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자료실 >
근대 국학의 성립과 그 국학적 요소 - 김동환 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4-06-10 조회수 : 2998
파일첨부 :
근대 국학의 성립과 그 국학적 요소

김동환 [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 들어가는 말
2. 기존 국학의 이해
3. 근대 국학의 성립
4. 근대 국학의 국학적 요소
5. 나아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요즘 우리 사회의 주변이 무척이나 복잡하다. 국내적 문제는 물론 국외적 문제 역시 녹녹치 않다. 그 중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학계뿐만이 아니라 정치계․문화계․교육계를 비롯하여, 한민족 사회 전반에 역사인식의 중요성에 대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이러한 역사왜곡 행태를 보면서, 학문이라는 것이 국가적 목적 앞에 무력한 시녀와 같이 전락될 수 있고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말이 국가 혹은 집단의 정책에 의해 어용적 도구로 포장될 수도 있다는 것과 국제관계사 속에서 강대국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힘없이 변개될 수도 있음을 다시금 목도하게 되었다.
  또한 과거 한국과 중․일관계사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중화주의사관이나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가치명제가 아직도 우리 역사계의 티눈으로 박혀 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 국학(國學) 연구에 정체성을 동반한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특히 우리 국학(國學)의 고향으로 고조선의 터전이었던 고구려사․발해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은,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시적으로 흔들어 놓을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태도는 그들의 중화주의적 비전으로, 한국에 대한 과거․현재․미래의 안목이 숨겨진 의도적 작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한국의 과거는 그들의 속국․중화문화의 시혜자요, 한국의 현재는 한반도에 묶여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불완전의 집단이며, 한국의 미래 또한 동북아의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자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문화제국주의적 망상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적 망상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난국에 우리는 국학이라는 의미를 또 다시 생각치 않을 수 없다. 국학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 정체성의 논리요 외국에 대한 국력이론이며, 원심론(세계화론)을 위한 구심론(민족이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정신적 단합요소로 작용한 국학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답게 만들어 온 문화사의 정수이며 민족을 민족답게 지켜 준 정신사 고갱이다. 특히 구한말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파급되는 국학의 성립과 발전은 국학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획기적 변화를 몰고 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우리 근대 국학 성립에 대한 논리와, 그 속에 담겨진 국학적 요소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특히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에 의해 성립된 근대 국학의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상 속에 담긴 국학적 요소를 집중 살펴보고자 한다. 

2. 기존의 국학 이해
  일반적으로 국학이란 우리나라와 관련된 총체적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역사 현상 속에 녹아 내려온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예술․민속 등, 우리 민족의 모든 사상(事象)이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학은 다른 나라의 학문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정체성과 독창성을 존립 기반으로 한다. 국학이라는 명칭이 상대적 가치 규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의 국학을 한국학과 같은 개념으로 부르게 되면서 양학(洋學) 또는 외국학과 구별하기 어려워, 양자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국학의 정립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학이라는 의미 규정을 올바로 정립하지도 않은 현 시점에서는 쉽게 공감만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학은 시간적으로 현재와 미래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가치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속성과, 공간적으로도 국학의 분류 근거가 존재론적이 아니라 지역적 분류에 근거한 차별성을 우선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시대의 사회 현실을 직접 다룬다고 하여 역사와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인류의 보편적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주목한다 하여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학에 대한 편견도 기우일 수 있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알아야 동시대의 현실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출발해야 세계와 인류의 문제를 포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기존의 연구 속에서 나타나는 국학의 상한(上限)은 삼국시대를 넘지 못한다. 이만열 은 국학의 흐름을 태동기와 성립기 그리고 발전기로 삼분하고 있다. 먼저 그는 삼국시대 자기의 역사를 남기려는 작업에서 국학적인 의식의 태동기를 찾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나타나는 역사기록의 의식과 신라 김대문의 저술 속에 농축된 자국문화의식, 그리고 최치원의 국학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지눌 사상에서도 우리 식의 깨달음과 사유가 숨어 있고 도선의 도참설이나 김위제의 신지비사 인용, 유교세력에 반기를 들고 정금론(征金論)과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묘청, 대장경조판과 7대 실록의 완성, 특히 몽고 침략의 위기 속에 나타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이규보의 『동명왕편』등에 나타나는 자주의식은 조선 초기 국학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음으로 그는 국학의 성립기를 조선 초기의 새로운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 민족문화가 흥왕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몽고침략으로 성숙된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문화의식, 고려후기에 성장한 민중세력의 관심, 원(元)나라를 통해 수용한 세계문화의 자극이라고 말한다. 또한 국학 성립기의 중심에 역시 세종의 한글창제를 놓고 있다.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민족국가의식․애민의식․문화주의적 동기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주적이고 국학적인 분위기는 조선 전기 문화계 전반을 풍미하는데, 인문학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인문지리를 정리하는데서 두드러지고 사서의 편찬과 각종 문화유산의 보존 그리고 과학기기 등의 발명 등에 찾을 수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그는 국학의 발전기로 지칭하면서, 임란(壬亂)․호란(胡亂) 이후의 새로운 의식의 대두와 주자학에 대한 반성, 고증학과 서학(西學)의 수용을 그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특히 사상적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으로 인한 화이관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와 원심적인 자기인식에 경도된 주자학이 퇴조하고 구심적인 자아의 발견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대두됨으로써, 국학의 자아인식이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국학을 논하는 학자들이 실학시대를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판단과 연결된다. 이 시기에는 자아의식의 성장을 토대로 역사학을 비롯하여 고전정리․어문학․지리학․의학․농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학문적이 업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우리의 학문사 내지는 문화사에서 일종의 문예부흥기와도 같은 시기로도 보고, 우리의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변혁기라고도 평가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역사학 분야에서는 강목체의 서술로 정통론(正統論)에 입각하여 씌어진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변화된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정통론을 극복하는 사서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그리고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꼽힌다. 특히 소론계의 이종휘는 단군의 계보가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는 ‘부여-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움으로 처음으로 대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더욱이 유득공의 『발해고』를 효시로 나타난 발해에 대한 관심은, 여러 역사지리서의 등장과 함께 대륙사관적 역사인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학의 위와 같은 역사서술이 유교사학의 상고사 인식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사학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동이문화를 유교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동이문화를 신교(神敎) 중심의 문화로 파악하려는 도가사학(道家史學) 또는 신교사관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시기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관심도 자아의식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과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그리고 유 희의 『언문지』등이 그것인데, 후일 최초의 국문(國文)이라는 명칭과 함께 순 한글표기와 띄어쓰기 시행, 병서 등을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이봉운의 『국문정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실학의 연구방향은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당면한 문제들과 현실개혁을 위한 사회경제적 문제, 나아가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연구와 함께 새로운 철학에 대해서도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실학이 국학이라는 명칭에 부합될 수 있었던 근거는, 한계성이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것과 함께 근대지향적 성격과 민중사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요 이론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더욱이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실학에 있어서 실제성의 판단은 모름지기 이 민족과 국가를 어떻게 위하는가의 여부로부터 내려진다는 지적과 함께, 실학이 지향하였던 ‘실제성의 기준’이 어디까지나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민족’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기존의 연구는 국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그 개념이 정립된 시기를 1930년대로 잡고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과 통치기를 지나면서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위기에 처하자, 일부학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되찾아 이를 살려 나가고자 하는 학문적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는 국권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그러한 분위기의 학문을 한국의 칭호인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조선학’ 혹은 ‘국학’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애국적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현실 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도모했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재발견코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발전시켜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정인보가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황원구는 정인보 등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학문과 사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개척된 탈중국적인 사상의 흐름을 국학의 계보로 파악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정인보가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사용한 이러한 국학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서 의미 규정을 한 것이다. 이것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명명해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학이라는 용어도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현금에는 국학이라는 개념 용어로써 의미를 넓혀 온 것과 같은 논리다. 더욱이 해방 후 정인보가,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새로운 체제의 대학을 서대문 밖에 설립할 당시, 국학대학(國學大學)이라는 교명(校名)을 지었다라는 기록도 정인보와 국학의 관계를 한층 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정인보는 1930년대를 풍미하던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 유학의 고질인 사대주의와 개화기 이후 서학을 수용함에 있어 나타나는 몰민족적 자세를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실증사학의 표방으로 1934년에 발족된 진단학회의 학풍을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도피적 사학으로 간주했다. 즉 우리들의 마음, 실심에 기초한 학문이 없고 남의 마음, 허심(虛心)에 근거한 국학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가 구현코자 했던 국학정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5천년 간 조선의 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상기해 볼 일이다. 

3. 근대 국학의 성립
  전통시대의 학풍에서는 국학이라고 개념화할만한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기존의 국학에 대한 연구 역시, 우리 것에 대한 기준이 없이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개념 설정과 학문의 제업적에 대한 나열형식의 탐구, 그리고 역사적 상한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존 연구 대상으로서의 국학은, 국학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사상적 정체성’과 ‘공간적 차별성’, 아울러 우리 민족의 형성으로부터 민족사를 관통할 수 있는 ‘시간적 연속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이란 국학의 연구와 인식대상에 있어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성에 근접한 가치이며, 차별성이란 중국․일본․미국 등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적 차별성과 연결될 수 있고, 연속성이란 우리 문화사 속에 단절되지 않고 흘러온 우리 것에 대한 시간적 가치라고 규정짓고 싶다. 특히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가치가 유입되어 습합 또는 혼재되어 온 우리의 경험에서는 이러한(사상적․공간적․시간적) 요소에 의한 순수국학의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정리의 필요성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어 문화적 정체성이 모호하게 인식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반드시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민족적 과제이기도 하다. 한말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가령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한국의 문학이나 교육체계․조상숭배 등 문화적 사유 양식이 모두 중국적으로, ‘중국문화의 패러디’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뒤, 라이샤워와 페어뱅크가 공저한 책(1960년 발간)에서도,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종속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학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개념화시킨다면,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연속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막연한 감이 있고 주변문화의 아류 또는 패러디라는 멍에를 결코 벗을 수 없다. 오히려 국학의 의미규정을 위의 요소를 토대로 정제시킴으로써 진정한 국학연구의 틀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순수국학 개념화에 대한 주장이 폐쇄적 혹은 국수적인 국학정립을 외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상적․공간적․시간적 요소들을 고루 갖춘 국학을 순수국학의 의미로 사유해 본다면,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사상․문화 ․풍습․언어․제도 등, 우리 역사의 줄기에 습합되어 자리 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대별시킬 수 있다. 
  다만 순수국학은 위의 세 요소 외에 학문적 범주로 인문학의 토대인 문(文)․사(史)․철(哲)로 국한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文)․사(史)․철(哲)은 고전학의 근본인 동시에, 전근대 사회까지 동북아에 국학으로 통념화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즈(胡適)도 국학을 국고학(國故學)의 약어라고 전제하고 중국의 모든 과거의 문화․역사는 중국의 ‘고유문화(國故)’로, 이러한 모든 과거의 역사․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국고학(國故學)이며, 생략해서 국학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19세기 서양문화가 중국으로 밀려들 때, 당시 중국 사람들은 서양과 중국의 문화를 서로 대비하여 서학(西學)․중학(中學)이라 부르거나, 혹은 신학(新學)․구학(舊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중국의 국학이라는 용어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국학 또한 문(文)․사(史)․철(哲)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었음은 에도시대의 국학성향을 보면 이해가 된다. 특히 명치 이후의 일본 국학은 국학원대학의 개설과 함께 국사․국어학․국문학․신도학․고고학의 교육연구가 국학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었으며,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진행시켰다.
  아무튼 이러한 요소와 주변 정황을 통해 우리의 순수국학의 개념을 간추려 보면, 순수국학이란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시원으로 고유하게 흘러 내려온 문(文)․사(史)․철(哲)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일찍이 안재홍이 협의(狹義)의 조선학을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 것도 이러한 순수국학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와 같은 순수국학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학의 근본인 한국정신사의 정수(精髓)를 세우는 작업으로, 한국의 고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한국사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부분이 토착고신앙(土着古信仰)이며, 그 자체가 중요한 맥락을 이루면서 한국사 전반에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 또한 토착고신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때문이다. 특히 고신앙 방면은 일제시대 민족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단군신앙의 영향을 컸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면은 후일 단군신앙을 부활시킨 홍암 나철에 의해 근대 국학이 비로소 정착됨을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민족의 형성사가 고조선 원민족의 형성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민족사회학적 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족국가의 형성은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원민족에 나타나는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지배지역과 지역주민을 끊임없는 정복에 의하여 확대해 가려는 강렬한 운동을 촉발시켜 꾸준히 민족형성으로 팽창해 가는 동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군사공동체의 특징을 단군시대부터 발견한 인물은 신채호다.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이, 단군시대의 무사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는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극찬했다. 까닭에 그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것도 화랑이라고 말한다. 
  한편 신채호는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을 국학(國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즉 “부여․마한 등 십여국의 이름을, 그 연혁을 찾으면 다 단군 때부터 있던 칭호라. 후세에 국학이 끊어져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 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라는 기록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 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 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 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라고 서술함을 볼 때, 국학(國學)과 불학․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양학(洋學)에 대비하여 사용한 국학의 의미도 무엇이었는가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채호에 있어서의 국학과 국수(國粹)의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용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국수의 정신을, “國粹者는 何오. 卽 其國에 歷史的으로 傳來하는 風俗․慣習․法律․制度 等의 精神이 是라.(國粹保全論-1908年)”고 주창한 바 있는데, 이 국수정신의 출발을 단군에 접맥시킨 것이다. 
  한편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국어․국문․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 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국문․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사(史)․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박은식이 또 다른 글에서, 육체의 생활은 잠시일 뿐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면, 그 육신의 고초는 잠시일 뿐이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고 화를 주는 자는, 육체의 쾌락은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 것이라고 경고함을 볼 때, 박은식의 학문에서 정신이 차지하는 무게를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채호가 단군의 선교(仙敎)를 중국의 선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단군선교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종교의 침체를, ‘국수(國粹)의 무너짐’이라고 한탄함을 볼 때, 신채호의 국수 혹은 국학이 단군신앙에 연결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박은식도 단군신앙을 부흥시킨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삼신을 믿는 최고(最古)의 종교로 보고 그 신조(信條)가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 국혼(國魂)의 토대가 단군신앙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의 본격적 시발은, 나철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단군신앙 부활에서 나타난다. 특히 나철의 업적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은, 그가 민족적 사유의 기반인 문(文)․사(史)․철(哲)의 확립을 통해 국학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족 집단에 있어 국어와 국사는 그 집단의 철학․사상과 더불어 정체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나철의 단군신앙 중광을 계기로, 유교․불교의 정신에서 배달의 정신으로 돌아 왔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였으며, 진정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였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일각에서는 실학에 나타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나 한말 의병운동에서 표방했던 척사위정(斥邪衛正), 그리고 대한제국기 개화파들이 들고 나온 동도서기(東道西器) 등의 구호들을 주목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 외침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나아가 최남선의 ‘부루교(敎)’나 ‘신도(神道)’, 정인보의 ‘조선얼’ 그리고 안재홍의 ‘한․’이나 ‘태백진교(太伯眞敎)’, 안확의 ‘종사상(倧思想)’과 이능화의 ‘신교(神敎)’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가 단군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호상은 전래 단군신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철학을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개념화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나철이 주도한 단군신앙의 부활은, 종교적 범주를 넘어 단군과 연관된 문(文)․사(史)․철(哲)로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보여준 사유의 양태가 민족 고유의 단군신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볼 때, 근대 국학의 성립 역시 여기에서 찾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4. 근대 국학의 국학적 요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상성이나 시간성 그리고 공간성이 충족된 순수국학의 의미와 그 실체를 우리 근대사에 가장 잘 드러내 준 인물이 나철이다. 그것은 나철이 우리의 문․사․철에 회통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 신앙의 중흥을 통해 순수국학의 실체를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나철은 당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국학자가 아닌 평범한 유학자였다. 또 유교적 소양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한다. 그가 개화사상에 눈을 돌려 근대화에 눈을 뜬 것도 유학자의 안목에서다. 여러 차례의 도일활동(渡日活動)을 통해 외교적 독립을 외쳤던 것도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행동이요, 을사매국오적에 대한 주살(誅殺) 거사도 유학자로서의 비분강개였다.
  나철이라는 인물이 유학자로서의 허물을 벗고 국학자로서 변신하는 계기는 단군신앙을 접하면서다. 나철은 1905년 단군교에 입교하고 1906년 단군교의 영계(靈誡)를 받음과 동시 전래경전(傳來經典)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 천제를 행하고「단군교포명서」를 반포함으로써, 단군교(후일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 사회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온다. 특히 나철의 단군신앙 중흥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의 회복을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배달교(倍達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섰다는 주장은, 나철 사상에 나타나는 국학적 요소가 전술한 순수국학의 의미 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국학적 관점에서,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동학의 창도로 나타나는 수운사상 그리고 증산교의 창교로 대두되는 증산사상을 비교함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즉 홍암은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을 택함으로써, 사상적․시간적․공간적 특성을 두루 갖춘 순수국학적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자생종교라는 동질성을 가진 수운사상과 증산사상에서는, 시간적 연속성과 사상적 정체성이 결여된 불완전한 국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동학과 증산교보다 후에 일어난 단군신앙(대종교)에 의해, 우리의 국교 관념이 대두되고 국어․국사의 연구가 주도되었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철이 단군 신앙의 중흥을 모색한 배경에도, 평소 그가 품어 온 정신의 중요성이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국망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우국의 행보를 옮기면서도, 늘 시대적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정신’을 갈망했다. 그가 평소 품어오던 ‘국망도존(國亡道存: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부활을 대종교의 중광에서 찾는데, 박은식이 찾아 지키고자 했던 ‘국혼’과 신채호가 갈구하던 ‘국수’의 의미와 통했던 것이다. 나철이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 받은 「단군교포명서」와 규약, 그리고 그가 남긴「중광가(重光歌)」·「이세가(離世歌)」를 비롯한 여러 글에 나철의 국학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먼저 한글 방면을 보자. 나철 역시 당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한문 지식을 배경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행세한 인물이다. 물론 대종교를 중광한 후에도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서나 논문을 남긴 것도 없다. 그러나 나철이 단교교단으로부터 받은 「단군교포명서」를 보면 우리말에 대한 애착이 많이 나타난다. 즉 조선이라는 말이 배달에서 왔다는 설명과 더불어 배달목․태백산․패강․임검․이사금․이니금․나라․서울 등 우리말에 대한 어원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교단이 대종교 중광 이전에 이미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후일 한글운동을 주도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종교를 중광할 당시 단군교단으로부터 받은 규약문류(規約文類)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지침이 나타나고 있다. 

“一. 봉교인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문자를 해득치 못하는 자는 마땅히 한글을 먼저 익히게 하되 만일 가난하여 여유가 없는 자에게는 부득이 강행할 것임.”

  즉 문자를 모르는 교인이 있으면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한글을 먼저 습득케 하라는 종교적 규약을 보면, 한글에 대한 대종교 혹은 나철의 방침이 무엇이었는가가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대종교의 노래 중 나철이 작사한 「한풍류[天樂]」「세얼[三神歌]」「세마루[三宗歌]」「어천가[御天歌]」 등의 곡을 보면, 당시 한문으로 익숙해 있던 지식인 나철의 순수한 우리말에 사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 단어․한 글자에도 한자어 사용이 없고 유려하고 세련된 조탁에 의해 펼쳐진 이 노랫말 속에서, 나철의 순수 우리말 구사 능력과 그것을 위한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철의 단군신앙 영향 속에, 우리말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의 선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한힌샘 주시경이다. 물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실시 주장했던 지석영도 대종교인으로 대종교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기록이 나타나지만, 주시경이야말로 우리글의 명칭을 ‘배달글(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으로서, 한글을 통한 언어 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오로지 헌신했던 인물이다. 
  또한 나철과 주시경의 이러한 국어정신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김두봉과 이극로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들 중, 최현배․정인보․안호상․안재홍․이병기 등도 대종교 내의 그 기록의 인멸에도 불구하고 대종교정신과 관련하여 국어활동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국어학이 아닌 국문학 방면에서 나철의 대종교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문학의 통사체계를 처음으로 확립하여 국학의 뿌리를 확립한 인물이 자산(自山) 안확(安廓)이다. 특히 안확은 상고문학의 기원을 대종교의 ‘종(倧)’사상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 상고 문학의 기원이 종교적 신화에 담겨 있으며, 그 종교적 신화의 한국적 원형을 ‘종화(倧話)’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종화’의 주요 모티브를 삼신(三神)에서 찾았고 삼신의 속성인 덕(德)․혜(慧)․력(力)의 섭리가 인간의 생활로 작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까닭에 안 확은 이러한 ‘종’의 관념이 일반 국민의 중심사상을 구성하여 생활 깊이 파고드니, 그 주관적 의식의 발달이 개인 윤리의 역사를 나타내고 그 객관적 도덕질서의 발달이 사회 윤리의 역사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한국의 인문사(人文史)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나철은 국사인식에서도 기존의 유․불 사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는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받은 교리(敎理)․교사(敎史)와 「단군교포명서」등과 같은 문류(文類)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다. 먼저 발해 문왕 대흠무가 기록했다고 전하는 내용을 보면, 『고조선기』와 『후조선기』를 인용하여 단군시대에서 부여로, 그리고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대륙적 혹은 대동아주의적 역사인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이미 상고 동이족의 활동무대가 현재 중국본토의 일부와 동북아 전역을 점했다는 중국학자의 주장으로도 뒷받침되는데,「단군교포명서」에도 ‘단군→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고, 고대 신교의 자취가 동북아 전역에 뻗쳤음을 언급했다. 
  또한 단군의 가르침은 외면한 채 유교에 함몰된 당대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제하 민족주의사학에 나타나는 반존화적(反尊華的) 성향의 지침과도 같다는데 주목을 끈다. 이것은 대종교의 역사정신이 철저하게 신교사관(神敎史觀) 혹은 도가사학(道家史學)에 바탕 둠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철이 남긴 「중광가」의 일부를 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승계되고 있다. 즉 기준왕(箕準王)의 박사였던 위만이 배반할 당시, 신교(神敎)의 원본 서책들이 영원히 유실되고, 한나라의 한사군 때와 당나라 때의 안동도독부 설치로 신교의 근거와 서책이 흩어지고 타버렸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몽고의 침략으로 신교의 제전인 팔관(八關)의 폐지와 신교 서책의 수난을 한탄하고, 조선조 세조․예종 당시 도참서를 금기시하여 『고조선사』를 비롯한 교리․교사 서적이 없어졌음을 개탄했다. 한편 불교가 전래될 당시 경계하고 조심했던 분위기를 일깨워 주고, 유교의 전래로 인한 족성(族性)의 와해를 조소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조 세조․예종 때의 수서 종류들을 신교사서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것은 나철이, 단군교를 경험하기 전인 1904년에 쓴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준 글(與伊藤博文書)」이라는 내용에서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허수아비를 만드는 자는 그 뒤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 형상을 미워하여 따라 죽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이 소국이라 하나 그 인구가 이천 만을 내려가지 않고 모두 血力과 性命이 있어 결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견줄 바 아니라.”는 구절에서,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남은, 대종교 중광 후 신교사관을 중심으로 한 탈유교적 정서와 대비된다는데 주목되는 부분이다. 
  또한 「단군교포명서」에 나타나는 기자․동명성왕․을지문덕․광개토대왕․대조영․김유신․왕건․이성계 등의 인물 행적을 통해 제시되는 신교적 흐름을 승계하여, 나철은 「중광가」에서 비서갑신모․부루․부우․부소․부여․팽우․고시․신지․왕조명․배천생․여수기․기자․왕수긍․문박씨․비류왕․해모수․아란불․고주몽․박혁거세․파소․알영부인․극재사․중실무골․소실묵거․오간․마려․김유신․을지문덕․명립답부․산상왕․을파소․대조영․왕건․솔거․김생․대조영․왕건․최치원․이규보․대야발․임아상․대흠무․이성계․인조(仁祖)등의 수십 명의 신교 관련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백봉신사의 정성으로 이 도맥이 되살아났음에 감격했다.
  그러므로 나철이 1914년 10월 5일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총본사에 고령사(高靈祠)를 설치하고 부루․부여․팽우․고시․신지 등을 비롯한 단군신앙의 선철선성(先哲先聖) 14인에게 제례를 올린 것도, 숭조교본(崇祖敎本)을 통한 신교사관 확립의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나철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교의식을 환기시켰다는 점이 특기된다. 홍암은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연면히 흘러온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사유를 가장 옹글게 간직한 것이 단군신앙으로 보았다. 
  대종교의 전래 경전이 단군시대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며 그것의 역사적 전개 또한 교명(敎名)만 달리 할 뿐, 동북아 전역에 이어 왔다는 것이다. 즉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발해에서는 대도진종(大道眞倧), 그리고 신라는 숭천교(崇天敎)로 고려는 왕검교(王儉敎)로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로 흘러 왔음을 밝혔다. 또한 삼신제석으로 떠받드는 성조신(聖祖神)과 태백신제(太白神帝)인 산상신(山上神), 그리고 만주족이 신봉하는 주신(主神)과 태고단신(太古檀神),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동황대제노백신(東皇大帝老白神) 등도 같은 하느님의 이음동의어로 보고 있다. 
  또한 나철은 “교문을 세우니 이름하여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乃設敎門曰大倧 玄妙之原道三一)”고 밝힘으로써, 현묘지도의 근원이 단군신앙의 삼일철학에 있음을 설파했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 당시 제자 엄주천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를 간곡하게 일깨우는데, 이것은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국교의식을 전수하려는 나철의 의지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최치원의 현묘지도(풍류도)는 한국 고대종교의 결정체로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요 사상이며 문화이기 때문이다.
  나철이 중광(重光: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킴)을 내세운 것도, 몽고 침입 이후 7백 년 간 단절되었던 위와 같은 종교적인 맥을 다시 세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단군신앙 고유제전인 팔관(八關)이 몽고의 침략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까닭에 나철은 순교 당시 유서를 통해서도 진실한 정성을 위해 팔관의 재계(齋戒)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팔관은 고려조 이지백(李知白)의 상소 내용에서도 전래되어온 선랑(仙郞)의 유풍이었음이 확인되고, 고려 의종은 선풍(仙風)과 팔관회를 받들어 따를 것을 명한 바가 있으며, 그 행사 내용도, 백희가무(百戱歌舞)와 사선악부(四仙樂部), 다섯 길이 넘는 채붕(綵棚) 설치와 모든 신하들이 포홀행례(袍笏行禮)를 하는 등의 불교적 행사와는 완전히 다른 전래 행사였다. 
  아무튼 나철의 위와 같은 국교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되는데, 특히 박은식은 대종교가 국교의 가치가 있음을 『한국통사』에서 언급했고, 신채호도 “壇君이 곧 仙人의 始祖라, 선인은 곧 우리의 國敎이며”라고 밝힘으로써, 단군신앙이 우리 민족의 국교임을 주창하고 있다. 또한 정인보는 해방 후「순국선열추념문」을 통하여, “國變 當時 朝野를 通하여 烈節히 繼起한지라, 守土의 長吏를 비롯하여 丘園에서 艱貞을 지키던 이, 國敎로 民志를 뭉치려던 이,…(후략)…”라는 표현과 같이, 국교의 기원을 단군에 두고 나철을 국교(國敎)로써 민족의 뜻을 뭉치려 하였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철학적인 방면에서도 나철의 업적은 적지 않은 의미를 남긴다. 선도(仙道)․풍류도 혹은 현묘지도라는 추상적인 가치로 전래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통섭(統攝)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는 가치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나철이기 때문이다. 나철이 말한 “교문의 이름은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는 설파에서 종사상과 삼일철학이 이음동의어임을 알 수 있고, 

“大倧의 이치는 三一일 뿐이니, 하나만 있고 셋이 없으면 이것은 쓰임이 없을지오, 셋만 있고 하나가 없으면 이것은 그 몸이 없을지라, 그러므로 하나는 셋의 몸이 되고 셋은 하나의 쓰임이 되느니라.”

에서는 삼과 일의 철학적인 관계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주재유일(主宰惟一)이나 작용유삼(作用惟三)이로다. 진리미묘(眞理微妙)하시니 만유포함(萬有包涵)이라.”는 천명에서 삼일철학이 온갖 것을 아우르는 이치임을 밝혔다. 이러한 삼일철학의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철이 저술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이다. 「신리대전」은 대종교의 전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신훈(神訓)’을 ‘신위(神位:한얼자리)’, ‘신도(神道:한얼도리)’, ‘신인(神人:한얼사람)’, 그리고 ‘신화(神化:한얼교화)’라는 네 방면으로 풀어 해석한 글이다. 나철은 이 글에서 대종교 철학의 근본인 삼일을 철학적 원리로 명쾌히 구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평가도 대종교, 즉 홍암의 삼일철학을 토대로 가능한 주장임을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격신관이 발달되어 있고, 불교는 절대무가 발달되어 있다면 대종교의 경전들은 인격신과 절대무의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브라흐만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대종교만큼은 못하다. 유교가 실천에 치우치고 도가사상이 사변에 치우쳤는데, 대종교는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여 어디에 치우침이 없다.”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전래 유속을 일깨우고 인습을 혁파하는 대도 한 몫을 한다. 「단군교포명서」에 언급되는 한복 윗도리의 동정(東旌), 땋은 머리 뒤에 매는 댕기(檀戒․檀祈), 그리고 성조신(成造神)․선령당(仙靈堂)․고시례(高矢禮) 등의 유습 배경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또한 편발개수(編髮盖首)와 일본에서 지켜지고 있는 십팔성(十八姓) 유족의 단군신앙 제사,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모신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우신관(佑神觀), 그리고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를 모신 일본 출운사(出雲社)의 배경을 단군신앙에서 근원을 찾는다. 또한 나철은 부여 풍속으로 내려오는 구서(九誓)와 고려속인 팔관의 준수를 유훈(遺訓)하고 있다.
  특히 선의식(襢儀式)의 제정을 통한 나철의 제천보본은, 예로부터 삼신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천제(天祭)를 복원시켰다는데서 전례사적(典禮史的) 의미가 크다. 즉 나철의 제천은 삼신의 신위를 모시고 행한 근대 최초의 천제이었다는 점과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인 선의식을 처음으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대의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유교적 제례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홀기(笏記)를 제정하여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를 시현․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임금들이 반드시 상제 및 단군삼신을 공경하여 섬김으로써 도를 삼았다”라는 기록과 함께, 제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의 내용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대개 尊卑의 예절은 신을 공경하는 데서부터 일어났다. 상하 존비의 차례가 정해지매 선왕의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행해지고 신을 공경하는 예가 제천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만고에 통하고 사방에 이르며 사람으로서 하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나철은 유교적 삼강오륜이나 여타 공맹의 질서, 그리고 유교가례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중시했던 것은 구서나 팔관 또는 세속오계, 천제 등과 같은 고래의 단군신앙 속에서 배태된 가치다. 단군신앙이 우리 국학의 맹아(萌芽)요 배반(胚盤)이었다면, 이러한 가치 또는 행사는 국학의 줄기요 몸통이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적 형식주의와 외화주의(外華主義)에 대한 청산 의지는 그가 순교할 당시의 유서 내용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밀유」에 언급되는“청직(淸直)으로써 뜻을 가지고 근검(勤儉)으로써 살림을 불리라”는 내용이나,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에서 강조한 근검․절약의 정신은, 앞의 팔관(八關)의 하나로 언급되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말 것’이라는 조목이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화랑의 ‘삼미행(三美行:겸손․검소․관용)’ 정신과도 일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국학의 전래 정신의 한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지향해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더불어 나철 국학의 심지로써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수행적 실천 부분이다. 그것은 단군시대부터 전래되어 오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방법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과 같은 집단에서 중요한 체행과정으로 시행된 듯하다. 이러한 수행정신은 우리 민족 무사혼의 뿌리가 되고 상무정신의 토대가 됨으로써, 문무가 겸비된 인간완성을 구현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한편 수행이란 사회 혹은 국가 또는 민족 집단의 성정(性情)을 연단(鍊丹)하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올바른 수행의 도가 존재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차이는, 성정상의 선진과 후진의 집단으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더한다.
  수행과 연관된 대표적 전래서로써는 『해동전도록』·『해동이적』·『청학집』 등을 들 수 있다. 『해동전도록』은 조선조 한무외(韓無畏)가 기술한 도맥 전수과정을 토대로 이식(李植)에 의해 세상에 유포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후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근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까지 연결된다. 또한 『해동이적』은 홍만종(洪萬宗)이 『청학집』은 조여적(趙汝籍)이 각각 저술했다. 이 저술들은 모두 외단(外丹)이 아닌 내단(內丹)과 관련된 서적들로, 차이가 있다면 도맥 전승에서 미묘한 차이가 난다. 즉『해동전도록』은 그 도맥을 ‘노자(도덕경)-위백양(참동계)-종리권(전진교)’이라는 중국적 도맥을 근원으로 최승우로 연결되고 있으며, 『해동이적』에서는 ‘단군-혁거세․동명왕-신라사선-김가기’라는 단군 도맥근원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청학집』에서는 특이하게 중국의 광성자에서 도맥의 근원을 찾고 그 흐름이 단군 이전의 환인으로 이어졌다고 설정했다. 
  그러나 이 저술들 모두 그 수행의 메커니즘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요소가 강하다. 즉 중국 도교의 정(精)․기(氣)․신(神) 론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 요소들이 인체의 삼단전(三丹田)머무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 초기 매월당 김시습은 물론이고,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와 『지봉유설』 그리고 『오주연문장전산고』같은 저술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나철의 국학이 수행적 방면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수행의 메커니즘에서 중국 도교적인 요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먼저 나철은 도맥의 근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고 그 수행의 목표도 「삼일신고」‘진리훈’을 토대로 하여 성통공완을 통한 홍익인간을 구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또한 나철의 수행은, 기존 중국 도교적인 정․기․신이 아니라 삼진(三眞: 하늘의 本性)인 성(性)․명(命)․정(精)이 존재하고 그와 대(對)가 되는 삼망(三妄: 인간의 俗性)으로 심(心)․기(氣)․신(身)이 있어, ‘인간의 속성을 물리치고[返妄] 하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卽眞]’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망즉진(返妄卽眞)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된 것이 삼법수행(三法修行)이다. 
  여기서 삼법이란 지감(止感: 마음공부)․조식(調息: 숨공부)․금촉(禁觸: 몸공부)을 말한다. 마음공부는 때 묻은 마음을 씻고 본성(本性)을 발견하는 공부이며, 숨공부는 어지러운 기운을 돌려 본명(本命)을 찾아가는 공부이고, 몸공부는 망가진 몸을 세워 본정(本精)을 일으키는 공부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철은 단군신앙를 중광한 직후부터 순교할 때까지 이 삼법수행으로 일관했다. 그가 단군신앙을 일으킨 1909년의 당부와 숨을 거둘 당시(1916)의 마지막 유언인 다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閉門修道하여 篤誠崇奉하니 一念一事가 只在修道上이오, 一言一辭가 只在養德邊이라.[1909. 12. 1.]”

"謹贈 小雲兄丈 道鑑. 神訓曰 自性求子降在爾腦 信之本也 眞理訓曰 止感調息禁觸 誠之原也 昻哉 專修.(소운 형장께 삼가 도감을 드립니다. 신훈에서 “스스로의 본성에서 한얼의 씨알을 구하라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있느니라”는 말은 믿음의 근본이며, 진리훈의 “지감․조식․금촉하라”는 말은 정성의 근원이니, 소중히 받들어 수행에 정진해 주십시오.[1916. 8. 15.])“ 

  한편 나철의 국학 정신은 닫혀있는 가치가 아니다. 흔히들 국학하면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가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람직한 국학의 본질이 자기만을 고집하는 ‘닫힌 학문’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해 가는 ‘열린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철의 국학 정신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군신앙을 경험하기 전의 나철은, 한마디로 유교적 가치에 순치된 우국지사에 불과했다. 을사오적주살 사건이나 여러 차례의 도일(渡日)을 통한 외교 활동의 배경에 숨은 그의 정신적 지탱요소가 유교 또는 개화사상이었음을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당시 그의 사상적 범주는 민족이라는 공간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시간적 한계성 속에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단군신앙을 접하고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나철은 단군신앙을 일으키면서 세계주의적 가치로 변화한다.
  이 내용을 보면 대종교 중광 이전에 가졌던 나철의 우국적 분노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요, 대종교에 헌신하면서는 국가 관념을 벗어버리고 세계주의의 이념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신앙의 교리관 자체가 조화와 통섭(統攝)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고, 대종교의 교의(敎義) 또한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나철이 “다른 교인을 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자신의 순교를 민족이 아닌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내세운 것, 모든 종교의 근원을 하나로 본 것등도 위의 가치와 일맥하는 것이다. 또한 일제시강점기 나철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의 궁극적 소망이 조국광복을 넘어 배달국 이상향을 건설코자 했던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나철의 국학 정신은, 결코 배타적․폐쇄적․국수적․일시적인 가치가 아니요 인류와 미래를 향한 상생적․개방적․보편적․창조적인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향후 국학연구의 방향에도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의 더불어 사는 삶의 전통이 잘 드러나는 풍류도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이 홍익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안재홍과 정인보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 나아가는 말
  구심을 잃은 물체는 안정감이 없고 정체성이 없는 민족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국학은 바로 민족의 정체성으로, 우리의 중심을 세우는 학문이요 원심활동을 위해 필요한 기준을 세우는 학문이다. 또한 국학은 ‘나와 너’를 구별해주는 학문이면서 ‘우리’를 지향해 가는 학문이다. ‘나와 너’가 없이 ‘우리’가 없고 한편 ‘우리’가 없이 ‘나와 너’를 기약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학(學)은 ‘나와 너’를 구별하지 못하는 학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우리학’으로도 성장하지 못했다. ‘나’를 고려치 않고 ‘너’만을 생각하는 학은 노예의 학이다. ‘너’를 생각치 않고 ‘나’만을 강조하는 학은 단절의 학이다. ‘나와 너’를 분별치 못하는 학은 무의미한 학이다. 
  따라서 우리의 국학이 가야할 방향은 나를 발견하는 길로 먼저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중심과 기준, 그것이 바로 사상적 정체성․공간적 차별성․시간적 연속성이다. 이렇게 정제된 학이 바로 순수국학이며 광범한 국학으로 가는 토대가 된다. 그 위에서 너를 만나려는 노력, 이것이 국학의 세계화이며, 이렇게 만나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근현대사의 수많은 위인들 중에 홍암 나철이라는 인물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바로 ‘나’를 일깨워 준 장본인으로, 근대 국학의 성립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중심과 기준이 되는 국학적 요소를 명확하게 제시했고 또한 실천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를 발견한 걸출한 인물들이 우리의 국문․국사․철학․문화 등의 제방면에 수없이 많았다. 그를 근대 국학의 선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비중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또한 사상성이나 시간성 그리고 공간성과 보편성이 충족된 순수국학의 요소를 우리 근대사에 가장 잘 드러내 준 인물이 나철이었다. 그것은 나철이 우리의 문․사․철에 회통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 신앙의 중흥을 통해 순수국학의 실체를 체계화한 것과 연관된다. 나철의 단군신앙 중광을 계기로, 유교․불교의 정신에서 배달의 정신으로 돌아 왔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였으며, 진정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였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더불어 나철이 찾은 ‘나’는 너를 외면한 ‘나’가 아니다. 홍암의 ‘나’는 과거의 망각에서 찾아낸 ‘나’요, 현실의 질곡에서 해방된 ‘나’며, ‘너’를 만나기 위해 행진하는 미래의 ‘나’였다. 까닭에 나철의 ‘나’는 폐쇄와 아집과 배타의 ‘나’가 아닌 ‘우리’를 만나기 위한 개방과 조화와 이타의 ‘나’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이전글 일본의 식민지 책임 관점에서 본 1965년 한일협정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다음글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