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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종 (洪萬宗 1643~1725)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11 조회수 : 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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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기를 극복하고자 국사와 국문에 혼신을 바친 선(仙)학자 홍만종(洪萬宗 1643~1725)

홍만종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默子)·몽헌(夢軒)·장주(長州)로 인조 2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천군수인 주세(柱世), 어머니는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의 딸이었다.

홍만종은 김득신(金得臣)·홍석기(洪錫箕) 등과 정두경(鄭斗卿)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675년 숙종 원년에 진사시에 급제한 뒤, 참봉·봉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이어 졍묘년과 병자년의 호란으로 피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당시의 조선사회는 민족정신을 고취해야만 할 시기였으나 파벌간의 갈등으로 1680년 경신대출척에 연루되어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그 후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대대로 명망 있는 문한가 출신이었지만, 홍만종은 출세를 위한 경서공부보다는 도선(道仙)과 시평을 비롯해 역사·골계·국문시가 등에 뜻을 두어 글쓰기에 골몰했다.
뿌리 깊은 모화관의 현실 병폐를 시정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방대한 저서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헌을 역사의 실체라고 믿고 있던 그는 엄격한 체제를 갖추고 확실한 사실을 전하려는 집념에서 많은 문헌을 섭렵하며 고증에 철저를 기했다. 
이러한 견해는 자주론적 저술관으로 집약되어 역사방면에서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을, 인물편으로는 ‘해동이적(海東異蹟), 그리고 조선시인의 시를 평한 3권의 시평서로 문학적인 면에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견줄만한 시평을 남겼다.
동국역대총목은 책머리에 동국역대전통도(東國歷代傳統圖)와 저자인 홍만종의 소서(小序) 그리고 범례다음에 본문, 이어서 지지(地誌)와 저자의 자서(自序)가 있다. 본문은 삼국사,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통감, 국조보감(國朝寶鑑), 고사촬요(攷事撮要)등 수 십 종의 사서를 인용하여 단군조선으로부터 기자, 위만조선, 삼한, 한사군, 이부(二府), 삼국, 고려, 조선사적의 사건만 간추려 편년체로 서술했고 지지(地誌)에는 8도의 고도(古都)와 산천을 기록했다.
이 책은 동국통감과 달리, 위만조선에게 축출당한 기준(箕準)을 주자강목(朱子綱目)의 예에 따라 정통으로 삼았으며 변한·마한의 위치비정(位置批正)은 종래의 것이 잘못된 기록이라 하여, 사관(史觀)을 수정한 것이 특징이다.

 홍만종은 도교를 일컬어 단학(丹學)이라고도 했다고 소개하며 단학에 대한 이적(異蹟)을 모아 ‘해동이적전(海東異蹟傳’을 집필했다. 거기에는 단군과 박혁거세(赫居世), 동명왕(東明王), 사선(四仙), 옥보고(玉寶高), 김겸효(金謙孝)와 소하, 대세와 구염, 탐시, 선도성모(仙桃聖母), 김가기(金可記), 최치원(崔致遠), 강감찬(姜邯贊), 권진인(權眞人), 김시습(金時習), 홍유손, 정희량(鄭希良), 남추, 지리산인(知異山人), 정붕(鄭鵬), 정수곤(鄭壽崑), 서경덕(徐敬德), 곽재우(郭再祐), 전우치(田禹治), 남사고(南師古), 박지화(朴枝華), 이지함(李之菡), 한계노승(寒溪老僧), 유형진(柳亨進), 장한웅(張漢雄), 장생(蔣生) 등 40명을 수록하고 그 인명과 출전까지 밝혔다. 
우리나라 도선계 인물들의 신이담을 적은 ‘해동이적’은 국문학사상 전기문학과 한문소설의 자료로서 더욱 더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또한 그가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시평 분야로 시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평이 필요하다며 시평의 객관성을 위해 입의(立意)·조어(造語)·격률(格律)과 같은 기준을 마련했고 평어의 구체화를 위해 비유적 시평방식을 쓰기도 했다. 
대표적인 시평서인 ‘소화시평(小華詩評)’에는 모두 480여 편의 작품을 실었다. 소화시평은 신분과 왕조, 시대의 기준에 따라 문단을 설정, 배열했으며 시인과 작품 화제가 조화롭게 수록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치밀성도 보였다. 
소화시평을 보충한 것이 시평보유(詩評補遺)다. 소화시평과 시평보유를 지은 그는 자신의 시평을 정리한 뒤, 만년인 70세에 고려시대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24종의 문헌에서 시평을 선발하여 ‘시화총림(詩話叢林)’을 묶었다. 
특히 이 시화총림에 수록된, 방대한 시화 저술에서 그 체계성과 철저한 고증성이 주목된다. 
그가 젊은 시절인 숙종 4년에 보름 만에 지었다고 해서 ‘십오지(十五志)’라고도 불리는 잡록 순오지(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전해졌음)는 그 책머리에 김득신(金得臣)의 서와 저자의 자서가 있는데 자서에 ‘자신이 병으로 누워 지내다가 옛날에 들은 여러 가지 말과 민가에 떠도는 속담 등을 기록했다’고 밝혀 놓아 당시 세태를 잘 알 수 있다. 
그 상권에는 고사일문(古史逸聞)ㆍ시화ㆍ양생술, 하권에는 유현ㆍ도가ㆍ불가ㆍ삼교합론(三敎合論)ㆍ문담ㆍ문집ㆍ별호ㆍ속언 등을 단락의 시작, 서(序)와 맺는 결(結)을 확실하게 전개해 놓아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다. 
 특히  ‘순오지’의 첫머리에는 단군의 사적을 여러모로 들었다. 
단군의 신이한 통치가 우리 역사의 출발이고 단군이야말로 ‘동방 생민(生民)의 비조’라고 하는 고대사의 기본인식이 만연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역사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줄기차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 뒤에도 신이한 행적이 계속되었음을 밝혀 민족적 자부심을 근거로 삼고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역사를 해석하며 우리문화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그는 중국문화 유입이 조선의 문화발전을 결정하였다는 중화주의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우리 선조들이 단군 이래의 굳건한 정신을 발휘한 사실을 거론하며 고구려가 중국침략을 당당히 물리치고 국력을 크게 떨쳤던 사실을 감격스럽게 서술했다.
그리고 그 같은 선조들의 기상을 잃고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현실을 통탄해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도 근본적인 각성을 하지 못하고 기강이 해이해져 있는 것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글만 숭상하고 실질을 저버리는 사고방식, 유학의 헛된 명분론을 거부하고 고구려시대의 실질적이고 전투적인 기상을 계승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불·선 삼교에 대한 해박한 논설도 펼쳤다. 그 중에서도 도가에 대한 내용이 많다. 
조선 태조의 건국설화 중 풍수에 능하였다는 도선(道詵)의 이야기에서부터 당시 지명에 얽힌 전설과 신선술, 또는 양성보명(養性保命)과 입신행기(立身行己)의 비법을 소개하였다. 이것은 많은 신이담과 민중적 영웅의 행적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나약하고 해이해진 풍조를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영웅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신선수련법까지도 필요하다고 보아, 단전호흡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법을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또한 진복창(陳復昌)의 ‘역대가(歷代歌)’, 조식(曺植)의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정철(鄭澈)의 ‘관동별곡’등 우리말로 된 장가 14편을 소개하며 먼저 작품명을 들고 작자를 말한 뒤 내용을 설명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평가는 간결하면서도 작품 위주의 평을 하고 있어서 비평의 의의를 부각시켰다. 

정수를 언어로 보고 자국문화에 대한 독자적 가능성을 자국어와 국어문학에서 찾고자 한 홍만종은 이두와 한글은 한자로 나타낼 수 없는 우리의 정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우리말 속담 143개를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한 뒤, 글자 수에 따라 분류하고 각각 그 뜻을 적어놓아 조선시대의 속담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두더지의 혼인’·‘고양이목에 방울달기’ 등에는 유래담도 실어 설화의 자료까지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오지의 주된 관심은 우리나라 역사와 문학에 있고 우리 민족에 대한 당당한 긍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관인문학(官人文學)에서 묻혀버리기 쉬운 사실들을 찾아 기록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하겠다.

이 외에 8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쓴 저서로 ‘증보역대총목’, ‘명엽지해(蓂葉志諧)’, ‘동국지지략(東國地志略)’, ‘풍산홍씨족보’, 시선집인 ‘고금시율선’, 국문시가와 비평이 함께 실린 시가평서 ‘동국악보’ 고본 ‘청구영언’ 등의 저서가 있다. 그의 업적은 조선 후기의 학문이 근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조선후기 3대 가집(歌集)의 하나로 꼽히는 ‘청구영언’은 숙종~영조조의 가인, 김천택 역으로 알았으나 한국일보 4월 18일자에 의하면 홍만종이라고 한다.

김영호(50)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의 학술지 '대동문화연구'61집에 기고한 '현묵자 홍만종의 청구영언 편찬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홍만종이 직접 작성한 '청구영언서(靑丘永言序)와 ‘청구영언’의 후편 격인 '이원신보서(梨園新譜序)'를 공개했다. 

김 교수가 공개한 '청구영언서'와 '이원신보서'는 홍만종의 문집인 '부부고'의 친필 필사본 11책(18.2×12.9㎝)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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