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자료실 >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01-03 조회수 : 4621
파일첨부 :

우리역사의 자주성과 전통성을 고집한 조선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안정복 선생의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한산병은(漢山病隱), 우이자(虞夷子), 상헌(橡軒)이다. 조선후기의 역사학자요 실학자인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예조참의, 아버지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었으나 남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 집안처럼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휘말려 벼슬길이 끊긴 불우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외가의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할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했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10세로 그때서야 비로소‘소학’을 시작으로 학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이 없이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어서야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의 고향에 정착하고‘순암(順菴)’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학문에 몰입하였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외에 음양(陰陽) 성력(星曆) 의약(醫藥) 복서(卜筮)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孫子) 오자(吳子)등의 병서, 불교 노자(老子)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소설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26살에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道統圖)’를 지었고 이듬해는‘치현보(治縣譜)’를 저술했으며, 이어 ‘향사법(鄕社法)도 지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下學持南)’ 상․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 윤리적 지침서로서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 이기논쟁을 직, 간접으로 반박한 책이다. 그가 온 정렬을 기울여 저술했던 관계로 그는 말년에 이 책을 펴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井田說)’을 내고 30세에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內範)’을 짓고 33세에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입수하여 그 이듬해에 ‘반계연보(磻溪年譜)’를 편찬했다. 이무렵 반계의 제자들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익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5세 때 이익을 방문해 그의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익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많았는데 안정복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 이병휴와 이익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이구환(李九煥)이었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그만의 형성된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참신성이 덜 하고 보수적이어서 성호를 비롯한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에도 쉽게 변화되지 않은 일면이 있었다. 그는 이익이 쓴 ‘사칠신편 四七新編’을 접하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한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퇴계와 정주로의 이론의 근원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진력하였다. 학문이란 세상을 다스리는데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38세에 처음으로 문음(門蔭)직인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벼슬을 시작해 이듬해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41세에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문제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했다. 1756년(45세)에‘이리동약(二里洞約)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임관정요(臨官政要-후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영향을 줌)를 저술하였다.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동사강목(東史綱目)은 1759년 48세라는 중년기에 일단 완성하고 1767년에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저술했다.
한편,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고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목차, 내용을 첨삭해서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으며,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翊贊)과 위솔(衛率)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향약(鄕約),향사례(鄕射禮)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司馬所)의 복설 등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의빈부도사(義貧府都事),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에 힘썼다. 고향 덕곡리의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재건하여 보존)라는 청사(廳舍)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학문을 강의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그는 말년에 정주학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다가오자 1785년(정조 9)에‘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인 위계질서의 옹호였다.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생전에 노론 천하인 1790년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사후에도 1801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러한 그는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하지만 관료로서는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아버지가 평생을 처사 생활을 한 그의 생활형편은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한 사실로 보아 그의 생활이 어떠했던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명작 동사강목(東史綱目)은 20권 20책으로 주자의 자차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체제를 따라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책이다. 1756년에 완성하고 3년 후인 정조2년에 서문을 써서 삽입했다. 그로부터 5년 후에 교정을 거쳐 필사본으로 전해오다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본으로 만들었다. 
활자본은 본문 19권, 부록 3권으로 서두에 스승 이익(李翼)의 미완성 서(序)와 저자의 자서(自序) ·목록 ·범례 ·역대전수도(歷代傳授圖) ·지도 ·역대관직연혁도(歷代官職沿革圖)가 있고, 부록은 고이(考異) ·괴설(怪說) ·잡설(雜說) ·지리강역고정(地理疆域考正)으로 되어 있다. 비록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는 등 오류를 범하고는 있으나, 역대관직연혁도와 부록 중에 수록된 고증 일부는 귀중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학으로서의 동사강목은 유형원의‘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되므로 유형원 → 이익 → 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시 안정복은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사상적인 면에서의 공헌이 컸다.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학문연구와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몸가짐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시대에 살았지만, 사상적으로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시대에서 살았다. 역사적 감각과 모든 학문과 사상체계를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그의 학구적 방법은 당시의 학풍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전글 장영실(蔣英實)
다음글 연암 박지원(朴趾源)님 (1737∼1805)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