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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인들의 메카- 청평사
-1 2016-06-23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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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淸平山, 779m)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으리라. 강원도에서 금강산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여행기록이 남겼기 때문이다. 김상헌의 《청평록》, 박장원의 《유청평산기》, 서종화의 《청평산기》 등이 있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7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라고 한다. 부의 동쪽 44리에 있다.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이 이 산에 들어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살았다"고 밝혔다. 청평사의 옛 이름이 문수원이다. 이자현을 기리는 문수원기비도 있다. 그러나 이곳이 부처를 모신 사찰만이 아니라 선도인(仙道人)들의 수도처로 유명했다.
  
▲ 춘천 청평사 전경(사진=춘천시)

정현축 박사(불교학, 원광대학교)는 "청평사에는 아내를 여의고 일찍이 인생무상을 느낀 이자현이 29세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이래, 곽여를 비롯하여 청평산인 이명, 행촌 이암 등 여러 선도인들이 드나들며 수련터를 형성했다"라며 "그리하여 청평사 뒤 골짜기 이름은 선동(仙洞)이며, 청평산 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천단(天壇)도 마련됐다"라고 말했다.

곽여(郭輿, 1058∼1130)는 이자현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기다. 이자현처럼 벼슬을 버리고 처사(處士)가 되었다. 예종(睿宗)은 곽여를 신선과 같은 존재인 진인(眞人), 선생(先生)으로 불렀다. 이명(李茗 ?∼1335)은 청평사에서 《진역유기(震域留記)》을 썼다. 이 책을 바탕으로 조선 숙종 2년, 북애자北崖子(생몰년미상)는 《규원사화》를 펴낼 수 있었다. 단군 47대의 역사와 함께 선교(仙敎)를 전하고 있는 규원사화 연구는 40여 편에 달하고 있다. ▶ (바로가기 클릭)

고려의 문신 이암(李嵒, 1297∼1364)은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을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한 유물이 1327년 청평사에 건립한 〈문수사시장경비(文殊寺施藏經碑)〉이다. 이제현이 글을 짓고 이암이 썼다. 이처럼 여러 선도인들이 청평사와 관련되어 있지만, 시대적인 영향도 컸다. 이들이 살았던 고려왕조가 조선과 달리 국가 차원에서 선도(仙道)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 선풍(仙風)을 숭상하라!

태조(918~943)는 옛 신라의 유풍을 계승하는 뜻으로 사선(四仙)을 선발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혀 팔관회(八關會)에서 춤을 추게 했다. 또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선도의 부활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성종 12년(993),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의 문신 이지백(李知白)은 “어찌 선왕(先王)의 연등·팔관·선랑(仙郞) 등의 일을 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이법(異法)으로 나라를 보호하여 태평에 이르게 하겠습니까”라며 우리나라 고유의 행사가 부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특히 고려 의종은 1168년(의종22) 서경에 행차하면서 왕조 중흥을 위한 교서를 내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선풍(仙風)을 따르고 행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성행하여 이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이 환열(歡悅)하고 백성과 만물이 평안하였도다. 그러므로 조종(祖宗) 이래 그 풍습을 숭상한 지 오래인데, 근래 양경(兩京,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는 날로 옛 모습을 잃어가면서 그 유풍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 지금부터팔관회는 미리 양반(兩班)으로 가산이 풍족한 자를 택하여 선가(仙家)로 정하고 고풍대로 하도록 하여 사람과 하늘이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하라.”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선풍이 역대 중국왕조에서는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전통이라고 노래했다.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선도에 대한 이러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국난 타개나 국가 발전을 모색하면서 그 정신적 토대를 선도에서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단군세기》의 집필스토리
행촌 이암은 충숙왕 때 20대 후반의 문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불과 수년만에 정5품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오른 것.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명을 받아 문수원의 장경비문을 썼다. 그러나 공민왕이 즉위한 지 3년, 1353년에 이암은 은퇴할 뜻을 품었다. 이후 그가 찾은 곳이 춘천 청평산이다. 5년이 흘러 왕의 부름을 받는다. 오늘날 부총리에 해당하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오른다. 62세 되던 1358년이었다. 학자들은 5년에 주목한다.

김흥삼 박사(사학, 강원대학교 강사)는 "행촌이 관직에 물러나 청평산, 강화도, 천보산 등지에 은거한 것이 여러 해인데 이러한 은거 시절에 아무런 저서도 없이 보냈을 리가 없다"라며 "청평산과 강화도, 천보산에서 불교와 선교를 넘나드는 승려들과 깊은 교유를 맺고 지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행촌은 1363년(공민왕 12) 10월 3일 강화도 해운당(海雲堂)에서 《단군세기》를 저술했다고 밝혔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이암의 후손인 이맥(李陌, 1455~1528)은 《태백일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노닐 때 밤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素佺)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처럼 신서(神書)를 얻으니 모두 옛 환단(桓檀)의 진결(眞訣)이라.”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고려 말에 소전거사가 청평사 전신인 태소암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청평사에 얻은 소전거사의 책을 바탕으로 《단군세기》를 집필한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단군세기》는 없다. 현전하는 것은 1911년 평안북도 출신 계연수가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을 하나로 묶은 《환단고기》에서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근대적 용어나 비과학적인 기록을 근거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군세기》의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을 천문학적으로 검증한 논문도 나왔다. ▶ 바로가기 (클릭)

한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단군세기》가 한말 일제시대 이후 지식인의 손을 거쳐 윤색, 가필 되었다는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을 전적으로 위서(僞書)로 판정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라며 "행촌이 지은 모본(母本)을 토대로 후세인들이 중층적으로 가필 윤색한 것"이라고 말했다.
7. 중국에 결코 굴복하지 않은 고구려, 내분에 망하다.
98주년 3.1절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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