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6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9-10-27 조회수 : 4485
파일첨부 :
고대에는 요동반도가 조선반도였다

중국의 하-상-주 시절은 단군이 이끈 고조선 시대와 비슷하고 3황5제 시절은 환웅시대와 비슷한 연대로 중국에서는 탐원공정을 통해 3황5제가 전설이 아니라 사실임이 밝혀지고 있다. 
3황5제 시절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로 ‘앙소(仰韶) 문화’가 거론된다. 앙소문화는 1921년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앤더슨이 황하지류인 위하(渭河)가 흐르는 하남성 삼문협(三門峽)시 민지(?池)현의 앙소촌에서 처음 신석기유물을 발견한 후, 그와 유사한 신석기 유적지가 동서남북으로 수백㎞ 이상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앙소문화’라는 말이 생겼다.
흔히 중국 중앙부를 가리켜 중원(中原), 황하문명이라고 하는데 황하강 중하류에 펼쳐진 대평원 지대로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 그리고 산동성 동부를 지칭하여 중원의 황하문명이라고 한다. 북경을 감싸는 하북성은 중원이 아니다.
3황5제에 대해서 중국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3황은 신농 복희 염제, 5제는 황제 전욱 제곡 당요 우순으로 정리한다. 중국학자들은 3황 시절의 앙소문화가 서기전 5000년에서 서기전 2500년 사이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서기전 3000년에서 서기전 2200년 사이에 존재한 용산문화를 5제 시절로 보고 있다.
이리두 문화부터 확실한 청동기 시절
앙소문화 유물이 발견된 앙소촌에서 위하를 따라 하류(동쪽)로 가면 낙양(洛陽)시 언사(偃師)현 이리두(二里頭)마을이 있다. 1959년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토기와 궁전 터, 구리를 주조한 흔적을 발굴했다. 그 후 유사한 유물유적을 중원 전 지역에서 발견했기에, 이 초기 청동기 문화를 ‘이리두 문화’로 명명했다. 서기전 2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존재한 것으로 판단한 중국학자들은 이리두 문화가 중국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조, 하(夏)나라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조선은 하나라보다 먼저인 서기전 233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라는 17대인 걸(桀)왕이 학정을 일삼자 상족의 리더인 탕(湯)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걸왕을 살해하고 상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중국학자들은 서기전 1600년경 상나라가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족은 은(殷)으로 불렀던 지금의 하남성 안양(安陽)시 소둔촌(小屯村)을 수도로 삼았는데, 1928년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청동기를 대량 발굴해 상나라의 문화수준이 대단히 높았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상나라도 31대 주왕(紂王)의 학정이 거듭되자 서기전 1111년쯤 주족의 리더인 무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주(周)나라 시대를 연 것이다. 주나라는 봉건제도를 통해 영역을 확대해나가다 서기전 771년쯤 서융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쪽으로 이주한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하는데, 동주 시절부터 주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제후국의 힘이 세지면서, 많을 때는 무려 300여 개의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春秋) 시대(서기전 770~서기전 476)가 열렸다. 춘추 시대는 청동 병장기를 사용했기에 무력이 강한 나라가 주변 국가를 정복했다.
춘추 시대 말기 중국인들은 쇠를 담금질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강철을 얻게 되었다. 강철로 만든 병장기는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했다. 철기시대는 몇 개의 강한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전국 시대(서기전 475~서기전 221)는 가장 강력한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한(漢)나라를 비롯한 후대 왕조가 이어지면서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졌다.
도구의 발전과 함께한 중국의 역사 발전이 이러했다면 한민족도 유사한 역사 발전을 했을 것이다. 한민족은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용산문화 등과 비교할 만한 고대 문화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한반도로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문화를 전해준 요서 문화다.
일본인이 발견한 홍산 문화
요서 문화의 대표인 홍산 문화는 1935년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의 동아시아 고적조사단이 발굴에 나섬으로써 처음 확인되었다.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홍산(紅山)구에는 붉은빛이 도는 바위산이 있는데, 몽골인들은 이 산을 ‘올랑하드’로 불러왔다 올랑하드는 ‘붉은 바위’란 뜻이다.
이 지역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은 ‘올랑하드’를 한자로 음차해 적지 않고 그 뜻을 따라 ‘홍산(紅山)’으로 적었다. 그 결과 ‘올랑하드’는 사라지고 홍산과 같은 뜻을 가진 적봉(赤峰)이 이곳의 지명이 되고 홍산은 적봉시의 구(區)이름이 되었다. 적봉시는 그 면적이 한국에 육박하는 9만㎢로 중국에서는 가장 큰 지급시 가운데 하나다.
일본 고적 조사대가 발굴한 곳은 홍산 뒤쪽이었다(紅山後 유적). 이곳에서 서기전 19세기에서 서기전 8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청동기, 돌무덤 등을 발굴했다. 중국 사서에는 요서 지역에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에 일본 조사대에 의한 홍산 발굴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명은 중국이 혼란을 겪다 공산당에 의해 통일되는 사이 잊혀갔다.
1980년대 중국 역사학계는 홍산지역을 다시 조사하여 서기전 4000년의 신석기 문명을 발견하면서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조사대에 발견된 청동기 문명이 중국 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으니, 이보다 먼저 일어난 신석기 문명도 중국 사서에 기록될 리 없다.
이 신석기 문명은 홍산 문화로 불리고 일본인이 발굴한 청동기 문화는 ‘홍산 2기 문화’로 수정 명명되었다. 홍산 문화가 발견된 적봉시 홍산구에서 동쪽으로 15㎞쯤 가면 하가점(夏家店)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1960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공작대는 이곳에서 서기전 24세기에서 서기전 15세기 사이에 형성된 청동기 유적유물을 찾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하가점에서는 두 종류의 청동기가 발견된 점이다. 표층과 깊은 곳에서 출토되었다. 깊은 곳은 서기전 24세기 전후에 형성된 초기 청동기 문화였고(하가점 하층 문화), 표층부는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7세기 사이에 형성된 후기 청동기 문화였다(하가점 상층 문화). 이러한 발굴을 통해 중국 역사학계는 적봉시 홍산구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신석기 문명이 일어났고 이를 토대로 중원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 분리된 또 다른 청동기 문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후 더 많은 문화가 발견되었다. 이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서기전 7000여 년에 형성된 소하서(小河西) 문화, 서기전 6200여 년쯤의 흥륭와(興隆·#53851;) 문화, 서기전 5200년경의 부하(富河) 문화, 서기전 5000여 년의 조보구(趙寶溝) 문화, 서기전 4000년 무렵의 홍산 문화, 서기전 2000여 년의 하가점 하층 문화 등이다.
이렇게 발굴해놓고 보니 이 문화를 만든 주인공이 누구냐, 이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이 누구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중원 문화와 황하 문명을 자랑해온 중국으로서는 복병을 만난 것인데 중국은 당황하지 않았다.
황하문명에 통합된 양자강 문명
수송이 가능한 큰 강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적 문화가 만들어 진다. 중국의 양대 강인 양자강에도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1972년 양자강이 흐르는 절강성 여요(餘姚)시 나강향(羅江鄕)의 하모도(河姆渡)라는 곳에서 서기전 5000년에서 서기전 4500년 사이에 번창했던 신석기 유적을 찾아내고 이를 ‘하모도 문화’로 명명했다. 중국 병법서인 ‘손자’에는 춘추 시대 오나라왕 부차와 월나라왕 구천이 서로 미워해 다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가 있는데, 하모도 문화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만든 종족으로 이어졌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 시대의 혼란에 참여하면서 일찌감치 황하 문명에 편입된 사실이 있으므로 중국 역사학계는 요서 문명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중국 처지에서 다행인 것은 요서 문명은 거란이나 여진(만주) 등으로 전파된 것 같은데 이들은 모두 중국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일으켜 송나라를 압박하다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여진족은 금에 이어 청을 세워 전 중국을 석권했으나, 1911년 손문이 일으킨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중국 역사 속으로 녹아들었다. 
1932년 일본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다시 이 지역을 중국의 역사 공간에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 만주국은 중국에 병합됐으니, 중국은 요서 문명을 제2의 하모도 문화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하 문명에서는 ‘옥밭’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옥기가 출토되었다. 옥기 중에는 뱀처럼 가늘고 긴 모양을 한 것이 많다. 요하 문명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펼친 중국 측의 첫 번째 노력은 이 옥기를 근거로 이곳이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탄생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요서지역에서 만들어져 황하 문명에 들어왔다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요서 지역에는 용의 모델인 악어가 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힘을 잃었다.
저수지론을 따르는 중국은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로 하모도 문화를 황하 문명에 합병시키며 정치 지평을 양자강 이남으로 확대시키고 그 방법을 지금 요서 문명에도 적용하려 한다.
부신 사해유지박물관(맨 오른쪽) 뒤에는 서기전 6000여 년 고대인들이 용 모양으로 돌을 박았다는 석소용이 있다. 그러나 석소용이 진짜로 용이라는 증거가 없자 중화제1용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부신 마을 앞에 있는 ‘중화제1촌’ 석상(가운데). 
요서 지역인 요녕성 부신(阜新)시 부신몽고족자치현의 101번 도로변엔 ‘사해(査海)’ 마을이 있다. 1982년 이곳에서는 서기전 6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형성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취락지가 발견되었다. 중국은 즉각 이 마을 입구에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이라는 글귀를 새긴 여신상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당시로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옥기가 발견되었다. 또 흙에다 돌을 박아서 용 모양을 만든 것도 발견됐는데 중국은 이를 ‘석소용(石塑龍)’으로 명명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용이 발견됐다”고 선전하고 그 앞에 옥기와 토기 등을 진열해 사해유지박물관을 세우고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석소용으로 명명한 중화제1용의 “용은 악어에서 유래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증거 미비로 흐지부지돼버려 중화제1촌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졌다. 이유는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寶國吐鄕)의 흥륭와촌(村)에서 서기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거주지터와 소하서 마을에서 서기전 7000년의 주거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흥륭와에서는 옥기도 발굴돼 부신 유적은 ‘세계 제1옥’이라는 타이틀도 내놓게 되었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중국은 다민족을 이끄는 대국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요녕성 수도인 심양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이를 ‘요하 문명’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통해 요하 문명을 황하 문명에 결합시키는 저수지론을 펼치고 있다.
요서와 요동 지역이 중국무대가 된 것은 명나라부터다. 이전까지 요서와 요동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만주로 통칭되는 이곳으로 중국이 지속적인 지배권을 뻗친 것은 주원장이 일으킨 명나라군이 몽골군을 추격해 만주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남군(南軍)’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3000여명을 이끌고 참전하게 했으나 평양 전투에서 참패했다. 춥고 지상전투를 해야 하는 조선전쟁에서 힘을 쓰지 못하자 교체한 부대가 이여송(李如松)부대다. 이여송이 만주의 금주에서 훈련한 ‘북군(北軍)’을 이끌고 참전했다는 것은 요서 지역의 지배권이 중국(명)에 넘어갔음을 뜻한다. 
그러나 명나라도 요동 지역을 확실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8기(八旗)군이 일어나 조선을 공격하고(병자호란, 정묘호란) 이어 중원을 공격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淸)나라를 열었다. 청의 중국 지배는 요서 문명이 황하를 포함한 전 중국 문명을 지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요서는 물론이고 요동 지방도 중국영토로 편입되었다. 
고조선과 고구려,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요하 일대에서 일어난 세력은 항상 중국 세력과 다투려고 했다. 이들은 한반도에 있는 세력과도 싸웠지만 결전(決戰)은 대개 중국 세력과 벌였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시절을 비롯해 여러 차례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고구려가 중국과 국경선으로 삼은 것이 ‘난하’였다. 고구려가 난하에서 공격을 멈췄다는 것은 고조선 때부터 이곳이 황하 문명과 요서 문명의 접경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은 난하에서부터 시작되는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곳이 오래전부터 중국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해문화 발굴을 계기로 중화제1용이니, 중화제1촌이니, 세계 제1옥이니 하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연나라 시절의 가짜 장성 만든 중국

적봉시 하가점 마을을 지날 때쯤 차창으로 본 ‘연장성유지’란 글귀. 이곳에 연나라 시절에 만든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허구다. 
난하 옆의 연산(燕山)에는 중국이 국경선 삼아 만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연산에서 동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요서지방에도 만리장성이 등장한다. 노노아호산 주변을 뱅뱅 돌아다닌 답사팀은 하가점을 지날 즈음 흙색을 드러내는 산에 흰색 시멘트로 만든 것 같은 ‘연장성유지(燕長城遺址)’란 글자를 발견했다.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의 장성(만리장성)이 이곳에 있었으니 요서 지역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라는 의미다.
연나라 군대가 이곳에 들어와 일시적으로 성을 쌓았을 수는 있어도 항구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킨 적은 없다. 일시적인 지배를 항구적인 영유라고 한다면, 지금 이라크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이라크는 미국 땅이어야 할 것이다. 이 지역엔 만리장성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중국은 만리장성이 있었던 것 같은 교묘한 정치공작을 펼치고 있다. 연장성유지와 사해 유적은 중국이 어떻게 중화 문명 저수지론을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전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7부
다음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5부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