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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고조선 심장부를 가다-제2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11 조회수 : 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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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의 

고조선의 자취인 우리뿌리를 찾는 탐방기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2부

===환웅족과 곰족이 만난 곳은 ‘우하량(牛河梁)’이다===

 역사인식에서 중국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오랫동안 신화로 여겨져 온 중국의 3황5제도는 단군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중국은 고고학적 발굴로 3황5제의 실존을 증명하려 한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3황5제 시절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노력을 중국은 ‘탐원(探源)공정’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하(夏)-상(商)-주(周) 왕조의 흔적을 찾는 노력을 거듭하며 하-상-주 왕조를 복원해 중국의 기원을 밝히는 노력을 ‘단대(斷代)공정’으로 이름지었다. 또한 만주 지방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학계도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왕조를 찾는 ‘한국판 단대공정’과 고조선 이전의 뿌리를 찾는 ‘한국판 탐원공정’을 펼쳐야 한다. 
중국의 탐원공정과 단대공정에 맞서는 뿌리 찾기를 하지 못하면 한국은 동북공정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오랫동안 인접해 살아왔지만 두 국민은 전혀 다른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 
외모와 유전자가 흡사해도 언어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국민이 다른 뿌리에서 나왔음을 뜻한다. 
언어 체계에서 한국과 유사한 것은 일본어와 만주어 몽골어 투르크어다(알타이어계).

그렇다면 한국과 투르크 몽골 만주(여진) 일본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알타이어를 쓰는 종족은 합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됐는가. 
그리고 이들이 처음 모여 살며 알타이어 계통이라고 하는 동일 문화를 만든 공간은 어디였을까. 

 오랜 역사 속에서 종족과 민족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영역이 오그라들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축소와 팽창을 거듭하는 것이 영토인데, 뿌리를 찾는 사관을 영토에 얽어맬 수는 없다.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뿌리를 찾아내려면, 중국을 우리나라 들여다보듯이 보아야 한다. 
중국역사와 지리를 꿰뚫지 않으면 동북공정에 맞서는 논리도, 뿌리를 찾는 노력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물론 광대한 면적만큼이나 폭넓고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을 쉽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 취재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복잡한 지방 체계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대표적인 혼란이 ‘시(市)’다. 중국은 성(省)과 자치구 아래조직이 시(市)인데, 그 시 밑에 다시 ‘시(市)’와 ‘현(縣)’과 ‘구(區)’가 있다. 성 다음의 시를 ‘지급(地級)시’, 그 아래에 있는 시를 ‘현급(縣級)시’라고 하지만 보통 구분하지 않고 ‘시’라 부르기에 지급시와 현급시의 구분이 어려워 혼란을 겪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이 있는 집안(集安)시를 예로 들면, 집안시는 길림성 통화(通化)시 안에 있는 현급시다. 
따라서 정확히 한다면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로 적어야 한다. 
통화시라는 현급시가 없는데도 중국인들은 통화시 중심부를 ‘통화시’로 통칭한다.

 중국 도시명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경(北京)은 한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수도’이니, 중국 수도명이라는 게 금방 이해되지만 소수민족 거주지인 자치구나 자치주·자치현의 도시는 한자만으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시는‘푸른 도시’를 뜻하는 몽골어 ‘허허호트’를 중국식 한자어 발음에 따라 적은 것이다. 지명의 한자 풀이가 불가능한 도시는 대개 최근에 중국에 편입된 지역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역사 무대가 아니었던 곳이다.

 중국 요녕(遼寧)성의 서쪽 끝엔 지급시인 조양(朝陽)시가 있는데, 이 조양시의 서쪽 끝에 현급시인 능원(凌源)시와 건평(建平)현이 있다. 건평현의 북쪽에는 내몽고자치구의 적봉(赤峰, 지급시)시가 있는데, 건평현과 적봉시 사이에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중국에서는 산맥을 ‘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지도 3 참조]. 대릉하를 중심으로 한 발해만과 노노아호산 사이, 그리고 대릉하, 영금하-노합하-서랍목륜하-서요하로 둘러싸인 적봉 지역이 요서 문명의 핵심 지역이다. 

요서 문명을 만든 이들은 배를 이용해 요동반도로 건너갔고, 요동반도에서 다시 한반도와 산동반도로 진출하면서 중국인들이 말하는 거대한 동이(東夷)문화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독 바람이 적고 따뜻한 곳, 우하량
 ‘노노아호’ 역시 몽골어나 만주어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노노아호산을 경계로 남쪽수계는 동북쪽으로 흐르다 기역자로 꺾여 남쪽 발해로 빠지는 ‘대릉하(大凌河)’를 이루고, 노노아호산 북쪽수계는 적봉을 지나는 ‘영금하(英金河)’를 구성한다.

 이 북쪽은 거대한 평원인데, 평원을 흐르는 영금하는 남쪽에서 흘러온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 내몽고 고원에서 흘러온 큰 강인 서랍목륜하(西拉沐淪河)를 만나 ‘서요하(西遼河)’가 된다. 서요하는 시곗바늘 방향으로 굽이쳐 내몽고자치구와 요녕성 접경 지점에서 동요하(東遼河)를 만나 ‘요하’가 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요하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하의 서쪽을 ‘요서(遼西)’지방으로 불러왔다. 고려 때의 명장 최영이 정벌하고자 한 곳이 바로 요동이다(요동정벌). 이러한 역사로 적잖은 한국인은 한민족 활동무대의 동쪽 끝이 요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한 역사지도도 대개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가 중국의 수·당과 대치한 것으로 그려진다.

 노노아호산 서쪽에는 발해로 흘러드는 ‘난하(?河)’가 만들어지는데, 난하를 건너면 멀지 않은 곳에 중국수도인 북경이 있다. 
난하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으로 비가 오면 강폭이 넓어지나 우기가 끝나면 누구나 건널 수 있는 하천이 된다. 난하는 선사시대 한민족과 중국인들이 국경으로 삼았던 곳이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고조선 흔적을 탐구하려면 요동에 얽매인 시선을 난하의 동쪽, 요서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요서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된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등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의 청동기는 중원지역으로 불리는 황하 중하류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요서 지역 중심부에 있는 노노아호산 남쪽 자락에 ‘우하량(牛河梁)’이라는 곳이 있다. 우하량은 조양시 능원시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건평현 쪽으로 달리다, 능원시 경계가 끝나가는 부드러운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지도 3 참조].

 요서 지방은 노노아호산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산지가 없는 평원이기에 도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 안에 있을 때는 복사열 때문에 따뜻하나, 차에서 내리면 점퍼 두 벌을 껴입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다. 그러나 야트막한 산지가 이어지는 우하량만은 아늑했다. 
바람이 세면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우하량은 바람이 거의 없어 요서 지역에선 보기 힘든 소나무 숲이 형성돼 있었다. 안온한 땅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 고조선의 비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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