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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 우하영(大猷 禹夏永) 선생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7-04-03 조회수 : 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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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농학자 대유 우하영(大猷 禹夏永) 선생 1741(영조 17)~1812(순조 12)

본관은 단양.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아버지는 정서(鼎瑞)이다. 

수원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 만연해 있던 과거시험의 부정 등으로 인해 회시(會試)에서만 12번이나 낙방하고, 이후 과거와 관직에의 뜻을 버린 채 시골의 유생으로 빈한한 가운데 평생을 보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사회실정을 조사, 수집하는 한편 스스로 농업경영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조사자료, 옛 문헌과 당대 제가의 글들을 참고하여 국가 및 사회개혁의 방안을 강구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그의 개혁론은 1796년(정조 20)과 1804년(순조 4) 왕의 구언교(求言敎)에 응지상소(應旨上疏)의 형태로 올린 글들에 잘 나타나 있다. 

1796년에 올린 〈수원유생우하영경륜 水原儒生禹夏永經綸〉과 뒤에 이를 보완하여 〈천일록 千一錄〉이라는 표제로 상정한 책자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군제·국방·관제·농업기술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가 실려있는데, 특히 농업과 관련한 관행 조사와 농업기술, 농업정책 등에 관한 건의는 조선 후기 농학사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 특히 농업론의 기조는 부유한 지주층에게로 토지가 집적되고 농촌사회가 분해되는 18세기 말엽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농촌사회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었다. 

특히 그는 근검역행(勤儉力行)하는 소농생산, 소농층의 집약적 농업생산으로의 유도, 소농층의 경제적 안정과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정부 농업정책의 개선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정부에서 양전(量田)과 조세(租稅)를 공평히 하여 소농경제를 안정시키고, 수차(水車)의 보급과 아울러 농서(農書)를 편찬하고 보급함으로써 농사를 지도하고, 권농기구(勸農機構)를 개선하여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을 근면한 농민으로 교도하며, 나아가 강력한 사회정책으로서 모든 농민을 인(隣)·통(統)의 향촌조직에 묶어둠으로써 농업생산을 강화하는 등의 방안을 개진했다. 

그리고 농지의 확보와 관련해서는 신전개발(新田開發)과 아울러 광작(廣作)하는 대농경영(大農經營)을 보다 집약적인 소농경영으로 전환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소농경제 안정책은 지주들의 토지집적을 기득권으로 인정하면서 봉건적지주제를 인정하는 한계를 지니는 토지개혁을 핵심적 관건으로 보았던 실학파의 농업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업적 농업과 시장경제에 의한 정당한 이윤추구를 인정하고,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부농의 신분상승을 긍정하기는 했지만, 농민의 상업 종사를 환영하지 않았고, 농업의 상업화가 농본억말(農本抑末)에 기초한 중세적 상업의 틀을 넘어서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농업론은 당시 농촌지식인들의 의식성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지주층에 기반한 중세적 농학사상의 한계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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