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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 장덕준
작성자 : 관리자(test@test.com) 작성일 : 2018-03-04 조회수 :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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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1(고종 28)1920. 언론인.

 

개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추송(秋松). 황해도 재령 출신. 장붕도(張鵬道)의 아들이며, 동생 장덕수(張德秀)는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었고, 장덕진(張德震)은 독립운동 중 상해에서 순사(殉死)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4평양일일신문(平壤日日新聞)의 한국문판 주간으로 1년여 지낸 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한국인 YMCA 부간사로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에 정열을 기울였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장덕준은 당시 일본의 데모크라시운동 제창자로 이름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요시노[吉野作造] 교수와 교분이 두터워, 민주주의 사상과 우리나라의 장래에 관해 서로 솔직하고 진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 연구에 힘쓰는 한편, 어렵게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자진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사색보다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19193·1독립운동 무렵에는 신병으로 요양중이었는데도 홋카이도[北海道]까지 가서 한국인 노무자들의 생활 실태를 살펴보고 왔다.

그 후 김준연(金俊淵)을 통해 조국에서 국문신문이 창간되도록 힘을 썼다. 그리하여 19204, 마침내 김성수(金性洙)를 주주 대표로 한 동아일보(東亞日報)창간에 참여하여, 논설위원이면서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 등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 7월 홍범도(洪範圖)의 독립군이 왕청현 봉오동(汪淸縣鳳梧洞)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완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기 위한 전제 수단으로 이른바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나남의 제19사단을 비롯해 시베리아에 출동 중이던 부대와 관동군 일부 등을 북간도로 들여보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발행이 정지된 상태였으나 자진 종군을 지원, 그 해 1015일 서울을 출발하여 116일 간도에 도착, 삼성여관(三成旅館)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일본 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에 종군할 것을 요청한 뒤, 일본군의 무고한 한국인 대학살을 취재하다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 청년 지사로서, 일본 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언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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