토태왕을 동명성왕의 17세 손(孫)으로 밝히고 있다. 고려 때 편찬한 삼국사기가 정확할까, 고구려 당대에 새긴 광개토태왕릉비가 옳을까.손영종 박사는 광개토태왕릉비문을 근거로 삼국사기가 누락시킨 다섯 손(孫)의 다섯 왕을 찾아냈다. 삼국사기가 ‘고구려 2대왕인 유리(琉璃)왕의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이다’와 ‘5대인 모본왕은 해애루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밝힌 것과 광개토태왕릉비에서 동명성왕의 세자를 유류로 표기한 것, 그리고 중국 사서들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해 삼국사기가 누락시킨 5명의 고구려왕을 찾아냈다.그는 고구려의 2대왕은 유리왕이 아니라 유류왕이고, 3대왕은 여률왕, 4대왕은 대주류왕, 5대왕은 애루왕, 6대왕은 중해왕(추정 이름), 7대왕이 삼국사기에서 2대왕으로 설명된 유리왕이라고 밝혔다. 삼국사기가 2대 유류왕에서 6대 중해왕까지를 7대왕인 유리왕에 합쳐버린 것이 삼국사기의 실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나온 ‘조선단대사(고구려사1)’ 119쪽에 실려 있는 고조선 유민 세력의 집결지와 고구려 서쪽 경계선, 그리고 한나라가 설치한 락랑, 현도, 림둔군의 위치를 그린 지도. 북한 사학계는 상당한 자료를 근거로 한4군이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하면 고구려 건국 연도는 서기전 277년으로 올라간다. 반면 한국 역사학계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서기전 37년에 고구려가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기원을 한국 사학계보다 240년 빠르게 보는 것이다. 손 박사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 일부 국내학자들은 가능성 있는 지적이라는 의견을 보인다.한4군 문제에 대해 손 박사는 ‘한나라 통치자들은 고구려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하려고 획책했다’ ‘한나라 침략군이 고조선의 북부 령역을 강점했다’ ‘한무제가 오랫동안 고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준비하던 끝에 마침내 BC 109~108년에 전쟁을 도발하여 고조선(만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고조선 옛 땅 일부에 락랑, 현도, 림둔, 진반(진번)의 4개군을 설치했다’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표현을 적어놓았다.북한 사학계는 대동강변에서 구석기 유적(검은모루 유적)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대동강을 황하에 버금가는 문명발생지로 만들고, 이 대동강 문명에서 김일성 부자가 나왔다는 조잡한 주체 사학을 내놓았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무관한 부분의 역사에서는 한국보다도 강한 민족 주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 문제에 대해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다. 
중국 사서들은 한4군을 한반도가 아닌 예맥의 땅에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4군이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예맥 족 위치에 대한 비정도 바뀌어야 한다. 예족(동예)에 대해 중국 사서인 ‘삼국지(편자는 진수)’는 ‘예는 남으로는 진한,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렀다. (필자인 진수가 살고 있는) 지금의 조선 동쪽은 모두 예의 땅이고 호수는 2만이었다(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라고 적어놓았다.
한국 역사학계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는 표현을 근거로 동예를 지금의 동해에 면한 함경남도에 있었다고 비정해 놓았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 언급된 동해는 지금의 동해가 아니라 요동반도 동쪽의 바다, 그러니까 압록강 하류와 접해 있는 서해(서한만)일 수도 있다.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이 가설은 상당한 신빙성을 갖춘다. 이렇게 되면 동예와 옥저 그리고 고구려의 위치는 전혀 달라진다. 좀 더 개연성이 높은 쪽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점박이 물범이 사는 서해
중국사서는 동예는 반어피(斑魚皮)를 중국에 수출했다고 적고 있는데, 반어피는 얼룩점이 있는 물범 가죽을 가리킨다. 지금의 동해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는 1950년까지 ‘강치’라고 불린 물개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독도 동남쪽에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오키(隱岐)제도와 러시아 연해주, 사할린 지역의 무인도에만 출몰하고 있다. 현재 오키 제도에 출몰하는 물개는 얼룩점이 없다. 과거 동해에 얼룩점이 있는 물개가 살았다고 해도 그 수는 서해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얼룩점이 있는 물개는 서해에 서식한다.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는 백령도 부근에 있는 바다인데, 인당수 일대의 무인도는 대표적인 점박이 물범의 서식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점박이 물범은 요동반도까지 몰려가 살았음이 분명하다. 동예인들은 이를 잡아 가죽을 중국에 수출했을 수 있다.
동예가 요동반도에 있었으면 진수가 살았을 때의 조선은 요서와 요동 지역(요동반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동예가 요동반도에 있고 그 북쪽에 고구려가 있어야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다는 중국 측의 기록,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한국과 중국 측의 기록이 일치한다. 이로써 고조선이 요서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니, 요서 지역에서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주인공은 고조선족이 된다. 이러한 발견은 환단고기 등에서 한민족은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을 거쳐 발전해왔다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요녕성 호로도시 남표구 태집둔진에서 발견된 토성. 네모형을 이루며 반듯하게 나가는 전형적인 중국 토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4군의 하나인 임둔군 태수의 봉니가 출토됐다.(좌) 백령도 인당수 부근 바위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점박이 물범. 요동반도에 있었던 동예는 이 물범을 잡아 가죽을 중국에 수출했을 것이다.(우) 
황하 문명에 연패한 요서 문명
청동기 문명을 일으킨 고조선은 왜 황하 문명 세력에 밀린 것일까? 이유는 요서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기가 황하 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기보다 적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비파형 청동검만 주로 발굴되나 황하 일대에서는 무기류를 넘어서 ‘정(鼎)’으로 불리는 의식용 제기 등도 다량 출토된다. 이는 황하 문명의 청동기 생산량이 요서 문명보다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구수에서도 요서 지역이 밀린 것을 거론할 수 있다. 지금 요서 요동지역은 상당히 건조하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매우 낮아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주지로는 마땅치 않다.
요서 문명이 꽃피던 시절엔 농업을 하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기후 변동으로 건조해지고 추워지면서 농업생산량이 급감해, 사람들은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먼저 철기 문명을 일으킨 황하 문명이 요서 문명을 공격했으니 요서 문명인들은 싸우면서 동남진해 지금의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는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들어오기 전인 춘추 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5만의 병력으로 조선 땅 2000여 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고조선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고구려족 예족 맥족 부여족 여진족 등을 지배하던 고조선의 힘이 크게 약화되고 이 부족들이 독립해 춘추 전국시대와 유사한 열국(列國)시대가 열렸다.
요동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졸본→국내성→평양의 동남(東南) 방향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은 황하 문명권의 공격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도읍을 옮겼다고 하여 모든 국민이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같은 자리에서 생활한다.
고구려가 패망하자 고구려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난 위치에 발해가 세워졌다. 당나라는 요서와 요동을 상시 지배하지 못했고 무주공산이 된 요서와 요동 지역에서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인들이 일어나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무너뜨리고 이어 여진족이 일어나 금나라를 세웠다.
요와 금은 서로 싸웠지만, 두 나라 모두 황하 문명권을 공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를 세운 황하 문명권을 상당히 압박했으나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즈 칸 세력의 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명나라 시절 여진족은 다시 일어나 조선을 제압하고 이어 황하 문명권을 쳐들어가 전 중국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청나라를 이룬 여진족은 한민족과 참으로 특이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라크에 파병돼 있는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은 쿠르드 자치구 지역이다. 쿠르드인들은 이라크와 시리아, 이란, 터키 접경지대에서 2000여 년 동안 나라 없이 지내왔다. 그리고 지금은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구를 토대로 ‘쿠르디스탄’이라는 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시절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패한 후 사라졌다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독립국가를 세웠다. 쿠르드인, 마케도니아인, 여진족은 수천 년간 나라가 없었는데도 종족을 유지해온 공통점이 있다.
중국사서는 여진을 숙신, 물길, 말갈, 여진 등을 거쳐 최근에는 만주족으로 표기한다. 요서지방에서 일어나 북위를 세운 선비족,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중국에 동화돼 사라졌으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민족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지금도 만주지역에 가면 도처에서 만주족자치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만주족은 내몽골인 이상으로 중국화되었다.
우리사학계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 우리 역사를 만든 나라로 인정해 ‘삼국 시대’란 말을 사용한다. 3국이 쟁패하던 시절 여진족은 고구려 편에 참여해 3국의 싸움에 당당히 참전했다. 서기 216년을 전후한 시기 말갈군은 백제의 적현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서기 478년경부터는 신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는 기록도 있다. 말갈인들은 당태종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도 결사항전을 벌이다 붙잡혀 수천 명이 생매장 당했다고 한다.
발해도 여진족의 도움을 받아 세운 나라이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여진족의 도움을 받았다. 고려와 조선은 여진인을 외국인이 아닌, 역내에 있는 야만인으로 대한 흔적이 많다. 왜 여진족은 한민족에 대해 강한 친연성(親緣性)을 보인 것일까. 여기서 몇몇 학자는 여진족은 고조선을 형성한 핵심 종족이기에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와 발해 고려에 협력했다고 주장한다.
요서 문명과 고조선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려면 반드시 여진족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1945년 이후 요서 문명의 후예로 살아남은 것은 남북한뿐인데, 지금 북한의 처지는 영 말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력에서 G-10 수준에 올랐지만, 역사의식에선 발칸반도의 약소국 마케도니아인보다도 못한 면을 보이고 있다.
정치의 영토는 좁아도 의식의 영토는 넓어야 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 정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뿌리를 찾으려면 한국은 요서 문명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은 요서 문명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재단은 언론이 동북공정 문제를 집중 보도한 덕택에 피동적으로 탄생했다. 의식 있는 역사학자들이 노력해서 만든 기관이 아니다보니 내놓은 성과도 미미한 편이다. 중국의 역사 공세에 맞서 우리의 뿌리를 찾으려면 동북아역사재단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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