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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이동휘 선생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9-08-29 조회수 :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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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선생은 1873년 6월 20일 함남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은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으로 일하던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본 선생은 대담하게도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습니다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선생은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선생은 승진을 거듭하며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군인들은 물론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얼마 후 일제에 의해 강제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자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광무황제·2천만동포형제·진신·법관·을사오적·각국공사관사절·주한일본공사하야시·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앞으로 보내는 8통의 유서를 작성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선생은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습니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뒤 군대를 해산하였는데 이에 대항하여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자, 일제는 선생을 배후조종자로 체포하고 그 해 석방합니다.

석방된 후 선생은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전도활동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한일합병’을 앞둔 1910년 8월 초 일제에 의해 또 한번 예비검속 되었다가 ‘한일합병’ 선언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1911년 3월 다시 안명근·양기탁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총감부에 체포된 선생은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했습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1.1.), 출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통일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3.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조직자들은 미국 등 서구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 결과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손병희·이승만과 함께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거나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주위의 측근들에게 “한인사회당의 당수면 되었지 무슨 정부의 직책이 중요한가”며 반문할 정도로 이들 임시정부의 각원취임수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대한국민의회측은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국민의회는 상해 임정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봉대(奉戴)에 합의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습니다. 국민의회의가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상해임정은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정부인 구미위원부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 총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동휘 선생 가족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노혁명가

선생은 말년 원동변강(연해주지역)의 모플(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모플의 목적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과 선전활동에 있었습니다. 원동변강모플위원회는 선생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원동변강모플열성자대회에서 훈장을 수여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하였습니다. 1935년 1월 31일, 선생은 모플활동을 위해 스찬지방을 방문했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오던 도중, 강한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분명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답습하여 이를 우리나라 혁명에 그대로 적용하고자 했던 이른바 정통공산주의자의 범주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양혁명의 책임자로서 한인공산주의운동에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제공산당의 젊은 볼셰비키들이 선생을 ‘비공산주의적이며 심지어는 반공산주의적 요소’를 지닌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반대파였던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해방을 제1차적인 과제로 설정하였으며, 한말 이래 민족운동의 전통과 경험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주류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볼셰비키들에게 종속되거나 휘둘리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또한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습니다. 선생은 독립운동에서조차 조국광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했던 그런 부류의 정치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야마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입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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