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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역 한중협력의 과거,현재,미래 학술세미나 - 제3주제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7-30 조회수 :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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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주제』

               국학(國學)으로 본 한․중 우호의 가능성
               -그 목표 지향을 중심으로-

                     김동환([사]국학연구소연구원)


1. 국학의 일반적 의미
2. 한․중 국학의 성립 배경
3. 한․중 국학의 중심 가치
4. 한․중 국학의 목표 지향으로 본 우호의 가능성


1. 국학의 일반적 의미

 19세기 말〜20세기 초, 동북아 3국에 나타난 대표적 지적 체계 가운데 국학이란 용어를 빼놓을 수 없다. 서구와의 긴장 혹은 제국주의 팽창 속에 나타난 이 용어는 후일 동북아 3국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는다.
 우리 학계에서도 이러한 국학 내지 한국학 개념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해 왔으면서도 아직 그에 대해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명쾌한 정리가 이루지지 않고 있다. 백영서, 「인문한국학이 나가야 할 길-이념과 제도」『한국학연구』제17집, 인하대한국학연구소, 2007, p.42.
기존의 연구에서는 국학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 황원구, 「國學」, 『민족문화대백과사전』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777.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동방학지』100호,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1988, p.2.
그리고 한국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생산(곧 연구)하고 유통(곧 교육)하는 학술 백영서,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의 (불)가능성-보편담론을 향하여-」, 『東方學志』제147집,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2009, p.4.
이라는 막연한 개념화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국학을,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민속․사상․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우리나라에서는 국어․국문학․국사 등이 이에 딸림)이라고 말하는 개념 정의나, 이기문 감수, 『동아새국어사전』, 두산동아(제4판), 2003, p.295.
자기 나라의 고유한 역사․언어․풍속․신앙․제도․예술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운평언어연구소편, 『국어사전』, 금성교과서(5쇄), 1997, p.219.
사전적 의미 규정보다 훨씬 후퇴된 느낌을 준다.
 일본에서는 국학을 개념화함에 있어, 에도(江戶) 시대에 발생한 학문으로써 일본 고대의 고유한 정신을 토대로 일본의 고전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려는 학풍으로 정리하고 있고, 중국 역시 예로부터 중화민족이 갖고 있던 고유한 것으로 일정하게 정리된 학술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한국 학계의 국학 규정과는 달리 양자 모두 시간성과 고유성이, 개념 규정의 중요한 준거임을 보여주고 있다. 
 케이추(契沖)와 카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로 시작되는 일본 국학은, 카모노 마부치(賀茂眞淵)․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로 이어지면서 사상운동으로 발전한다. 일본의 국학은 학자들에 따라서 화학(和學)․왜학(倭學)․황왜학(皇倭學)․고학(古學)․황조학(皇朝學)․황국학(皇國學) 등으로도 불리며 신도학(神道學)으로도 통용되었다. 케이추가 문헌학적 방법을 통해 국학연구의 실마리를 확립한 이래, 아즈마마로는 국학을 신도(神道)와 연관시켜 체계화하였으며, 마부치는 일본 고대가요인 『만요슈(萬葉集)』를 통하여 일본 고대정신을 궁구하고자 했다. 
 중국에서도, 체계적 개념으로서의 국학이 언급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영향이었다. 근대 중국 학자로서 일본의 국수보존운동에 최초로 주목한 인물은 황치에(黃節)와 량치차오(梁啓超)다. 황치에는 1902년 발표한 글에서 일본의 국수주의운동이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소개하였으며, 黃節, 「保存國粹主義」『政藝通報』(1902)第22기.(中國近代史料叢墾續編, 第27輯, 臺北:文藝出版社 影印, 1976)
량치차오는 1901년에 이미 국수(國粹)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고 1902년 황쭌샨(黃遵憲)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민양성을 위해 국수보존을 중요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董方奎, 『梁啓超與立憲政治』, 華中師範大學出版社, 1991, p.122참조.
물론 량치차오는 문호를 개방하고 신학(新學)을 고취해야 한다는 황쭌샨의 답장 이후, 더 이상 국수(國粹)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치에는 국수보전과 국학의 고취를 잡지 『정예학보(政蘂學報)』의 중요 방침으로 정하고, 1905년 짱빙린(章炳麟)․류시페이(劉師培)․덩시(鄧實)․류야지(柳亞子)․첸커빙(陳去病) 등과『정예학보』의 뜻을 이은 『국수학보(國粹學報)』를 창간함으로써, 본격적인 국수보전운동에 나섰다. 다만 일본의 국학이 편협한 국수적 성격을 가졌다면, 당시 중국의 국학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중국 고유문화의 유산 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과 일본의 정황을 통해 우리의 국학의 개념을 간추려 보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줄기로 하여 우리 민족사에 연면히 이어온 인문학적 사상(事象)이라고 일단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사상․문화․풍습․언어․제도 등과, 정치․경제․사회․과학․예술 등의 타학문을 포괄하는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즉 광의적으로는 우리 순수국학의 줄기에 습합되어 자리 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중 국학의 성립 배경

 중국 근대 국학의 등장은 일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이나 『수서(隋書)』의 「백관지(百官志)」등에서 국학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천자(天子)나 제후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체계적 개념으로서의 국학이 언급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영향이었다. 
 본디 중국의 국학은 중학(中學)․국수(國粹)․국고(國故)․국고학(國故學)․고학(古學) 혹은 구학(舊學) 등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朱維煥, 『国学入門』, 中国人民大学出版社(中国․北京), 2005, p.2.
중학이란 말은, 청나라 말기 장즈퉁(張之洞)의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이란 구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張之洞, 「勸學篇」條, 『中國儒學百科全書』,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中國․北京), 1997, 참조.
서학(西學)에 대항하는 중국학술로서의 중학을 말한다. 국수란 말은 쉬디산(許地山)의 『국수와 국학(國粹與國學)』이란 책 제목과, 류스페이(劉師培)와 장삥린(章炳隣)이 주도한 『국수학보(國粹學報)』에서 연유한 것으로, 여기서의 ‘수(粹)’란 정수(精粹)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국고라는 명칭도 장삥린의 『국고논형(國故論衡)』에서 등장하는 말로, 여기서의 국고란 ‘중국구학(中國舊學)’이나 ‘중국의 장고(掌故)’라는 의미를 가진다. 장고(掌故)란 예로부터 굳어져 계속 전해 온 전례(前例)를 말하는 것으로, 고실(故實)이나 전고(典故)와 같은 의미다. 또한 국고학은 차오쥐런(曺聚仁)의 『국고학대강(國故學大綱)』에서 기인하는 용어인데, 과학적 방법을 통해 하나의 학적 계통을 세우려는 노력을 보였다. 끝으로 고학이나 구학은 서양의 철학․정치․윤리 등의 신학문을 번역함에 있어, 중국의 학술을 고학이나 구학으로 칭했던 것이다. 
 근자에는 서양학자들의 중국에 대한 연구가 보편화되면서, 그들에 의해 중국학이 한학(漢學Sinology) 혹은 화학(華學)으로 칭해지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는 중국학 연구가 ‘지나학(支那學)’으로 명명되는가 하면, 일본은 에도 시대 이후 서구와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더 이상 中國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국을 支那로 대체한다. 支那學의 출현은 지나라는 용어의 태동과 직결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지나로 변한 연유가 그러했듯이, 그것을 학문 대상으로 설정한 '지나학'은 더 이상 중국을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을 지나로 폄하하며 원시 미개하고 후진적인 사회로까지 설정했다.(子安宣邦, 『日本近代思想批判』, 岩波書店(日本․東京), 2003, pp.101-150참조.)
한국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국학(中國學)’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중국연구(Chinese Studies)’나 ‘동방연구(東方硏究Oriental Studies)', ‘원동연구(遠東硏究Far East Studies)’라 칭하기도 한다. 邱燮友 外 編著, 『國學課』, 앞의 책, p.2.

 한편 근대 중국학자로서 일본의 국수보존운동에 최초로 주목한 인물은 황치에(黃節)와 량치차오(梁啓超)다. 황치에는 1902년 발표한 글에서 일본의 국수주의운동이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소개하였으며, 黃節, 「保存國粹主義」『政藝通報』(1902)第22기.(中國近代史料叢墾續編, 第27輯, 臺北:文藝出版社 影印, 1976)
량치차오는 1901년에 이미 국수(國粹)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고 1902년 황쭌샨(黃遵憲)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민양성을 위해 국수보존을 중요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董方奎, 『梁啓超與立憲政治』, 華中師範大學出版社(中國․武汉), 1991, p.122참조.
물론 량치차오는 문호를 개방하고 신학(新學)을 고취해야 한다는 황쭌샨의 답장 이후, 더 이상 국수(國粹)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치에는 국수보전과 국학의 고취를 잡지 『정예학보(政蘂學報)』의 중요 방침으로 정하고, 1905년 장삥린․류스페이․덩시(鄧實)․류야지(柳亞子)․첸커빙(陳去病) 등과『정예학보』의 뜻을 이은 『국수학보(國粹學報)』를 창간함으로써, 본격적인 국수보전운동에 나섰다. 다만 일본의 국학이 편협한 국수적 성격을 가졌다면, 당시 중국의 국학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중국 고유문화의 유산 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원석, 『近代中國의 國學과 革命思想』, 국학자료원, 2002. ; 천성림, 「國學과 革命-淸末 國粹學派의 傳統學術觀」『震檀學報』제88호, 진단학회, 1999. 등 참조.(중국의 근대 국학 개념 형성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설로 파악하고 있다. 첫째, 黄遵憲이 1887년 『日本國志』라는 中文本에서, 일본에서 유행하는 ‘國學’이라는 名詞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둘째, 粱启超가 1902년 가을 『國學報』에 ‘國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개념화했다는 관점이다. 셋째, 吳汝綸이 1902년 8월 일본사람의 의견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國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관점이다.[田正平․李成军, 「近代 ‘国学’ 概念出处考」『华南师范大学学报(社会科学版)』, 2009年第2期, p.76참조])

 한편 한국에서 국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그 개념이 정립된 시기는 1930년대로 잡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신라 신문왕 때와 고려 성종 당시 설치된 ‘교육기관으로서의 국학’과는 무관한 것으로, 일제의 침략과 통치기를 지나면서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위기에 처하자, 일부학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되찾아 이를 살려 나가고자 하는 학문적 분위기에서 나타났다. 그 당시는 국권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그러한 분위기의 학문을 한국의 칭호인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조선학’ 혹은 ‘국학’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애국적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현실 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도모했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재발견코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발전시켜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황원구, 「國學」, 앞의 책, p.777참조.

 특히 조선 후기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정인보가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같은 글, pp.777-778참조.
당시 국학자들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학문과 사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개척된 탈중국적인 사상의 흐름을 국학의 계보로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정인보가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사용한 이러한 국학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서 의미 규정을 하고 있다. 이것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명명해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학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實事求是라는 말은 중국의 漢代부터 쓰여진 고전적인 용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해 중히 사용되었던 것을, 후일 호암 문일평이 실학이 마치 실사구시학인 양 實事求是學派라고 표현함으로써, 실학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이을호, 「韓國의 實學思想 槪說」,『實學思想의 探究』, 앞의 책, p.12참조.)
국학이라는 용어도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현금에는 국학이라는 개념 용어로써 의미를 넓혀 온 것과 같은 논리다. 이만열, 「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 앞의 책, p.2참조.
더욱이 해방 후 정인보가,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새로운 체제의 대학을 서대문 밖에 설립할 당시, 국학대학(國學大學)이라는 교명(校名)을 지었다라는 기록 민영규, 「爲堂 鄭寅普 先生의 行狀에 나타난 몇 가지 問題(實學原名)」,『薝園鄭寅普全集』1,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p.356.
도 정인보와 국학의 관계를 한층 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정인보는 1930년대를 풍미하던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 유학의 고질인 사대주의와 개화기 이후 서학을 수용함에 있어 나타나는 몰민족적 자세를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실증사학의 표방으로 1934년에 발족된 진단학회의 학풍을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도피적 사학으로 간주했다. 즉 우리들의 마음, 실심에 기초한 학문이 없고 남의 마음, 허심(虛心)에 근거한 국학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성과 고유성을 동반한 근대 국학의 토대는 단군신앙을 부활시킨 홍암 나철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 사상성이나 시간성 그리고 공간성이 충족된 순수국학의 의미와 그 실체를 우리 근대사에 가장 잘 드러내 준 인물이 나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문․사․철에 회통했을 뿐만 아니라, 단군 신앙의 중흥을 통해 순수국학의 실체를 체계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나철이 유학자로서의 허물을 벗고 국학자로서 변신하는 계기는 단군신앙을 접하면서다. 나철은 1905년 단군교에 입교하고 1906년 단군교의 영계(靈誡)를 받음과 동시 전래경전(傳來經典)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 천제를 행하고「단군교포명서」를 반포함으로써, 단군교(후일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김동환, 「己酉重光의 民族史的 意義」,『國學硏究』제1집, 국학연구소, 1988, 참조.
이 사건은 우리 민족 사회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온다. 특히 나철의 대종교 중흥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의 회복을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배달교(倍達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섰다는 주장 이현익, 「大倧敎人과 獨立運動淵源」『대종교보』가을호, 대종교총본사, p.51.
은, 그의 사상에 나타나는 국학적 요소가 우리의 시간성과 고유성을 토대로 한 국학의 의미 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3. 한․중 국학의 중심 가치 

 중국 고전 강의로 인기가 높은 위단(于丹) 베이징사범대 교수는 이제 중국인은 예전의 중국인들이 아니며 우리는 이제 강해졌다고 역설했다. 위단과 쌍벽을 이루는 스타는 허난(河南)대의 이중톈(易中天) 교수 역시, 삼국지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묶은 저서 ‘품삼국(品三國)’은 지금까지 150만부 이상이 팔렸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최근 폭발하는 ‘전통문화 부흥’ 붐을 일구고 있는 대표주자다. 이른바 ‘국학(國學) 열기’는 다방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한복(漢服) 입기’ 운동과 만18세가 되는 청소년들을 위한 ‘성인례(成人禮)’ 개최, 공자 존숭(尊崇) 캠페인 등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베이징대와 푸단(復旦)대, 칭화(淸華)대 같은 명문대학들은 최고 경영자(CEO) 등을 상대로 ‘사서오경’ 같은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국학반을 운영하고 있다. 또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 사숙(私塾)도 상하이·정저우(鄭州)·광저우(廣州) 등에서 유행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이런 분위기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시장경제 활성화로 공산주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배금주의가 확산되는 도덕적 위기 상황에서 대안으로 유교를 토대로 한 전통 국학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수년 전 작고한 중국 국학의 거두 지셰린(季羨林)이 대국학(大國學)을 제창한 이후, 얼마 전에는 쉬지린(許紀霖) 중국 화둥(華東) 사범대 역사과 교수가 ‘신천하주의(新天下主義)’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중국 근대 사상사 전문가인 쉬 교수는 역사적으로 중국이 천하를 지배한 원리는 무력이 아닌 천하주의적 화하(華夏)문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화된 오늘날 중국의 전통과 경험에서 보편가치를 뽑아내는 한편, 세계 문명 속의 보편가치를 중국에 맞게 바꾸는 작업을 병행하는 ‘신천하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东方早报』2012. 1. 14.「许纪霖谈新天下主义」

 물론 ‘신천하주의’라는 가치는, 중국이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염려와 함께, 신천하주의가 여전히 중국 중심적임을 지적하고 아시아 전체를 위한 보편 문명을 구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신천하주의’가 보편 문명이 되기 위해서는 개방성이 보충돼야 한다는 지적도 주목된다. 즉 역사적으로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강대할 때는 개방적 천하주의가, 그렇지 않은 때는 폐쇄적 천하주의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천하주의라는 도덕적 이상이 정치적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앙일보』2013. 6. 21.「중국이 내세운 '신천하주의' … 폐쇄성 경계해야」

 중국 국학의 근본이 유교와 뗄 수가 없음을 감안한다면, 위와 같은 분위기 역시 공자(유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화주의의 모색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일찍이 중국의 근대 국학은 고학(古學) 부흥을 제창했는데, 중국의 고학이란 유학(儒學)을 포함한 선진(先秦)의 제자학(諸子學)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鄧實, 「古學復興論」『國粹學報』(1905) 社說9기.
이것은 한무제 당시 동중서가 유교를 국학으로 세운 이후, 중국의 근대 국학에서도 유교적 가치를 강조했음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즉 중국 인민대학의 국학원 설립이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고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에서도, 현금 중국 국학의 뿌리도 유교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중국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흔들리는 사회주의의 이념 문제를 중국의 전통 가치인 유교에서 찾아 세우려는 것이다. 몇 년 전(2005년 9월 초)에도 200명이 넘는 중국 지도자와 화교(華僑) 학자들이 모여 유학연구대토론회(儒學硏究大討論會)가 벌어졌다. 여기서 도출된 것이 “유학에서 사회 충돌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世界日報』, 2005년 9월 27일자) 즉 중국의 국학도 중국의 전통 종교인 유교의 토대 위에서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 국학의 중심가치 역시 우리 고유의 사유체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전래 고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한국사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부분이 토착고신앙(土着古信仰)이며, 그 자체가 중요한 맥락을 이루면서 한국사 전반에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 또한 토착고신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때문이다. 김재경, 「韓國 土着古信仰의 名稱問題 檢討」『韓國學報』제83집, 일지사, 1996, p.167.
특히 고신앙 방면은 일제시대 민족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나철에 의해 일어난 단군신앙의 영향을 컸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같은 글, p.168참조. 까닭에 김교헌이 칭한 ‘神敎’나, 신채호가 말한 ‘仙敎(東國古代仙敎考)․수두敎(朝鮮上古文化史)․朗家(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그리고 최남선이 칭한 ‘부루敎’, 박은식의 ‘國魂’, 정인보의 ‘얼’, 이능화의 ‘神敎’, 안 확의 ‘倧思想’ 등은 신라 최치원의 ‘玄妙之道’와 함께 小異相通하는 명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후일 단군신앙 부활의 주역이었던 나철이 국학의 선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도 되는 것이다.
 기존 국학연구의 업적이 전술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를 넘어 올라가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의 시대로 국학의 자취를 재구(再構)해 감에 있어 사료의 빈곤과 재야사서의 문제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조 세조의 수서령(收書令)으로 자취를 감춘 서책들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우리 순수국학의 중요한 맥이 될 수 있는 신교사서(神敎史書)와 연관됨을 상기한다면, 우리 고신앙의 흐름이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끊임없이 흘러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민족적 특징이 고조선 원민족(선민족 proto-nation or pre-nation)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민족의 형성사는 고조선 원민족의 형성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민족사회학적 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족국가의 형성은 그것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원민족에 나타나는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지배지역과 지역주민을 끊임없는 정복에 의하여 확대해 가려는 강렬한 운동을 촉발시켜 꾸준히 민족형성으로 팽창해 가는 동태를 가지고 있다. 신용하, 「民族形成의 이론」, 앞의 글, p.344.
 
  이러한 군사공동체의 특징을 단군시대부터 발견한 인물은 신채호다.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이, 단군시대의 무사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花郞의 別名은 國仙이라 하며 仙郞이라 하고, 高句麗 皂衣의 別名은 仙人이라 하여, 『三國遺事』의 花郞을 ‘神仙之事’라 하였은 즉, 新羅의 花郞은 곧 高句麗의 皂衣에서 나온 者요, 高句麗史의 ‘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은 곧 仙史의 本文이니 壇君이 곧 仙人의 始祖라, 仙人은 곧 우리의 國敎이며 우리의 武士道이며 우리 民族의 넋이며 우리 國史의 꽃이거늘….” 신채호, 「朝鮮上古文化史」『丹齋申采浩全集(改訂版)』上(이하 改全集이라 略稱함), 丹齋申采浩先生記念事業會, 1982, p.372.


 그는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극찬했다. 같은 글, p.383.
까닭에 그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것도 화랑이라고 말한다. 신채호, 「朝鮮上古史」, 『改全集(上)』, 같은 책, p.225.
 
 한편 신채호는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을 국학(國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즉,

“夫餘․馬韓 等 十餘國의 이름을, 그 沿革을 찾으면 다 壇君 때부터 있던 稱號라. 後世에 國學이 끊어져 그 根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 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앞의 글, p.359.


라는 기록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 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 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 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신채호, 「꿈하늘」『改全集(下)』, 같은 책, pp.213-215.


라고 서술함을 볼 때, 국학(國學)과 불학․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옛 것을 지키려는 이는 한문이 있음은 알아도 국문이 있음은 알지 못하고, 새 것을 찾는 이는 양학(洋學)이 있음은 알아도 국학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라는 지적을 통해 양학에 대비하여 사용한 국학의 의미도 무엇이었는가를 분명히 밝혔다. 신채호, 「考古篇(天鼓)」『改全集(別集)』, 같은 책, p.267.

 한편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박은식, 「韓國痛史(結論)」『朴殷植全書(上)』,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75, p.376.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국어․국문․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 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국문․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사(史)․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김동환, 「朴殷植 民族史學의 精神的 背景」『國學硏究』제4집, 국학연구소, 1998. pp.69-71참조.

 더욱이 신채호가 단군의 선교(仙敎)를 중국의 선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단군선교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종교의 침체를, ‘국수(國粹)의 무너짐’이라고 한탄함을 볼 때, 신채호, 「朝鮮上古文化史」, 앞의 글, p387.
신채호의 국수 혹은 국학이 단군신앙에 연결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박은식도 단군신앙을 부흥시킨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삼신을 믿는 최고(最古)의 종교로 보고 그 신조(信條)가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 국혼(國魂)의 토대가 단군신앙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최남선의 ‘부루교(敎)’나 ‘신도(神道)’, 정인보의 ‘조선얼’ 그리고 안재홍의 ‘한․’이나 ‘태백진교(太伯眞敎)’, 안 확의 ‘종사상(倧思想)’과 이능화의 ‘신교(神敎)’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호상은 전래 단군신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철학을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개념화시키기도 했다. 안호상, 『국학기본학』, 배영출판사, 1977, 참조.
따라서 한국 국학의 본체 혹은 사유범주를 단군신앙과 연관된 문(文)․사(史)․철(哲)로 테두리 짓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한․중 국학의 목표 지향으로 본 우호의 가능성

 국학의 ‘보편적 개방성’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보편적 개방성이란, 국학의 집단(국가 혹은 민족)적 속성을 넘어, 타집단 학문과의 조화․지양을 통해 상생의 논리를 추구해 가는 상대주의적 가치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문화․다종교 사회가 보편화되는 추세에서, 국학의 국수주의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세계화 시대의 국학으로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근자에 추진 중인 중국의 국학이 개방성을 중요한 속성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중국 국학의 거두였던 지셰린(季羨林)의, 다인종으로 구성된 중국의 현실을 겨냥한 듯한 국학 견해도 주목된다. 그는 중국 국학을, 한학(漢學)이나 유학(儒學)의 협의적 의미가 아니라, 전중국의 56개 민족문화가 축적된 대국학(大國學)이라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중국을 하나로 묶는 문화조화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한족의 문화와 지역문화가 비록 표현형식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지만, 중국문화의 불가결한 요소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오술(五術)․육례(六藝)․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넘어서, 중국 내 모든 지역의 학문을 총합한 가치를 국학이라 칭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지셴린의 대국학 제창에는 복선이 있다. 즉 다민족 중국사회를 통합할 대중화주의 논리로서의 대국학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도 일종의 끊임없는 변증적 교환을 통해 우리의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보편적인 것을 특수화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종합에 다가갈 수 있는 슬기가 필요하다. 이매뉴얼 윌러스턴(김재오 역), 『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창비, 2008.(Immanuel Wallerstein, European Universalism: The Rhetoric of Power, New York Press, 2006), p.90 참조.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민족 자체에 대한 논의를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만의 입장이 아니다. 민족 자체가 지적 논쟁의 대상으로 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의 발전과 개방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에 대한 연구가 자국학(自國學)의 수준을 뛰어 넘어 보편적인 연구주제로 다루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개념사로 본 의미의 간격-」, 앞의 글, p.29.

 일본의 국학이 국수적이요 폐쇄적이라는 한계는 이미 경험한 바다. 그들의 군국주의적인 과거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의 욕심 뒤에도 일본의 국학이 상존해 있다. 중국 국학의 중심인 유교 역시, 중국인에 의해 그 폐쇄적 한계가 이미 지적된 가치다. 일찍이 류스페이(劉師培)가 지적한 유가(儒家)의 네 가지 단점 중에서, 劉師培, 「孔學眞論」『國粹學報』(1906), 學篇17기.
상호 비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고 이설(異說)을 배척한다는 지적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현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중화사관의 욕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국학이 지향하는 중심가치는 근본적으로 배타성이나 자폐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국학의 궁극적 지향인 홍익인간과 중국 국학의 목표 가치인 유교적 인(仁)의 본질이 ‘울타리 없는 사랑’․‘불구하고의 사랑’․‘위아래 없는 사랑’고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보면 한․중 국학의 중심가치가 동이(東夷)라는 집단 속에 배태되었음도 흥미를 끈다.
 본디 동이문화는 동북아 문화소의 중심이자 주변으로, 시공간적으로도 가장 폭넓은 문화지층을 만들며 잠재되어 왔다. 그러므로 동이문화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넘어서는 동북아 문화의 요람으로, 동북아의 종교․철학․언어․예술 등의 산파 역할을 해 왔음은 주지하는 바다. 가령 동이의 천신신앙과 제천, 오행․역법, 갑골문자, 원시가무(原始歌舞) 등은 동북아 제반 문화의 토양이 되었음은 물론, 몸통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특히 동이의 정신문화는 동북아 고대 종교의 뿌리로서만이 아니라, 도덕과 철학의 근간이 되면서, 이 지역 윤리사상을 살찌워 왔다. 유교나 도교 심지어는 많은 제자백가의 가치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교의 인사상(仁思想)은 동이의 정신적 이상과 직결되는 가치다. 
 동이의 정신적 이상 중에서도 인본주의적 가치야말로, 그 정수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고전에서 ‘동방예의지국’이나 ‘군자국(君子國)’이라 하여 동이를 흠모했던 것도 이러한 정신문화에 대한 동경이었던 것이다. 같은 동이문화권인인 고조선문명권의 ‘홍익인간’이 그렇고, 은(상)문명권의 ‘인(仁)’이 바로 그것이다. ‘홍익인간’과 ‘인’은 한 뿌리에서 뻗은 서로 다른 가지로, 이음동의적 가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동환, 「동이의 문화사상-정신적 이상으로서의 ‘仁’을 중심으로-」,『국학연구』제14집, 국학연구소, 2010, pp.7-61참조.

 주목되는 것은 중국 국학의 중심 가치이며 동북아의 가치를 넘어서 인류보편적인 가치로 승화된 인사상이, 동이족의 정신적 이상에서 잉태된 가치라는 점이다. 일찍이 왕셴탕(王獻唐)은, "고대 동방의 토착 민족은 돈후․화평하고, 기품과 도량이 있어 黃帝族이 비록 異族의 질투심 때문에 '東夷'라고 얕잡아 보았으나, 궁극에 가서 양심적 사가들은 '군자국'이라거나, 혹은 '그 풍속이 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타 종족에 대해서는 모두 폄하하는 말이 있었지만, 유독 동이에 대해서만은 그 같은 말이 없었다."고 했다. 王献唐, 『炎黃氏族文化考』, 齊魯書社(中国․斉南), 1985, p.39.
이 말은 동이의 문화가 정신적․도덕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문화임을 대변해주는 내용이다. 특히 그 평가 속에 돌출되는 동이의 인사상은, 후일 중국정신문화의 기반이 되는 공자사상의 핵심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갖는다. 최남선은 동이의 문화에서 중국에 가장 먼저 정형화된 가치로 윤리를 꼽았다. 즉 “支那란 나라는 民族的으로나 文化的으로나, 한 커다란 沈澱池요 合成金의 鎔鑛爐이다. 支那文化가 소위 四夷八蠻의 諸物素를 攝取하고 있음은, 正히 그 民族內에 모든 관계 민족의 血液을 混合하고 있음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東夷란 가장 일찍부터 雜處 또 隣住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先住民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 가장 오래 계속적으로 밀접한 交涉을 가지고 있는 만큼, 支那文化에 있어서의 東夷의 遺物은 料外로 多量이며, 또한 그 要部를 占하고 있음을 본다. 支那의 文物에서 가장 일찍 整形을 보인 것은 國家倫理요…….”라는 의견이 그것이다.(최남선, 「不咸文化論」, 앞의 글, p.65.)

 동이인들의 인을 바탕으로 한 자비의 심성은 다른 어떤 집단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심지어 한인(漢人)들조차도 이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었음을 고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디 동이인들은 예의와 겸양의 미덕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양보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았다. 『山海經』 「大荒東經」 好讓不爭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일종의 특수한 사회 도덕 관념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곧 중국 역사 전통 속에서 일컫는 '인(仁)'이라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저명한 인물들인 공자·묵자·맹자 등의 학술사상은 모두 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한서』에 보면 동이족의 인사상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등장하는데, “『王制』에 이르기를 ‘동방을 '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柢]'라는 의미이니, 어질고[仁] 살리기를 좋아하여[好生] 마치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道德이 펼쳐지기 쉬워 君子不死之國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에는 아홉[九夷]이 있으니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九夷에 머무르고자 하였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後漢書』「東夷傳」 王制云 東方曰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夷有九種 曰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故孔子欲居九夷也. 
이것은 ‘동이’의 ‘이(夷)’에 나타나는 철학적 가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더욱이 그 핵심적 가치가 ‘인’이라는 점에서, 중국 학자 쑨카이타이(孫開泰)는 위의 내용을 매우 긴요한 기록으로 보고, 이 정신의 면모와 도덕관념이 동이 선민(先民)으로부터 왔음을 밝혔다. 孙开泰, 「关于东夷思想史的两个问題」『东夷古国史硏究』第二辑, 三秦出版社(中国․斉南), 1990, p.175.
 
 한편 한국 국학의 목표 지향인 홍익인간을 말함에 있어, 인류적․보편적 가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홍익인간의 가치는 태생적으로 사해일가나 만교합일의 대아적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개별성(Individualism)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즉 개별성은, 보편성(Universalism)의 상대어인 특수성(Particularism)과는 다른 것으로,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가지고 출발한다. 그러므로 이 개별성에서 출발하는 홍익인간의 가치도 우리 민족의 정서적 국시라는 특수성과 함께 인류대동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근대에 들어 홍익인간의 가치를 처음으로 언급한「신사기」는 인류의 출현에서부터 문명을 잡아가는 과정을 만듦[造化]과 가르침[敎化]과 다스림[治化]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이 글에서 보면, 우리 민족에 국한된 사상이나 족보와 같은 폐쇄적인 흔적은 추호도 없다. 더욱이 근대 이후 우리 민족사회 전반의 중요한 담론이었던 ‘단군’이라는 용어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래 신교의 경전인 「삼일신고」와 「신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인식은 「삼일신고」의 ‘신훈(神訓)’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나철의「신리대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히려 나철은 일반포고문이나 문서에서는 우리의 국조이자 족조(族祖)이며 단군신앙으로 본다면 교조(敎祖)가 되는 단군을 내세워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한편으로는 인류보편적인 신을 수용하고 사용함으로써 민족이라는 특수성과 종교라는 보편성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전래의 신교 규례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다른 종교나 종교인에 대해 지극한 존경의 예로 대하라는 것과 타종교의 선열들에게도 공경히 대할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에게도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어 이단(異端)이 없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라고 일러 주고 있다. 이것은 실로 현금 회자되는 종교다원주의의 가치보다도 그 단계를 훨씬 뛰어 넘는 대아적 종교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철이 대종교를 세운 뒤에 발포한 ‘오대종지’에서도 ‘사랑으로 인류를 합할 것(愛合種族)’이라는 항목은 이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홍익인간적 가치와 관련하여 나철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하늘의 뜻에 의해 인간이 사이좋게 지냄을 뜻하는 ‘호생(好生)’이라는 표현을 썼다. ‘호생’이란 우리 민족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써, 중국 송나라 때 범 엽이 쓴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왕제(王制)』를 인용하여 나오는 말이다. 그 기록을 보면 “夷는 抵다. 즉 그들은 어질어서 만물을 잘살게 하며 大人으로서 땅위에 살고 있다(夷者抵也 言仁而好生萬物 抵也而生)”고 나타난다. 여기서 저(抵)라는 글자의 의미는 ‘대(大)의 뜻과 아울러 땅에 접(接)한다’는 의미로써, 군자(君子)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우리를 상징하여 ‘대인(大人)’․‘호생(好生)’․‘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고 호칭한 배경에는 우리 고유의 홍익인간의 가치 기반이 크게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철은 ‘호생’이 인간관계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덕(天德)으로 엮어지는 사이좋은 인간의 삶으로 이해했다. 천덕은 달리 표현한다면 하늘의 아량이요 신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신교의 전래 비서(秘書)인 『신교총화(神敎叢話)』에 ‘호생이 하느님의 마음(上帝好生之心)’이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이해가 간다. 또한 『참전계경』「숭덕」조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보면, 천덕의 의미가 인간의 의지로만 엮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덕은 天德이니, 천덕이란 가문 땅에 단비요 그늘진 골에 봄볕과 같다. 잠시라도 천덕을 품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되지 못하고 사물은 사물되지 못한다. 까닭에 밝은이는 부지런히 천덕을 칭송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답고 사물이 사물다우려면 천덕과 어울려한다는 말로, 여기서도 천․지․인 조화사상이 발견된다. 까닭에 홍암의 ‘호생사상’은, 인간이 서로 사는 관계로 통용되는 상생(相生)을 넘어, 천리(天理)와 철학이 깃들어진 승화된 인간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호생사상은 하늘정신에 따라 어질게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러한 정신은 우리의 국토나 우리의 민족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의 대동이상(大同理想)이자 사해일가를 위한 정신적 조화의 기반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의 인류적․보편적 가치는 접화군생의 가치와 동일한 것이며, 인종․민족․국가․종교․이념 등을 초월하는 개방적․상생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홍익인간의 가치론적 동의어인 접화군생은, ‘한’의 존재론적 속성의 외연이며, 삼일철학의 인식론 사고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조화와 통섭이라는 현묘한 질서가 끊임없이 숨쉬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중 국학의 목표 지향인 홍익인간과 인의 가치 속에는 경계 없는 휴머니즘이 숨쉬고 있다. 이것은 서로의 국학 연구를 통해 반목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 더더욱 우호의 기반이 깊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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