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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4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2-29 조회수 : 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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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은 곰 뼈를 감추었을까 

한때 중국의 상징인 용은 뱀에서 나왔다고 하더니 악어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요서지역에는 악어가 살지 않으므로 악어설도 성립될 수 없어서인지 새로 등장한 것이 돼지, ‘옥저용(玉저龍)’설이 한창이다.

동부 시베리아와 몽골지역에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퉁구스족이 가장 먼저 돼지를 기른 것으로 알려져 퉁구스족으로 부르게 됐다. 당연히 우하량 일대의 신석기인들도 돼지를 길렀을 것이고 중요한 재산이었던 돼지를 근거로 중국학자들이 옥저용을 만들어낸 것이다. 용이면 용이고, 돼지면 돼지여야지 돼지용은 있을 수 없다. 

우하량 2지점에는 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든 무덤자리(위)와 판석을 벽돌처럼 쌓아서 석관(石棺)처럼 만든 돌무덤이 있다(아래 왼쪽). 요녕성 박물관에서는 우하량 5지점에서 발견된, 인골이 들어 있는 돌무덤이 전시돼 있다(아래 오른쪽). 

“용이 아니라 태아를 새긴 것”
자료실에는 전시돼 있지 않지만 우하량 유지 제16지점의 무덤에서는 인골과 함께 사람 모습의 옥기가 나왔다. 중국학자들은 무당을 새긴 것으로 보고 이 옥기를 ‘옥무인(玉誣人)’으로 명명했다. 새를 새긴 옥기는 봉황으로 판단하고 ‘옥봉(玉鳳)’으로 명명했으나 이 옥기의 문양은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깝다.

중국학자들은 홍산 문화는 용과 봉황을 등장시킨 최초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나 옥무인과 옥봉은 누가 봐도 사람과 새의 문양이다. 최근 이 지역에서 발굴된 옥기가 용이 아니라서 이 굽은 옥기를 어머니 뱃속의 태아(胎兒)를 본뜬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홍산 문화는 모계(母系)사회였다. 유아의 생존율이 낮아 인구 증가를 위해 다산(多産)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하량의 여신전도 다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홍산 문화인들은 신체해부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사람의 태아나 짐승의 태아를 새긴 옥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굽은 옥기를 어머니 뱃속의 태아(胎兒)를 본뜬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홍산 문화는 모계(母系)사회였다. 유아의 생존율이 낮아 인구 증가를 위해 다산(多産)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하량의 여신전도 다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홍산 문화인들은 신체해부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사람의 태아나 짐승의 태아를 새긴 옥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굽은 옥이 태아를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요대 등에는 곡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곡옥은 백제와 가야, 일본 왕릉에서 출토된 관에도 많다. 이 곡옥이 홍산 문화인들이 만든 태아형의 굽은 옥에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닐까. 홍산 문화인의 후예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흘러갔다면 그들이 다산을 숭상하기 위해 만든 곡옥 제작의 전통이 신라와 가야 백제 일본의 관에 달리는 곡옥 장식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공작점 자료실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옥저용이 아니라 ‘웅(熊)’이라는 제목만 붙여놓은 빈 전시대였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여신 두상과 나신상, 옥저용뿐만 아니라 곰 턱뼈도 발견되었다. 곰 턱뼈는 최근까지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고 하는데, 답사단이 찾아갔을 때는 빈 전시대만 남아 있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곰의 발’ 모양의 토기도 발견되었다는데, 이 곰발 토기도 전시돼 있지 않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신성한 곳이니, 신석기인들이 쓰레기를 버리듯 죽은 곰뼈를 던져 넣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곰을 키우던 우리였을까? 곰뼈와 여신상 그리고 흙으로 만든 곰발의 출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사단원들은 조심스럽게 ‘웅녀족(熊女族)’ 이야기를 꺼냈다. 웅녀족은 곰을 숭배했다. 서기전 3500년이면 모계사회였으니 곰족은 곧 웅녀족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제사터이니 웅녀족은 이곳에서 성스러운 제사를 지냈을 것이고 따라서 우하량은 신성한 지역인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답사단은 차량을 이용해 노노아호산을 넘기도 했다. 노노아호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중심부에 제법 숲다운 숲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었다. 지역인들에 따르면 요서 지역에서는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한다. 

호랑이는 포식자인지라 많은 동물을 먹잇감으로 하는데, 노노아호산을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은 호랑이가 살기에 적합지 않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초식을 할 수 있는 곰이 가장 강력한 동물이었을 수도 있다. 곰을 숭배하는 종족은 널리 퍼져 살았기에 호랑이를 숭배한 종족보다 우세했다. 이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신은 곰일 수도 있고 다신을 상징하는 여신일 수도 있다. 

이러한 때 금속을 다룰 줄 아는 종족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이들은 아주 우연하게 금속을 다루는 기술을 개발했다. 광물질을 품고 있는 돌을 불에 집어넣으면 광물질이 녹아나온다. 광물질은 온도가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데, 굳기 전에 일정한 틀에 넣어 굳히면 토기는 물론이고 나무보다 단단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이들은 광물질이 나오는 돌을 찾을 수 있었고, 녹인 광물질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철도 찾아냈으나 떨어뜨리면 ‘퍽석’ 깨지는 무쇠인지라 도구의 재료로는 부적합했다. 구리와 아연을 섞은 청동이 도구를 만드는 데 훨씬 더 유리했기에 이들은 청동기 문화를 만들어갔다. 청동기 제작술을 가진 이들이 곰과 여신을 모시는 종족과 결합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청동기 문화는 노노아호산의 북쪽인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하가점(夏家店) 마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청동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이 남하해 우하량 일대에서 곰족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곰족을 지배하며 부드럽게 융화했다.

홍산 문화의 신석기인들은 돌에 가는 방법으로 자유자재로 옥기를 제작했다. 우하량 1지점인 여신전(여신묘)에서 출토돼 공작참 자료실에 전시된 옥저룡(玉猪龍, 오른쪽 위). 우하량 16지점의 돌무덤에서 나온 새 모양의 옥기(오른쪽 아래). 중국 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이라고 하나 삼족오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한반도에서도 옥공예가 발달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에는 태아 모양의 굽은 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왼쪽). 

고조선족의 탄생
한민족이 단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처음 밝힌 사서는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다. 책을 내는 사람이면 누구든 첫머리만큼은 매우 신중하게 서술한다. 삼국유사는 첫장에 ‘고조선’이란 제목을 붙이고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김원중씨가 번역한 민음사 출간의 삼국유사 첫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즉시 내려 보내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그 당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항상 기원했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너희가 이것을 먹되,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받아먹으면서 삼칠일 동안 금기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 거론된 환웅은 종족 이름이자 종족 대표자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청동기 제작술을 가진 3000여 명의 환웅족은 노노아호산 우하량의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정복하듯이 옮겨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온 곰족과 호랑이족 가운데 좀 더 세력이 큰 곰족과 결혼 동맹을 맺고 대표자로 단군을 뽑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시를 무대로 한 단군족(고조선 족)이 탄생한 것이다.

금속기가 등장하면 사회의 생산량은 더욱 커진다. 갈아서 만드는 돌칼보다는 틀에 넣어 만드는 청동검을 훨씬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병장기의 생산이 증가하면,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인접한 종족이 재배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게 부(富)를 축적하는 길이 된다. 다른 종족을 공격하는 것은 남성의 임무이니 사회와 가족은 빠르게 힘있는 아버지 체제로 재편된다. 부계(父系)사회가 등장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업적을 지키기 위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힘이 센 큰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니 장자상속(長子相續)을 기본으로 한 고대왕국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회는 부족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성한 곳에 모여 단결을 강조한다. 이때 제사를 지내는 부족의 대표가 단군이다.

요서 지역은 소금 공급이 가능했다
적봉 삼좌점에서 발견된 서기전 2000년 취락지 입구의 암각화. 사람의 얼굴을 새긴 듯하다. 암각화의 존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정신적인 생활을 했음을 의미한다.

신단수가 있는 산이 태백산이다. 
삼국유사는 태백산을 太伯山으로 적어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신석기 문명과 청동기 문명은 평원에서 일어났으니, 백두산 고원지대는 단군의 무대가 될 수 없다. 태백산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두머리산’이다.

단군족이 요서에 포진한 것이 옳다면, 이 지역 최고봉인 노문명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살 수 있는 편평한 곳에서 일어난다. 물이 있어야 하고 땔감 공급이 가능한 숲이 있어야 한다. 

물은 곧 강인데 강은 물자를 운반하는 고속도로 역할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소금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사람은 소금 없이 생존할 수 없다. 
내륙에 있는 홍산 문화는 어떻게 소금을 확보했을까.

노노아호산 남쪽에 발해로 이어지는 대릉하가 있으니 소금을 공급받을 수 있다. 노노아호산이 높지 않으므로 수레나 짐승의 힘을 이용해 발해에서 생산한 소금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노아호산 북쪽의 홍산 문화인들은 발해에서 나온 소금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영락(광개토태왕 연호) 5년 을미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 부산을 지나 염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 영을 노획한 소 말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소금강이라는 뜻의 염수(鹽水)인데, 광개토태왕이 이 강 상류까지 쳐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서랍목륜하는 현재 짠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 이곳을 파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이 올라왔다고 한다. 소금우물(井鹽)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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