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5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9-10-27 조회수 : 4102
파일첨부 :
요서 지역을 맴돈 고조선 도읍지

 우리 역사학계의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 고조선의 위치를 비정(批正)하지 못하는 점이다. 한국 최고(最古)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았던 곳 혹은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 한다(平壤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고 밝혀놓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고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을 좀 더 상세히 밝혀놓았다. 삼국유사의 인용 부분을 옮기면
『위서』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다.’ …중략…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백악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그 후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단군이 1500년 동안 다스리고 1908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한 단군이 장수했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명의 단군이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의미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단군은 47대로 밝힌 사서가 많다. 이렇듯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도읍지를 아사달→백악산, 아사달→장당경→아사달로 옮겼다고 밝히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평양을 언급한 것과 맥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삼좌점 주거지를 둘러싼 석성은 일정하게 튀어나온 치가 있다. 삼좌점 언덕에 둥글게 쌓아 만든 고대인의 주거지. 중국 요녕성 등탑현의 고구려 백암성 치와 수원 화성의 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조선의 흔적을 찾아 나선 답사단은 1주일 동안 노노아호산 남북을 뺑뺑 돌며 살펴보니 주변은 온통 거대한 평야였다. 노노아호산과 연산 그리고 의무려산 갈래를 제외하면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이다. 평양(平壤)은 곧 편평한 땅이니, 요서 지역의 광대한 평원이 평양일 수 있다.
 선사 시대, 자연재해나 전쟁 등 여러 이유로 터전을 옮길 때마다 살던 지명도 함께 가져갔다. 요서 지역에 살던 이들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갔다면 ‘평양’이란 지명도 함께 옮겨 갔을 수 있다.
 발해는 작은 바다다. 서해라는 ‘큰 만(灣)’의 제일 안쪽 만이니, 다른 바다에 비해 풍랑이 작아 배를 운항하기가 쉽다. 대릉하나 요하 하류에서 배를 몰고 남쪽으로 가면 요동반도를 만나므로 요동반도는 어렵지 않게 홍산 문화의 영향권이 되었을 터, 요동반도가 중국의 산동반도를 마주 보고 있으니 고대인들은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진출했을 것이고 그곳에도 요서지방과 같은 문화가 형성된다. 산동반도를 동이(東夷)족 지역으로 밝힌 중국사서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장보고를 비롯한 통일신라인들도 대개 산동반도로 옮겨와 생활했던 것은 아닐까?
 산동반도나 요동반도에서 하루 정도 항해하면 대동강이나 한강 하류에 도착하니 대동강과 한강 하구에 유사시 배로 대피하기 위한 장소를 만들고 나당연합군에 밀린 백제인들이 일본 규슈(九州) 다이자이후(大宰府)지역으로 피신했듯 요서 문화인들도 한반도의 대동강과 한강 주변에 피난처를 만든 것이다. 그로 인해 대동강에서 가까운 묘향산과 한강 하류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과 관련된 시설이 들어선다. 증거는 없지만 이는 그럴듯한 가설이다.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노노아호산 북쪽의 내몽고자치구는 해발 500m쯤 되는 고원 평야다. 이곳의 중심지는 앞에서 언급한 적봉시인데 적봉시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리면 삼좌점(三座店)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그곳에서는 영금하의 지류인 음하(陰河)를 막는 다목적댐 공사가 마무리돼가고 있었다. 댐 아래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댐과 맞닿은 오른쪽 언덕에 고대인들이 살았던 신비로운 거주지가 있다. 답사단은 해가 기울기 직전 올랐다가 생각지도 못한, 여행 가방만한 크기의 돌에 새겨진 암각화를 발견했다. 
 이 암각화 주위로는 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주거지가 수십 군데다. 둥글게 쌓은 돌은 집 안과 집 밖을 구분하는 벽이었으리라. 고대인들은 이 돌담 위에 짐승 가죽을 씌워 지붕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주거지의 사이는 사람들이 다니는 고샅길이다. 고샅길에는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얕은 우물이 있는데 음식물을 저장하는 창고였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네를 둘러싼 돌성이다. 입에서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곳은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온다. 수천 년에 걸쳐 모래가 쌓이면 사람이 떠난 주거지는 고스란히 모래흙에 묻힌다. 삼좌점에 고대 유적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떠돌다 2000년대 들어 댐 공사를 벌이면서 서기전 2000년의 삼좌점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주거지를 둘러싼 돌성에는 놀랍게도 ‘치’가 있었다. 치는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간 성 구조물로 성 안의 군사는 공격해오는 적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석성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돌이 적기 때문인지 흙을 빚어서 만든 벽돌 성이 많고 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성은 100%라고 할 정도로 치가 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우하량에서 여신상과 사라진 곰뼈 자리를 보았을 때 이상으로 흥분됐다. 삼좌점 유적은 홍산 문화 다음에 일어난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의 일부다. 석성에 치를 만드는 전통은 고구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졌고, 일본으로도 건너갔다.
감제고지 성자산의 무너진 돌성
 적봉 중심지에서 오한기(敖漢旗)로 가다보면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의 경계를 이루는 성자산(城子山)이라는 산이 있다. 해발 500m 이상인 내몽고 고원에 있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해발 높이는 800m쯤이라고 한다.
 성자산 밑에는 중국어와 몽골어로 된 안내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소백산 정상부처럼 풀만 자라는 성자산의 정상부는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몸을 10도 정도 기울여야 쓰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입 안으로는 바람에 날린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상부는 거대한 망루와 같아서 내몽골 초원과 여기저기 솟아오른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기전 2000여 년에 축조된 대전자 토성 안쪽에 세워진 안내석. 몽골어로 쓰인 것은 그대로 서 있으나 중국어 안내석은 누군가가 산산조각을 내놓았다(왼쪽). 뼈대로 박아놓았던 나무가 썩어서 생긴 대전자 토성의 구멍을 살펴보는 답사단. 
 이 산 정상부를 덮고 있는 것은 풀만이 아니었다. 한 줄기 띠 모양을 이루며 뻗어나간 검은 돌무지도 정상의 주인마냥 버티고 있었다. 이 돌무지는 강한 바람에 무너진 돌담이나 돌성의 흔적이다. 이 돌성 터는 1987년 중국학자들이 발견해 2000년 조사가 이뤄졌다.
 이곳에는 각각 5개의 문을 가진 내성과 외성이 있었고, 내성 안에서 제단터가 발견되고 외성에서는 치의 흔적이 있다. 성자산성의 총 면적은 6.6㎢인데 초기 청동기 문명인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인 서기전 20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한다.
 왜 초기 청동기인들은 내몽고 초원을 감제(瞰制)할 수 있는 고지에 산성과 제단을 만든 것일까. 이스라엘 사해(死海) 서쪽에는 ‘요새’라는 뜻을 가진 난공불락의 ‘마사다 성’이 있다.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항전하다 전원 분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자산 산성은 하가점 하층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마사다 성’이 아니었을까. 평상시 이곳에 올라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유사시에는 방어하기 좋고 사방을 감제하기 좋은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평야에서 생활하다 유사시 산성으로 올라와 항전하는 것은 고구려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채택된 방어책이다.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 돌성만 쌓았던 것은 아니다. 몽골 초원에는 돌이 적다. ‘마사다 요새’로 활용하려는 산성은 이곳저곳에 있는 돌을 모아 단단히 지어야 한다. 하지만 평상시의 생활공간은 이렇게 만들 수 없다. 흙으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적봉시 오한기의 대전자향(大甸子鄕)이라는 마을에는 서기전 2000년에 쌓은 토성(土城)이 있다. 평지에 쌓은 평원성(平原城) 개념의 토성인데 높이는 약 3m 정도다. 
 콘크리트 건물은 강도를 높이는 뼈대 역할을 하기 위해 철근이나 철골을 집어넣는다. 같은 개념으로 흙으로 짓는 건축물에는 나무를 집어넣는다. 일부가 무너져내린 이 토성에서는 뼈대로 박아 넣은 나무가 썩어 생긴 작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이 토성 안쪽에는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지금은 옥수수밭만 펼쳐져 있다. 옥수수밭에서는 40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토기 파편을 주울 수 있었다. 대전자 토성에서 놀라움으로 다가온 것은 안내석이었다. 안내석은 몽골어와 중국어로 쓰인 것 두 개가 있었는데, 중국어 안내석이 둔기에 맞아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둔기를 휘두른 사람은 중국어 안내석의 기단도 쓸어뜨려 놓았다. 몽골어 안내석은 멀쩡히 서 있는데 중국어 안내석은 왜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일까. 
 이곳은 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고는 중국의 여러 자치구 가운데에서도 중국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아직 몽골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몽골은 한민족만큼이나 중국의 팽창 정책에 시달려왔다. 몽골인 가운데 대전자 토성은 중국과 관련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큰 망치를 들고 와 중국어 안내석을 때려 부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문화는 대개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발전한다. 한국이 환웅과 단군에 의해 국가와 민족을 성립했다면, 중국은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에 의해 처음 나라꼴을 갖췄다. 하나라에 이어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일어나고, 주나라 말기 갈등기인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를 겪다가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졌다. 하-상-주와 춘추 시대는 청동기 시대로 분류되고, 전국 시대부터 쇠를 담금질하는 기술이 개발됨으로써 철기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라 이전은, 신석기 문명인 3황5제 시절로 보고 있다.
 청동기 이전은 기록이 없는 ‘선사(先史) 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비밀은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내야 한다. 중국은 선사 시대를 탐구해 중국이라는 국가와 문명은 하나라 이전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전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6부
다음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4부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