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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9-03-02 조회수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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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민족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던 3.1운동.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우리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했던 2.8독립선언을 아시나요?

올해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선언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마리아 선생이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개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1906년 서울로 이주해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된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였고, 또 삼촌인 김필순 선생의 집에 드나들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 선생은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고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다가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유학 중에도 선생은 일본 전체 여자유학생회의 대표가 되어 <여자계(女子界)>를 기관지로 발행하는 등 여성의식 자각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듭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하였습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황애덕 선생 등 여자 유학생들이 거둔 성금을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국내에도 전파하여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국내로 들여왔고 여성계,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 다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당일에도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3.1운동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됩니다.

약 6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고 출감한 선생은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은 선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1921년 8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중국 남경대학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습니다.

1923년 미국 유학을 위해 중국 상해를 떠난 김마리아 선생은 미국에서의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92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게 됩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라고 말하며 일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마리아 선생.

2.8독립선언 100주년, 그리고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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