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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 백포서일의 구국정신과 항일무장투쟁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2-11-29 조회수 : 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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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의 구국정신과 항일무장투쟁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길영

목 차

Ⅰ. 序 論    1
Ⅱ. 서일의 生涯    2
 1. 時代的 背景     2
 2. 서일의 家系와 修學    3
 3. 大倧敎에서의 활동    4
Ⅲ. 서일의 哲學思想    6
 1. 思想形成 背景    6
 2. 서일의 著述    9
Ⅳ. 서일의 抗日運動    11
 1. 理念的 抗日運動    11
 2. 武力的 抗日鬪爭    14
 3. 靑山里戰役의 評價    27
 4. 大韓獨立軍團 組織과 朝天 29
Ⅴ. 結 論     30
<參考文獻>     32


Ⅰ. 序 論 
 우리 민족은 역사 이래 주변 異民族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과 침략을 받아 왔으나 그때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와 국난은 극복하고 우리의 疆土와 민족정신을 지켜왔다. 구한 말 일제 침략자들의 치밀하고도 악랄한 침략 야욕으로 우리는 또다시 국토와 국권을 유린당하는 민족 최대의 受難을 겪게 되었다.
 이때에도 救國一念으로 국내외에서 목숨 바쳐 투쟁한 역사적 인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인물들 중에서도 白圃 徐一은 조국 광복을 위해 무장항일투쟁을 제일먼저 주창하면서 민족운동가들의 정신적 支柱가 되었으며, 일제와 맞서 투쟁하면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민족교육, 항일무장투쟁 및 종교・철학 등 여러 방면에서 실로 기적 같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祖國光復을 위해 저마다 헌신한 공적에 대해 輕重을 가릴 수는 없지만 어떠한 연유에서든지 진실이 묻히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 덕에 오늘 우리들이 복되게 살면서 그분들의 공덕을 마땅히 선양하고 후진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서일은 일제와의 전쟁만이 조국광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고 10년 동안 국외 항일무장단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부대를 만들고 키워서 청산리 대 승첩을 이끌어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 이름마저도 생소한 실정이다. 이는 전쟁결과만을 가지고 과대평가나 자의적인 해석을 하다 보니 그 준비과정을 잃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戰爭은 전쟁 당사국간의 무력충돌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데 비하여 軍事는 전쟁이 그 핵심요소이지만 평시의 전쟁준비상태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군사의 범위에는 전쟁 외에 군사제도, 군사사상, 교육훈련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서일의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한 구국정신과 청산리전역에 대한 軍事史的인 측면의 검토로 서일이 어떻게 무력투쟁을 준비해 왔으며, 청산리전역의 성과가 과연 무장항일투쟁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인지 등에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한민족 광복운동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는 용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2007 9월 20일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일제강점기’ 등 유사 표현의 수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정부 관계부처에 권고안이 발송된 일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제식민시대, 일제강점기, 독립, 독립군, 독립운동 등의 단어를 다른 말로 대체해보고자 한다. 

Ⅱ. 서일의 生涯
 1. 時代的 背景 
 개항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는 때 조선의 지도층은 黨利黨略만을 앞세운 당파싸움에 힘을 낭비하면서 近代化에 소홀했던 탓에 일제의 朝鮮侵略政策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敗亡할 때까지 시종일관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일제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1910년 끝내 國權을 喪失하고 말았으나 우리 韓民族은 결코 일제의 침략과 植民支配 야욕에 그대로 屈從하지 않았다. 
 1905년 乙巳勒約과 1910년 韓日倂呑을 거치면서 일제의 탄압이 날로 거세짐에 따라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국내외 민족운동 지도자들 사이에는 국외에 광복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민족운동지도자들은 침략적 팽창주의로 치닫는 일제가 필시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도 전쟁을 도발할 것을 전망하고, 이런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對日戰爭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自力으로 完全光復을 쟁취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서 武裝鬪爭에 입각한 獨立戰爭論이 대두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만주・러시아 등지에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광복운동기지를 조성하고, 항일 무장단체의 조직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2. 서일의 家系와 修學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咸鏡北道 慶源郡 安農面 金熙洞에서 徐在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本名은 夔學이고 初名은 正學(또는 夔學)이요 道號는 白圃, 堂號는 三兮堂이며 本貫은 利川으로 시조 徐神逸의 36세손이다.
 서일은 10세 때부터 고향 서당의 김노규(金魯奎)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周易을 전공하였다, 그 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함경북도 경성군 소재 有志義塾의 전신인 私塾에 입학하였으며, 1902년 사숙을 졸업한 후 이로부터 10년간 고향에서 계몽운동과 아동 교육 사업에 전념하였다.
 함일학교는 私塾(1900년) → 有志義塾(1907년 1월) → 함일학교(1907년 2월) → 함일실업학교(1910년)로 변화되어 왔다. 受業年限은 本科 3년, 豫科・農林科는 1年이며, 학교설립목적은 함일학교 때는 “男子에게 必要한 高等普通 敎育을 施하고 兼하여 實業上에 知識技能을 養成함으로써 目的함”으로 되어 있는 반면, 咸一實業學校에서는 “農業上에 關하여 必要한 知識과 機能을 敎授하며 兼하여 德性을 涵養함으로써 目的”한다로 바뀌면서, 남자라는 단어가 빠지고 德性 항목이 추가된 것을 보면 남녀 共學으로 된 것 같다. 
 學科目은 本科는 修身, 國語, 漢文, 日語, 地理이고, 理科는 數學, 作物論, 肥料, 養蠶學, 林學, 作物病理學이었으며, 速成科는 日語, 數學, 物理, 化學, 氣象學, 博物, 土壤學, 肥料學, 作物各論, 園藝栽培, 畜産, 養蠶, 造林各論, 林學大要, 昆蟲學, 病理學으로, 産業을 重視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로서는 상당히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당시 함일학교의 설립취지를 보면 “關北의 중심인 鏡城에 학교를 세워 학문진작을 통해 咸一이라는 이름을 전국에 빛나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과연 이 학교 출신인 徐一을 비롯해서 간도대한국민회 사령 安武, 대한군정서 부총재 玄天默 및 간부 김병철,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김학섭 등 광복운동의 핵심 투사들을 많이 배출한 민족학교이었다.
 한국병탄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의 항일 민족운동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 서일은 1911년 새로운 광복운동의 터전을 찾아서 가족들과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 땅에 처음 들어선 곳은 왕청현 덕원리였다. 당시 동행한 가족은 서일의 아버지 서재운, 아내 채 씨, 맏딸 서 모(출가 후 병고로 이름조차 모름,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가 가족의 전부였으며, 서일의 가계는 아들 대까지 4대독자로 내려왔으며 아들 서윤재가 형제를 두어 간신히 독자를 면했으나 후대가 단출한 내력이었다.

3. 大倧敎에서의 活動
 韓民族光復運動史에서 대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看過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대종교는 檀君信仰을 바탕으로 한 民族宗敎로서 일제침략에 대항한 투쟁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과 성과를 남겼다. 또한 한민족광복운동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였고, 대부분의 광복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敎徒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광복운동에서 대종교가 차지하는 比重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滿洲로 진출하여 교세 확장을 위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0월에 북간도지사를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6일에는 박찬익을 앞세워 청산리에 시교소를 두었다. 1911년 6월에는 화룡현 학성촌을 중심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쳤고, 특히 1912년에는 나철을 중심으로 박찬익・박승익・심근・현천묵・백순・조창용・기길(나철의 부인) 등이 백두산 북쪽 화룡현 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종교 교조 나철은 1914년 5월 중국 화룡현 청파호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하고 포교를 위한 교구개편을 단행하였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개 교구와 중국・일본・구미지역을 관장하는 외도교구 등 5개 교구를 설치하였다. 南道敎區는 한반도 전역, 西道敎區는 남만주에서 중국 산해관까지, 東道敎區는 동만주 일대와 노령 연해주지역, 北道敎區는 북만주지역 일대를 관할하였다. 이러한 교구 설정은 교세 확장은 물론 나아가 국외 광복운동, 특히 중국에서의 광복운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사실상 국외 광복운동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서일은 대종교를 信奉하기 시작한 지 1년 만인 1913년 10월에 參敎로 피선되었으며, 그 후 3년 동안 수만 명의 敎友를 얻었고 知敎로 陞秩되어 東一道本司 典理로 임명되는 동시에 『오대종지강연』·『삼일신고강의』·『회삼경』 등을 저술하여 大倧敎의 진리를 闡明하였다.
 특히 서일이 知敎로 있으면서 방대한 經典을 저술하자 그가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교리를 품고 있음에 탄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이리하여 서일은 1916년 4월에 尙敎로 陞秩하여 總本司 典講이 되었으며, 같은 달 13일에는 한 단계 건너뛰어 최고 敎秩인 司敎로 超陞되었다. 정상적인 자격 기준에 의하면 16년이 소요되는 최고 교질을 4년도 못 되어서 달성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의 敎勢擴張을 위해 포교활동에 매진한 결과 대종교에 입교한 지 불과 3년 만에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였다. 서일이 단기간 내에 수많은 대종교 신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함경도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10년대 초기 만주 이주 한인들의 출신지별 통계를 보면 함경북도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서일과 고향이 같다는 동향 심리로 만주로 이주한 수많은 함경도 출신 농민의 절대적인 신뢰가 작용하여 대종교 포교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만주로 이주해 살던 韓人의 수는 2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이미 대종교를 직・간접적으로 신봉하였으며, 서일은 대종교 동도 본사의 책임과 함께 대종교 典講의 중책을 맡는 등 대종교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서일은 1919년 大倧敎 제2세敎主 茂園 金敎獻 宗師가 대종교 敎統을 전수하고자 간곡히 당부하였으나 시급한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5년간 보류하기로 하였는바 그는 이미 대종교 最高 指導者의 위치에 있었지만 최후의 선택은 조국광복사업이 優先하였으니 결국 대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였다.
 일반적인 기록에 서일이 1911년 3월에 ‘중광단’을 조직하고, 1912년 10월 대종교에 입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重光’이란 단어는 대종교의 중광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서일의 입교시기와 배치되며, 이는 대종교중광60년사에 부분적인 오류나 누락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강용권은 『대종교중광60년사』의 기록과는 달리 “서일이 1902년 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경원에서 7, 8년간 학교선생 노릇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일이 渡滿하기 전 1~2년 사이에 이미 대종교와 인연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Ⅲ. 서일의 思想
1. 思想形成의 背景 
 어린 시절 서일의 스승이었던 鶴陰 金魯奎는 국경지대인 함경북도 경원에 살고 있으면서 자기 고장 일대의 역사지리학적 관심이 많은 지식인으로서 북쪽 疆域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北輿要選』과 우리의 토속사상들을 담은 『鶴陰遺稿』 등을 남긴 인물로 민족의식이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북여요선』은 상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대신 李乾夏, 농상공부대신 金嘉鎭, 白山樵夫 柳完茂, 吳在英의 序文과 北墾島修約委員 李秉純의 跋文이 수록되어있다. 상권은 간도 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일대의 古蹟들과 역사 지리학적 고찰을 통해 조선에 귀속됨을 밝혀주고, 하권은 1882년 韓淸 兩國 간의 境界문제에 관한 교섭내용이 담겨있다.
 서일이 첫 스승이었던 金魯奎로부터 漢學을 修學하고 周易을 전공한 것이 그가 數理學的 기본을 철저히 다지고, 해박한 지식을 통한 학문적 소양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을 것이며, 또한 國土愛와 민족의식이 강한 스승의 가르침이 훗날 서일로 하여금 救國을 위해 투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咸一學校를 세운 이운협은 학교운영에 그의 재산을 거의 바쳤으며, 당시 실력 있는 교사를 초빙하기 위하여 경성으로 올라와 동분서주할 정도로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에 皇城新聞도 그의 학문이 넉넉한 著名 敎師의 초빙을 다음과 같이 축하하고 있다. 
 “咸北 鏡城郡 有志紳士 李雲協씨가 元來 敎育에 熱心ᄒᆞ더니 今番에 咸一學校를 擴張ᄒᆞ고 道內에 文學이 裕餘ᄒᆞᆫ 人士를 募集ᄒᆞ며 資金을 鳩聚하야 全道 敎育을 發興케 ᄒᆞ고져 ᄒᆞ야 李雲協씨가 上京ᄒᆞ야 一邊 學部에 請願ᄒᆞ며 一邊 各 敎育家에 敎師를 泣求ᄒᆞᆫ다더니, 李相益씨가 李雲協氏의 熱心을 感服ᄒᆞ야 敎師로 特許하야 日間 發程ᄒᆞᆫ다니 咸北 一道의 敎育將來를 爲ᄒᆞ야 祝賀ᄒᆞ노라.”
  이운협은 경성군의 민족운동가요 교육가로서 평안도의 안창호에 비할 만큼 熱血的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1910년에 죽는다. 후일 서일이 남긴 저술들을 볼 때 서일이 다양한 학문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시기는 咸一學校 前身인 경성 私塾에서 수학할 때와 1902년 사숙을 졸업한 후 10년간 지역사회에서 계몽운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던 때로 동・서양 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경험을 한 것이 확실한 듯하다.
 또한 서일이 이 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야겠다고 결심했던 듯하다. 당시 설립자 이운협은 항상 학생들에게 “제군은 공부 잘 하여 입신양명이나 이현부모할 생각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애국심에 투철하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함일학교가 설립된 경성지역은 1908년 함경북도의 대표적인 의병인 경성의병이 항일전을 벌였던 지역으로 일찍부터 開化衣食과 민족의식이 강했던 지역이다. 경성의병은 두만강 대안의 노령 연해주 및 간도지역의 의병과 깊은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으며, 애국계몽운동 노선을 표방하던 정치단체인 大韓協會 경성지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그 지역 의병을 지원하기 위해 郡內 각지로부터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으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 군자금 모금운동은 학교후원 명목으로 전개되어, 먼저 보성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또한 함일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학교지원 사업에 주력하는 듯 하였으나 실제로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자금은 대부분 의병 지원금이었다. 
 이 시기 서일은 같은 지역에서 주로 애국계몽운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서일 역시 경성군의 의병 또는 대한협회의 활동에 참여했거나 국권회복을 위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일은 대종교를 접하고 그 정신으로 중광단을 만드는데, 그러한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나철이라는 인물과의 만남이다. 즉 『三一神誥』와 『神理大全』이라는 책을 경험하면서다. 『삼일신고』는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하기 이전인 1905년 11월 30일, 우연히 頭岩 伯全이라는 노인을 만나 檀君敎에 입교하고 받은 秘典으로서, 대종교의 주요 경전이 되는 책이다. 또한 『신리대전』은 나철이 『삼일신고』에 나타나는 神理를 神位・神道・神人・神敎로 나누어 구명한 책이다.
 서일은 三一의 원리야말로 白峯神師께서 나철에게 전하여준 것으로, 나같이 갖지 못한 사람으로서도 또한 다행하게 나철 스승으로부터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더불어 들음이 있었음에 감격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서일이 나철을 만나 대종교의 심오한 진리에 눈뜨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일이 나철을 만난 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일이 구국일념을 다지며 1911년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 잡을 때는 홍암 나철 대종사가 대종교 총본사를 경성으로부터 화룡현 청파호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고 포교활동을 시작한 시기였다. 
 서일은 나철 대종사를 찾아가 삼일철학의 가치를 깨닫고 크게 감화를 받아 1912년 10월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서일이 본격적인 광복운동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한 정신적 배경이 대종교이며, 또한 대종교를 통해 그의 삶의 가치가 새롭게 전환되었으리라는 것은 그가 평생을 대종교의 정신 속에서 修道하는 자세로 살았고 그가 남긴 著述들이 모두 대종교의 敎理를 궁구하는 내용이라는 점이 증명한다. 그러나 서일이 나철을 만나기 전에 대종교와 어떤 교류가 있었으며, 어떻게 중광단을 조직(1911)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2. 서일의 著述
 서일은 나철을 만남으로써 대종교 교리와 심오한 진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고 그 종교적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통해 이룩한 그의 哲學的 位相은 우리 사회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던져 주었다. 이는 철학의 不在라는 우리 현대사에서 삼일철학이라는 思想體系를 獨步的으로 체계화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종교적 스승인 나철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는데, 서일이 나철을 찾아가 삼일철학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고백한 道覺詩를 보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서일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회삼경』은 分三合一의 倧理를 36종의 妙化大法으로 歸一케한 唯一의 眞經으로 불교의 묘법, 유교의 역학, 도교의 玄理를 종합한 내용이니 대종사의 神理大全과 아울러 敎理闡明에 雙璧을 이루었다.
2. 『三一神誥의 圖解講義』는 한배검 敎化의 大訓을 神人一理의 境地에서 宇宙觀・來世觀・人生觀 등을 종교철학으로 一目瞭然하게 밝히었고,
3. 『九變圖說』은 대종교의 상징인 圓・方・角의 三妙를 대종교 교리의 三德으로 통하는 性・命・精의 이치와 연관시켜 그림을 통하여 해설한 것이며,
4. 『眞理圖說』은 天地人 三極의 원리를 生・化・成의 變則에 의하여 返眞, 즉 가달(妄)을 돌이켜 참(眞 )으로 돌아가는 究竟을 밝힌 글이다.
5. 『神理註解』는 三神・三宗의 同義와 會三歸一의 化行妙法을 明示하였고,
6. 『宗旨講演』은 나철이 발포한 五大宗旨, 즉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들 것・정성으로 성품을 닦을 것・사랑으로 인류를 합할 것・고요함으로 행복을 구할 것・부지런함으로 살림에 힘쓸 것 등의 다섯 가치를 인생의 本能・自由・幸福 등을 現代哲學思潮에 비추어 實踐面을 강조하였으며,
7. 『三問一答』 은 三思生(서일 자신)과 一意子(나철 스승)의 문답형식의 글이다.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토대로 상권에서는 서언과 함께 ‘하늘에 대한 헤아림[天論]’, ‘하느님에 대한 헤아림[神論]’, ‘하늘집에 대한 헤아림[天宮論]’, ‘누리에 대한 헤아림[世界論]’을 구명하고, 하권에서는 ‘참이치에 대한 헤아림[眞理論]’ 네 부분에 대한 이치 설명과 결론을 담았다. 특히『삼문일답』은 다른 종교의 敎理와 대종교의 삼일사상을 비교 講論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머리말만 남고 대종교의 壬午敎變 당시 모두 분실하였다. 
8. 『神事記의 節安考定』은 造・敎・治 三化의 神功을 古記의 參照로 考定한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회삼경』은 『삼일신고』・『신리대전』・『신단실기』와 함께 함께 대종교 4대 經書 중의 하나로 추대되었으며, 총 9장으로, 「세검」(三神)・「세밝은이」(三嚞)・「세가달」(三妄)・「세길」(三途)・「세나」(三我)・「세윤리」(三論)・「세누리」(三界)・「세모음」(三會)・「하나로 돌아감」(歸一)을 각 장에 담아 풀이하고 있다.
 또한 서일은 대종교 교리・교사의 정리와 보급에도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그가 대종교동도본사를 이끌던 시절인 1918년 1월에, 대종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신사기』・『신리대전』과 서일 자신의 연구물인 『회삼경』・『圖解三一神誥講義』 등을 하나로 엮은 『四冊合附』를 출간했는데, 당시 대종교동도본사와 대한군정서의 계화・정삼・고평 등도 참여하여, 계화는 『신사기』 註解를, 정삼은 『회삼경』의 발문(跋文)을 썼으며, 고평은 『사책합부』의 편수(編修)를 담당하였다.

Ⅳ. 서일의 抗日運動
1. 이념적 항일운동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자 국외로 亡命한 다양한 系譜의 항일 민족운동자들은 일제와 전쟁을 결행함으로써 조국광복을 기필코 달성하겠다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韓人청소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실력양성을 통한 민족운동지도자를 양성해 내고자 교육과 구국계몽에 心血을 기울였다.
 따라서 북간도를 비롯한 각처에 한인마을이 형성된 곳이면 거의 모든 지역에 韓人學校가 세워졌다. 북간도의 연길・화룡・왕청・훈춘・안도 등 5개현만 해도 1916년 말 현재 여러 유형의 한인학교는 총 158개교에 학생 수도 모두 3,879명이었다. 이와 동시에 요령, 흑룡강 및 통화, 길림 등지에도 적극적으로 학교를 세운 결과 1931년에는 동북의 민영학교가 280여개 소에 학생 수 7,070명이었으며,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108개교에 학생 6,433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교육 사업에 얼마나 비중을 두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서일도 만주로 건너가서 1913년 5월에 東滿洲 汪淸縣 德源里에 明東學校를 창설하였으며, 이때부터 서일은 국내에서와는 달리 나라의 광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在滿 한인 청년동지들의 民族精神 교육에 매진하게 된다. 또한 만주 각지에 夜間 강습소와 小學校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과 育英事業에도 힘썼다. 
 또한 『一民報』와 『新國報』라는 순수 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 동포들에게 광복의식을 고취시켰다. 여기서도 주목되는 것은 순수한글 사용의 정신적 배경이 대종교 정신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주시경이나 지석영・김두봉 등 한글 개척의 선각자들이 모두 대종교도이며, 대종교 정신에 따라 한글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과 연결되는데, 서일도 훈민정음원리를 저술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일이 일찍이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의 先鋒에 서게 된 것은 대종교의 투쟁목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종교의 광복운동은 국권회복의 차원을 넘어서 대종교의 理想國家인 倍達國土 재건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이러한 목표완성을 위해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과 더불어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에 서일은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광복운동으로 연결 된다. 대종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적 信仰運動으로 崇祖報本의 큰 뜻을 밝힘으로서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일심단합으로 倭政의 侵略魔手를 물리치고 조국의 衰運을 挽回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일을 비롯한 중광단의 중심인물들은 각기 화룡현・왕청현・연길현 등으로 나뉘어 포교와 더불어 광복운동의 거점을 확산시켜 갔다. 1914년 5월 13일 화룡현 청파호에 대종교 총본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도, 서일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서일은 수전병행의 실천방안으로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가 직접 설립한 明東學校를 위시하여 중광단에서 설립한 교육기관도 東一學校・靑一學校・學成學校 등 10여 개를 헤아린다. 서일은 대종교와 광복운동, 그리고 민족교육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일치시키면서 수전병행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또한 1918년에 대한광복선언서(일명 戊午光復宣言)가 만주에서 발표되었는데, 이는 2․8독립선언 또는 3・1독립선언보다도 앞선 것이며,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인 동・북 만주에서 먼저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선언서는 일제 침략에 대한 사생결단의 혈전을 선언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광복의지를 최초로 대한민국 대표의 이름으로 표명한 사건으로, 무장 항일투쟁의 새로운 장을 예고하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서의 서명 날인자에 관해서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허혁・이세영・한흥・최명학・임방・이승만・김약연・이대위・황상규・안창호 등 10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가 대종교 중심인물이었다. 본 선언서의 발표 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大韓獨立義軍府이나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가 언급되어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총본사인 것으로 보아 대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 갈래는 서명자가 김교헌・서일・김좌진 등을 위시하여 39명으로 되어 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서일 등 39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무오독립선언을 發布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은「무장독립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에 “1918년에는 기미독립선언의 전주곡인 무오독립선언서를 東三省 혁명 거두의 署名으로서 발표했다. 同 선언서에 서명한 이는 39인으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유동열, 신팔균, 김동삼, 손일민, 김동평, 나우, 서상용, 황상규, 김좌진, 서일 등이다.’ 이에 따르면 1918년 서일 등의 광복선언은 중광단의 것이라기보다는 만주일대의 유력한 광복운동자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다만 서일 등의 중광단이 同 선언의 주동단체였기 때문에 世間에서는 同 宣言을 중광단의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라 본다.”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대한광복선언서의 서명자 명단에는 분명 서일이 빠져 있다. 그러나 선언서에 날인한 흔적은 없으며, 만주일대의 유력한 광복운동가들이 망라되어 있고 대종교에서 서일의 위치를 감안하면 당연히 참여하였을 것이므로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서일은 한민족의 先驅者요 간도 移住民의 지도자이며, 그는 국권을 유린당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모든 노력과 최선을 다한 애국자이며 항일투사이다. 서일이 자신의 전 生涯를 우리 韓民族의 광복과 자유를 위해 바쳤다는 것은 서일의 조천을 애통해 하는 다음의 光復新聞 기사를 보아도 能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鳴呼 痛哉라 先生의 逝하심이여 誰를 爲하야 今日의 一擧가 有하엿으며 誰를 爲하야 今日의 一死가 有하엿는가 先生의 一擧난 果然 二千萬同胞의 自由尊榮을 爲하여스며 先生의 一死난 또한 十三義士와 數百良民의 無辜被害함을 爲함이시니 一擧도 國을 爲하여섯고 一死도 同胞를 爲함은 곳 先生의 高義가 己命을 己의 命으로 自認치 아니하고 오직 同胞의 生命으로 곳 己의 命을 삼으시며 同胞의 死生으로 곳 己의 死生을 定하여슴으로 그의 生도 衆을 從하여 生하여섯고 그의 死도 또한 衆을 從하여 死하섯도다 …… 중략…… 우리들의게는 萬里長城이 문허져스며 大廈棟梁이 꺽거짐 갓도다”

2. 무력적 항일투쟁
 (1) 武力軍團 組織
 대한군정서는 동북만주의 한인독립운동단체 가운데서 역사, 조직, 병력면에서 단연 첫손에 꼽아야할 존재이며, 대한군정서의 역사는 重光團에서 비롯된다. 중광단은 서일이 경술국치를 겪으면서 무력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11년 초 만주로 건너가서 再擧를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동년 3월에 왕청현에서 광복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되었으며, 본영은 吉林省 旺淸縣에 두었다. 서일이 의병을 모아 군단을 만들게 된 것은 고향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경성의병의 영향인 듯하다. 그러나 중광단은 조직초기에는 무기를 갖추지 못해 군사 활동은 하지 못하고 청년동지들의 정신교육과 계몽운동에 치중하였다. 
 국내 3․1운동 餘派가 만주에 파급되자 1919년 3월 25일에 서일・계화・채오・양현 등이 중광단을 기반으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적극적 軍事行動을 취하려는 목적에서 북만주에 산재한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大韓正義團을 조직하였으나 당장은 武器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군사부문에 非專門家로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으므로 서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좌진・조성환・박찬익・박성태 등 군사전략에 밝은 인물들을 영입하여 1919년 8월 7일 종래의 정의단을 임전태세의 軍政府 조직으로 근본적인 개편을 하였다, 
 本營을 국경이 가깝고 幽僻한 密林地帶인 길림성 왕청현 西大坡溝에 두고, 각처에 警察業務와 정보연락을 하는 警信分局 두었으며, 주요간부는 총재 徐一, 총사령관 金佐鎭, 참모장 李章寧, 사단장 金圭植, 여단장 崔海, 연대장 鄭勳, 연성대장 李範奭, 경리 桂和, 군기감독 梁玄 등이었다.
 동년 12월 徐一은 玄天黙·曺成煥·李章寧·김좌진·이범석·김규식·桂和·鄭信 등과 協議하여 상해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요청으로 大韓軍政府를 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和龍縣 밀림지대에서 將兵을 양성하였는데 간부와 장교는 물론이고 士卒軍屬까지 대종교 교도로 조직되었고 軍糧과 군자금은 일반 敎徒들이 부담하였으며,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서일로부터 항일전쟁을 위한 군대 편성과 훈련을 책임 맡은 김좌진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일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십리평으로부터 약30리의 森林지대에 兵舍 8棟을 짓고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아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장교 朴寧熙・白鍾烈・姜華麟・吳詳世・李雲岡・金勳 등을 비롯한 훈련장교 및 각종 교재를 공급받고, 간도일대에 18~30세의 청년들을 뽑아 6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운영하였다. 교과목은 정신교육, 역사(세계 각국 독립사 및 한일관계사), 군사학, 술과(병기의 조작법, 부대의 지휘운용법), 체조 및 구령법 등이었다. 
 북간도에서 대한군정서가 조직된 시기에 서간도에서는 부민단과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었으며, 양 군정서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서로 협의, 원조하였다. 주목할 점은 양 군정서 간부들이 대부분 대종교 신도였으며, 양 군정서의 활동이 대종교 단군신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양 군정서 대표인 서일과 이상룡은 서신과 대표 파견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군사작전 협조를 도모하였다. 
 서일의 구국방략은 「무오독립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齊],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 한 죽음[一死]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傾家復國]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것은 戊午年인 1918년 11월 13일 서일이 길림 화룡의 삼도구 총본사에서 대종교 2세교주 金敎獻을 비롯한 윤세복,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이시영, 이상룡, 신채호, 이동녕 등과 함께 중광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은 민족종교의 바탕 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을 광복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성인으로 독립투쟁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투영하고 있으며,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서막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이해되어 진다. 서일은 “궐기하라! 독립군!...육탄혈전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만민이 피 끓게 하는 구호를 제일먼저 내놓고 강력한 무장군단을 조직하여 항일전쟁을 선도하였으며, 후일 대한군정서는 이 선언의 무장혈전주의를 계승하여 청산리전투에서 미증유의 대승리를 올리게 된다. 
 (2) 軍資金 募集
 대한군정서는 武器購入과 食糧, 軍需品 등의 調達을 위하여 막대한 軍資金이 필요하였으며, 군자금 募金은 間島地域에 거주하는 同胞로부터의 徵收金과 寄附金 및 國內에서의 募捐金 등으로 조달하였다. 
 처음에는 같은 지역의 동포로부터 徵收金 문제로 間島大韓國民會 등 다른 단체와 중첩되어 충돌이 있기도 했으나, 서일・김광국 등 수뇌부의 방문 설명으로 具春先 등은 이것을 양해하고 금후 국민의회와 정의단은 서로 提携協力一致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진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불화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和龍縣 밀림지대에서 將兵을 양성하였는데 간부와 장교는 물론이고 士卒軍屬까지 대종교 교도로 조직되었고 軍糧과 군자금은 일반 敎徒들이 부담하였으며,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대한군정서는 軍資金을 징수함에 있어서, 징수대상자의 재력을 감안하고 또 분납을 통하여 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으며, 또한 「각 단체의 勢力範圍는 대체로 區劃되어 있어서 軍資金・軍糧을 모집할 때는 다른 세력범위를 侵犯하지 않도록 미리 協定을 하고 있는 것 같다. 



府政軍韓大







大韓軍政府財務署募捐局

大韓民國
元年 
月 


嘉尙하여 
此票를 
交付함 
一. 
國家光復大業을 
爲하여 
盡力한 
誠忠을
一. 
右記金額을 
大韓獨立에 
關한 
準備金으로
領收함 
一. 
金    



受納票


 號


第  




募捐局章
府財務署
大韓軍政





  따라서 군자금 募集 시기에 있어서는 상당히 고려를 하고, 納稅徵收의 分納主義를 채용하여 전기·후기로 하여 징수하고, 또 그 財源이 일시에 고갈되지 않도록 하였다. 평균 토지 15晌(약5정보) 이상을 가진 자에 한하여 백 원 이상 삼천 원을 本年 8월부터 11월까지의 기간에 出捐하도록 布達하고 일반민에 대해서도 평군 조(粟) 2두, 草鞋 2足分을 납부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대한군정서는 군자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미리 財力을 조사해서 고지서를 발부하고 간도 각 방면에 募捐隊를 파견하여 이를 징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軍資金 모집에 응한 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受領을 증명하는 收納票를 교부함으로써 二重徵收의 피해를 피하고자 하였다.
 대한군정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간도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모연대를 파견하였다. 이때의 문서를 보면, 군자금의 기부를 받고 收納票와 함께 感謝狀을 발부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군정서는 또한 만주·노령지역과 國內로부터 재력 있는 애국적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보내온 기부금을 접수하여 軍資金에 보충 사용했으며, 이러한 군자금 모집을 통하여 충분하게 다량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軍糧은 약 4∼5개월분을 능가하는 食料를 이미 준비하여 저장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大韓軍政署 독립군은 매우 잘 武裝되어 있었고 西大坡 근거지에서는 軍糧도 충분히 확보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만 보아도 대한군정서의 군대는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확보함으로써 다른 단체의 무력부대보다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은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에는 대종교를 신봉하는 家口수가 많은 것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

 (3) 武器 確保
 무기 구입은 주로 체코군대와 러시아로부터 구입하였다. 서일이 직접 현장을 뛰면서 섭외를 하였으며, 청산리전투 직전에도 노령지역 현지에 나가 무기운반대와 함께 하였다.
 대한군정서 일지에는 7월과 8월에 걸쳐 무기 구입을 위한 운반대가 출발한 기록이 있다. 1920년 7월 26일 출발하여 흠춘을 경유 3일 뒤에 연해주에 들어가게 되었고, 또한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조성환이 동행하였으며, 무기운반대는 1920년 9월 7일 대한군정서에 귀대하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경과하게 된 것은 무기대금으로 들고 간 화폐가 화폐개혁으로 인해 사용할 수가 없게 된 사정에 기인한다. 
 일차세계대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많은 체코인들이 오스트리아군의 일원으로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 프랑스를 경유하는 귀국길의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한국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한편, 그들의 귀국경비 마련을 위해서 신식무기를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어 한국의 군대로서는 항일무장투쟁에 큰 힘이 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청산리전투 당시 군사력은, 군사 1,600명, 군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상해임시정부 간도파견위원 안정근은 총기 4천정 반입을 위해 東道軍政署 및 東道獨立軍署에서 약 300명의 운반부대를 삼차구 방면으로 파견하였으며, 徐一 일파의 軍政署는 金永學 및 崔禹益의 알선으로 浦潮 및 「ニコリスク」 방면의 露國過激派로부터 軍銃 3만정의 양수 계약을 마쳤다. 최근 김영학으로부터 일부 인도를 통보 받아 玄甲을 수송지휘관으로 하여 운반부대를 파견하였다는 정보가 있다.
 이와 같이 대한군정서의 무기 확보 또한 다른 단체와 비교도 안될 만큼 충분히 확보한 것을 보면 총재 서일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군정서의 근거지는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의 큰 森林의 한 복판에 있었으며, 울창하고 끝없는 이 대 삼림은 동으로 시베리아까지 뻗치고 남은 두만강변에, 서는 密山縣 虎林 遼河에 이르렀다. 이 원시림은 우리가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은밀히 대량으로 운반해 오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간도지방으로 들어오는 무기는 일부 東淸沿線 방면에서 반입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은 露領방면에서 반입되는 것으로서 대개 다음의 세 가지 경로와 같다..
 ○ 烏蘇里沿線 방면에서 왕청현 奧地지방으로 들어오는 경로
   오소리연선 방면에서 왕청현 오지방면으로 반입된 것은 철로「ニコリスク」를 경유하거나 또는 「スパ-スカヤ」 柳亭口驛 방면에서 陸路國境驛 「ポグラニ-チナヤ」 부근으로 나와 교묘하게 국경을 넘어 屯田營通路 또는 三岔口를 경유 大烏蛇溝路로 나와 銨芬河源으로 거슬러 올라가 왕청현 오지 羅子溝 지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秋風방면에서 왕청현 오지 방면으로 들어오는 경로
   浦潮(블라디보스토크) 또는 「ニコリスク」 지방 및 秋風지방에서 왕청현 오지방면으로 반입하는 것은 東寧縣의 國境 胡布圖河 沿線 또는 三岔口에서 國境을 넘어 大烏蛇溝에서 水流를 따라서 老黑山으로 나오는 72個項子, 나자구 火燒舖를 경유해 혼춘현 大荒溝 또는 왕청현 春明鄕 西大坡 방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 南部 沿海州 지방에서 혼춘현으로 들어오는 경로
   혼춘현 국경방면에서 반입되는 것은 주로 紅旗溝 上源지방 森林지대 또는 「パラバシ」 방면에서 교묘하게 國境監視를 피해 琿春 오지방면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 먼저 露領에서 過激派 또는 기타 연락인 들이 구입교섭을 하거나 또는 무기를 수집해서 중소 국경부근으로 운반해 간도방면의 同志團體로 通牒하여 건네주면, 이것을 반입할 때에는 특히 체력 강건한 자를 선발하여 보통 1인당 2정내지 3정을 메고 적당하게 탄약을 분담해서 삼삼오오 연락을 할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행진한다. 도중에 중국관헌이 있는 지방에서는 우회 또는 상황에 따라서는 금전을 주고 매수책을 강구하여 통과하고 있으나 저들이 가장 고심하는 것은 중소 국경을 통과하는데 금력 또는 비상한 노력을 지불하는 것이다.

 (4) 靑山里戰役(서부전선)
일제는 반드시 만주로 진출하여 중국을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있는데, 만주방면에서는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武裝勢力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지역에서 날로 커지면서, 빈번하게 日本機關을 파괴하자, 일제는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일제 침략자들은 1920년 5월경부터 만주방면에서 우리 광복군세력을 제거하기위해 중국에 협조를 구하였으나, 중국 측 미온적 태도로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일제는 수차의 대책회의를 갖고, ‘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계획’을 만들어 간도지방의 병력투입을 內定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대한군정서에서는 무력의 확충과 함께 외교 관계를 통하여 대내·대외적으로 융화 단합을 기하였으며, 특히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李相龍)과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은 서로 연락하면서 대일 합동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군정서는 홍범도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崔振東 일명 : 명록)의 도독부(독군부)와도 항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서로 호응하였으며, 도독부의 장병은 수시로 군정서 사령부를 견학하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평소의 친밀한 협조는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3군 협동작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강압 으로 궁지에 몰린 중국의 현지 당국은, 그러한 자기들 입장을 설명하고 자주 양해를 구하면서, 7월 1일에도 왕청현의 제4구 경찰분소장 王德隣이 군정서의 총재·부총재·사령관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군의 장엄한 형세를 찬양하면서 일본 측의 압력 때문에 자국 관헌으로서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속히 무장을 해제하든가, 다른 곳으로 군영을 옮겨 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그 동안 무기 구입 차 노령 방면에 나가 있던 총재 徐一・재무부장 桂和는 曹成煥을 동반하여 본영으로 돌아오고 기계국장 梁玄 및 무기 운반대 제1중대장 李敎性・제2중대장 李麟伯・제3중대장 崔浣 등이 모두 무기를 운반, 총재 일행의 뒤를 따라 귀영하니 오랜 숙원의 무기증강 과업을 완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군 침입정보를 입수한 洪範圖・安武 등 국민회 엽합部隊로부터 함께 長白山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 결전을 하자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군정서에서는 이동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9일에는 사관 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12일에는 보병 1개 대대 및 敎成隊를 편성한 다음, 20일에는 李範奭을 단장으로 하는 旅行團을 조직하여 백두산을 향해 대부대가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1920년 7월 중에 이미 소위 ‘間島 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우고 나남에 있는 제9사단 병력은 물론, 러시아에 나가 있는 병력까지 돌려서 만주방면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국제 외교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구실을 찾아내야만 했다.
따라서 저들은 만주지방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혼춘사건을 조작하고, 혼춘성을 습격한 무리는 한국인 무장대 1백 명과 소수의 러시아인·중국 관병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며, 독립군 토벌에 결부시키려고 조작 선전하였다. 그리고는 ‘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라는 구실로, 미리부터 예정하였던 소위 간도 출병계획을 곧바로 실현에 옮겼다.
이것은 마적을 빙자하여 한국광복군을 궤멸시키려는 속셈이었으며, 9월초 混成團長 孟富德이 직접 서대파구 소재 대한군정서를 찾아와서 東三省 당국의 말을 전언하였다. 이때는 벌써 「시베리아」에 출전하였든 日軍第19師團이 張鼓峰을 넘어 남하하고 第21師團은 羅南으로부터 北上하여 汪淸縣 大波溝에 있는 서로군정서를 목표로 兩狹作戰을 하려고 進攻하여 오던 터였다. 
 大韓軍政署가 汪淸縣 西大坡를 떠나 1천 8백의 인원과 1백 80여 대의 우마차량으로 야음과 山路를 이용한 완만한 이동으로 大坎子를 거쳐 5백여 리를 강행군하여 10월 16일 和龍縣 三道溝(길림성 화룡현 청산리)로 들어갔으며, 이때 이미 출동하여 행동을 개시하는 일본군의 동태를 주시하던 洪範圖・安武・崔振東(일명: 명록) 등의 다른 독립군 부대도 뒤따라 도착하게 되니, 여기서 靑山里 대결전을 앞두고 연합작전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회의 결과는 청산리 부근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되, 연합군을 3개 연대로 편성하여 적을 요격 섬멸하기로 하였다. 당시 독립군 3개 연대의 병력 및 배치 상황을 보면 아래와 같았다.

연대
대 장
병 력
배치 장소
제1
홍범도
6개 중대
완루구(完褸溝 일명 : 만록구) 중앙 산록
제2
김좌진
2개 대대
이도구(二道溝) 좌편 고지
제3
최진동
6개 중대
동 우편 고지

 그리고 3개 연합군의 중앙진을 담당하였던 제2연대, 즉 대한군정서 사령부의 전시 편성은 아래와 같았다.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백종열(白鍾烈)・한건원(韓建源)·김훈(金勳), 보병 대대장 김규식(金奎植), 부관 김옥현(金玉鉉),제1중대장 강화린(姜華麟), 특무 정사 나상원(羅尙元),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熹:대대장서리겸),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특무 정사 권중행(權重行),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제1중대 제1소대장 강승경(姜承慶), 제2소대장 신희경(申熙慶),제2중대 제1소대장 채춘(蔡春), 제2소대장 김명하(金明河), 제3중대 제1소대장 이익영(李翊永), 제2소대장 정면수(鄭冕洙), 제4중대 제1소대장 김동섭(金東燮), 제2소대장 이운강(李雲岡), 기관총대 제1소대장 김덕희(金德喜), 제2소대장 최인걸(崔麟杰)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동년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에 걸쳐서 전개된 약 9개의 전투로 이루어져 있다. 9개의 전투 중 우리가 흔히 청산리전투로 부르는 첫 번째 전투는 엄밀하게 말하면 백운평전투이다. 이를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청산리전투 요약

전투명
장소/시간
한국군 참가부대
일본군부대
특 이 사 항
白 雲 坪
전  투 
三道溝 靑山里 白雲坪/10월    21일 오전
大韓軍政署(김좌진 지휘/연성대장 이범석
야마다(山田)부대
(보병 연대급)
협의의 청산리전투로 불림 일군200~300명 사망, 매복 작전
完 樓 溝
전  투
二道溝 완루구 / 21일 오후  ~22일 새벽
대한독립군(홍범도지휘) 및 연합부대(국민회군,한민회,신민단,의민단,광복단)
東支隊 隸下部隊 中 1개 부대
유인작전에 의한 일본군끼리의 오인사격 (일군 400명 전멸) 및 아군의 협공
泉水坪전투/一名 새물둔지 전투
頭道溝 泉水坪/ 22일 새 벽
대한군정서
1개 기병중대: 시마다(島田) 중대장 지휘/기병27연대소속
일군 116명 사망 / 한국군전사 2명, 부상17명 /기습공격
漁 郞 村
전  투
頭道溝 漁郞村 서남방 /
22일 오전 9시~당일 저녁
대한군정서와 홍범도부대의 공동작전
東支隊 주력부대 기병연대장 가노(加納) 전사
전투기록의 차이가 가장 심함 / 일군 및 임정기록에는 홍범도 참전기록이 있고, 대한군정서일지에는 없음 / 일군 1,000여명 사망추정, 가장 대규모의 전투, 아군피해도 100명 전사


전투명
장소/시간
한국군 참가부대
일본군부대
특 이 사 항
맹 개 골
전  투
만기구 맹개골
/ 23일 오후 3시
대한군정서
예하 1개 부대
기병 30명
일 기병 10명 전사
만 기 구
전  투
만기구 후방 삼림
대한군정서
일병 50명
일병 200명의 추격을 받아 삼림으로 행군(체력저하)
쉬溝전투
쉬구/24일 새벽
대한군정서
騎砲 6문 / 
  보병 100명
심한 기갈에 의한
전투 중지
天 寶 山
전  투
24일 저녁 ~ 25일 새벽
홍범도 부대 및
대한군정서(이범석 지휘부대)
1개 중대
24일 2회 / 25일 1회 기습공격, 피해기록은 없고, 일본군의 1개 대대 지원요청 기록만 있음.
古 洞 河
전  투
고동하 계곡
/ 25일 저녁  ~26일 새벽
홍범도 부대
東支隊 예비대
일군의 유일한 선제 공격;병력오판으로 일군 100명 사망 / 예비대의 저지선이 무너져 아군은 일본의 토벌전 포위망을 탈출.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던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명은 대소전쟁 10여회에 걸쳐 왜병을 1,200여명 사살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해방이후의 현실은 백운평전투만 집중 조명되고 실제로 가장 큰 전과를 올리고 모든 부대가 참여한 어랑촌전투 및 기타 다른 전투는 부각이 되지 못했다.  또한 홍범도부대의 역할은 학계 일각에서만 규명되고 있을 뿐 국민 일반의 뇌리에는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만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이범석이나 김좌진장군의 경우 본인이나 후손들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여전히 큰 역할을 한 반면 홍범도부대를 비롯한 다른 참전자들의 경우 이럴 기회가 상대적으로 극히 제한되었던 점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한군정서는 상해임시정부 소속인데 반해 홍범도부대는 임정소속이 아니었던 점도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祈戰死歌는 이범석 장군이 작사 작곡한 獨立軍歌로서 청산리 싸움터에 나가면서 불렀다고 하는데, 후손들에게 복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한 목숨 깨끗하게 바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비장한 결의를 엿볼 수 있다.

“하늘은 미워한다, 倍達族의
自由를 抑奪하는 倭敵들을.
三千里江山에 熱血이 끓어
憤然히 일어나는 우리 獨立軍.
白頭의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鴨綠江 얼음 위엔 銀月이 밝아
故國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갚고야 말 것이다, 骨髓에 맺힌 恨을.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千萬代 後孫의 幸福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戰死를 하게 하소서.“ 

 (5) 東部戰線의 反討伐戰
 지금까지 庚申年反討伐戰 하면 서부전선인 靑山里戰役만을 말하고 동부전선의 반토벌전은 잘 모른다. 그러나 경신년 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것은 당시 中・日 군경들의 토벌에 의하여 항일부대의 주력은 연길현 서쪽과 화룡현 쪽으로, 기타 항일부대는 혼춘현 동북부와 왕청현 동북부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서부전선의 항일부대는 홍범도부대와 안무의 국민회군, 혼춘한민회군 및 기타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대한군정서 주력군을 말한다. 
 항일부대들의 서부전선 이동은 화룡현 2・3도구로 청산리와 어랑촌 등지는 한인들이 일찍 정착하면서 여러 촌락을 형성하고 있어 인적 물적 공급을 만족시킬 수 있고, 지형적으로 사방이 심산계곡에 원시림이 우거져 ‘難攻易守’의 유리한 지역이며, 중・일 세력이 미약한 지역이다. 이곳은 조선무산지구와 인접해 국내진입이 용이하고 특히 화룡현 삼도구 일대는 일찍 나철 대종사 등이 대종교 총본사를 건립하고 포교한 곳으로 신도가 다수 거주하고 있어 대한군정서는 이곳에 근거지를 세우려고 했었다.  그리고 동부전선인 혼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혼춘민회와 신민단군이 中露변경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원기지에서는 대한군정서 잔류부대와 각 단체 간부들이 잠복하여 활동하였고, 왕청현 나자구와 노흑산 일대에는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나자구의사부 등에 소속된 약 850명가량의 부대원이 있었다.
 동부전선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인데, 첫째 이곳은 반일부대들의 원래 근거지여서 그곳 민중들의 반일정서가 높고 조직화 되어있다. 둘째 中露변경지구로 항일단체들이 항상 왕래할 수 있고, 셋째는 항일부대들이 노령과 연계하여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후방기지였다. 일본침략군은 항일부대들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것을 알면서도 동부전선에 1만여 명의 침략군을 투입하여 항일부대를 토벌하고 기지를 파괴하여 서부와 연결을 단절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동부전선의 항일부대들의 전투상황은, 
 ① 10월23일 대한군정서 잔류부대가 십리평에서 아시다와 다까다 등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항일군의 토로를 막을 생각으로 금화골 산중에서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는데, 매복해있던 반일군은 적들이 가까이 오자 맹공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약 3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일제의 기록으로는 저들의 피해가 1명 죽고 2명 부상 입은 것으로 되어있다.
 ② 10월 27일 150여명 나자구의사부군은 노모저 하구에서 다요기병소대, 아베대대의 1개 소대, 히데시마 대대의 1개 중대, 1개 기관총 소대 등과 약 2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③ 11월 4일 훈춘한민회군 30여명이 훈춘현 삼도구 북쪽 39리 상거한 지점에서 일본 78연대 우에사까 대대를 습격하여 전투는 약 1시간 진행되고 이다(井田)소위이하 5명 살상, 
 ④ 11월 9일 훈춘한민회이 김운서가 지휘하는 30여명의 결사대가 75연대 쥬지 중좌가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훈춘현 우두산 남쪽에서 습격하여 약 1시간을 교전하였다. 
 ⑤ 11월 9일 항일부대는 동녕현 소수분하의 팔가자에서 북만파견군 야스니시 대대의 무라다 중위가 지휘하는 5명의 경찰대를 전멸시켰다. 
 ⑥ 12월 5일 시마다 소위가 지휘하는 30여명의 일본군이 하마탕 서북쪽 산곡에 있는 항일부대의 숙소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쌍방이 교전하였다. 
  10월 28일 76연대 이와오 소좌가 나자구에서 대황구로 돌아올 때 왕청현 장가구에서 항일소부대가 두 차례 습격하였다.
 이상의 전투들이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의의는 가벼이 할 수 없다.
 첫째, 대부분의 전투들이 분산 은폐하였다가 주동적으로 적을 습격한 機動靈活한 전법을 충분히 과시하였고,
 둘째, 적을 타격하여 적의 토벌계획을 혼란시켰다. 
 셋째,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항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潛伏을 엄호하였다. 따라서 서부전선 항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켰다. 즉 일본군은 동부전선 小部隊들의 빈번한 奇襲戰 때문에 북상하는 항일부대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넷째,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 총재 徐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김좌진의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2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청산리대첩은 한국광복군이 벌인 전투 중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3. 靑山里大捷의 평가 
 (1) 청산리전역의 성과
 靑山里戰役의 總決算은 日軍 死傷者 1,200餘에 대하여 我軍 損失은 戰死者 60명, 戰傷者 90餘명을 내었다.(韓國軍 發表)
 中國軍 발표는 日軍 손실이 1,300餘名이며, 日本領事 秘密報告에 依하면 二道溝戰에서 加納聯隊長 大隊長 2명 中隊長 5명 小隊長 9명이 戰死하고 下士官 以下의 戰死者 900餘名이라 하였다.
 이 戰鬪結果는 한국군은 調査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조사한 것은 아니다. 近方에 사는 한인들이 日軍이 死者와 傷者를 牛馬車에 실어 遠方에 이송하는 것을 보고 계산한 숫자이다. 이같은 戰果는 발표주체의 입장에 따라 수치의 차이가 있지만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군이 협동작전으로 일본군을 크게 패퇴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동부전선에서의 抗日戰鬪는 서일 등이 일본군진영을 교란시켜 주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전투에 일본군의 증원을 막고, 서부전선의 광복군들이 무사히 밀산지역으로 퇴각할 수 있도록 해준 큰 역할을 해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자력으로서 조국광복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이었다.
독립군의 전투는 高地를 선점하여 視野를 확보하는 등 地形地物을 잘 이용하였고,
그러면 대한군정서 군의 이러한 역사적 대승전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이듬해 1월 15일 군정서 총재 서일(徐一)의 임시정부 대본영에 보낸 보고서 중에서는 피아간 승패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2) 韓國軍의 全勝 理由
  ① 대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민족정신으로 무장하고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용전태세로 적의 志氣를 압도하였다.
②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양호한 진지를 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 성능을 극도 발휘하였다.
  ③ 應機隨變의 전술과 정확한 척후활동, 주민을 활용한 기만작전, 적시에 치고 빠지면서 연합부대와 유기적인 작전으로 적의 예상을 깨뜨리는 수장들의 탁월한 지휘능력이 빛났다.
  ④ 재만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오는 듯한 전쟁의 砲雨속에서의 부녀자들의 주먹밥 운반 등은 독립군 장병들의 士氣를 더욱 충천하게 하였다.
  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충분한 군자금 확보로 체코로부터 구입한 세계최고수준의 신무기의 성능이었다.

 (3) 적의 실패 이유
  ① 병가에서 제일 꺼리는 것은 輕敵의 행위인데, 險谷長林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하였다.
  ② 국지전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의 자기편끼리 충돌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③ 그들 군인의 厭戰心과 避死逃生하는 두려움은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射法이 不精하여 1발의 효과도 없는 亂射를 행하였다.

4. 大韓獨立軍團 組織과 朝天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 이후 전략전술상 왕청현 지역으로 향하여 후퇴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것은 일본군은 전쟁에 패해도 계속 병력이 보충될 뿐 아니라 무기도 계속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대한군정서는 무기도 계속 보급될 수 없었고 그에 따른 탄약도 제한되어 있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당시에 희생된 대종교도만도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한군정서를 蘇滿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키고, 각 광복군 부대에 일치단결을 촉구하는 檄古文을 발송하였다. 이에 간도 대한국민회의 具春先・李明淳, 대한신민회의 金聖培, 도독부의 崔振東, 의군부의 李範允, 혈성단의 金國礎, 야단의 金笑來, 대한정의군의 李圭 등 많은 지도자가 호응하여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10개 단체 현존 병력 3,500명으로 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서일을 總裁로 추대하였다. 조국광복을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겨 온 명망 있는 항일 무장투쟁 영도자들이 서일을 총재로 추대했으니 이는 서일의 인품과 성망은 물론 조직력과 지휘능력이 출중하여 두각을 나타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 ‘토벌군’의 보복이 옥죄어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에 오래 머물 수 없어 1921년 1월에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때 서일은 군단의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들인 홍범도・김좌진 등에게 맡기고, 독립군단의 長久한 維持를 위하여 백취 현천묵 등과 일부 병력을 인솔하고 밀산 당벽진에 남아서 경제적 뒷받침과 병력 보완 등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 후 반년이 지난 1921년 6월 28일 ‘自由市事變’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어 광복군단은 기력을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밀산에서 재기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土匪 수백 명이 夜襲하여 방화와 약탈, 살인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진중이 초토화되고 훈련 중이던 수많은 청년병사가 희생되자, 한 종단의 최고 간부로서 그리고 광복군을 지휘하는 總帥로서 서일은 自盡殉命의 비장한 각오를 새기게 된다.
 서일의 죽음은 살신성인의 선택이었다. 그는 그의 스승인 홍암 나철이 殉命三條를 남기고 1916년 음력 8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를 마음에 새기면서, 마침내 1921년 8월 27일 다음과 같은 홍암 殉國離世歌 遺書 중의 詩 한 구절을 읊으면서 閉氣殉命하니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굿 것이 수파람 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르 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鬼嘯而魅跳하니 天地之精光이 晦明하고 蛇食而豕突하니 人族之血肉이 淋漓로다 日暮途窮에 人間何處오.” 

 이는 죽음으로서 대종교의 한 단계 도약을 도모하고 흩어진 광복진영이 단합하여 대일항전에 분발할 것을 촉구하고자 하는 수전병행의 가치를 최후까지 보여준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죽을 때와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안 인물이었다. “마땅히 복되지 않을 때 복되면 이것은 도리어 허물이요,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요, 마땅히 부귀하지 않을 때 부귀하면 이것은 도리어 부끄러움이다.”라는 그의 철학이 이를 대변한다. 

Ⅵ. 結 論 
 조직 구성원은 조직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망각할 때가 많다. 백포 서일은 나라가 수난을 당한 불운한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조국광복만을 위해 청년 동지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항일 무장투쟁을 선도하면서 초지일관 종교적 신념과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살신성인의 삶을 살았다.
 서일은 1911년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만주로 건너가 그해 3월 再擧를 꿈꾸며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주축으로 무장투쟁의 초석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31세의 나이로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 후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광단을 대한정의단, 군정부, 대한군정서로 개편하면서 줄곧 총재직을 맡아 군단을 통솔하였다.
 서일은 나철 대종사를 만나 삼일철학을 접하면서 크게 감화를 받고, 대종교를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정신적 배경으로 삼았으며, 평생을 대종교 정신 속에서 수도하는 자세로 살았다. 또한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교세 확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남긴 저술 모두는 대종교의 三一思想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심오한 종교서이자 철학서이다. 
 위와 같이 서일이 중광단을 조직하고, 대종교를 신봉하며, 명동학교를 설립한 세 가지 일은 모두 무장광복투쟁이라는 하나의 명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 활동이었다. 즉 중광단은 무장투쟁의 직접적인 기초 조직이고, 대종교 활동은 신앙을 통해 더 많은 사회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며, 학교 설립은 무장투쟁의 역량과 산업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서 1920년 대한군정서의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일제의 청산리대첩 보복전에 대비한 서일의 ‘격고문’ 하나로 인해 10개 단체 현존병력 3500명으로 大韓光復軍團을 결성하고, 명망 있는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서일이 총재로 추대된 것만 보아도 그의 인품과 성망은 물론이고 조직력과 지휘능력이 출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일은 1919년 대종교 제2세교주 茂園 金敎獻 종사가 대종교 敎統을 전수하고자 간곡히 당부하였으나 시급한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5년간 보류하기로 하였는바 그는 이미 대종교 最高 指導者의 위치에 있었지만 최후의 선택은 조국광복사업이 優先하였으니 결국 대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불굴의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였다.
 또한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항일무장투쟁을 주창하였지만 여의치 못했다. 그러나 서일은 항일무장투쟁을 실현하기 위해 10년 동안 무장조직을 조직하고 키우면서 신앙을 통한 정신무장과 군사교육과 훈련, 군자금 모집과 신무기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 최강의 군대를 만들어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무기구입에는 자신이 섭외 계약 운반까지 직접 수행하고, 지역민의 어려움도 보살피는 위대한 영도자였다. 
 그 동안 서일에 대한 기존 연구는 거의 무장투쟁과 관련한 것에 치우쳐 있었는데, 그가 남긴 저술들을 보더라도 앞으로는 그의 정신과 내면에 연관된 수전병행의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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