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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빈 東濱 김상기 金庠基선생( 1901 - 1977 )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6-09-30 조회수 : 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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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빈 東濱 김상기 金庠基선생(1901 - 1977)


한국 근세 정통사학의 개척자요 태두로 일컬어지는 동빈(東濱)김상기(金庠基).

그는 가장 한국적인 선비로서,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에 커다란 업족적을 남겼다. 특히 사학을 전공하는 후학들에게 뛰어난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깨끗한 몸가짐으로도 귀감이 되고 있다.


▶ 김상기는 일제가 한반도의 강점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1901년 11월 김제시 백산면 하리 수각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김연익(金然翊). 김연익은 이 일대에서 이름난 토박이로 학행(學行)과 행실이 남달랐으며 덕망과 신의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집안이 청빈하면서도 비교적 농사에 여유가 있어 김상기는 어려서 구애없이 생활할수 있었다.

▶ 그는 6살때인 1907년부터 한학을 익혔다. 아버지로 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것이다. 

그때 배운 동몽선습은 아버지가 가장 역점을 둔 과목으로 여기에 나오는 오륜(五倫)이나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세계(世系)가 자신의 흥미를 끌었다고 후에 술회한바 있다.

▶ 이어 집에 글방을 마련하여 소학에서 대학, 논어 까지 6년 동안 섭렵하였다.

이처럼 한학에 조예를 쌓은 김상기는 일제의 침략이 우리 민족의 무식한 소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신학문을 노크했다.

▶ 훌륭한 지식을 연마해 일제에 대항해야 하는데 한학만으로는 그 세계가 너무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 이같은 뜻을 굳힌 김상기는 1921년, 20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협성(協成)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1년 과정을 마치고 동광(東光)학교 2학년에 들어가 다시 1년 과정을 마쳤다.

▶ 이어 1923년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보성 고보 시절 그는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신학문에 목 말라 있던 그로서는 역사와 지리등 모든 학과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졸업할 때 까지 한번도 수석자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보성고보는 뜻있는 조선인 교사들이 많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그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때 “비록 일제에 의해 겨레와 강토가 짓밟히고 있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언젠가 되찾을 겨레와 강토를 위해 보다 많은 지식을 쌓고 그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의 영생을 다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 그는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들어갔다. 예과 격인 이곳에서 2년 동안 발군의 실력을 보인 ▶ 그는 1928년 와세다대 사학과에 합격했다.

이 무렵 그는 외국 역사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을 섭렵했고 특히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동양사 전반에 걸친 학문적 이론이나 연구에도 심혈을 쏟았다. 이와 함께 그는 학문적 탐구 못지않게 많은 문학지를 읽으며 시와 수필, 소설 등 문학분야에도 심취했다.

▶ 같은 고향 이웃마을 친구인 윤제술(尹濟述 1904-1986)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문학동우회지인 동성지(同聲誌)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윤제술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무렵 동빈과 매일 만났으며 일요일에는 긴 시간을 함께 술을 같이 들며 인생과 철학, 그리고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김상기는 이때 이 잡지에 일찍 여읜 어머니를 그리는 ‘어머니 묘를 찾아서’라는 시를 발표했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1930년 그는 슬픈 소식을 접해야 했다. 다름 아닌 아내의 죽음이었다. 상처(喪妻)의 아픔이 아물지 않은 1931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소에 품고 있던 역사전수의 소명을 후학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는 “자기 민족의 버젓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발양(發楊) 못하는 민족은 역사민족의 자질이 없으며
그것을 깨우치고 그 긴한 역사성을 애국과 애족에 결부시킴으로써 우리는 잃었던 나라를 찾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리하여 1931년 서울의 중앙기독청년학교 교사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 학교에서 교사생활 1년만에 정화숙(鄭和淑)과 재혼했다. 장인되는 정춘수(鄭春수)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철저한 신앙인이자 애국지사였다.

▶ 1933년 10월 그는 사학 명문으로 꼽히는 중앙고보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그는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에 깊숙히 관여했다.

▶ 1934년 5월 조직된 이 학회는 당시 일본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 언어 문학등 식민사관을 불식하고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발기인은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김윤경 문일평 백낙준 손진태 신석호 이병기 이병도 이상백 이선근 이윤재 이은상 이희승 조윤제 최현배 등 24명으로 당시 국학관련 명사들이 망라되었
다.

▶ 김상기는 이 학회에서 발행하는 진단학보에 1934년과 1935년‘외방(外方)에 끼친 선인들의 발자취’와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주로 하여’등 10여편의 논문을 발표, 역사학자로서의 위치를 다져 나갔다.

▶ 그의 실력이 점차 알려지면서 1939년부터 3년간 이화여전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그의 명강의에 학생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그해 10월 그는 경성대학(京成大學·현서울대) 예과 동양사 강사를 맡았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서지학회(書誌學會)를 조직했다.
이 학회는 역사의 실증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헌을 중시, 흩어진 우리나라 역사문헌들을 집대성하고 문헌사학이 학문적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 이후 그는 1962년 1월 정년퇴직시 까지 서울대학에 몸담으며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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