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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애(檀崖) 윤세복 (尹世復) 선생 (1881~1960)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6-09-23 조회수 : 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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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애(檀崖) 윤세복 (尹世復) 선생 (1881.2.17 - 1960.2.13)


▶ 선생은 1881년 2월 17일(음력) 경남 밀양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무송(茂松)이요, 본명은 세린(世麟)이며 자는 상원(庠元), 호는 단애이다.

홍암 나철과 무원 김교헌에 이어 대종교 3대 도사교로 단애종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 22세까지 한학을 공부한 선생은 신창소학교와 대구의 협성중학교에서 5년 간 교편을 잡았고 ▶ 1909년에는 신민회의 일조직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두문분출하던 선생은 동년 12월 ‘근대 국학운동의 선구자’인 홍암 나철과 만난 후,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단군정신을 계승한 대종교에 입교하여 나 철에게서 '단애'라는 호와 '세복'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 1911년 1월 독립운동과 국학운동을 위해 단애는 친형인 윤 세용과 상의하여 부유했던 가산을 정리해 그 해 2월에 만주 환인현으로 망명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민족학교인 동창(東昌-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국권회복을 기약한다는 취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선생은 단군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아 역사, 국어, 한문, 지리, 체육 등을 가르쳤으며 교내에 기숙사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압력에 의해 설립된 지 3년 만에 폐교되어 근거지를 무송현으로 이동한 후 백산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군사교육과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 1915년 선생은 일본인 살해 혐의로 체포되는 위기에 처하였으나 조성환, 신규식, 박찬익 등의 노력에 의해 18개월 동안 옥살이 끝에 1916년 가을에 석방되었고 

▶ 1917년,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 설립을 주창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한 선생은 '무오독립선언'으로 알려진 독립선언에 서명하여 민주공화제의 민족국가 설립과 독립전쟁을 선포하였고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업단>을 조직하여 산업을 진흥하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선생은 국학교육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여 무송현, 안도현, 화전현, 반석현에 교당을 설치하였으며 세는 크게 확대되어 항일투쟁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진력하였다.

▶ 1923년 10월 대종교 제2대 교주인 김교헌이 사망하자 1924년 초에 제3대 교주로 임명되었다.

▶ 그러나 대종교가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 부대조항에서 대종교를 해산해야 한다는 조항에 의해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미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등 어려운 시기에서도 

▶ 1934년에는 영안현 동경성에 단군 영정을 모신 천진전을 세우는 한편, 대종학원을 설립하는 국학부흥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 단애의 이러한 활발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42년 일제는 선생을 무고한 죄목으로 동지들과 함께 무기징역형에 처했으나 조국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46년 2월, 단애는 고국을 떠난 지 36년 만에 환국한 선생은 만주에서 민족교육학교를 경영했던 경험을 살려 홍익대학, 국학대학 설립에 참여하였고 1960년 향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선생에게 있어 국학부흥운동은 곧 독립운동이었으며 무소유의 정신으로 민족교육에 일생을 바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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