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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仙道 수행 전통에서 바라본 대종교 선도수행론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6-07-11 조회수 :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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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仙道 수행 전통에서 바라본 
대종교 선도수행론


우 대 석*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박사


Ⅰ. 서론
Ⅱ. 근대의 선도와 대종교의 성립
 1. 근대의 선도
 2. 대종교의 성립
Ⅲ. 대종교의 삼일사상
Ⅳ. 대종교의 성통에 대한 인식과 삼법수행론
Ⅴ. 대종교의 공완에 대한 인식과 항일독립운동
Ⅵ. 대종교의 조천에 대한 인식
 Ⅶ. 맺음말


[국문요약 ]
한국선도는 상고시대부터 자생하여 계승 발전된 한국 고유의 문화이며 사상체계다. 한국선도 문화는 신시배달국을 거쳐 단군조선으로 이어져 오던 역사와 함께 한민족 사유체계의 뿌리를 제공하였고 한국문화의 근저가 되었다. 하지만 단군조선이 폐관하면서 한국선도의 전통은 차츰 그 한민족 전통 철학으로서 빛을 잃어갔다. 특히 삼국시대 이후 중국에서 수입된 儒·佛·道에 밀려 퇴조 일로를 걸었다. 한국선도는 근대 이후 민족종교 방식으로 소생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백두산 선도단체 계열인 백봉교단으로부터 선맥을 이어받은 대종교는 한국선도 고유의 전통사상과 수행법을 올곧게 이어받았다. 대종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거세게 반발하는 항일투쟁을 벌였다. 당시 일본에 의한 침략 시기에 최고의 공완활동은 항일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종교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광복 후에 외래사상에 밀려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한국선도는 현대에 이르러 심신수련법의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으며 물질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식한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선도의 본령인 선도수행의 원형이 회복되어가고 있다. 
한국선도의 원형성을 판단함에 있어서 몇 가지 잣대를 살펴 보자면, 우선『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등이 주요 경전이며 수행의 방법으로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이 제시된다. 또한 존재의 본질을‘일’로 보고 그‘일’을‘일기(一氣·三氣)’로 바라본다.‘일’을 이루고 있는 존재의 세 차원으로‘천·지·인’,‘성·명·정’삼원을 제시하는 삼일사상이 중심철학이며 더 나아가 ‘천·지·인’삼원은 인체의 상·중·하단전에 연결된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을 삼성(三聖)으로 모시는 스승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으며 삶의 과정을‘성통-공완-조천’으로 보는 수행관(생사관)과‘홍익인간·재세이화’정신이 주요 특징이다.
대종교는 위에서 언급한 한국선도의 원형에 근접하고 있다. 나철과 서일 및 김교헌, 윤세복 등 대종교 초기 지도자들이 보여 주었던 한국선도 수행의 원형인‘성통→ 공완→ 조천’의 삶은 한국선도 전통 부활이라고 부르기에 족하고 삶의 중심철학과 생사관이 뚜렷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소중한 귀감이 되어주기에 손색이 없다. 특히 나철과 서일이 보여준 조천과정은 전형적인 선도수행으로 주목된다. 
 한국선도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을 통하여 심신이 맑아지면 이미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과 만나게 되고, 그 신()을 만나면 신()의 속성인 사랑(德)과 지혜(慧)와 힘(力-창조력)을 자연적으로 회복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인류가 만든 그 어떤 종교나 사상도 작금의 인류가 안고 있는 인성회복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많은 인류학자가 경고하고 있다.‘모두가 함께 조화롭게 잘살아 보자’는 한국선도의‘인성회복운동’이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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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한국선도, 대종교, 성통, 공완, 조천, 삼법수행, 지감, 조식, 금촉 


Ⅰ. 서론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정통 한국선도의 가장 큰 특징은‘성통(性通) → 공완(功完) → 조천(朝天)’으로 이어지는 수행문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행목적을‘홍익인간(弘益人間)·재세이화(在世理化)’사상으로 명확히 표명하고 수행의 지침서인『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공식 수행지침서 또는 경전으로 채택한 점,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의 삼법수행을 활용한 점, 삼성(三聖:환인·환웅·단군)으로 대변되는 선도스승의 전통, 일·삼론(一·三論) 또는 삼일(三·一)철학으로서의 사유체계 등은 한국선도 여부를 판가름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구한말 한국선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수행단체들이 민족종교 형태로 등장했다. 격동기의 구한말과 일제하에 근대 민족종교를 창시했던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웠다. 이 단체들은 한국 근대사에 새로운 전환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조 말엽 최제우(1824∼1864)의 인내천사상, 강증산(1871∼1909)의 후천개벽사상, 박중빈(189∼1943)의 법신불 일원상사상, 갱정유도(更定儒道) 강대성(1889∼1954)의 일심교(一心敎)사상 등은 사상적으로 한국선도의 오랜 사상적 토양 하에서 등장하였기에 한국선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단체들이다. 
 민족종교 중에서 한국선도의 전통을 가장 원형으로 받아들인 단체는 대종교다. 1909년 1월 15일 대종교가 중광된 이래 나철이 조천한 1916년 8월 15일까지 8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수십만의 신도가 생겼고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큰 축을 형성했다. 대종교가 짧은 기간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대종교 신도들이 단군을 단순히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한국선도 고유의 심신수행 문화 및 전통사상과 철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구한말 근대의 선도가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종교 형태를 취했던 것과 달리 1980년대 이후의 선도문화는‘수련법의 보급’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활하였다는 특징을 보였다. 나아가 수련의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인 철학과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사회 실천운동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국학운동과 전 지구적 차원의 평화운동도 전개하였다. 또한 국학운동도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한국선도를 주제로 한 연구와 학술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여 본고에서는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만을 대종교 수행으로 바라보던 기존의 소극적 관점에서 벗어나,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운동과 국학운동, 식산자강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수행의 일환으로 보겠다. 그리고 나철과 서일의 폐기조천으로 알려진 죽음 또한 선도수행의 일환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이는 한국선도의 가장 큰 특징인 성통→ 공완→ 조천이라는 선도이론으로써 대종교 초기 지도자들의 전반적인 활동을 분석하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며 대종교 활동을 성통(지감·조식·금촉)→ 공완→ 조천의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연구로, 대종교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근대의 선도와 대종교의 성립

1. 근대의 선도

 구한말 성리학 이념이 시의성(時宜性)을 상실하게 되면서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다. 서구문명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기존에 성리학에 의해 이단으로 억압받아온 선도, 도교, 불교, 서교(西敎)가 양성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정신혁명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분위기가 팽배했고 대한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이 중화 사대주의였다는 깊은 자각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사상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특히 한국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사상은 바로 선도였다. 선도는 한국인들 스스로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의식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상적 혼란기에는 의식의 중심자리에 있던 것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자각은 주로 민족종교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말, 민족종교를 구심점으로 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한 인물들이 다수 나타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즈음 선도의 영향을 받은 민족단체들은 1860년대에 시작된 최제우의 동학, 1880년대의 김항의 정역(正易), 1900년대 강일부의 증산도(甑山道), 1910년대 나철의 대종교(大倧敎), 1916년 박중빈의 원불교(圓佛敎), 1929년 강대성의 갱정유도(更正儒道) 등이 있는데 다양한 민족종교 형태로 등장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다양한 민족종교는 외형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사상과 방편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나 그 근본은 모두 수천 년 동안 면면히 흘러왔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얼과 토양이 바탕이 된 것이며 우리의 역사상 가장 어렵고 불행했던 시대로 인식되고 있는 일제하에서 절망 속에 방황하는 민중들에게 구원의 희망철학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민족종교를 살펴보면서 대종교를 제외한 민족종교 및 단체는 선도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선도의 핵심경전인『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경전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고 조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법, 三·一철학, 그리고 선도의 핵심원리인 성통→ 공완→ 조천사상과 삼성(환인·환웅·단군)의 선도 스승 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다.   


2. 대종교의 성립
 
1900년대 초 선도 관련 단체와 지도자 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단체와 인물이 바로 백봉신사와 그 제자들이다. 백봉교단은 백전과 두일백을 통해 총 세 차례에 걸쳐 나철에게 『삼일신고』,『신사기』,『단군교포명서』등을 전해준 인물이다. 
백봉교단과 나철의 대종교는 중국의 도교적인 요소와 완전히 다르다. 나철은 도맥의 근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고 그 수행의 목표도 『삼일신고』「진리훈」을 토대로 하여 성통공완을 통한 홍익인간·재세이화를 구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백봉교단이 1906년 두암 백전을 통해 나철에 전수해 준 것이『삼일신고』·「신사기」이다. 중국 도교는『삼일신고』와 연관이 없다. 따라서 백봉교단으로부터『삼일신고』가 전수되었다는 것은 백봉교단이 중국 도교가 아닌, 한국 고유의 선도수련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암 백전이 이 두 권의 책을 나철에게 전해준 의미는, 이 책 속에 담겨있는 한민족 고유의 사상체계를 알려주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백봉을 중심으로 한 신교교단은, 백두산을 수련의 근거지로 삼고 백봉에게 지도를 받던 33인(혹은 13인)이 뜻을 모은 한국선도 계열의 비밀결사 단체로 추정된다.『단군교포명서』를 나철에게 전해준 백봉교단은, 불교와 유교로 거의 없어질 뻔 했던 한국 고유의 전통선도 정신을 지키며 후대에게 물려주려 했던 사람들이다. 나철이 창교가 아닌 중광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배경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간다. 동학의 최제우나 증산교의 강일순처럼 창교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백봉교단의 단군교에 입교한 일개 교인으로서 단군신앙의 연결자로 자신을 낮춘 것이다.
관직에 있던 나철은 1901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신회를 조직했던 42세(1904년 경)까지 낙향하여 구국의 대망을 품고 제석산을 오르내리면서 입산수도했다. 그의 유족과 벌교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급제(나철)가 입산수도했던 산이 제석산이라고 한다. 나철은 산중에서 수도할 때 반드시 사방에‘天’자를 사방에 부치고 수도했다고 한다. 입산수도할 당시, 순천 송광사의 덕호 큰 스님이 나철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불교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나철의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나철이 단군신앙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수행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나철은 1905년 경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07년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 후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해에 풀려나서 1908년 네 번째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1908년 12월 5일 동경 세이코칸(청광관) 여관에 머물고 있을 때 백봉신사의 제자라는 두일백이 찾아와 『단군교포명서』․『신가집』․『입교절차』를 전해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국민에게 단군정신을 알리라는 재촉을 받았다. 그래도 나철이 반응을 안 보이자 4일 후인 12월 9일 다시 찾아와 재촉하였다. 
이 순간 나철은 무언가 모를 감동으로 온몸이 진동하였고 마음에는 활연히 大悟, 각성하는 상태에 놓였다. 그때서야 나라가 망한 이유가 정신을 빼앗긴 것에 있음을 깨닫고 정훈모와 함께 영계를 받은 뒤, 귀국하여 대종교 중광을 준비했다. 영계의 의미는 한국선도로 바라보면 스승을 통해 선도를 전승받았다는 의미다. 이 영계의식을 통해 나철은 백봉신사를 영적 스승으로 맞이하였다. 영계를 받은 나철의 의식은 스승과의 강한 영적 유대감을 통하여 크게 변화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대종교 중광이다.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 자시(23시∼01시) 오기호, 이기, 김윤식, 강우, 최전, 유근, 정훈모, 김인식, 김춘식 등과 함께 서울 재동 취운정 8통 10호 6간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나철은「단군교포명서」를 발표하면서,국조 단군이 창립했던 단군교는 몽골침입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되었던 것을 구한 말에 다시 계승하였다고 천명하였다. 
나철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하고자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명했다. 교명을 바꾼 직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되자 나철은 활동무대를 만주로 넓히고 1914년 5월 13일에는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하였다. 아울러 서울에 남도본사, 청파호에 동도본사 등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도 교구와 외도교구를 설치함으로써 교구제도를 확대․개편하였다. 대종교가 세력이 확대되면서 많은 대종교 교인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에 양심있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善)은 독립운동일 수 밖에 없었다. 
공완의 실천적 수행관으로「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천명한 대종교 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대종교 포교가 가장 시급했던 나철의 입장에서 포교와 독립운동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매우 위험한 일로 쉽지 않은 전략이었다. 따라서 나철은, 비교적 일제의 핍박에서 자유로웠던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포함한 정치활동을 외형적으로 분리하여 대종교를 포교활동을 일제의 감시로부터 피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 나철의 정교분리 선언이었다.
이러한 나철의 의도가 초기에는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 중광 6년여 만에 결국 일제로부터 사실상 불법단체로 낙인찍히게 되어, 나철의 실망은 매우 컸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대종교의 포교활동으로 수많은 교인이 생겼고, 나철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무장투쟁, 국학운동, 식산자강운동 등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Ⅲ. 대종교의 삼일사상

대종교의 삼일사상은 한국선도의 핵심경전인『삼일신고』의 삼일철학을 기본으로 하되 근대 대종교만의 독특한 해석이 가해지고 있다. 특히,『삼일신고』「진리훈」이 대종교 삼일철학의 핵심이다. 따라서『신리대전』,『회삼경』,『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삼법회통』,『종리문답』과『애국지사단암이용태선생문집』등의 대종교 관련서들은 사상적 배경이『삼일신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철의 삼일사상은, 백봉교단으로부터 받은『삼일신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삼일신고』를 주해한 임아상의 사상과 철학이 대종교 삼일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종교가 출간한『역해종경사부합편』에 의하면 임아상(任雅相)은 대조영의 칙명을 받고『삼일신고』주해서를 썼다. 발해시대의 문헌이 매우 드문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임아상의『삼일신고』주해는 대조영의「어찬」과 대야발의 서문과 함께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라고 본다.
임아상은『삼일신고』를 해석하면서,‘삼·일’은‘삼진귀일(三眞歸一)’로,‘신()’은‘밝음(명)’으로, 고(誥)는‘글과 말씀(文言)’으로 해석했다.‘삼진귀일’이란,『삼일신고』·「진리훈」에 나오는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人物 同受三眞 曰性命精)’부분과 관계가 깊다‘삼진’이란 ‘성·명·정’을 의미한다. 근원으로부터 내려받은‘성·명·정’이 다시 근원인‘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임아상이 일신(一)을 광명(밝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의 광명사상이 발해를 통해서도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광명사상은 고조선, 고구려, 신라 등의 건국신화에서 살펴볼 수 있고 특히 광명사상은 환인에서 환웅으로, 환웅에서 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손의 계보를 보여주는 삼국유사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환인과 환응의‘환(桓)’이라는 음은‘환하다’라는 의미와 통하는 것으로 ‘밝음’즉‘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임아상은‘참(眞)’이라는 것은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고 했다.‘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참‘의 세가지 모습(삼)을 성·명·정이라 하고 원(○)·방(□)·각(△)으로 도상화했다. 임아상이 『삼일신고』주해를 통해서 주장하는 핵심은 우주의 근원인 ‘일’이 인간의 몸에서 성·명·정인‘삼’으로 분화되어 있고 인간은 몸의 수행을 통해서 다시 근원인 ‘일’로 돌아가는 것이 ‘삼진귀일’이며 이것이 삼일철학이다. 그리고 이‘일’의 신격화된 것이 하느님(一)이고 광명(밝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임아상은, 성을 원(○), 명을 방(□), 정을 각(△)을 보고 있어, 성을 원(○), 명을 각(△), 정을 방(□)으로 보고 있는 한국선도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즉, 인(人)을 각(△)에 대비시키면서 가운데 위치시키는 한국선도와 달리 임아상은 방(□)과 지(地)를 대비시키고 이를 가운데 위치시키는 것이 한국선도와 임아상의 핵심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대종교는 임아상의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묵수(墨守)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백봉교단으로부터 전해진『삼일신고』를 주해한 인물이 임아상인데 그에 의해서 방향 지워진 천·지·인 사상이 대종교의 천·지·인 사상의 기본이 되었다. 특히 임아상의 천·지·인→ 원·방·각의 도상 해석은 대종교에 그대로 전승되어 지금까지 변함없이 대종교의 교리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나철, 서일 등 대종교 초기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이후에 저술된 대종교 교리서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대종교의‘신관’은‘일신’을 체로 하고‘삼신’을 용으로 한‘삼신일체’의‘신관’이다. 지고지상의 한얼은 환인·환웅·환검(단군)으로 나타나 조화·교화·치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대종교의 삼신인 환인·환웅·환검(단군)은「단군설화」의 환인·환웅·단군의 우리말 표현으로서, 역할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역사성을 지닌 설화와 종교적 교리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나철이 강조한 것은‘일’을 인격신으로 보는 것이었다. 대종교라는 종교단체의 중광주로서 사명감을 갖고 삼일사상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것보다‘삼신일체(三一體)’의 교리로 시급하게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나철의 삼일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철은‘한얼’을‘환인’,‘환웅’,‘환검(단군)’의 삼신으로 보았다. 그리고‘환인’을‘조화신’으로,‘환웅’을‘교화신’으로,‘환검(단군)’을‘치화신’으로 보았다. 또한 ‘환인’을 하늘 아버지(天父),‘환웅’을 하늘 스승님(天師),‘환검(단군)’을 하늘 임금(天君)으로 보기도 했다. 특히, 백봉교단에 의해 전수된 『삼일신고』, 곧 임아상의 각주가 달린 형태의 『삼일신고』에 나타난 천지인 사상이 나철에 의해서 계승됨으로써 대종교의 천지인사상의 기본이 되었다. 



Ⅳ. 대종교의 성통에 대한 인식과 삼법수행론

나철이 1906년 백봉교단으로부터 건네받은『삼일신고』의「진리훈」에는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에 대한 원리 외에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나철 이하 초기 대종교 인사들이 모두 선도수련을 했음이 나타나 있으므로 대종교 초기 지도자들의 삼법수행 연구는 자못 그 의미가 크다. 백봉교단의 삼법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또한 드러난 것이 없다. 다만 백봉교단이 백전을 통해서 나철에게『삼일신고』를 가장 먼저 전해준 것을 볼 때, 그들은『삼일신고』「진리훈」에 바탕을 둔 한국선도 고유의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봉신사가 백두산에서 수도에 정진하여 성통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기록과 백두산에서 10년간 기도 끝에 성통(性通)의 경지에 이르러, 한배검의 묵계를 받아 석함 속의『삼일신고』를 얻었다는 기록, 태백산 대숭전에서 13인이 백봉신사를 배알하고 선도단체의 스승으로 모신 것 등을 볼 때 백봉교단은 삼법수행을 포함한 한국 고유의 선도를 집중적으로 수행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나철이 삼법수행을 강조한 기록은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조천하기 전에 지인인 소운 황병옥에게 남긴 유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삼일신고』「신훈」과「진리훈」에 나오는‘자성구자 강재이뇌’와‘지감 ․ 조식 ․ 금촉’수련을 언급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삼법수행에 정진해 달라는 글을 남겼다. 나철은, 대종교의 모든 신도는 삼법수행에 정진해야 함을 강조했다. 나철이 지은 「중광가」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공부한 형제자매 삼법(三法) 먼저 세우되
한배의 소리․기운 밖에서 구하지 말고
  네 신부(神府) 공경하라. 네 영대(靈臺)밝히어라.
  현현玄玄코 정일精一하면 한울․사람 한 지취旨趣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나철의 사상은 대종교 중광 전에 가졌던 우국적 분노가 대종교 중광 이후에 세계주의 이념으로 바뀌어 갔다. 이것은 대종교 교리관 자체가 조화와 통섭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고, 대종교의 교의 또한‘홍익민족’이 아닌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홍익인간’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나철이“다른 교인을 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자신의 순교를 민족이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내세운 것, 모든 종교의 근원을 하나로 본 것, 등이 동일한 가치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나철이 한국 선도수행을 복원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치적 중의 하나는 개천절과 천제를 부활시킨 것이다. 나철은 1914년 6월 9일 당시 총전리였던 강우를 천산(백두산)에 보내어 제천의식을 대행하게 했다. 제천의식은, 한국선도의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삼일신고』·「천궁훈」이나「진리훈」에 나타나 있는 경천(敬天)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개천행사와 제천의식이며 천제의식 자체가 수행의 핵심이다.
 대종교와 한국선도의 삼법수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종교의 삼법수행은 한국선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삼일신고』「진리훈」을 바탕으로 지감·조식·금촉 수련을 수행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고 환인·환웅·단군을 각각 조화주·교화주·치화주 삼신(三)으로 모시면서 천제의식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다만 한국선도에서는『천부경』과『삼일신고』를 인체의 상․중․하단전에 연결시키지만 대종교에서는 인체의 상․중․하단전에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대종교에서는 이용태가‘천·지·인’을 각각 머리와 배(腹), 다리(脚)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Ⅵ . 대종교의 공완에 대한 인식과 항일독립운동

대종교는 구한말 선도계열의 종교단체 중에서도 한국선도 공완의 기준에 가장 철저했던 단체였음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대종교 공완론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하여 논할 수 있다. 첫째, 항일무장독립운동이고 둘째, 국사연구 및 교육, 국어연구 및 보급 등 국학운동이며 셋째, 식산자강운동이다.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주로 만주에서 일어났고 식산흥업운동과 국학운동은 만주와 함께 국내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당시에는‘홍익인간·재세이화’를 위한‘공완’활동은 항일독립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적으로 대종교 지도자들의 공완론도 직·간접적인 독립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나철 역시 대종교 중광의 목적이 망국의 원인이었던 모화·사대의 그릇된 교육을 버리고 하루빨리 한배검(하느님 또는 환인·환웅·단군)의 교화를 폄으로써 민족독립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나철이 중광주로서 비록 포교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었지만, 민족의 독립과 단군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철이 당시의 최고의 공완을 항일독립운동에 두었다는 것은 그가 유언한 구서(九誓: 아홉맹세)나 오계(五戒: 다섯계율)에도 잘 나타나 있다.‘구서’에 보면‘충성하지 않는 이는 내치라’는 항목과‘ 환란을 구원하라’는 맹세, 그리고 오계에 나오는‘사군이충(事君以忠)’과‘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은 조국의 위기에 임해야 할 국가구성원 개개인의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철의 정신은 역사적으로 줄기차게 나타나고 있는 한민족의 도덕적 투쟁과 맞물려 있다. 이는 대종교의 경전노래 가운데 가장 오래된‘신가(歌: 얼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다.‘신가’에는‘고사기(古事記)’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高句麗의 祭時에 此曲을 常歌하고 또 臨陣時에 士卒이 가하여 이로써 軍紀를 助하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군인들에게 사기(士氣)를 북돋는 이러한 노래는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수행이요, 국가적으로는 치세(治世)의 차원으로 병용되었음을 볼 때 수전병행(修戰竝行) 의 가치가 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정신적 배경이 일제하 대종교 항일 무장투쟁에 나타나는 군교일치·수전병행의 정신으로 연결되면서, 철학이 있는 싸움·정사(正邪)를 구별하는 싸움·살신성인하는 싸움이 가능했던 것이다. 
 대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펼친 공완의 또 다른 방법은 국학운동이었다. 이 국학운동은 국사연구 및 교육과 국어국문연구 및 보급운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으로서 국학운동의 큰 중심축은 역사와 언어다. 민족 집단에 있어 역사와 언어는 그 집단의 철학⋅사상과 더불어 정체성을 지탱하는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하 이 두 분야에 대해 보여준 대종교의 애착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김교헌은 역사교육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장투쟁도 필요하다는 신념이 있었고 이를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김교헌이 가장 집중한 분야는 역사연구요 역사교육이었다. 김교헌의 대종교 공완론은,‘투철한 역사의식과 강한 긍지로 양성된 민족혼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최우선으로 하며 일시 방편적인 민족의식이 아니라 유구한 신교사상(敎思想)에 뿌리박은 신앙적 차원의 영구불변한 민족의식의 함양’에 있다고 보았다. 
 김교헌의 이러한 공완론은, 그의 저서『신단민사』와『신단실기』가 대종교 관련한 학교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관련한 거의 모든 학교에서 역사교교서로 활용되어 빛을 보았다. 나아가 그의 강력한 포교활동으로 1920년대 초반 대종교의 세력이 만주지역에서 크게 신장되면서 독립군 활동의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교헌과 같이 신채호 역시 민족주의 사학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대종교 인물이다. 
 대종교가 국학운동으로 펼친 항일 독립운동의 또 다른 축은 언어 즉, 한글보급운동이다. 이 한글보급운동의 혁명적인 변화의 선각자가 바로 한힌샘 주시경, 지석영 등이다. 물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실시 주장했던 지석영도 대종교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주시경이야말로 우리 글의 명칭을‘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으로서, 한글을 통한 언어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오로지 헌신했던 인물이다. 
 대종교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 독립운동이 가장 중요한 공완활동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에 몰입하였다. 대종교 지도자를 포함은 많은 교인들은 항일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이 아니라 식산자강운동과 국학운동도 매우 중요한 독립운동임을 자각하고, 항일무장투쟁 못지않게 활동하여 많은 성과를 남겼다.   
     

   Ⅵ. 대종교의‘조천’에 대한 인식

 앞서 한국선도 수행의 성통→ 공완→ 조천에 대해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수행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조천이다. 조천은 현대에 이르러‘천화’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조천’의 사료적 근거는『삼일신고』다. 나철이 백봉교단으로부터 건네받은 책인『삼일신고』에는 한국선도의 수행관인 성통→ 공완→ 조천사상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나철은『삼일신고』·「진리훈」의 삼법수행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따라서 나철 또한 수행의 궁극적 목표를 조천으로 삼은 것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증거가 나철의 생전 어록이나 저술에 다수 남아있다. 나철의 영향을 받아 나철을 따르던 많은 교인과 제자들도 나철의 생사(生死) 전과정을 성통→ 공완→ 조천으로 인식했다. 이는 김교헌이 펴내고 윤세복이 번역한 나철의 마지막 행적 기록서의 제목 자체가『홍암신형조천기』라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생을 마감하면서 유서와 편지 등을 남겼는데 그 중에 대종교 인사들에게 남긴 유서가『이세가(離世歌)』인데 총 3절로 되어 있다. 그중에 3절이 조천을 의미하는 내용의 글이다. 

만덕문(萬德門) 들어가서 인간선악(人間善惡) 여짜울 때
간사(奸詐)하고 악독(惡毒)한 자 용서(容恕)없이 다스리며
정직(正直)코 착한 사람 보전(保全)하여 다 왕성(旺盛)케 
살벌풍진(殺伐風塵) 쓸어내고 도덕세계 새로 열어보세
사랑토다 믿부도다 우리 형제들아
형제자매 모든 죄악 오늘 이 몸이 다 대신(代身) 가니 
한 마음에 성통하여 늘히 천궁(天宮)에서 즐깁시다

 만덕문(萬德門)이라 함은,『삼일신고』「천궁훈」에 나오는 문귀로서‘천궁(天宮)’에 존재하는 1만개의 덕(德)으로 이루어진 문(門)을 의미한다. 역시‘천궁’이란 (하느님)이 거주하는 장소를 이른다. 나철은,『삼일신고』가 이른대로‘성통·공완’한 자는 (하느님)이 거주하는‘천궁’으로 회귀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철은 김교헌에게 남긴 유서에도 그의 조천사상을 피력했다. 대종교 대도가 진실한 가르침이니 우리도 삼일의 도를 닦아 반드시 근원인 신()의 자리로 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나철은 죽고 삶이 몸덩이에 있지 않고 신의는 오직 신명이 증거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에서 나철은 죽고 사는 것의 정의(定義)가 육체에 있지 않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조천의 실체는 육체가 아니며 반진일신(返眞一)된‘삼진’즉, 인간에 내재한‘성·명·정’이‘삼(三)’의 근원인‘일(一)’로의 회귀를 의미함을 말하고 있다.
 나철의 구월산 삼성사에서의 조천은, 대종교의 삼신일체 사상과 성통→ 공완→ 조천으로 이어지는 한국선도의 전통사상과 연관해서 극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나철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일신(一)’즉,‘삼신(三)’으로의 회귀를 위해서 현상계의‘삼신(三)’이 모셔져 있는 구월산에서 조천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나철과 대종교를 연구한 여러 학자는, 나철의 자진 순교가 대종교 신도들이 더욱 단합하여 구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 강한 항일독립운동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필자는 보다 넓은 차원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미 육체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할 일이 끝났으므로 미련없이 육체의 생을 마감한 것, 즉 한국선도 수행의 마지막 여정인 조천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철은 박찬익을 통해서 구두로 전한 예언시에서 일본이 망하는 날이 자신이 조천하는 날로부터 무려 29년 후인 1945년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철은 조천을 결심했을 때, 광복의 날이 아직 멀었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포교의 길은 완전히 막혔기 때문에 자신의 할 일이 이승에서 끝났음을 인식하고 미련없이 수행의 마지막 여정인‘조천’의 길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판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일은 나철의 철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계승한 인물이었음은 앞서 살펴 본 바이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서일은 나철의 삼일사상과 삼법수행 및 한국선도의 핵심 수행과정인 성통→ 공완→ 조천을 확연히 깨치고 있었을 것이다. 서일이 생전에‘조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많다. 서일은 이『회삼경』의 마지막 9장,‘귀일(歸一)’에서 수행의 마지막 종착점을 ‘귀일’즉‘조천’으로 보고 있다.‘귀일(歸一)’에서“철지화행(哲之化行)이 수유여시종종묘법(雖有如是種種妙法)이나 급기공완(及其功完)하야는 경귀어통(竟歸於通)하나니 시지위반진(是之謂返眞) 일신(一)이니라.”라고 설파했다. 
 이는“깨달은 철인이 변화 성장함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공완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마침내 통함으로 돌아가나니(근원으로 통하니) 이를 일러 참함으로 돌이켜 하늘(근본)과 하나가 된다.”라고 해석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서일 역시 나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한 단계 도약을 도모하고 흩어진 항일독립군 진영에 대한 각성과 합심대도로 항일독립운동을 더욱 강하게 촉구함을 꾀하고자 했다고 보거나, 동시에 부하들이 자신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비통함과 절망감에 더 이상의 독립운동에 대한 용기를 잃었기 때문에 자진했다는 주장 등으로 서일의 자진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나철의 경우와 같이 서일의 죽음을 한국선도 고유의 수행과정인 성통 – 공완 – 조천 과정으로 바라본다. 서일은 항일무장노선을 취해왔던 자신의 길이 당시의 시점에서 시대조건과 맞지 않아진 현실을 직감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현재 대종교와 관련되어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나철과 서일의 죽음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대종교 신도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두 인물의 순교를 단순히 독립운동 차원으로만 시각을 좁히지 말고 한국선도 수행의 마지막 여정인‘조천’으로 적극 적으로 확대해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나철과 서일 모두 공완의 길을 가다가 자신의 임무가 이번 생(生)에서 끝났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미련 없이 육체적인 삶을 벗은 것으로 보인다. 즉, 조천을 위한 적극적인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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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Ⅶ. 맺음말

본고는 한국선도의 수행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대종교의 선도수행론을 고찰한 글이다. 고조선 이후 한국선도의 수행전통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하지만 문헌상 최소한 발해시기까지 전통적인 삼법수행이 전해진 것은 확실하다.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으로 대변되는 선도수행은, 발해 대조영의『어제삼일신고찬』이나 문왕의『삼일신고봉장기』등을 살펴볼 때 문헌상 발해시대까지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부식에 의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실패에 결정적 타격을 입은 국학파는 빠른 쇠퇴를 가져왔다. 
이에 더하여 억불숭유정책을 정책의 최고 기조로 한 조선의 건립은, 한국선도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기층민의 저속한 문화로 치부되어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한국선도의 전통적 수행과정과 고유한 철학 및 사상은 잊혀져 갔다. 다만 기층민 사이에서 무속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구한말 제국주의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통한 주체적 대응을 위하여 많은 단체가 민족종교 형태로 활동하였다. 당시 등장한 대부분의 민족종교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 수행문화인 한국선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대종교는 한국선도의 특징과 정통성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계승한 단체로 볼 수 있다. 대종교는 백두산 계열의 선도단체인 백봉교단의 지원으로 1909년 나철에 의해 중광되었다. 이렇게 한국선도는 근대에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극적인 부활을 꾀하였다. 대종교는 구한말 당시 많은 민족종교가 창교를 주장한 반면에, 나철은 단군교(후에 대종교)중광을 내세웠다. 나철 자신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이 시대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라는 의미에서 중광이라는 용어를 활용했다. 
백봉교단으로부터 건네받은『삼일신고』로 인하여 대종교는 한국선도 수행의 핵심과정인 성통→ 공완→ 조천의 전통과 지감 ․ 조식 ․ 금촉의 삼법수행을 되살렸다. 뿐만 아니라 한국선도 최고의 수행법인 제천문화와 개천절을 부활시켰으며 홍익인간․재세이화 정신을 부활했다. 나아가 환인․환웅․단군을 삼성을 선도의 스승으로 다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광복 후에 무차별적으로 유입된 서구 외래사상에 의해 한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으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나철은 단군교 중광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한국선도의 고유한 삼법수행 특징과 사상·철학을 부활시켜 이를 제자와 교인들에게 전수했다. 나철이 부활시킨 한국선도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로 제천의식의 부활이고 둘째, 한국선도에서는 물론 역사적으로 삼성(三聖)으로 존경해 온 환인·환웅·단군을 종교차원에서 삼신(三)의 자리로 복구시켰다. 셋째, 한국선도의 고유한 사상과 수행법인 삼일사상과 삼법수행을 부활시켰다. 삼신일체(三一體)로 대변되는 삼일사상과 지감·조식·금촉을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한 삼법수행은,『천부경』과『삼일신고』「진리훈」을 그 근거로 하는데, 특히 삼법수행은『역해종경사부합편』에 의하면 최소한 발해 대조영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수련법이었다. 넷째,『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3대 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한국선도의 전통사상과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제천의식, 삼일사상, 삼법수행, 삼성(三聖)의 한인·한웅·단군 삼신사상, 그리고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3대경전의 경전 채택 등은 한국선도의 전통성 계승여부를 판가름하는데 핵심적 판단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종교는, 비록 일본의 영향 하에서 어쩔 수 없이 종교라는 형태를 띠고 단군정신을 부활시켰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고유한 전통사상인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선도수행 단체로 보아야 한다.
구한말 성리학 이념이 시의성(時宜性)을 상실하게 되면서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다. 서구문명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기존에 성리학에 의해 이단으로 억압받아온 선도, 도교, 불교, 서교(西敎)가 양성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정신혁명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분위기가 팽배했고 대한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이 중화 사대주의였다는 깊은 자각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사상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특히 한국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사상은 바로 선도였다. 선도는 한국인들 스스로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의식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상적 혼란기에는 의식의 중심자리에 있던 것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자각은 주로 민족종교 형태로 나타났다. 선도의 영향을 받은 민족단체로써 최제우의 동학, 김항의 정역(正易), 강일부의 증산도, 나철의 대종교, 박중빈의 원불교, 강대성의 갱정유도 등이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민족종교는 외형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사상과 방편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나 그 근본은 모두 수천 년 동안 면면히 흘러왔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얼과 토양이 바탕이 된 것이며 우리의 역사상 가장 어렵고 불행했던 시대로 인식되고 있는 일제하에서 절망 속에 방황하는 민중들에게 구원의 희망철학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대종교 계열은 선도의 본맥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대종교는 선도의 3대 경전을 중심으로 선도사상의 틀을 확립하였고 수행 면에서 선도의 삼법수행(三法修行)을 정립하였으며 실천 면에서‘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선도의 궁극적 실천목표에 철저하였다. 나라가 망한 그 시기에 대종교가 당시 최고의 선(善)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운동에 전력투구한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한국선도 전통에서는 삼법수행을 통하여 성통한 후에 반드시 공완을 실천에 옮긴다. 대종교 인물들 또한 공완 활동으로써 당시 최고의 선(善)인 항일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 대종교의 항일독립운동은 무장투쟁, 국학운동, 식산자강운동 등 크게 세 분야로 진행되었다.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길이 빛날 청산리전투는 당시, 북로군정서 총재였던 서일을 비롯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등 대종교 계열의 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이룬 승리였다. 이 외에도 당시 만주지역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의 80% 이상이 대종교 교인들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대종교가 한국선도의 수행과정인 공완에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선도에서 수행의 마지막 단계는 조천이다.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마친 후에 미련 없이 육체의 껍질을 벗는 조천과정은, 한국선도의 수행에 있어서 마지막 여정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물론 오랫동안 수련한 수행자들도 목숨을 스스로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철과 서일의 폐기 조천 과정은 한국선도 수행의 극치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철은 스스로의 죽음을 가경(嘉慶) 즉, 아름답고 경사스러움이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조천한 날을 기리는 가경절이 있다. 죽음을 아름답고 경사스럽다고 표현한 것은 결코 죽음이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생의 끝이며 모든 것의 마지막, 그래서 슬프디 슬픈 것이라는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육체의 옷을 벗고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길고 긴 수련과정과 치열한 수행을 통해 깊은 정신세계를 경험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경이로운 수행경지라고 판단된다.
서일 또한 자유시 참변과 마적떼에 의한 부하들의 몰살 등을 당하고 서 스승인 나철의 유언시를 접하고, 이승에서 자신의 할 일이 더 이상 없음을 깨닫고 미련 없이 생을 마감했다. 서일 또한 시신에 상처 한군데 없고 잡충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폐기 조천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나철과 다른 점은 별도의 유서가 없다는 것이다. 스승인 나철이 여러 통의 유서를 남긴 것에 비해 서일은 일체의 유서를 남기지 않고 북만주 밀산 당벽진 야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아마 스승인 나철이 대종교에게 전해야 할 것을 모두 전한 마당에 자신이 추가로 해야 할 유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조상들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목적은, 그들의 행적을 거울삼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처럼 되고자 함이다. 과도한 물질 만능주의와 끝 모를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불과 1세대 전에 살았던 나철과 서일을 포함한 대종교 지도자들의 선도수행 행적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980년대 들어 한국선도의 본령인 선도수련법의 원형이 회복, 심신건강 운동 차원으로 발전되면서 한국선도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선도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선도 실천운동으로서‘인성회복운동’및‘지구인운동’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한국선도의 핵심은 선도 존재론의 중심인‘일(하느님)’이 이미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삼일신고』「신훈」은 이를 강재이뇌신(降在爾腦)으로 표현하였고 신()의 속성을 큰 사랑·큰 지혜·큰 힘(大德·大慧·大力)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선도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감·조식·금촉의 삼법수행을 통하여 심신이 맑아지면 이미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 과 만나게 되고, 그 신() 만나면 신()의 속성인 사랑(德)과 지혜(慧)와 힘(力 – 창조력)을 자연적으로 회복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작금의 끝을 모르는 종교분쟁, 이념분쟁, 국가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이에 따른 비극적인 국지전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지구의 종말이 사실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으로 본연의 인간성 회복을 제시하고 있는‘인성회복운동’이나‘지구인운동’은 우리 모두에게 절박한 당위이다. 
통시대적으로 한국선도는 성통→ 공완→ 조천의 관점에서만이 올바른 이해와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향후 한국선도의 본령에 대한 인식이 보다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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