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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朴齊家, 1750~1805)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7-07 조회수 : 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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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북학파(北學派)의 거장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박제가는 서자로서 승지(承旨) 박평(朴坪)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으로 출생에서부터 신분차별을 받고 아버지까지 일찍 여의어 가난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면서도 아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아들이 사귀는 명사들에게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곤 해서 아무도 그가 가난한 집 아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엔 서자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어, 그는 일찍부터 글공부를 익혀 시(詩)·서(書)·화(畵)로 명성을 얻었다. 19세 무렵부터 북학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따르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과 가까이 지냈다. 소년시절부터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진 박제가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란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조선의 시문 사대가'로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박제가는 29세(1778)때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된 정사(正使) 채제공(蔡濟恭)의 배려로 이덕무와 함께 수행원으로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등 청나라 학자들과 가까이 지내며 청조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하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 이듬해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정책에 따라 박제가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읽고 저명학자들과 깊이 사귀었다. 3개월간의 청나라 여행과 한 달여의 연경 시찰에서 직접 보고 들은 그는 청국에서의 경험적 사실과 그 동안 연구한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폐단을 성찰하고 농기구와 수레 등의 기구를 개량하고 사회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청을 선진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북학의에서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라 안에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 산호 등 보배도 없다. 아무리 많은 금과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간다 해도 떡을 살 수 없는 형편이다. 무릇 재물은 우물과도 같다. 우물의 물은 퍼서 쓰면 쓸수록 자꾸만 가득 채워지는 것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물을 사용하면 물은 항상 보충되어 썩거나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우물은 소비를 뜻한다) 
박제가는 무조건 쓰지 않고 아끼는 검소한 생활만이 잘사는 길이 아니라 ‘소비’원리를 정확히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로 소비가 아주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사용할수록 새 물을 만들어내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는 이 우물론은 이용과 후생의 양 측면을 모두 해결하는 이론이었다. 
군사력 또한 국가 경제발전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 박제가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징병제를 용병제로 대체하고 군대 수도 감축하고 사병에게 녹봉제를 실시하여 우선 기초가 안정된 다음 무기와 훈련,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국가의 방위 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국가의 부강과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며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경작법을 개량하고 노동 도구와 무기를 개선하는 등, 과학기술을 개조해야 한다고도 했다. 
청나라 학자 뤄핀이 선물한 박제가의 초상화그는 나라가 백여 년간이나 평화가 지속되고 사치한 풍속이 없는데도 나라가 빈곤한 까닭을 선진기술과 과학기술의 낙후라고 본 것이다.

37세 때(1786)에도 왕명에 따라 올린 구폐책(救弊策) 상소에서 신분 차별 타파와 상공업 장려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국민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청나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사회적 생산과 과학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양반문벌과 과거 제도 폐단인 관직 세습이라고 한 그는 실제의 쓰임에 맞게 인재를 등용하고 비천한 집안의 재능 있는 자제를 추천하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하였다. 그가 반대한 것은 과거 제도 자체가 아니라 과거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관직의 세습이었던 것이다. 그가 신분 등급 제도를 반대하고 인권존중을 주장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노비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박제가는 상업 진흥도 적극 주장했다. 낙후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상업을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무역을 발전시켜야한다고 했다. 국가가 낙후되고 농민 생활이 빈곤한 경제원인은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하고 재화가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상업은 상품유통을 촉진하여 사회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기 때문에 생활을 향상시키므로 상인 경시풍조를 반대 하였다. 
그리고 상업과 대외 무역이 발전하려면 교통 운수업이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지리적 특징에 근거하여 수상 운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너무 내핍만 강조하면 생산이 줄고 상업도 부진하여 결과적으로 경제가 더욱 위축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농산물 저하원인도 과학기술 낙후와 백성들이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을 꼽았다. 그러면 세계의 발전추세에 뒤질게 뻔하고 발전추세를 따라가려면 반드시 상업과 대외무역을 발전시키고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생산 활동에 활용함과 동시에 정치기본이고 도덕 근본인 이용후생에 유리한 모든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생산을 늘려야만 소비를 증가시켜 농민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소비품 생산을 늘려야만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 박제가는 이전 실학자들이 토지제도개혁으로 농업을 중시한 것과 달리, 상인·중인 등 성장하는 시민 계층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한, ‘어떻게 하면 백성을 이롭고 넉넉하게 하는가’를 중시했다.
그는 1790년 41세 때,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 번째 연행(燕行)에 다녀오다가 원자(순조)탄생을 축하한 청나라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압록강에서 되돌아 세 번째 연경에 파견되었다. 1794년,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798년 나라에서 왕명으로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를 간추려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올렸다. 순조 원년(1801) 네 번째 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신유사옥(辛酉邪獄)의 주모자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1805년 석방되었으나 다음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시대착오적인 북벌론을 무릅쓰고 북학론을 외친 그는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해서는 서양의 학문도 배워야 할 것임을 피력했다. 민중의 수요억제 절검이 경제 안정에 필요하다는 통념을 물리치고 생산 확충에 따른 충분한 공급이 유통 질서를 원활하게 한다는 그의 경제관은 농경기술과 농업경영을 개선함으로써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상공업도 발전시켜 민부(民富)를 증대하고자 했다. 
당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시대에서 박해를 무릅쓰고 구국·구빈(救貧)의 길은 오직 북학밖에 없다고 주장했으나 주자사상에 물든 사대부들은 오랑캐의 것이라 하여 번번이 거부했다. 그는 실현되지 못한 답답한 심사를 자신의 글 속에 풀어 놓았다.
「학문의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묻는 것이 옳다. 비록 하인이라 할지라도 많이 알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신이 남과 같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묻지 않는다면 이는 죽을 때까지 편협하고 무식한 곳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 중략 - 
동방에 사는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 편으로 치우치는 기질을 갖고 있다. 한 번도 중국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중국 사람을 본 적도 없다. 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 나라 강토를 떠나 본 적이 없다. 역관을 몹시 천하게 여겼으므로 외교에도 능통할 수 없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는 소리 없는 전쟁이라 할 만한데 역관을 귀히 여기지 않는 외교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청나라가 일어난 이래 우리나라 조정 사대부들은 청나라 말 사용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사신도 보내고 싶지 않으나 할 수 없어 보낸다.”면서 국내의 상황과 문서, 언어전달을 통역에 맡겨버린다.
- 중략 - 
사신은 통역관이 “이렇습니다”하면 그 뿐이고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러니 눈이 있다한들 무엇을 보았겠는가? 또한 사신이 귀를 기우려서 듣는다 하더라도 바로 옆에서 나누는 대화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또한 그 곳의 통역담당관리가 날마다 뇌물을 요구해도 기꺼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림: 목우도(牧牛圖), 어락도(漁樂圖), 야치도(野雉圖), 등 다수 
저서: 정유집(貞否集), 북학의, 정유시고(貞否詩稿), 명농초고(明農草稿),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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