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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현천묵선생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9-03-02 조회수 :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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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간 현천묵 선생이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현천묵 선생은 190640대 중반에 보성학교 학감을 맡아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며 교육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보성학교의 교장과 경성향교 직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중심인물로 부상했고, 학교 운영 등을 담당하면서 경성 내 인맥과 사회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선생은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했고, 이후 지회장을 맡아 대한협회의 지회 중 가장 많은 회원을 거느린 단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수의 증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모색하고 전개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당시 대한협회 본부는 의병활동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나, 현천묵 선생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항일투쟁에 있어 의병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보성학교와 함일학교의 후원 명목으로 받은 경성지회 자금을 의병 활동비로 제공했으며, 실제로 경성지회 주요 인물들이 항일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 대종교 입교로 뒤바뀐 인생

이 시기 현천묵 선생의 활동 중 주목할 점은 바로, 대종교 입교입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면서 선생은 자신의 독립운동 방략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새로운 대안으로 올바른 역사 인식과 민족 정체성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선생은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이후 북간도로 망명했습니다.

북간도 망명 이후 현천묵 선생은 대종교 지도자 서일 선생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여 대종교를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섰고,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이어갔는데요, 학교 운영을 통해 이주한인 자녀들에게 교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훗날 졸업생들이 독립군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 3.1운동과 청산리전투 등에 적극 참여

19192,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 등 39인이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했습니다. 여기에는 다수의 대종교인들이 참여하고 서명했습니다.
이후 3.1운동의 열기는 한인 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고, 현천묵 선생 역시 적극적으로 가담했는데요, 선생은 대종교가 종교 단체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을 위한 단체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김좌진, 나중소 장군 등을 영입하여 무장투쟁단체로의 변모를 꾀했고, 그 결과 대한군정서가 조직되었습니다.

선생은 대한군정서의 부총재를 맡아 총재 서일 선생을 보좌하며 단체를 이끌었고, 김좌진 장군이 주축이 된 청산리전투에서 대한군정서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현천묵 선생은 청산리전투 이후 조직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부총재를 맡았고, 1921년 자결한 서일 선생의 뒤를 이어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아 조직의 재정비를 담당했습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로서 단체를 재정비하며 한인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던 선생은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정부는 1963,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함경도지역에서 의병과 개화인사들을 아울렀던 세력을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로 옮겨와 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소통에 의한 대동단결을 실천한 현천묵 선생.
10월의 독립운동가, 현천묵 선생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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