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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熏1901∼1936)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06 조회수 : 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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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소설과 시로 표출한 항일운동가 - 심훈(沈熏1901∼1936)

 「상록수」의 작가, 「그날이 오면」의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선생은 열혈 독립운동가다.  
1901년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출생한 심훈의 원래 이름은 대섭(大燮)으로 심상정(沈相珽)과 해평(海平) 윤씨 사이의 3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다.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금강생(金剛生), 백랑(白浪) 등이 있으며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한 필명이 훈(熏)이다.

  막내아들로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선생은 영민하여 1915년 서울 교동(校洞)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여들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다. 
당시 그 학교에는 청산리전투로 용맹을 떨친 철기 이범석이 있었고 같이 입학한 동기로는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박열과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분노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의지를 굳혔다.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아픔의 울분은 일본인 수학선생과의 알력으로 백지 답안을 제출하고 고로 인해 수학과목 낙제로 유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발峠舅?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섰다. 
그러한 사실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잘 나타나있다. 
 ‘심대섭(심훈)외 60명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그 시위운동을 개시함을 듣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기도하여 1919년 3월 1일 경성부 파고다 공원에서 위의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수천인의 군중에 참가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성부내의 각 곳을 광분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심훈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운동과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경성고보로부터 퇴학 조치를 당했다. 
그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약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선생은 옥중에서도 민족 독립을 향한 결의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옥중편지가 증명한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조국)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조국 독립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이 있었기에 선생은 출옥하자 곧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등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혔던 것이다. 
그 당시를 회고한 심훈의 글을 소개한다.
 “기미년(1919) 겨울 옥고를 치르고 난 나는 어색한 청복(淸服)으로 변장하고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탈주하였다.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두류(逗留)하며 연골(軟骨)에 견디기 어려운 풍상을 겪다가 수삼차 단재(신채호)를 만나 그의 우거(寓居)에서 며칠 저녁 발치 잠을 자면서 가까이 그의 모습을 접하였다. 
감명 깊은 그의 말씀도 여기서는 약(畧)할 수밖에 없다. … 북경(北京)서 지내던 때의 추억을 더듬자니 나의 한평생 잊히지 못할 또 한 분의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수년 전 대련(大連)서 칠십 노구로 쇠창살에 갇히어 이미 고인이 된 우당(이회영) 선생이다. 
나는 맨 처음 그 어른에게로 소개를 받아서 북경으로 갔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 보지 못하던 19세의 소년은 우당장(友堂丈)과 그 어른의 영식인 규룡(圭龍)씨의 친절한 접대를 받으며 월여(月餘)를 묵었다. 
조석으로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북만에서 고생하시던 이야기며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는 소식을 거기서 들었는데, 선생은 나를 막내아들만치나 귀여워해 주셨다.
” 이처럼 선생이 일제와의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주옥같은 항일 문학작품을 남겼던 것은 바로 이 분들과의 만남에 있었을 것이다.
  이후 선생은 상해, 남경을 거쳐 절강성 항주(杭州)의 지강(芝江)대학에서 선진학문을 수학하면서도 연극에 관심이 매우 컸다. 
이는 연극이 갖는 역동적인 대중 호소력에 끌렸던 것 같다. 
실제로 선생은 1귀국해서 최승일과 나경손, 김영팔, 임남산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고 직접 각색, 감독하여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도 만들었으며 자신의 대표작인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여 자신의 뜻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지면을 갖게 되었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인 1926년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사건으로 퇴사했다. 
철필구락부는 입사하던 해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만든 언론운동단체로 같은 언론운동단체,무명회(無名會)와 공동으로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사회부 기자들이 임금 인상 투쟁이 신문사 경영진의 비위를 거스르며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한 일제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자 철필구락부는 해산되었고, 거기에 참여하였던 다수의 기자들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바로 이때 선생도 동아일보사에서 퇴사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에서 물러난 직후인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가 붕어(崩御)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거의 유폐되다시피 생활하다가 돌아간 융희황제에 대한 슬픔이 일제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였다. 
광무황제(고종)의 붕어가 3.1운동의 한 계기였다면, 이번 융희황제의 붕어 또한 그와 유사한 독립운동의 폭발을 예견한 선생은 4월 29일 융희황제의 국장이 준비되고 있는 돈화문 앞에서 「통곡 속에서」 란 시를 지었고  5월 16일자 '시대일보' 에 발표하였다.(소식지 2면에 소개)

예견한 대로 선생의 시 「통곡 속에서」가 기폭제가 되어 융희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서울 학생들을 중심으로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듬해 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하다 ’30년에는 중국 유학 당시 생활을 소설화한 「동방(東方)의 애인」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고 이어 일제에 대한 옥중투쟁을 다룬 「불사조(不死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해 선생은 3.1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3.1운동에 옥고를 치른 선생에게 기념일은 특별한 날이었고 지난해 의 광주학생운동의 여진과 원산노동자총파업, 용천소작쟁의 등 노동자, 농민의 항일투쟁을 목격하고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와 경성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사상문제로 그만두고 부모가 계신 충남 당진군 송악면(松嶽面) 부곡리(富谷里)로 낙향하여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려 했으나 그나마도 일제의 검열로 무산되어 해방 직후에야 간행되므로써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 

당진에서 장편 소설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장편소설 「직여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필경사(筆耕舍)라는 자택을 몸소 설계하여 짓고 그곳에서 1935년 「상록수」라는 농촌계몽 소설을 집필했다.
「상록수」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서 전개되고 있던 야학운동과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부곡리에서는 선생의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이 1932년부터 농촌 야학을 운영하며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마침 동아일보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산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공모했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사가 전개한 브나로드(귀농)운동을 촉진하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에 「상록수」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고, 그해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연재되어 당시 민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36년 선생은 「상록수」의 영화화에 나서 각색, 감독을 맡기로 제작사까지 선정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자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마음먹고 간행 작업에 몰두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 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한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에는 이렇듯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깃들어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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