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 신문,잡지
5.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 논리에 충실한 집안박물관
264 2014-08-19 3442
첨부파일: 1408414145.png [ 1,245KB ]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 논리에 충실한 집안박물관
중국 속 우리 역사 기행 5

  
승인 2014.08.12 17:45:23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중국에서 첫 밤을 보낸 통화(通化) 호텔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 꽤 큰 호텔인데 우리 일행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지금은 손님이 없지만, 인삼을 수확할 때가 되면 빈방이 없다고 한다. 홍콩, 대만에서 인삼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통화다. 아침에 호텔 주위를 거닐며 보았더니 호텔 바로 옆이 인삼시장이다. 백두산의약물류중심, 통화백두산인삼시장이라는 간판이 크게 붙었다. 약재료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 제약회사가 많다.
한국의 인삼 재배 기술이 들어와 통화에서는 인삼 재배가 한창이다. 값이 싸고 약효도 좋다고 한다. 이런 삼이 국내에 들어오면 국내 인삼 재배농가가 이겨낼까.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16일 오전 7시30분께 통화를 출발하여 집안(集安)으로 향했다. 압록강변 로령산맥을 따라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유일한 길. ‘고구려길’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집안에 도읍을 둔 고구려가 길을 따라 통화에 오갔다는 것이다. 이 길목에서 고구려인들이 돌을 캐서 수로를 이용하여 집안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장수왕릉의 돌을 이곳에서 캤다고 한다.
가는 동안 임찬경 박사가 고구려 역사를 강의했다. 중국에서 7년간 살면서 역사 현장을 샅샅이 살펴본 경험이 녹아난 해설이라 머리에 속속 들어왔다. 오늘 보기로 한 곳은 집안박물관, 고구려 국내성터,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모두루묘지 등이다.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묘에는 조상이 북부여에서 왔다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대목. 당시 부여가 대국이었고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이 그 대국 출신으로 부여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부여가 망한 뒤 백제에서는 “성왕 16년 무오 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백제 또한 부여의 정통을 이은 국가라는 의미로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이다.
부여가 어떠한 나라였는가. 임 박사는 후한 때 사람 왕충(王充, 25~220)의 ‘논형(論衡)’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후에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도 전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집안시 압록강변에는 유람선이 유유히 다닌다.

“한(漢)나라 때 부여는 매우 강한 나라였습니다. 부여 왕이 죽으면 한나라에서 보내준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습니다. 옥갑은 한의 황제들이 사용하던 것이죠. 그런데 한나라는 이 옥갑을 미리 만들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부여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장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나중에 요동의 공손 씨를 칠 때 공손연(公孫淵)이 주살된 뒤 현도군의 창고를 보니 옥갑 1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에 이 기록을 찾아 읽었다. 옥갑은 값이 많이 나가기도 하지만, 만들려면 시일이 많이 걸린다. 왕이 죽은 뒤에 만들면 늦다. 미리 만들어 놓고 부여에 가까운 곳에 보관하여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옥갑을 가지고 간다. 한나라가 부여에 이렇게까지 성의를 다한 것은 부여가 한나라와 대등하였거나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국가라는 증거가 아닐까.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은 내용ㅡ우리 역사를 소홀히 배운 게 드러난다. 고구려를 알려면 부여(夫餘)를 알아야 하리라. 
   
▲ 집안시는 동남쪽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서로 마주한다. 역사탐방 참가자들이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집안에 도착할 무렵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걱정이 되었다. 모처럼 고구려를 보려고 왔는데, 비 때문에 낭패를 볼까 우려됐다. 집안시내에 들어서자 날씨가 맑아 한 시름 놓았다. 곧바로 집안박물관으로 이동하여 버스에서 내려 집안박물관과 눈인사만 하고 압록강변으로 갔다. 집안에서 보는 압록강. 물이 맑고 고요했다. 강폭이 넓지 않아 건너편이 훤히 보였다. 소리쳐 부르면 누군가 돌아볼 것 같은 거리. 이렇게 가까운 거리지만 갈 수 없는 곳.
“저 쪽이 북한이라는데 아무도 없네.”
누군가 혼잣말을 한다.

집안시는 동남쪽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서로 바라보는데 그 길이가 203.5킬로미터이다. 중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어 압록강유람선부두를 운영한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변을 구경한다. 국경지대라지만 평화롭고 한가롭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집안박물관으로 향했다.

1958년 9월 15일 문을 연 집안박물관은 소장 유물이 11,000여건, 전국중점박물관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길림성의 애국주의 교육 기지이고 집안고구려 유물을 전시하는 국가 AAAA(4A)급 경구(景區), 길림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2009년 새로 지은 집안박물관은 오로지 고구려 역사 문물만 전시한다. ‘고구려박물관’으로 새로 개장한 집안박물관은 면적이 13,120제곱미터, 건축면적 6,459제곱미터 그중 전시면적이 2,954제곱미터에 달한다. 중국의 저명한 건축가 제강(齊康) 중국공정원 원사가 설계했다. 외관이 팔각연화(八角蓮花)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 사상과 고구려가 좋아하는 연꽃과 상석(尙石)을 반영한 것이다. 박물관에는 고구려 유물 1,027건을 6개 부분, 17개 단원으로 나누어 고구려가 집안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의 건축 특색, 생산활동, 군사수준, 문화예술, 종교신앙 등 역사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유물로써 보여주는 박물관. 중국이 고구려를 어떻게 보고 있나,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 들어가면서부터 긴장된다. 사진 촬영이 안 되고 공안이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한다.   
▲ 중국내 유일한 고구려 박물관인 집안박물관.

1층에 고구려의 역사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고구려는 주몽이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고구려현에 서기전 37년에 정권을 수립했다고 적었다. 고구려에는 국가를 세웠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중국 자료를 찾아봤더니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니까 국가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이라는 국가 내의 일부인 지방정권이니까 국가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란으로 본다. 복속(服屬)과 배반(背叛)을 거듭해온 고구려라고 한다.


박물관 1 전시실의 주제가 ‘한당고국(漢唐古國)’.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옛 국가. 고구려가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의 중국이라는 의미. 진나라 한나라 유민이 요동으로 이주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주제이다. “고구려는 중원 역대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멸망한 후에는 유민이 한족과 기타 민족으로 융합됐다.” 박물관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책봉(冊封)ㅡ중국 황제의 봉작을 받았으니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듯하다. “고구려는 북위 등 중원왕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중원왕조는 현토군을 통해 고구려에 조복의책(朝服衣幘)을 내렸다. 고구려 왕과 귀족은 한나라의 관복과 의장을 사용했고 수나라 당나라 때는 책봉을 받고 인수(印綬)를 받았다”고 복속 관계를 보여주는 듯한 자료만을 뽑아 늘어놓았다.   
▲ 고구려 유물만을 전시하는 집안박물관 전경. 풍수사상과 고구려인이 좋아하는 연꽃을 반영해 팔깔 연꽃 모양으로 건축했다.

2 전시실은 웅거요동(雄據遼東). 고구려가 요동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리왕 때 국내성, 지금의 집안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발전상이다. 국내성 평면도, 유적, 연화문와당, 철부, 석저, 철추 등을 볼 수 있다. 3 전시실은 산지민풍(山地民風)이라 하여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4 전시실은 금과철마(金戈鐵馬), 각종 무기, 마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이 철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알 수 있다. 금장식품을 통해서는 물산이 풍부한 고구려의 모습이 겹쳐진다. 5 전시실은 상장유풍(喪葬遺風),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와 유물을 소개한다. 고구려 묘지군이 집안에만 80개 정도 있고 묘지가 현존 8,0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오회분 5호 벽화를 재현하였다. 마지막으로 6 전시실은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유물로 호태왕비(好太王碑). 비석 탁본과 사진, 비문을 연구한 책까지 두루 갖추었다. 광개토대왕 비석 전시에 공을 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박물관 안내 자료에 그 속내가 보인다. "탁본에는 아름다운 광개토대왕 비문 전체가 한자(漢字)자로 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에는 고유의 문자를 없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또한 고구려가 중원에 신속(臣屬) 관계에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속(臣屬), 신하로서 복속 관계에 있었다. 즉 고구려와 중원국가는 군신(君臣) 관계이 있었다는 증거를 광개토대왕비의 한문에서 찾는 것이다. 

출구를 통해 1층에 내려오니 집안 고구려비가 맞이한다. 2012년 7월 29일 중국 길림성 집안시 마선향(麻線鄕) 마선촌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팔각 유리관을 씌워두고 다가가서 볼 수 없어 비석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광개토대왕비도 저런 모습일 게다.

박물관을 신축하기 전 집안 박물관의 전시 내용은 어떠했을까? 그 주제를 보면 농경어렵(農耕漁獵), 석성도와(石城陶瓦), 적석위봉(積石位封), 호태왕비석편, 철마병과, 연향가무(宴享歌舞), 문화예술, 의책금화(衣幘金花)로 되어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중국색이 덜하다. 동북공정에 따라 고구려의 유물이 다르게 평가받는 현장이 바로 집안박물관이다.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했고 강할 때는 배반하고 약할 때는 복속하는 중국의 일부 지방정권ㅡ집안박물관은 이 논리에 충실한 자료만을 진열하여 고구려의 전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길림성 애국주의 교육의 기지ㅡ집안박물관은 중국의 지방정권 고구려의 문물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애국주의를 심는 교육을 하는 기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데다 공안이 계속 따라오니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힘들었다. 전시 내용을 옮겨 적으면서도 뒤에서 보는 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물관 관람을 이렇게 긴장 속에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들 말이 없다.

< 저작권자 © 코리안스피릿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4. 7000년 전 신락문화를 일군 사람들은 누구일까?
6. 천혜의 요새, 환도산성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