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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재 양성지(梁誠之) 1415~1482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2-29 조회수 : 5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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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자 했던 선지자 - 양성지
(梁誠之) 1415~1482


조선 태종 15년에 아버지 구주와 어머니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양성지는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세종 23년(1441)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시작으로 성종조까지 6왕조(王朝)를 섬기면서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2회.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2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악학도감 제조(樂學都監 提調)도 겸직한 바 있는 눌재 선생은 성종 13년 68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문신으로서 청요한 벼슬을 모두 역임한 당대 최고의 문사였다.

세조가 왕좌지재가 있다며 “양성지는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칭찬했던 눌재 선생의 학문은 넓고도 깊어 다방면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깊은 경지에 도달한 시와 문, 법학에도 일가견을 지녔고 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하여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삼강사략을 편찬하였으며 면황계감을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서에도 밝아 여러 번 국가의 병사에 대하여 헌책하였고 손자주해를 교정하였으며 의서에도 조예가 깊어 의문류취를 교정했다. 이렇듯 수많은 그의 저술은 오로지 경국제세의 실용에 치중했다. 특히 역사와 지리에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가진 것도 실은 이 경국제세를 위한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이민족, 여진과 달달(達達)이 호시탐탐 엿보며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 깊숙이까지 내려오곤 했지만 북방 방비책이 전혀 없었다. 적은 노리는데 백성은 오히려 병력을 기피하기 위해 호적에서 빼는 자, 뇌물을 주고 빠지는 자, 세력가의 하인으로 위장, 집 호수마저 없애거나 도망가는 등 온갖 간계들이 많았다. 

이에 눌재 선생은 국방정책의 확립을 위한 비변십책에서 우수한 장정을 골라 뽑아서 정병을 양성하고 장수는 일정한 기관에서 학술과 단련을 쌓게 하여 임용할 것을 주장했다. 

평소 군량비축 방법으로 근본적인 생산 강화, 군대 자체의 둔전 실시, 벼슬을 파는 방법까지, 그가 얼마나 당시 군량의 준비가 소홀함을 안타깝게 여겼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고 성곽과 보루를 수리하고 요새지를 정하여 수비위주로 관방을 정할 것도 주장했다. 그의 국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비변십책’ 외에 도 ‘동서양계 일체비어’를 비롯해 평안도편의십팔사, 위부형명, 군정십책, 군국편의십사, 변방사책, 군정사사, 병사육책, 국군비계이사, 북방비어초소집오책, 북방비어이소삼책, 북방비어삼소사책 등 많은 상소가 있다. 

                 
40여 년 간의 관직에서 약 330여건에 이르는 상소는 
경학 사학 문학 병학 지리 의학 음악 농법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과 깊이를 지녔다. 

그중에서도 사학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였다. 

단군이래의 민족사 정립과 교육을 강조해 국왕의 경연(經筵)에서 국사를 강의할 것을 여러 번 진언했고 ‘동국사략’과 ‘고려사절요’를 늘 읽으라고 권하였으며 과거 시험에 삼국사기 고려사 등 국사를 넣어야 한다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456년 6월 집현전이 폐지되고 세자좌보덕으로 옮길 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 혹 ‘왕’이라 일컫기도 하고 ‘경’이라 일컫기도 하더니 문종 대에 와서는 ‘이여(爾汝:너)’라고 부르니 통분스럽기 짝이 없다. 명에 항의를 해야 한다"며 명의 오만함을 서슴없이 성토했던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역사를 모르고 우리의 주체성이 결여된 까닭이라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를 주관하고 임금의 탄생일을 황제의 예인 "절(節)"로 할 것과 상신(相臣)을 우대하고 왕실에 존호를 올려 국가의 체통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또한 세조에게 “임금의 어필(御筆)은 운한(雲漢)과 더불어 그 소회(昭回)함이 같으며 규벽(奎璧)으로 그 찬란함이 같으니 만세의 신자(臣子)들이 마땅히 집을 지어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송조(宋朝) 성제(聖製)의 예로는 집을 세워 간직하였으되 관을 설치하여 관장하게 했습니다. 

태종은 용도각(龍圖閣)이라 하고 진종은 천장각(天章閣), 인종은 보문각(寶文閣), 신종은 현묘각(顯謨閣), 철종은 휘유각(徽猷閣), 고종은 환장각(煥章閣), 효종은 화문각(華文閣)이라하여 모두 학사(學士) 대제(待制) 직각(直閣) 등의 관직을 두었습니다”라며 임긍의 어제시문을 인지당(麟趾堂)의 동쪽 별실에 봉안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 짓고 이미 소장된 내각(內閣)은 비서각(秘書閣)으로 하여 대제학, 제학, 직각, 응교 등의 관직을 두도록 건의했다. 
이는 우리나라 서적 보관을 소중히 할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동방은 대대로 요수의 동쪽에 살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리어졌고 3면은 바다로 1면은 산을 짊어지고 있어 구역이 저절로 나뉘며 풍기 또한 다르다. 단군 이래 관청을 베풀고 고을도 두어 주체적인 교화의 덕을 폈으니 전조(고려)의 태조는 신서(信書)를 만들어 나라사람을 가르쳤고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래 지닌 풍속을 따랐다. 

만약 의관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라며 비록 연등 놀이나 돌싸움 같은 풍속일지라도 옛 풍속을 따르고 지킬 것을 종용했다. 

지리학과 지도에도 매우 조예가 깊은 선생은 “지리는 주군의 연혁, 산하의 좁고 막힌 것을 기록한 것으로 모든 서적을 찬집 할 때에는 사기·병서·지도도 아울러 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려사지리지·팔도지리지·팔도지도·경성지도·여연·무창·우예의 삼읍지도 등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관방·성보·변진 등에 관한 그의 많은 진언은 어느 것이나 그곳의 지리를 들어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어서 공허한 구석이 없었다. 


특히 왕명으로 
정척(鄭陟)과 함께 
각도(道)의 
수령(守令)에게 그 지방의 위치, 산맥의 방향, 도로의 이수(里數), 인접된 군(郡)과의 접경(接境) 등을 조사하여 그린 동국지도는 ‘기리고거’라는 거리측량 기구로 삼각측량법을 원용하여 한반도의 남북길이 동서길이를 실측한,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과학적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지도에는 요하 동쪽의 오늘날 중국 영토와 울릉도, 독도 및 대마도까지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하였다.(세조실록 세조9년11월12일조)


선생은 우리나라는 단군이라는 민족 시조를 가지고 있?단군 이래 역사적으로 정치적 자치를 유지해 왔으며 문화적으로도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며  "명나라(明) 태조왕도 우리나라 영토를 요하 동쪽 만리의 나라라 하여 요동의 동쪽 1백80에 연속된 산맥으로 경계가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넓이가 몇 만리나 되고 가구 수가 수 백 만호이며, 군사가 1백 만으로 주나라(周)에 대해서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나라와 위나라(元,魏)와는 동등한 우방국 지위였다. 연나라(燕)에는 한때 의지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수나라(隋)때는 수나라가 6개 사단(六師)의 대군으로 침략하였으나 대파하였다. 문물의 아름다움은 중화와 짝이 되어 우리가 손님으로 대우한 당(唐)나라는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다. 

요나라(遼)때 요나라가 다시 침략하였으나 요나라의 침략군은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송나라(宋)는 우리가 섬겼던 나라이나, 송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예의의 나라’라고 불렀으며, 금나라(金)는 우리나라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일컬었고 원나라(元)때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다."라며 중국과의 관계를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조정 신하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세종치세의 태평에 익어 국방을 잊고 있을 당시에 선생은 문신이지만 항상 문관과 무관이 동등할 것을 주장했다. 

문묘에 배식(配食)하는 자가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세 사람뿐"이라며 문묘에 우리 선현을 많이 배향해야 하고 자칫 문약(文弱)에 빠질 것을 경계하고자 문무여일(文武如一)정책을 주장하며, 문묘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검필,강한찬,양규,윤관,조충,김취려,김경손,박서,김방경,안우,김득배,이방실,최영,정지 그리고 조선의 하경복, 최윤덕 등의 무관들의 묘도 세워 배향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눌재 선생의 이 같은 제언에도 불구하고 신료들뿐만이 아니라 임금까지도 묵묵부답이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타성에 젖어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 요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점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역사만을 일반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점에 우리의 동국사도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그러한 그의 건의는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숭문천무(崇文賤武)풍습으로 치달아 조정과 온 국민이 문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으며 마침내 준비 없는 나라로 쳐져 뒷날 왜구의 침략을 앉아서 당하게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늘재집(訥齊集) 해설’

 양성지(梁成之)의 문집 눌재집은 김수온이 찬한 남원군정안에 의하면 성종 때 주의 십권 가집대권이 있었으나 수백 년의 세월과 여러 번의 병화를 겪는 동안 선생의 문집은 거의 사라졌다. 정조 15년 신해년에 임금이 규장각에 명령하여 널리 공사 문헌에 실려 있는 공의 주의·잡저·고금시 등을 채집하여 눌재집 세 권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것이 눌재집의 원집이다.
원집이 간행된 후, 148년이 지난 무인년에 그의 14 손 주겸이 왕조실록·국조보감 등에서 원집에 수록되지 않은 주의·기송·유사 등 수십 편을 보완해서 속편을 간행하여, 지금 세상에 전하는 눌재집은 원집 세권, 속편 한권으로 네(4)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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