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3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27 조회수 : 4844
파일첨부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의 고조선 자취인 우리뿌리를 찾는 탐방기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3부

우하량 여신상 무덤은 모계사회를 상징하는 女神殿

여신전의 비밀을 찾는 탐험은 101번 도로 변에서 2006년 7월1일 능원시 인민위원회가 세운 안내석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하량 홍산 문화유지(牛河梁紅山文化遺地)’라고 쓰여진 자주색을 띤 안내석은 폭이 5-6m 됨직했다. 거기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홍산 문화는 서기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요하 유역과 대릉하 유역 그리고 연산과 발해만 사이에 살았던 종족들이 꽃피운 신석기 문화다. 
이러한 홍산 문화의 후기 유적이 이곳에서 발굴된 우하량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은 황토로 이뤄진 노노아호산의 봉우리 3개 사이로 뻗어 있는 10여 ㎞ 길이의 계곡 좌우 5㎞의 지역에서 발굴되었다.이 지역에서는 여신전(女神殿)과 제단, 돌무덤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들은 당시 사람들을 대신해서 희생된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을 제사지내던 공간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역과는 격리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홍산 문화를 구성한 모든 지역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꼭짓점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자 홍산 문화를 구성한 종족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곳으로 기능했다.제사를 지내고 종족 간의 문제를 논의하는 정치를 했다는 것은 홍산 문화가 이미 고대국가 단계에 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하량 유적지는 1981년에 발견돼 1983년 처음 발굴이 이뤄졌다. 유적지는 모두 16개소다.’ 

이 안내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신석기 문명인 홍산 문화를 고대국가 단계로 표현하고 우하량을 정치와 제사의 공간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고대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중국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대국가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홍산 문화를 구성한 신석기인들은 우하량에 모여 무엇을 논의했을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평상시에는 신을 모시고 유사시에는 방어 공간으로 사용하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는 청동기 시절에 꽃핀 것이라 아크로폴리스에 자유자재로 대리석을 다듬어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인지라 흙과 돌로 그들의 건축물을 지어야 했다.

궁금증은 소나무 숲으로 덮인 도로 위쪽의 산으로 오르면서 더욱 커져갔다. 
잠시 후 답사단은 중국어로 ‘여신묘(女神廟)’라고 쓰인 또 다른 안내석을 만났다. ‘여신묘’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우하량 여신묘’로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명명인 것 같다. 이곳은 ‘우하량 여신전(女神殿)’으로 불러야 한다. 
여신묘의 ‘묘‘자는 종묘(宗廟)의 ‘묘‘자와 같은데, 여기서의 묘는 ‘사당‘이나 ‘신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운데 中자 모양
이 유적을 발굴한 중국학자들도 같은 판단을 내린 듯하다. 
‘그렇기에 영어로 쓰인 안내문에는 여신전을 뜻하는 goddess temple로 적어놓았다. 죽은 사람은 무덤에 파묻지만 숭배하는 신은 드러내야 한다.
‘이 여신전(여신묘)‘은 흙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발굴 당시 여신상은 남북으로 25m, 동서로 2-9m인 ‘가운데 중(中)’자 모양의, 반(半)지하 깊이로 땅을 판 ‘움’ 속에 있었다. 반 지하 깊이의 가운데에는 주실(主室)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의 측실(側室), 북쪽에 한 개의 방이 있고 남쪽에 3개의 방과 별도의 방이 하나 더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발굴하기 전의 형태로 다시 흙을 덮어놓아서 보이는 것은 평범한 황토 흙 언덕뿐이다. 능원시 인민정부는 이 여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파이프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놓았다. 강한 햇빛에 지붕 그림자가 드리워져 여신전의 전체 모습은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이 여신전은, 눈동자 자리에 ‘둥근 녹색 옥(玉)돌’을 박은 여자 두상(頭像)과 이 두상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무릎 꿇은 여자 나신상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학자들은 흙으로 빚은 두상과 나신상을 합쳐 ‘여신상’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다. 이 ‘여신상’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여신전 바로 뒷산 정상부에는 잔돌을 사각형으로 촘촘히 박은 제단 터가 있다. 이 제단 터에서 반경 20~30m쯤 떨어진 주위에는 한 줄기로 이어지는 돌무더기 띠가 있다. 
원래는 돌담을 형성하고 있던 것인데 오랜 세월 풍파에 무너져 돌무더기 띠가 되었다. 

능원시에서 건평으로 이어지는 101번 도로 ‘우하량홍산 문화유지비’가 있는 곳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면 ‘여신묘’(사진)라고 쓴 안내석이 나온다. 이 안내석 위 쪽에 여신상과 곰뼈가 나온 여신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인 서기전 3000년쯤, 사람들은 바람이 적어 유난히 아늑한 이곳에 여신상을 모신 여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쪽에 잔돌을 박아 제단을 만들고, 주위에 돌담을 둘렀다. 홍산 문화인들은 이곳에 모여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종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를 펼쳤으니, 이곳은 홍산 문화인들의 아크로폴리스라 할 수 있다.

우리답사단은 101번 도로 변 바로 아래 ‘우하량 유지 제2지점’이라는 안내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두드러지게 눈길을 끈 것은 판판한 돌(板石)을 모아 만든 ‘석관(石棺)’ 모양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텅 빈 채로 열려 있었는데, 그 안은 키가 150㎝쯤 되는 사람이 누울 만 했다.
2지점에서 멀지 않은 우하량 제5지점의 돌무덤군(群)에서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심양(瀋陽)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제2지점에는 잔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잔돌을 박아 올려 기단을 만든 무덤 자리도 있었다.

이런 무덤 터는 우하량 도처에서 발견된다. 16개 발굴지 가운데 여신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돌무덤 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지점의 돌무덤 주변에는 주황색 토기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신석기인들이 이곳에서 토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토기에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은 참석자들에게 돌리고 토기는 깨뜨려 뿌리는 의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른 문화지역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잊는 것은 언어라고 한다. 실제로 2~3세대 이민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것은 알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보다 맛에 대한 기억은 강해서 어린 시절 맛있게 먹던 한국 음식의 기억을 더듬어 그 맛을 잇는다. 그러나 음식보다 더 오래 유지되는 것이 장례(葬禮)의식이다. 어느 종족이든 장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된다.

고구려로 이어지는 돌무지무덤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은 널방을 만든 무덤을 ‘적석총(積石塚)’, 우리말로는 ‘돌무지무덤’이라고 한다. 선사(先史)시대에 만들어진 이러한 무덤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광개토태왕릉과 장군총을 비롯해 집안시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왕과 귀족의 무덤은 전부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 적석총의 원형이 우하량에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돌무지무덤이 아닐까. 돌을 네모꼴로 박아 넣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무덤을 만든 2지점의 돌무지무덤은, 피라미드 형태로 큰 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널방을 만든 장군총의 원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구려는 돌을 자유자재로 자르던 철기 시대의 나라이고,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였으니 무덤 규모만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2지점을 둘러본 다음, 건평현 쪽으로 난 꾸불꾸불한 길을 5분여 달리다 샛길로 빠져, 안쪽 건물에 ‘요녕성 고고문물 연구소 우하량 공작참(工作站)’이라는 간판이 붙은 자료실을 찾아갔다. 답사단은 관리자를 설득해 굳게 닫혀 있는 자료실의 문을 열게 한 후 눈알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문제의 여신 두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탈 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두상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여신 두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복제품인 두상과 결합시킨 나신상도 볼 수 있었는데 나신상은 단전 자리에 두 손을 맞잡고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여신상뿐만 아니라 옥돌을 갈아서 만든 공예품도 발굴되었다. 이러한 옥 공예품을 중국학자들은 ‘옥기(玉器)’로 표현하는데, 옥기는 우하량뿐만 아니라 홍산 문화가 펼쳐진 전 요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료실에는 ‘돼지용(龍) 모양의 옥기’라는 뜻으로 ‘옥저룡(玉猪龍)’으로 명명된 것도 있었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다. 용도 없는데 과연 돼지용이 있었을까?

돼지용은 이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중국학자들은 요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용이 발견되었다는 이상한 가설을 내세웠다. 이곳에서 대량 출토된 옥기에 새겨진 짐승 문양을 보고 “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는데, 새긴 것이 용 같지 않으면 “돼지용을 새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우하량 여신전에서 발굴된 곰뼈는 우하량 공작참 자료실에 보관돼 있었는데 최근 사라져버렸다(위). 여신전에서 발굴된, 눈동자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여신의 두상(頭像)도 어디론가 옮겨지고 공작참 자료실에는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아래 왼쪽 사진). 아래 오른쪽은 中자 모양의 여신전 발굴 당시 사진이다. 이 사진 아래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남쪽이다.
이전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4부
다음글 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2부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