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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孫秉熙 1861∼1922)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3-06 조회수 : 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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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孫秉熙 1861∼1922)

3․1 독립운동선언 33인 중의 한 분인 민족지도자 손병희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천도교의 제3세 교주의 종교지도자로서, 국가적으로 정치적 재능과 행정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은 철종 12년인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北二面) 금암리(琴岩里)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 밀양(密陽)손씨 두흥(斗興)의 큰아들로 태어난 선생의 초명은 응구(應九), 그 뒤 규동(奎東)으로 고쳤다. 

장자임에도 어머니 최씨(崔氏)가 둘째부인이기에 서자(庶子)로써 그의 어린 시절은 암담했다. 또래와 같지 않은 어린 그의 심술이 동네사람들의 눈에는 “서자 놈이라서…”로 보였을 것이고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한 그는 12세의 어린나이에 “낯선 동네에 가면 모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가출하고 이름도 ‘병희’라고 고쳐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자신의 처지처럼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다는 그는 무작정 방랑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의중은 ‘언젠가는 때가 온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두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22세 때 조카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했다.
‘동학이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고자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도이니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 빈부의 차별이 없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목적이란 말에 선생은 무릎을 치면서 “동학이 그런 도라고 하면 믿고말고. 여부가 있소”라며 즉석에서 입교식을 행하고 그날부터 수도?전념하여 입도 3년 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무렵 정부의 부정부패는 골이 깊었고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을 외치는 시위가 무성했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남접(南接)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는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10만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조총을 쏘는 일본군에 패배하고 탄압의 손길을 피해 함경도와 평안도지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교세를 확장하며 포교에 힘썼다.

선생의 꾸준하고 지략 있는 생활태도와 역량을 인정받아 최시형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고 1897년 12월 24일 제3세교주의 일을 맡아 보다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3세 교주가 되었다. 

1901년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재건 구상을 위하여 미국시찰을 계획한 그는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동생 병흠(秉欽)·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머물렀다. 

이름도 이상헌(李相憲)이라 바꾸고 경찰의 눈을 속이고 다녔지만 언제 간신배들의 책동이 있을지 두려워 상해(上海)에서 수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하였으나 그마저도 좌절되어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이미 일본에 망명해 있던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이진호(李軫鎬)·박영효(朴泳孝) 등과 만났으나 가명을 썼으므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손병희선생은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본국과 연락하며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교도로 하여금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하여 상당한 유학생을 배출시켰고 1903년 일본에 있는 동안 러일전쟁의 가능성과 일본의 승리를 확고하게 점쳤다. 

1904년 본국으로 돌아온 후 선생은 바로 대동회를 조직했다. 새로운 단체 회원에게 단발령을 명령했고 7월에는 단체명을 중립회(中立會)라고 고쳤다가 다시 진보회로 변경하고 기본 취지 및 강령과 규칙을 제정하는 한편, 정부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 군정을 재정비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과 독립기초를 공고히 하여 정부를 개선하는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이는 정부가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행동하게 하려던 목적이었다. 
 
한편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고 알려진 또 하나의 개혁모임이 독립협회의 여당(餘黨)으로 설립되었다. 그 협회는 1896년 개화파 인사들로 조직했다가 일진회(一進會)로 개명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단체였다. 유신회에서 손병희선생의 수석부관이며 진보회의 회장이었던 이용구에게 손짓했다. 두 회의 목적이 유사함을 들어 합병을 제의한 것이다. 새로운 단체는 일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고 이용구는 그 일진회의 실질적인 영도자가 되었다. 
 
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친일추구를 나중에야 알게 된 선생은 이용구 일파를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기 위하여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고자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돌아갔다. 

이때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 사상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혼란한 때문이라 먼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고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해서 2월 16일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

선생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서 처리하던 이용 구 이하 62명은 손병희의 망명기간 중 재정권을 위임받아 처리하였던 관계로 동산·부동산이 모두 그들의 명의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재정적 타격이 컸다. 그러나 교도들의 한줌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제정으로 타개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확장을 막기 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며 탄압의 수위를 점점 혹독하게 높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더 높아졌다. 궁핍한 재정난은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 3년 후에는 오히려 무기명성미제로 호전된 재정을 3·1운동자금으로 크게 쓰이기도 했다.
 
선생은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제일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하여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에 정기적으로 보조했고 학교폐쇄를 막는 일시적인 보조로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고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경영권도 인수하였다. 이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 8개교에 관계하눼?

1919년 일본 동경(東京)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崔麟)·권동진·오세창의 독립운동 허락이 있었다. 선생은 이에 찬동, 천도교 측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하
고 일원화하여야 하며,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이라는 합의를 하고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1000매를 인쇄하고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거사를 재확인했다.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기념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하여 식은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3월 1일 기념식을 마친 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독립선언서를 읽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족주의와 독립이라는 대의(大義)에 조선인의 불굴정신은 총칼로써 위협할 수 없었다. 

일본 무관의 위협 아래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비무장 평화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삼일운동은 조선 민족주의의 영원한 횃불이 되어 일본 식민지 수법에 반대하는 세계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실재로 삼일운동 이후 세계적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 졌으니 4월 6일 인도 간디의 불복종운동이 개시되고 5월에는 북경에서 5월 4일 학생운동이 있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이 독립운동을 개시하여 8월에 독립하였다. 

알바니아가 1920년 1월 독립을 선언하였고 3월 7일 시리아 · 이라크도 독립을 선언 하였다. 그리고 1922년 이집트와 1923년 네팔이 영국으로부터 각각 독립하였던 것으로 보아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에 삼일운동이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독립선언기념식 이후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요양 중 돌아가셨다. 

손병희선생은 천도교 교단 내부의 조직과 도의 사업에서매우 큰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는 정치적 재능과 행정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이었으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민족주의자의 선봉장이었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 도결(道訣) / 명리전(明理傳) /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 /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 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 / 무체법경 (無體法經) / 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 / 신통고(神通考) 견성해(見性解) / 삼성과(三性科) / 삼심관(三心觀) / 극락설(極樂說) / 성범설(聖凡說) / 진심불염(眞心不染) / 후경(後經) / 십삼관법(十三觀法) / 몽중문답가 / 무하사 / 권도문 / 삼전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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