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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뿌리 - 단군조선을 찾아서 <3> 다링허에 흐르는 아사달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9-10 조회수 : 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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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뿌리 - 단군조선을 찾아서 <3> 다링허에 흐르는 아사달
아침해의 땅 차오양(朝陽)에 아사달의 흔적이…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 등 차오양(朝陽)서 다량 출토
한국 고대사 연구가들은 고조선의 뿌리로 접근
고구려의 영토 확장 길목 대조영 발해 건국 시발점
한국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곳





랴오닝성(遼寧省·요령성)의 역사도시 차오양(朝陽·조양)시에서 아침을 맞는다. 연무가 피는 다링허(大凌河·대릉하) 너머로 해가 솟는다. 거대한 북탑·남탑이 위용을 드러내고, 고도가 서서히 눈을 뜬다.



차오양은 인구 30만명의 도시지만, 초원의 웅혼한 역사를 품은 중국 동북부의 고도다. 북탑과 남탑은 4각형 13층(높이 45m) 규모의 대형 전탑으로 각각 당나라, 요나라때 세워졌다. 차오양의 옛 이름은 영주(營州), 별칭은 연도(燕都)다. 이름에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5호16국 시대 선비족이 세운 후연(後燕, 384∼409)은 차오양을 수도로 삼아(燕都) 중원을 들락날락 했다. 앞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쳐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발해의 대조영이 건국을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 곳도 차오양이니, 한국사와 이래저래 인연이 많다.







 
  중국 요서지방을 적시는 다링허 상류. 다링허 유역에는 비파형 동검 등 고조선 관련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사진 제공=권태균('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역사의아침 출간) 사진 작가)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



차오양은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다. 이 곳의 청동기 유적지를 조사하면 십중팔구 비파형 동검이 나온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문화의 표지 유물이다. 이 지역 동검의 제작 연대는 늦어도 기원전 8세기께 춘추전국시대까지 올라간다. 고조선이 왕성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비파형 동검은 내몽골 자치주를 비롯해 만주 일대, 한반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데, 차오양에서 가장 많이 나왔어요. 무려 60여 곳이나 됩니다. 12대영자라는 곳이 대표적 유적지고요. 저는 이 곳의 동검을 요동 및 한반도와의 친연 관계로 보아 고조선 계통이라고 봅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복기대(고고학)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고대사가인 김정학 선생은 일찍이 차오양을 포함한 요서·요동의 비파형 동검 문화에 주목, 12대영자 무덤의 주인공을 조선족 계통으로 보면서, 고고학적으로 차오양 지방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집단이 요동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차오양 일대의 비파형 동검에 대해서는 임운(林澐) 같은 중국인 학자들도 고조선 계통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차오양의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제작 용범(鎔范·거푸집)도 다수 나왔다. 용범은 쇳물을 부어 도구를 만드는 주물 틀로, 대량 생산체제를 의미한다. 고대사회에서 청동기 소유는 곧 집권을 뜻하고, 제작기술은 권력자가 독점하게 되므로 용범 출토지는 특정 세력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펑황산의 기운



답사단은 차오양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기 위해 오후 늦게 펑황산(鳳凰山·봉황산)을 올랐다. "우와, 이런 기운이…." 탄성이 터졌다. 펑황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링허와 차오양시는 한 시대의 도읍이 되고도 남을 터전이었다. 활짝 열린 풍광이 주는 알지못할 기운이 답사단을 압도했다. 답사에 참가한 부산국학원 오현지(42) 홍보국장은 "처음인데도 언젠가 밟아본 듯한 땅 같다. 한국의 태백산이나 지리산에 올랐을 때 벅차오르던 그 느낌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해가 떨어지면서 석양이 엉겨들고 있었다. 다링허의 물결이 붉게 일렁거렸다. 카메라는 역광을 뚫지 못하고 희미한 영상만 그려냈다. 희미한 영상속에 불현듯 고조선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펑황산 산정에서 답사단은 기이한 굴 하나를 구경했다. '와불고동(臥佛古洞)'이라는 석굴이었다. 바깥엔 향불이 타고 있었고, 굴속에는 부처가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 "펑황산은 오래 전부터 숭배 대상이 되어 왔다고 해요. 차오양에서 고조선 유물이 쏟아지는 걸 보면 고조선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복기대 교수)



고구려가 중시했다는 '혈(穴)' 자리가 이러하지 않을까. 고구려의 도읍 동쪽에 있다던 국동대혈(國東大穴)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 기록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러한 큰 굴에서 신을 맞은 것으로 돼 있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을 버티려 애쓰던 굴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곳이 곧 국동대혈은 아닐까…. 맹랑한 상상을 하며 하산을 재촉하는데, 복 교수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의무려산이라고 있어요. 명산이죠. 거기에도 큰 동굴이 있어요. 가 보실까요."







 
  요서지방 곳곳에는 고조선 문화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중국 차오양시 일대에서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과 요동·요서가 만나는 지점인 의무려산 중턱의 동굴 , 그리고 차오양시 펑황산 정상의 석굴 . 박창희 기자

영혼을 치료하는 산



요동과 요서가 만나는 지점인 베이친(北鎭·북진). 중원세력이 북쪽 진지로 삼았다는 곳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솟아 있었다. 듣던대로 명산이었다. 면적은 630㎢, 최고봉의 해발고는 866m. 크게 높지는 않지만 산줄기가 이어져 산맥을 방불케한다. 오랫동안 만주족의 성산으로 받들어졌고, 지금은 불교와 도교의 도량지로 이용되고 있다. 의무려산은 이름 그대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을 갖는다고 한다. 



산정에 올라보니, 동쪽으로 끝없는 요동벌이 펼쳐졌고 북쪽으로 산의 능선들이 파도 치듯 뻗어나가 몽골 초원에 닿았다. 서쪽으로는 능하의 대평원이, 남쪽으로는 발해만이 가물거렸다. 천지 사방이 트여 절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시대때 이곳을 다녀간 사신들이 왜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지 알만 했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과 박지원의 '북진묘 견문기'는 의무려산에 대한 헌정이다. 후일 다산 정약용도 의무려산을 노래했다.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이란 제목의 시다.



'의무려산 꼭대기에 주연을 펼쳐놓고/ 요동벌 발해 신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미주(美酒) 삼백 잔을 나누어 마신 뒤에/ 호기가 한 곡조를 목 놓아 부른다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할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거란 공격 루트도 의무려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부산(富山)'이 곧 여기라는 것. 이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요동을 넘어 요서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답사단은 의무려산 중턱의 '대혈(大穴)'을 주목했다. 덩치가 산만한 고래가 비스듬히 입을 벌린 모습이었다. 동굴 속에서 중국인 승려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낯선 문화 현장임에도 별로 낯설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이곳이 국동대혈이라는 것인가.



"고조선은 고유의 선도(仙道)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중국의 도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엄청난 영역을 통치하려면 그만한 정신문화가 바탕이 돼야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런 면에서 이런 동굴도 고조선 시대엔 수련처거나 제사터로 이용됐을 겁니다." 답사에 동행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경희(국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정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선도 연구자다.



학계 일각에서는 의무려산을 '백악산 아사달'로 보기도 한다. 지리학자 이형석 씨는 "의무려산은 무속과 제천, 선인(仙人)의 산으로서 흰 빛(白山)이 나는데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가 중원세력을 막는 천연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어 백악산 아사달로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무려산은 쉽사리 비밀의 문을 열것 같지 않다.




 

아사달 문명



차오양에서 끝까지 머리에 맴돈 단어는 '아사달'이다. 단군왕검이 조선(朝鮮)을 열면서 도읍으로 삼았다는 아사달(阿斯達)…. 그 곳이 바로 차오양, 즉 '조양(朝陽)'이 아닌가. '아사'는 아침을 뜻하고, '달'은 땅 또는 산, 양지를 말한다. 그러니까 조양은 '아침의 햇빛이 가장 먼저 드는 땅' 곧 양달이다. 한국 학자들은 일찍부터 조양을 아사달과 결부시켜 고조선의 근원을 좇았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는 고조선 문화를 '아사달 문명'이라 이름하고, 중국의 요하문명론에 맞설 문화적 대안으로 내세웠다. "고조선(아사달)은 '한' '맥(貊)' '예(濊)' 세 부족이 결합해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고대국가이고, 뒤이은 것이 고중국(夏·하)입니다. 중국의 요하문명은 고조선 아사달 문명의 일부일 뿐이지요."



신 교수는 '아사달'이란 말에서 고조선어의 존재를 읽는다. "단군이 세운 조선은 '아침이 아름답게 빛나는 나라' '아침의 나라'라는 뜻으로 '아사나' '아사달'의 한자 표기입니다. 같은 원리로, '밝달' '박달'은 '밝은 산'이란 뜻으로 한자 '단(檀)' '백산(白山)' '박산(朴山)' '배달(倍達)' 등으로 번역되지요.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아사달'이 갖는 의미는 역사·문화적이면서 중첩적이다. 고조선어가 낳은 의미 변형이 심오하다. 아사히(朝日)란 말에서 보듯, 일본어가 고조선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아사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차오양을 떠나면서 답사단은 다링허를 구경했다. 대륙의 산을 뚫고 벌판을 가르며 힘차게 흐르는 다링허를 보고 있자니, 잃어버린 고국(古國)에 대한 아픔이 불현듯 강렬해졌다. 다링허와 랴오허를 뒤로하고 쫓겨 들어온 반도. 우리의 역사 상상력은 반도에 갇혀 너무 졸아들어 있지 않은가.





# 고조선의 도읍지가 어디



- 고조선 멸망의 산물 '한사군' 위치가 수수께끼 푸는 열쇠



"고조선의 도읍지가 어디였지?"



"갑자기 물으니 답답해지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고조선 도읍지는 아직 통설이 없다지 아마. 만주(요동)에 있다는 설이 있지만 평양으로 봐야 할 거야. 실제론 아무도 몰라. 그러니 그런 건 시험에 안나와."



"솔직히 아이가 고조선에 대해 물으면 뭘 대답할 수 있을까 싶어.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으니 말야."



지난 주말 B대학 사학과 동창회 자리에서 오간 대화들이다. 석·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 역사교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조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날 분위기를 전해준 K씨(42)는 "사학과 출신들이 그 모양이니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이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역사지식"이라며 씁쓸해 했다.



고조선의 중심과 강역 문제는 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삼국유사'에 비교적 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나 '아사달' '백악산' '평양' 식으로 언급돼 줄거리가 파악되지 않는다. '평양(平壤)'이 북한 대동강변의 평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상식처럼 돼 있다. (고)조선에 대해 단편적 정보를 제공하는 중국 사료들도 사건이 있을 때마다 불쑥 한마디씩 언급하는 식이라 일관된 논리 전개를 어렵게 한다.



다시 '삼국유사'를 보자. '…단군왕검은 처음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백악산(白岳山)으로 옮겨 15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 뒤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 또는 莊莊坪)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학계는 크게 대동강 중심설, 요동 중심설, 중심 이동설 세 가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대동강 중심설은 종래 학계의 통설이지만,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대표적 학자는 이병도 박사다. 조선 후기 정약용과 한치윤 등 실학자들도 고조선의 중심을 한반도로 고증한 바 있다. 북한 학계는 지난 1994년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간의 요동 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있다. 



요동 중심설은 신채호 정인보 등 1920년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북한 학자들이 한동안 통설로 삼았던 학설이다. 중심 이동설은 고조선 초기 중심지는 요동이었으나 후기들어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절충론이다. 여기엔 기자(箕子)동래설을 어떻게 보느냐가 쟁점이다.



최근에는 고고학 발굴 자료를 근거로 문헌 사료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는 요서(난하)중심설을, 김정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전 고려대 총장)은 예맥조선설을 내세운다. 이들 논쟁은 고조선 멸망 후 '한사군'이 어디에 설치됐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고대사의 뇌관'인 한사군 위치가 규명되면 후기 고조선의 도읍지가 저절로 밝혀지게 된다.



취재 지원 = (사)부산국학원·부산국학운동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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