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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 민영환(閔泳煥 1861.7. 25~1905.11. 30)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27 조회수 : 4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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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운동의 기폭제로서 순국한 민영환(閔泳煥)(1861.7. 25~1905.11. 30)

 조선 말기인 철종 12년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난 선생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으로 부친은 겸호(謙鎬)였으나 후에 큰 아버지에게 입양된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선생은 1877년 동몽교관이 되고 이듬해 약관 17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홍문관 정자, 검열, 설서, 수찬, 검상, 사인 등을 역임했다. 
20세엔 일약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임오군란의 와중에 생부를 잃고 3년 복상 후, 탈상을 마친 선생은 이조참의에 임명된 이후 '87년 27세의 젊은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88년과 '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도 지냈다.
'93년 형조판서, 한성부윤, '94년 독판내무부사, '95년 8월에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부친이 흥선대원군의 처남으로 명성황후와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아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생부 양부 모두 살해되는 불행도 겪었다. 

  임오군란(1882년 6월 5일, 양력 7월 19일)은 혹심한 경제로 백성들의 민심이반이 원인이었다. 
1881년 4월 별기군(신식군대) 창설로 그해 12월 상당수 군인들이 실직되고 편입된 군인들조차 차별이 심해 불만이 많았다. 
거기다가 대원군 실각 후, 민씨 세력 집권하의 경제상황은 너무 열악해서 군인들의 녹봉미 조차 지급되지 못했다. 
이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관세권을 인정치 않아 일본보다 3분의 1 정도로 싼 한국 쌀로 큰 이득을 취한 일본상인들이 대량으로 쌀을 수입해간 嘯嚮눼? 
따라서 쌀의 절대 부족으로 값이 터무니없이 올라 경제가 파탄국면에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녹봉미 관할 담당 창고지기가 쌀에 겨와 모래를 섞고 나머지를 착복한 사건이 점점 커져 군인들이 강화유수 민태호 등 척신들의 집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는 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6월 10일에는 수천 명의 서울 민중들과 실직당한 구(舊)군인들도 합세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가 명성황후와 그 척신들을 수색하는 지경에 이르고 성난 군민들에 의해 민겸호와 김보현이 살해되었다. 
이때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강화조약으로 마관조약을 체결하여 요동반도 점령을 획책하려 했으나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부추겨 일제의 야욕을 좌절시켰다. 이를 본 명성황후는 일본 세력 축출을 위해 러시아세력을 불러들여 견제하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펼쳤다. 이런 상황급변으로 한국에서조차 위축될 위기에 빠지자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인류 역사상,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선생은 이를 막지 못한 자괴감과 일제 침략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주미전권대사로 부임하지 않고 낙향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미,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선생은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할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로 간 선생은 러시아군함으로 상해, 나카사키, 동경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서 기차로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으로 직행했다. 
3일간 뉴욕에 머물며 근대화된 도시와 선진 문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은 선생 일행은 상선으로 대서양을 건너 런던과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 5월 26일 모스크바 크레믈린궁에서 열리는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했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에 머물면서 선진 문물과 제도 등을 견문한 선생은 두 차례의 병조판서를 지낸 경험도 있었겠지만 당시 외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조국의 현실에 러시아의 근대식 군사제도와 신식 무기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해 10월 21일 귀국한 선생은 의정부 찬정,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다음해 1월 다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임발령을 받았다. 그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어명을 받아 이기, 김조현, 김병옥, 손병균 등 수행원을 대동하고 3월 24일 서울을 출발하여 상해, 나가사키를 거쳐 마카오로 갔고 거기서 다시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스에즈 운하를 통과, 지중해를 건너 5월 14일 러시아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할 국서와 국왕의 친서 전달 임무를 이행한 후, 6월 5일 런던에 도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도 국서와 국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6월 22일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후, 런던에서 40여일 체류하면서 영국의 국민생활과 선진 문물을 두루 견학한 뒤 귀국했다.
  두 차례의 외유를 통하여 서구 여러 나라 선진문물을 보고 깨달은 바가 큰 선생은 민권을 신장하여 근대식 국가 발전을 꾀하고 군제개편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광무황제에게 상주했으나 반영되지 못했다. 
다만 군제개편 건의만 채택되어 육군을 통솔하는 최고 기구로서 원수부 설치만 이뤄졌다. 
그렇지만 선생의 조국 근대화 의지는 사회단체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1차 외유 후, 독립협회의 국민 계몽운동 취지에 찬동하여 적극 후원했던 선생은 서재필과 이상재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자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시기가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이었다. 
정부 관료로서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당시 독립협회의 핵심 인사, 정교는 “지금 정부 요인 가운데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선생과 한규설 뿐”이라며 광무황제에게 민영환선생을 군부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상주하기까지 했다.
 선생은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세로서 독립협회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설하기로 결정, 11월 2일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는 의회설립 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공화정을 수립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의회설립운동도 좌절되었다. 따라서 선생도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선생은 다시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고 선생 건의로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장, 장례원경, 포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이미 풍전등화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전쟁을 발발시켰다. 
그리고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했다. 
그리고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함으로써 한국은 외교권과 재정권을 잃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도 국제적으로는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카스라, 태프트 밀약,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오츠머드 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일제가 이 같은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선생은 내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참정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제 및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고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했다. 
비분강개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던 선생은 곧 서울로 올라와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11월 27일 백관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가 을사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아래 놓인 광무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일제는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해산시키고 선생과 조병세를 잡아가뒀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9일 저녁에 석방된 선생은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했다. 
이제 남은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나라와 민족이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데 초석이 되는 것뿐임을 자각하고 11월 30일 오전 6시경, 45세의 한창 나이에 자결, 순국했다. 

 온 국민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선생의 순국은 전 좌의정 조병세와 전 대사헌 송병선, 전 참판 홍영식, 학부 주사 이상철도 자결로 이어져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에 불을 붙였다. 
선생은 ‘국민에게 고하는 글과 각 나라의 공사들 그리고 황제께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스스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죽음으로서라도 조국과 민족의 독립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다음은 국민에게 전하는 유서이다.

‘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1905. 11. 30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유고: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외에 많은 소(疏), 차(箚)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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