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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 857~?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6-11-02 조회수 : 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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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자 - 최치원 연구 자료 


- 서문 - 

1. 中國을 압도한 大文章 

2. 詩文과 四山碑銘 

3. 風流道 思想의 體系化 

4. 主體的인 思想의 현대적 繼承 




- 서문 -

우리 민족의 선도문화와 역사를 찾아 올라가다보면 그 길목에서 항상 만나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당대에 해동공자로 칭송을 받았던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난랑비 서문'과 '고운 사적의 천부경'에서 보듯이 마치 우주 중계의 위성처럼 중간분기점이 고운(孤雲)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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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교(敎)를 설치한 근원에 대해서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제로 삼교(三敎)를 다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들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예컨대 집에 들어오면 집안 어른께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였으니 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요,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 선생은 경주최씨의 중시조(中始祖)인데 그 후손으로는 동학의 창시자이신 최제우(濟愚) 선생, 동학의 제2대 교주이신 최시형(時亨) 선생, 그리고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치신 최익현(益鉉) 선생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은 '황소의 난'때 글을 읽던 황소를 책상에서 굴러 떨어지게 만든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중에 나오는 글입니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한 것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는 것이요,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알맞은 때를 따름으로써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름으로써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일생은 하늘에 명이 달려 있어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중략)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달하였고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중략) 

햇빛이 활짝 비치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베풀어져 있으니 반드시 흉한 족속들은 제거되고 마는 것이다.(중략) 

하물며 너는 평민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밭두둑 사이에서 일어났다.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꾀라 하며, 살상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고, 죄를 용서해 주려해도 착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 할 뿐만 아니라, 땅 속에 있는 귀신까지도 남몰래 베어 죽이려고 의논하리라.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之鬼 已議陰誅) 

무릇 잠깐 동안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벌써 정신이 죽었고 넋이 빠졌으리라. 사람의 일이란 제가 저를 아는 것이 제일이다.(중략) 
너는 모름지기 나아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를 잘 헤아리고,잘된 일인가 못 된 일인가 분별하라. 
배반하여 멸망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다. 그러면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친한 장사를 찾아 갑자기 변할 것을 기약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라." 

- 최치원(崔致遠)선생의 격황소서(檄黃巢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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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國을 압도한 大文章 


고운(孤雲) 최치원은 신라 말엽에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서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을 격문으로 평정함으로써 문장은 능히 중국을 압도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유학의 시종(始宗)이 되었고 유불도(儒佛道) 3교에 효통(曉通)했을 뿐만 아니라 풍류도(風流道)라는 주체적인 사상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관련 기록에 의하면 고운의 시조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이고 아버지는 23세 산윤(山允, 一名 肩逸)으로 시랑(侍郞)을 지냈으며, 고운은 24세로서 경주 최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최치원은 그의 능력이 탁월했던 만큼 그에 대한 설화도 수없이 많다. 특히 그의 말년이 그랬듯이 그의 출생 또한 매우 기이했다. 하루는 검은 구름이 사면에서 일어나고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어지러운 틈에 최치원의 어머니가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다. 


집 뒤 일악령(日岳嶺)이라는 산에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밤에 최치원의 아버지가 달려가 그 바위를 살펴보니 바위가 저절로 열리며 그 속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들어가 보니 땅이 넓고 이상한 골짜기와 숲에 그윽하고 이제껏 보지도 못한 새가 꽃 사이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곳은 신선의 세계였다. 동쪽으로 한참 들어가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집이 한 채 덩그렇게 있는데 그 속에 황금빛 돼지가 여인의 무릎을 베고 용문석(龍紋席)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주위에는 수많은 선녀들이 그를 옹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바로 자기의 부인이었다. 그가 향을 바람에 날리니 부인은 그 남편이 구출하려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치원의 어머니는 황금빛 돼지가 따뜻한 물에 불려진 사슴의 가죽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부인은 사슴 가죽으로 된 주머니 끈을 입 속에 넣어 불린 다음 돼지 목에 딱 붙여 버렸다. 그래서 돼지는 곧 죽게 되었다. 거기에서 구출된 부인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부인이 금 돼지에게 잡혀간 일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아들을 바닷가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지 않는가?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애를 데려 오려고 찾아 나갔으나 그 때는 이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려던 그들은 어디선가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한 아이가 바다 가운데 높은 바위 위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아이는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이 때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그 아이는 본래 문창성(文昌星)인데 잠시 인간 세계에 내려와 최씨 집에 인연하게 되었노라. 아이의 어머니가 돼지의 변을 당하여 14삭만에 생산하였으니, 이는 자고로 이인(異人)은 열 달이 넘은 후에 태어나는 법이라, 이 아이는 최충(崔沖)의 아들이 분명할 뿐 아니라 그 돼지는 심상한 돼지가 아니로다". 그의 출생에 따르는 이러한 설화는 그의 삶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쉽게 짐작하게 해 준다. 그에 대한 비범한 설화는 실제 그의 생애 전체에서 확인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지혜가 절윤(絶倫)했던 최치원은 12살 때인 경문왕(景文王) 9년(A.D. 869)에 진봉사(進奉使)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0년 동안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뼈에 새겨 공부한 지 6년 만에 최치원은 외국인에게 보이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인 빈공진사과(賓貢進士科)에 급제했다. 


최치원은 성골(聖骨), 진골(眞骨)도 아닌 육두품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신분의 한계를 넘어 출세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한 개인의 영달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학문(學問)에만 전념하여 장원급제라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다. 급제한 뒤에 2년 동안을 시작(詩作) 활동에 전념했고 20살 약관(弱冠)의 나이에 율수( 栗水) 縣尉(현위)라는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문집 5권을 만들어 복궤집(覆貴集)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시박능문(詩博能文)의 인재를 뽑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21세가 되던 겨울에 현위직(縣尉職)을 사임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다시 학문에 매진하였다. 현위직을 그만두자 녹봉이 없어져서 글 읽을 양식이 없을 정도로 구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동년우(同年友) 고운(顧雲)의 주선으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인 고변(高騈)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처음에는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가 1년 후에 고변의 서기직을 맡게 되었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종군하면서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짓게 되었다. 이 격문을 황소들이 읽다가 "오직 천하의 사람만이 너희를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들도 너희를 죽이려고 의논했다(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之鬼 已議陰誅)"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자신들도 모르게 상(床)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명문을 씀으로써 최치원은 천하에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고변이 문장 보필의 공을 천자에게 알려 그는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시어사(承務郞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승직되고 천자가 내리는 하사품인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기까지 했다. 


그 후 4년간 최치원은 고변을 대신하여 표(表), 장(狀), 계(啓), 서(書), 격문(檄文) 등 일만(一萬)여 편의 글을 지었다고 하니 그의 문장력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고변(高騈), 배찬(裵瓚), 장교(張喬) 등 당시 일급의 문인 호걸들과 교유를 하여 당시 국제 사회의 최고 지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오히려 이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최치원의 유학과 출세는 입신 출세라는 개인의 포부를 실천했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 우리 민족의 총체적인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 천하를 놀라게 할 정도의 실력을 기른 최치원은 이제는 그 능력을 고국 신라를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나라 천자의 은근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28세 되던 해에 귀국 길에 올랐다. 고운이 신라로 돌아 올 때 동년우 고운(顧雲)이 증별시(贈別詩)인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中華에 떨친 최치원의 특출한 문재(文才)를 찬양하자 고운(孤雲)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시를 읊어 금의환향하는 기쁨을 노래하였다. 


巫峽重峰之歲 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絲入中華 한미한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 
銀河列宿之年 스물 여덟 살 되는 해에 
錦還故國 입신하여 돌아가네 


고운이 귀국하자 헌강왕(憲康王)은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제수했다. 이에 최치원은 공식적인 문장을 짓고 국가를 위하여 봉사했다. 또 그때 최치원은 개인적으로 지은 시를 모아 시문집 28권을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말기적인 타락상이 풍미하는 혼란한 사회가 되었고, 최치원은 그 뛰어난 능력과는 오히려 반대로 귀족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게 되었다. 최치원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백성을 잘 다스리려는 포부를 실천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태수(太守)가 되었다. 그 후 부성군 태수로 자리를 옮겨 선정을 펴기에 애썼다. 얼마 뒤에는 왕명으로 중국을 다시 다녀오기도 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다시 그는 의창(義昌), 천령군(天嶺郡)의 태수(太守)를 지내면서 진성왕(眞聖王)께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니 왕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고 그를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중앙의 벼슬, 지방관, 국정을 바루기 위한 건의를 거듭했지만 신라는 이를 수용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최치원은 깊은 실망을 안고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숨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시대와 역사에 맞게 해내고 상황에 따라 새로운 변신을 할 수 있었던 달인(達人)이었다. 그에 대한 설화를 빌리지 않더라도 최치원은 위대한 시인이요 문장가이며 정치가, 사상가, 학자였다. 그를 두고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니, 동국문종(東國文宗)이니 하는 것은 그가 우리 역사에 미친 학문적, 문학적, 사상적인 업적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려 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그의 위대성은 이러한 거창한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포부를 달성하고 자기 실현을 위하여 일생 동안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일, 학문을 이루기 위하여 기울인 피나는 노력, 획득한 역량을 나라를 위해 끝까지 바치려 했던 정성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이상과 괴리된 현실 속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솔직히 남에게 보이면서 자기 일생을 정성스럽게 살았다는 점, 그 결과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음은 물론, 세계사에까지 명성을 드날린 점은 일상적인 자아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된다고 하겠다. 


2. 詩文과 四山碑銘 


그의 삶의 자취는 약간의 시문과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하지 않는 그의 시문까지를 합친다면 그 작품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가 급제한 후 10년간에 걸쳐 지은 시문을 책으로 묶은 것이 무려 28권이나 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그의 저술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데 그의 저작을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사시금체부오수 1권(私試今體賦五首一卷), 오언칠언금체시공일백수 1권(五言七言今體詩共一百首一卷), 잡시부공삼십수 1권(雜詩賦共三十首一卷), 중산복궤집일부 1권(中山覆궤集五卷), 계원필경집일부 20권(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사륙집(四六集), 문집 30권(文集三十卷),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현수전(賢首傳), 과시금체 5수(科試今體五首), 5언7언 금체시 100수(五言七言今體詩百首), 잡시부 30수(雜詩賦三十首), 석리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이 외에도 단행본의 저술은 더 있겠으나 전부 유실되고 계원필경 20권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현전하는 다른 전적에 얼마간의 작품이 남아 있는데, 문장 양식과 그 편 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序)20, 표(表)29, 장(狀)48, 주장(奏狀)20, 당장(堂狀)10, 별지(別紙)94, 격서(檄書)4, 서(書)18, 위곡(委曲)20, 거첩(擧牒)50, 재사(齋詞)17, 제문(祭文)5, 기(記)7, 소(疏)2, 계(啓)9, 비명(碑銘)4, 찬(贊)7, 원문(願文)8, 전(傳)3 (계 357편) 


수많은 그의 작품 가운데 그의 시를 먼저 살펴보면 제여지도(題輿地圖)라는 시에 "곤륜산은 동으로 달리고 오산은 푸른데, 별들은 북으로 흐르고 한 줄기 물은 황색을 띠었네(昆崙東走五山碧, 星宿北流一水黃)"라고 읊고 있다. 중국의 친구는 "이 구는 곧 하나의 여지도다"라고 찬양했고, 조선시대 비평가 홍만종은 "천하를 주머니에 넣은 것으로서 산수의 조종(祖宗)이다. 생각이 지극히 호건하니 생각컨대 이 늙은이의 흉중에는 몇 개의 운몽(雲夢)를 지니고 있다"고 극찬했다. 


그리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한시,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날 알아 줄이 적네, 창 밖에는 한 밤의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에 대하여 허균과 이수광이 모두 가장 훌륭한 시라고 평가를 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들지 않은 수많은 그의 시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는 최치원이 시에서 이룩한 높은 경지를 여지없이 웅변해 준다고 하겠다. 


시에서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기도 어려운데 최치원은 문장에서 또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최치원은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숭복사비(崇福寺碑) 등 유명한 4비(碑)의 비문(碑文)을 남겼는데 이를 일러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한다.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는 신라 말의 명승인 혜소(慧昭, 774-850)의 공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세운 탑비(塔碑)로서 고운 최치원이 비명(碑銘)을 짓고 글씨도 직접 쓴 유명한 비(碑)이다.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 대웅전 바로 앞에 서 있는데 국보 제 4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혜소는 애장왕(哀莊王) 5년(804)에 입당(入唐), 흥덕왕(興德王) 5년(830)에 귀국하여 역대 임금들의 추앙을 받다가 문성왕(文聖王) 12년(850)에 입적하였다. 그는 옥천사(玉泉寺, 후에 雙谿寺로 개칭)에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철저히 선(禪)을 내세워 실천함으로써 혜능을 연상케 했으나 독립된 선파(禪派)를 세우지는 못하고 고려조에 와서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조사(祖師)로 추존된 고승이다. 


헌강왕은 선사의 시호(諡號)를 진감선사(眞鑑禪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했었다. 이 비의 총 높이는 3.63m이고 비신(碑身)의 높이는 2.02m, 비폭(碑幅)은 1m이다. 사산비(四山碑) 중에서 유일하게 고운이 직접 비문의 글씨와 제액(題額)의 전자(篆字)까지 쓴 이 비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건립되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保光塔碑)는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인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의 묘탑비(墓塔碑)로서 현재 충청남도 보령군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성주사지(聖住寺址)에 서 있는데 국보 제 8호이다. 


성주사(聖住寺)는 원래 백제의 헌왕태자(獻王太子)인 법왕(法王)에 의해 개창된 오합사(烏合寺, 일명 烏會寺)이었는데 신라 문성왕대에 낭혜화상이 중창(重創)을 하자 왕은 사명(寺名)을 성주사로 바꾸었던 것이다. 무염(無染)은 애장왕 2년(801)에 출생하여 일찌기 입당,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성주산파의 개산조가 되었고 진성왕 2년(888)에 입적한 고승이다. 


왕은 곧 대낭혜(大朗慧)란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백월보광(白月保光)이라 하였다. 이 비의 총 높이는 4.55m, 비신의 높이는 2.52m,비폭은 1.56m, 비의 두께는 42cm로서 우리나라 현존 비석 중에서 최대의 걸작이다. 


비문의 글씨는 최치원의 종제(從弟)인 최인곤(崔仁滾, 改名 崔彦 爲)이 썼으며 비신(碑身), 구부(龜趺), 이수(이首)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는 지증대사 도헌(道憲)의 탑비로서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鳳巖寺) 금당 우측에 세워져 있는데 보물 제 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헌은 헌덕왕 16년(824)에 출생하여 입당하지 않고 사조(四祖) 도신(道信)의 법통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을 아울러 이은 혜은(慧隱)으로부터 선풍을 이어받아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하였다.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였다. 이 비의 높이는 2.73m, 비폭은 1.64m, 비의 두께는 24cm이며 비문의 글씨는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혜강(慧江)이 83세 때에 쓰고 직접 새긴 것이다. 


이 적조탑비의 비각안에 현재 함께 보존되어 있는 적조탑(寂照塔)은 보물 13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헌강왕 8년에 세운 팔각원당(八角願堂)을 기본으로 한 부도탑(浮圖塔)으로서 사산비(四山碑) 중에서 유일하게 완존하는 부도탑이다.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는 곡사(鵠寺)의 유래와 이건(移建), 개명한 숭복사의 건립과정을 밝힌 사적비(寺蹟碑)이다. 원래 곡사는 원성왕모(元聖王母)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고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되는 김원랑(金元郞)이 세운 절인데 원성왕의 인산(因山)을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이 절에 경영하고 절을 현재의 월성군 외동면 말방리의 숭복사지로 옮겼던 것이다. 경문왕이 즉위한 후, 이 절을 개건하였고 헌강왕은 절이름을 大崇福寺라 고쳤다. 


이 사산비명은 사륙변려문(四六변儷文)으로 쓰여졌는데 이 문체는 중국 한대(漢代)에 연원하여 남북조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문 문장의 한 갈래이다. 특히 만당 때에는 사륙문(四六文)이 공문서(公文書)는 물론 과거문(科擧文)으로 쓰이게 되어 이 문체가 유행하였는데 최치원은 과거를 준비하고 공문서를 전담하는 과정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익혀 귀국 후에도 이 문체로 글을 썼다. 


이 문체의 특성은 어구면(語句面)에서는 대우(對偶)와 사륙(四六)이고, 어음면(語音面)에서는 평측상대(平仄相對)이며, 용사면(用辭面)에서는 용전(用典)과 수식(修飾)이다. 외국인으로서 구사하기 어려운 문체를 최치원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물과 역사를 서술하고, 자기의 사상을 마음껏 피력했다. 그리고 격황소서(檄黃巢書)는 그 때의 효용성에서나 후대적인 평가에서 언제나 거론의 대상이 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최치원의 문학적인 업적에 대하여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중국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나타낸 이로는 최학사(崔學士) 고운(孤雲)이 앞에서 선창(先唱)하였다"라고 찬미했다. 


그리고 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당서 예문지(唐書藝文志)에는 최치원의 사륙일권(四六一卷)을 실었으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의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음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어찌해서 문예열전에 유독 최치원의 전을 세우지 않았는가? 나의 사의(私意)로는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를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傳)을 설치하여 바른대로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猜忌)에 저촉이 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이를 생략했을 것인져! 이는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최치원은 당대의 최상급 문인이였다. 


최치원에 대한 이같은 높은 평가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94)은 그의 상이회재서(上李晦齋書)에서 "최치원 선생의 문조(文藻)는 신이(神異)하고 그 견문과 실천은 진실로 백세의 스승이라 일컬을 만하다. 성정(誠正)의 설에 이르러서는 아직 듣지 못했다고 하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 문학을 창성하게 한 공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은 즉 선성(先聖)에 배향하기를 이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를 하겠는가?"라고 하여 최치원을 탁월한 문장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시문을 통해서 볼 때 최치원은 우리나라의 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그 결과 초기 우리 문학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문학적인 역량을 세계에 떨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최치원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 있다. 결국 최치원은 세계 속에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風流道 思想의 體系化 


최치원은 단순히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고 유교사상을 비롯한 불교, 도교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다. 이념에 대한 이해가 막연하던 당시에 매우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 스스로를 '유문말학(儒門末學)', '이부지도(尼父之徒)'라 일컬은 것을 보면 그가 유교사상을 상당히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인 면과 관련하여 "반드시 요순을 따르고 우탕의 정치를 펴면, 천하가 창성하고 아름다워진다(必可驅堯舜而殿禹湯 苑五岳而池四海 盛矣美矣)"라고 했으며 또 일컫기를 "어진 신하는 그 임금이 요순처럼 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賢臣以致堯舜爲先)"라고 했다. 


이로 보면 최치원은 유교사상의 핵심을 깨닫고 있었으며 당대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은 나무에서 생기나 불이 사나우면 나무를 태우고, 물은 배를 뜨게 하나 물이 성하면 배를 뒤엎는다(以爲火生於木 而火猛則木焚 水泛其舟 而水狂則舟覆)"라는 발언을 보면 최치원이 당대 신라의 실정을 비판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만민의 어버이인 임금이라도 패덕(悖德)을 저지르고, 실정(失政)을 하게 되면 백성이 힘으로 이를 저지하고 나설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유교에 대한 그의 입장과 발언은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그는 유교에서 이른바 사람 다스리는(治人) 요체가 인정(仁政)과 예교(禮敎)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유교의 핵심을 꿰뚫었다. 인정(仁政)의 궁극적인 목적은 백성을 바르게 다스려 구하는 것이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공평(公平)과 중정(中正)을 지켜 조금도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고 했으며 예교(禮敎)는 인간질서의 근본이므로 반드시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孝)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올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의 내용도 이로써 짐작을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유교 사상은 물론 불교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가운데 화엄에 대한 이해가 심원했다.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서(序)에서 법장화상의 행적을 10개의 과목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화엄삼매관(華嚴三昧觀)에 나오는 직심(直心)의 십의(十義) 즉, 광대심(廣大心), 심심심(甚深心), 방편심(方便心), 견고심(堅固心), 무간심(無間心), 절복심(折伏心), 선교심(善巧心), 불이심(不二心), 무애심(無碍心), 원명심(圓明心)에 맞춘 것이다. 논리적인 학문을 해온 그가 불교 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보여주는 화엄경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화엄경이라는 교종(敎宗)에만 얽매이지 않았고 선(禪)의 실천적인 면도 중시했다. "선(禪)은 담박하여 맛이 없으나 모름지기 힘써서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다른 사람이 마신 술이 나를 취하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낭혜화상(朗慧和尙)의 말을 빌어 선(禪)은 자득(自得), 자증(自證)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서(智證大師碑序)에서 남종선의 종취(宗趣)를 "수행하고 수행했으나 수행함이 없고, 증득하고 증득했으나 증득함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는 심심상인(心心相印), 불입문자(不立文字)란 선(禪)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도교에 대한 그의 깊은 식견은 "도(道)는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진실로 탁마(琢磨)의 이치를 끊은 것이다"라는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진리의 본질이 언제나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면에서 지도(至道)를 알기 위해서는 성실성과 경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지도(至道)를 부지런히 행하는 자는 적고, 현문(玄門)을 닫는 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유불도의 사상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실천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의 고유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가치를 세상에 언표했다는 점이다. 그가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풍류도(風流道)를 새롭게 이해하고 설명한 데에는 그의 민족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는 동인의식(東人意識)이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했으면서도 외국 문화에 물들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 갖는 가치를 오히려 발견해 냈다. 동방이라는 방위가 갖는 의미, 그 동방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과 그 우수성, 동방에서 동방인이 세운 나라가 갖는 아름다운 명칭 등을 밝히고 언급함으로써 그 스스로 투철한 동방인의 의식 즉 주체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동방을 움츠렸던 것이 다시 살아나고 새로운 싹이 무성하게 뻗어 나와 생성, 변화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방위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천성이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고 부드럽고 유순하며, 서로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지적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조건이 어울려 우리나라가 군자의 나라(君子國), 어진이가 사는 곳(仁域), 태평승지(太平勝地) 등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러한 선민(選民) 의식의 바탕이 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풍류도(風流道)가 갖는 가치를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교(敎)를 설치한 근원에 대해서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제로 삼교(三敎)를 다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들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예컨대 집에 들어오면 집안 어른께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였으니 이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요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나오는 이런 내용은 풍류도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최치원은 풍류도가 삼교(三敎)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包含三敎]고 지적하여 우리의 고유한 사상 속에는 이미 삼교의 사상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풍유도의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을 보면 우리의 고유한 풍류도는 외래적인 삼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삼교와 일치되는 사상이 내재된, 독자적으로 형성된 고유한 사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충효적인 요소, 무위(無爲), 불언(不言)의 요소, 위선거악(爲善去惡)의 요소가 풍류도에 모두 내포된 것이라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 갖는 선진성(先進性)과 원융성(圓融性)을 찾아 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알게 된 상호 이질적인 사상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된 질서와 체계를 가진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정치, 사상, 종교라는 상호 다른 분야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유불도의 이념을 풍류도 하나로 묶을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은 '진감선사비서(眞鑑禪師碑序)'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이 다른 나라는 없다(道不遠人 人無異國)"는 발언을 하여 사상이나 진리의 보편성을 인간 본연의 바탕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최치원은 우리 사상이 갖는 원융성, 보편성, 그리고 다양성을 정확히 발견하고 그 우수성을 널리 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일찍이 세계적인 사상을 널리 섭렵했을 뿐 아니라 우리 사상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입증하여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지성과 사상을 대표할 만한 위인(偉人)이라 할 수 있다. 



4. 主體的인 思想의 현대적 繼承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이 단순히 옛것을 숭상하고 맹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는 점은 신분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자기 개발에 그가 얼마나 투철했으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얼마나 신고했는지를 말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자기 개발을 위해서 성실했던 자세, 우리 민족의 문예적인 우수성을 몸소 보여준 최치원의 역량을 우리는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하겠다. 오랫동안 유학을 했으면서도 외국 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 사상의 우수성과 특징적인 체계를 찾아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현란한 문화와 사상도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구체적인 삶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풍류도라는 우리의 사상에 대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어 그 우수성은 설명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그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우리 사상이 갖는 원융성(圓融性), 그리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일찍이 증명하여 우리가 세계문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예견하였다. 

현대 우리 민족이 종교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의 각종 종교사상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념적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대립적인 두 사상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실정인데 장차 이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창조함으로써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도 제 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우리 사상의 원융성에서 찾을 수 있다. 최치원이 보여준 주체적인 사상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움은 물론 세계적, 인류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정치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최치원은 거기에 맞게 대응하였다. 외국에 나가서는 이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물론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귀국해서는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하여 선정을 펴고 정무를 처리했다. 정치 현실에 나아가서는 현실의 개혁을 위하여 애썼고 물러 나와서도 자기 스스로의 독선적 세계를 흔들리지 않고 견지해 나갔다. 결국 최치원은 자기가 처한 시간적 상황, 공간적 상황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몰두하기만 하다가 삶이라는 전체의 균형을 상실하는 현대인에게는 최치원의 균형 잡힌 삶 자체가 하나의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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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한국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82. 
김인종, "고운의 생애"『고운 최치원』대우 학술총서, 민음사, 1989. 
최영성, 『최치원의 사상 연구』아세아문화사, 1990. 
양광석, "삼국시대의 문학사상"『한국 문학사상사』계명문화사, 1991. 
김중렬, "최치원의 문학사상"『한국문학사상사』계명문화사, 1991. 
김문기, "최치원의 사산비명 연구", 한국의 철학, 제 22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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