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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金素月1902-1934)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3-27 조회수 : 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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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비애를 넘어서 민족적 정한을 읊은 군계일학(群鷄一鶴) 金素月(1902-1934)

양지바른 곳이면 전국산천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진달래가 만발하다.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며 온 산을 진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진달래’에 대해 누구나 추억 한 두 가지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고 ‘진달래 꽃’ 시와 ‘김소월’ 시인이 떠오를 것이다. 
그가 살던 백 년 전에는 요즘보다도 더 많은 진달래가 만발했을 것이다. 

김소월 시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이다. 
본명은 정식(廷湜)이고 필명인 ‘소월’은 아명이다. 
소월의 나이 두 살 때 부친은 정주ㆍ곽산 간 철도를 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소월은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성장하였다.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와서 숙모(桂熙永)로부터 수많은 민담과 민화를 접한 소월은 후에 그의 시작(詩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은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고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성으로 남산보통학교(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산학교를 졸업한 소월은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서춘(徐椿), 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삼았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남으로 그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1914년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했다.(연변과 북한자료) 이 때 벌써 소월은 자신에 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 본격적으로 문학을 접했으며 세살 연상의 홍실단여사와도 결혼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조만식(曺晩植)선생이었고 나도향(羅稻香)과는 문단의 벗이었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을 선동하여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 요행히 몸을 피하였다고 하며 이 때 학교가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해서 공부하고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졌다. 
소월은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청산하고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하여 경영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한 뒤 심한 염세주의 증에 빠졌다. 
북한자료는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지국 일을 맡아보며 소일했다고 하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이고 그만둔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이처럼 광산업을 하면서도 일제하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런 소월의 시작(詩作)은 1920년 ‘창조(創造)’에 낭인(浪人)의 봄 / 야(夜)의 우적(雨滴) / 오과(午過)의 읍(泣) / 그리워 / 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개벽’에 금잔디 / 첫치마 / 엄마야 누나야 / 진달래꽃 / 개여울 / 제비 / 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삭주구성(朔州龜城 / 가는 길 / 산(山), 《배재》2호에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주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 별로 살펴보면, 밭고랑 위에서(1924) / 꽃촉(燭)불 켜는 밤(1925) / 무신(無信 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 노래(1924) /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 1925)을 발표하고 있다.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그해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소월의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김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으며 산유화 / 첫치마 / 금잔디 / 달맞이 등에서 보여주듯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 깨달음을 토한다. 또한, 진달래꽃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 후일 / 꽃촉불 켜는 밤 / 못 잊어 에서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해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그의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시집 ‘진달래꽃’ 이후, 후기의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들도리(1925) / 건강(健康)한 잠(1934) /상쾌(爽快)한 아침(1934)이 있고 삶의 고뇌를 그린,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 삼수갑산(三水甲山1934)을 들 수 있다. 
작품 활동이 저조해지고 생활고까지 겹친 소월은 생에 대한 의욕을 잃고 1934년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고향 곽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7·5조의 정형시로서 호흡의 리듬이 자유롭고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되는 소월의 시는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에 눈뜨게 하였다. 
이러한 민요조 서정시를 창작하고 정형적 율조에만도 머물지 않고 개인의 비애를 넘는, 민족적 정한을 노래함으로써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일급 시인으로 떠오른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고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 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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