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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 이희승(李熙昇 1896∼1989)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2-20 조회수 : 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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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학문에 몸 바쳐온 국어학계의 태두 이희승(李熙昇 1896∼1989)

 국어국문학자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은 강단과 저술로 우리나라 국어학 체계 확립에 90평생을 헌신했다. 청빈한 선비의 집안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그는 1908년 혼인하고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으나 3년 만인 1910년 경술국치로 학교가 폐교되었다.
 다음해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양정의숙(養正義塾), 중앙고보 등을 졸업하고 한때 인촌(仁村: 김성수)이 경영하는 경성방직에 근무했다. 그러나 10대의 학창시절 우연한 기회에 주시경의 ‘국어문법’을 접한 이후 평생을 국어운동에 헌신하기로 뜻을 세운 그는 뒤늦게 국어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나이 30세 때 경성제국대학에 입학, 본격적인 국어학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졸업 후, 경성사범과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에 입회했다. 

 일제시기가 비록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학문적인 연구도 크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국민계몽을 위한 학자들의 활동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다. 국민계몽운동 일환으로 시작된 한글운동은 3.1운동으로 주춤했지만 1921년 12월 이희승 선생을 비롯해 권덕규 신명균 김윤경 최현배 등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조선어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숙원이며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희승선생은 일제의 국어 운동방해와 박해가 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6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일을 맞아 '가갸날'로 정했다. 그 날이 한글날의 시초가 되었다. 5년 후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가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어 '세종 25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정인지 서문의 구절을 근거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게 되었다. 
 한편 연구 성과로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고 36년엔 표준어 사정(査定), 40년에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고 42년에는 조선말 큰 사전 출판에 착수하는 등 한국어의 말과 글 연구에 매진했다. 이로써 한글창제 이후, 근 오백년 동안 언어규범 없이 혼란스럽던 한글체제를 잡아 합리적인 언어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일제는 이미 1938년 4월, 민족어 말살 정책으로 각 학교의 조선어과를 폐지했다. 그때부터 일본어만을 강요하고 1940년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했고 그 다음해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도 폐간시켰다. 
 이는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어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조치였고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함으로써 언제든지 독립운동가를 검거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석 선생은 일제의 숨 막히는 탄압정책을 직감하면서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시작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된 것이 시작이다.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이가 서울에서 사전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이 드러난 것이다. 일제는 정태진을 취조하여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어 조선어학회 회원 대부분이 검거되고 한글운동폐지와 함께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두 검거되는 수난을 당했다. 이 사건에 33명이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고 증인으로 불려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때 선생도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년 8월 17일까지 만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광복 후 새로 개교한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고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편입, 국어학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6년 조선문학연구(朝鮮文學硏究)를 비롯해 조선어학논고(朝鮮語學論攷), 국어학개설(國語學槪說), 교과서인 초급국어문법과 수정판 새고등문법 등을 펴내고 1961년 수록어휘가 25만7854개나 되는 국어대사전을 펴냈다.  일석 선생은 우리말 문법은 ‘단어와 단어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어서 글월을 이루는 법칙’이라고 정의하고 그 영역을 총설·품사·글월(文)의 3부문으로 하였다. 문법론 외에 단어와 어휘 분야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체언과 결합되는 여러 가지 곡용(曲用)어미를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여 ‘조사’라고 하였고 체언에 조사가 결합되는 언어형식을 ‘어절(語節)’, 품사론의 단위는 단어, 글월의 단위는 어절로, 품사는 명사·대명사·동사·형용사·존재사·관형사·부사·감탄사·접속사·조사로, 지정사(指定詞) ‘이다’는 체언의 활용인 서술격조사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문법체계는 최현배의 문법체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문법체계를 형성했다.  한편, 1969년부터 19년 동안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한글전용론에 맞서 죽을 때까지 국한문 혼용을 고집하고 어문교육 시정에 힘쓰는 등 국어학분야의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1961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함과 동시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고 명예교수로 활동했으며 ’6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고 2년 동안은 군사정권 아래에서 언론창달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구대학 대학원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그리고 71년부터 10년간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맡아 <동양학총서> 중국 왕조의 흥망을 기록한 <이십오사초> 등을 편찬하며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평생을 근검절약으로 일관하여 노후에도 버스나 전철만을 고집스럽게 이용했다. 그러면서도 1967년부터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을 맡아 단군성전 사업에 1천만 원을 기탁하고 평생 모은 2억 원을 후학들을 위해 ‘일석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평범의 비범’이라는 그의 좌우명에 따른 생활신조 철학으로 이웃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일석 선생의 일화(逸話)는 지금도 서울대학교에서 회자된다. 키가 강단에 서서 손을 뻗쳐 쓴 글씨가 흑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45cm의 5척 단구이지만 그는 정시에 들어와 정시에 끝내기로 아주 유명했다. 2시간 연장 강의를 하면서도 휴식시간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의실 밖에서 돌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진행할 정도로 수업시간 엄수가 철저했다. 수난의 민족사를 헤쳐 온, 한 지식인으로서의 결연한 자세가 학생들에게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보였을 것이다.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객이 많이 모이는 것이나 제자들의 결혼 주례 건수가 많은 일화에서도 후진을 아끼는 스승으로서의 풍모를 알 수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파동 때 반대운동에 뛰어들고 4ㆍ19 교수 데모 때 앞장선 사실 등은 수난의 역사 속에서 선비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감이 된다. 
일석 선생은 국문학분야에서 대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수필가로도 유명하다. 
기발한 별칭으로 표현된 조선 시대 선비 ‘남산골샌님’을 오로지 청렴결백과 지조, 흑은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을 생활신조로 삼는 모습으로 그린 수필 ‘딸깍발이’는 바로 우리 사회와 역사, 민족에 대한 결단을 그린 것이다. ‘대추씨’,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 등은 그로부터 비롯됐다. 
저 서: <국어대사전><역대 국문학정화><국문학 연구초>등
시 집:< 박꽃>(1947), <심장의 파편>(1961) 등 
수필집:<벙어리 냉가슴>(1956), <소경의 잠꼬대>(1964), <메아리 없는 넋두리> 등이 있다.


주요시상
1957년 학술원공로상, 
1960년 서울시교육공로상,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8년 인촌문화상,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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