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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8-03-04 조회수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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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출신지 황해도 은율
성별
관련사건 3·1운동

정의

1894(고종 31)∼1928. 독립운동가.

 

개설

황해도 은율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9인 중의 1인으로 활동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며, 경신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2월 22일, 기독교 측의 박희도()와 이갑성() 등으로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과 함께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받자, 쾌히 응낙하였다.

그 후 손병희()로부터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탑골공원에서 전개하기로 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25일 정동교회내의 이필주()의 집에서 학생 대표들을 소집, 각 전문학교와 중학생들을 3월 1일 오후 2시까지 탑골공원에 집합시켜 민족 대표들과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28일 승동예배당에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다시 모여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 받았으며, 3월 5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남대문역 앞에 모여 2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강기덕 등과 함께 군중을 지휘하면서 두 갈래로 나누어, 일대는 동쪽으로, 일대는 서쪽으로 독립만세운동행진을 하다가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제지를 받았으나, 오후 늦게까지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4일 각 학생 대표와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의 독립만세운동계획을 확인하고 시간과 장소를 오전 8시 서울역 광장으로 정하였다. 이튿날 약속 장소인 서울역 광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강기덕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남대문 쪽으로 향하여 시위 군중을 지휘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기도 하였고, 신생활사()·시대일보사() 등에서 일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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