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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1-04 조회수 : 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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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뛰어 넘은 천재 과학자 장영실

“우지끈 딱”
세종대왕의 어가(御駕)가 부러지는 소리다. 

이 사고로 천재과학자 장영실은 하루아침에 곤장 80대의 형벌과 함께 파직되었다. 서기 1442년에 그가 감독해서 만든 어가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향주 출신의 중국인 기술자로 그의 아들인 장영실의 과학적 자질은 부친의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래현의 어린관노 시절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여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고달픈 노비 생활에 틈이 날 때는 편히 쉬기 마련이련만 그가 스스로 일을 찾아 완벽하게 정비한 것은 일 자체가 좋아 스스로 일을 찾아다닌 것으로 타고난 성품임이 드러난다. 

장영실의 첫 기록은 태종 12년(서기 1412년)이다. 그 즈음 장영실은 이미 궁중에서 전문 기술자로 활동했고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세종 3년(서기 1421년)에 천문기구 제작연구를 위해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기기를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과학 전문 기술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셈이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천문기구의 개괄적이고 원론적인 이론만을 얻었을 뿐, 실물이나 설계도 등 실 제작에 필요한 것은 구하지 못했다. 당시 천문은 가장 중요한 분야로 중국은 그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종 6년(서기 1424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고쳐서 보완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국가 운영의 기초였던 당시에 천민이 공식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 얼마나 빼어났는지의 사실이 증명된다. 

세종 14년(서기 1432년)부터 천문 관측기구와 현실에 맞는 수시력(授時曆)제작은 농업 국가로서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 해 가을, 천문 관측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을 확장하고 대규모 천문 관측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景福宮) 안에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 일에 장영실이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물론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각도기와 비슷한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漢城)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시계인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鑌)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이듬해(서기 1434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고 보루각에 설치되었다고 하여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 부르기도 했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안에 있다고 해서 '금루(禁漏)'라고도 했다. 

보루각의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 종루에서 오정(낮 12시)또는 인정(밤 10시경)등 시각에 북이나 종을 쳐서 일반인들에게 시간을 알렸다. 이 자격루의 정확도가 얼마나 정밀했는지 그는 정4품 무관 벼슬인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 시계였다. 옥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자신의 집무실(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그곳에 옥루를 설치하게 하고 수시로 드나들며 관심을 기울였다. 또 우승지 김돈(金暾)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하여 그 공을 치하하기도 했다.

천문 기구 이외에도 장영실은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와 측우기 등 관측기구도 만들었다.

금속활자는 고려 고종(高宗)(서기 1234년)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후 큰 발전이 없다가, 조선조 태종 3년(1403년)에 계미자(癸未子)를 만들었으나 크기가 고르지 못하고 활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밀랍을 사용하는 불편 때문에 많은 양의 인쇄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세종 2년(서기 1420년)에 다시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어 능률적으로 인쇄할 수 있었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생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 연구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우량 측정은 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를 조사하여 자료화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 18년(서기 1436년)을 전후로 가뭄과 폭우가 잇따라 발생하여 농업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받자, 강우량을 좀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세자를 중심으로 장영실 등이 참가해서 1440년에 처음으로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 기상학 사상 최초의 측우기이다. 그 다음 해에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1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수표(水標)가 있다. 이 수표는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되었는데, 현재 세계 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양수표(量水標)와 똑같은 이치였다. 

이렇게 제작된 관측기구들은 세종 16년(서기 1434년)에 완공된 경복궁 대간의대 안팎으로 설치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천문 관측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대간의대(大簡儀臺)는 높이만 해도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 대간의대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신무문(神武門) 서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고 자격루, 옥루도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렸다. 중종(中宗)대에 새로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昌慶宮) 안에 새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설치하였는데, 고종(高宗)대에 시간을 알리는 방법이 바뀌자 일제(日帝)가 보루각을 헐고 자격루만 장서각(藏書閣) 앞에 방치하다 현재는 덕수궁(德壽宮)에 있다.

세종 당시 측우기도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현종(顯宗)3년(서기 1837년)에 만들어진 금영(錦營) 측우기가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30년 동안의 찬란한 공적이 무참하게 장영실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 천재 과학자의 출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사생활과 말년도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승승장구하던 삶이 한순간에 그 흔적이 묘연한 것은 장영실이 천민 출신이기도 하겠으나, 역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말년의 삶이 무시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든다.

정교한 과학 기구를 수도 없이 만들어 온 그가 가마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여 사용 중에 부서지게 했을까 하는 점, 그가 감독을 맡았던 가마만 부실하여 사고가 난 점, 전문적으로 제작했던 기술자들이 임금이 탈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 리 없는 점 등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사고는 이미 제작된 가마를 누군가가 고의로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노비에서 정3품 관직으로의 파격적인 신분 상승은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거슬리는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장영실의 출세가 신분제를 뿌리부터 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보수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수긍이 간다.

비록 인생의 최정상에서 갑자기 허무하게 추락하고 말았지만, 장영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그는 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여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정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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