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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역 한중협력의 과거,현재,미래 학술세미나-제1주제 강수옥 연변대학교 교수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7-29 조회수 : 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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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역사NGO세계대회 시민단체 프로그램
[연변지역 한중협력의 과거,현재,미래]

제5회 역사NGO세계대회 시민단체 프로그램- 국학운동시민연합 학술세미나

『제1주제』

      근현대사 역사속의 한중연대모색
        -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

      연변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사학과 강수옥

요약: 근세에 들어서면서 중한 두 나라는 모두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강탈의 목표가 되었고 양국 인민들은 이에 대응하여 투쟁을 진행하였다. 중국공화혁명의 성공소식이 당시 일본식민지로 전락된 한국에 퍼지자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중국혁명당인들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재중 한인 망명지사들은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관심, 지지하였고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한국지사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당시 간행물을 창간하는 것도 주요한 투쟁형식 중의 하나였다. 주간 <震壇(진단)>은 양국 지사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지하며 성원을 보내준 역사의 견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중국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주간 <震壇>으로부터 본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근현대사 역사속의 중한 두 나라 연대에 대해 모색하고 보다 넓은 층면에서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진화발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키워드: 신해혁명; 한국독립운동; 震壇


머리말
1.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
2. 주간<震壇>으로부터 본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

맺음말


머리말

중한 두 나라는 산과 물이 잇닿아 있고 예로부터 함께 외세와 맞서 싸우면서 두터운 친선관계를 맺었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중한 두 나라는 모두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강탈의 목표가 되었고 두 나라 인민들은 이에 대응하여 폭넓은 투쟁을 진행하였다.
백여 년 전에 일어난 신해혁명은 청나라의 통치를 뒤엎었고 중국역사의 발전에 중대한 비약을 가져다준 한 차례의 큰 사변이었다. 신해혁명은 중국에서 2천여 년 동안 지속된 봉건군주독재제도를 종말 지었고 중국의 역사발전을 크게 추동하였다. 아시아의 시각에서 본다면 신해혁명은 그 당시 아시아를 휩쓴 민족혁명의 거센 폭풍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화혁명의 성공소식이 당시 일본식민지로 전락된 한국에 퍼지자 한국혁명의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신해혁명 후,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중국혁명당인들과 아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상해 프랑스조계지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이 시기 재중 한인 망명지사들은 늘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관심, 지지하였고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한국지사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중국의 지사들은 주간 <진단>을 통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진단>은 두 나라 지사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지하며 성원을 보내준 역사의 견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중국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주간 <震坛>으로부터 본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근현대사 역사 속의 중한 두 나라 연대에 대해 모색하려 한다.

1.     신해혁명이 한국에 미친 영향

백여 년 전에 중국대지에서 발생한 신해혁명은 청나라의 통치를 뒤엎었고 중국역사의 발전에 중대한 비약을 가져다준 한 차례의 큰 사변이었다. 이는 중국에서 2천여 년 동안 지속된 봉건군주독재제도의 종말 및 자산계급공화제도의 탄생을 상징하고 중국이 전통적인 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변하는 과정 속에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정치상에서 신해혁명은 중국의 민주공화정체를 수립했고 정치현대화를 위하여 새로운 장을 펼쳐 주었다. 신해혁명은 폭력혁명방식으로 중국을 2천여 년 동안 통치한 부패한 봉건군주독재제도를 뒤엎어 봉건세력의 가장 고집적이고 보수적인 보루를 뿌리째 뽑아버렸고 봉건군주독재통치시대의 종말을 선언하여 중국의 정치가 독재로부터 민주로 바뀌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 딛게 하였으므로 중국의 정치현대화라는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경제상에서 신해혁명은 중국근대화의 한차례 비약을 이루어 가난하고 낙후하던 중국을 근대공업화의 길로 이끌었으며 생산력을 해방시켜 사회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전제조건을 마련해 놓았다. 남경임시정부가 창건된 후 사회에서는 실업을 운영하는 열조가 일어났는데 중국공업화발전에 추진 역할을 하였다. 민국초창기부터 손중산은 공상업을 장려하는 일련의 법령을 제정하여 공상업의 발전에 좋은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 주었으며 민족자본주의경제가 상대적으로 큰 규모로 발전하는 "황금시대"의 문턱에 진입하게 되었다. 
사상 상에서 신해혁명은 봉건군주독재제도를 짓부신 동시에 사회경제발전을 추동하여 전통적인 의식형태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국민들로 하여금 사상과 관념상에서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신해혁명을 거쳐 독재의 굴레에서 벗어났기에 중국의 사상계는 전대미문의 해방을 얻어 여러 가지 주의, 사조가 중국의 사회무대에서 선보일 수 있었고 마르크스주의도 아주 폭넓게 전파되었다.
비록 신해혁명은 낡은 중국의 반 식민지 반 봉건사회성격과 중국인민의 비참한 처지를 개변시키지 못하였고 민족독립, 인민을 해방시키는 역사적과업도 완수하지 못하였지만 근대민족민주혁명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열어 중화민족의 사상해방을 크게 추동하였고 진보적 조류의 갑문을 활짝 열어 놓아 중화민족의 발전에 길을 밝혀 주었다.
신해혁명은 중국근대 역사상에서 시대를 뛰어 넘는 의의를 가진 중요한 혁명이었고 20세기 초 세계 역사상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 사건이었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초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과 아시아 각성의 주요 표징이라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을 통하여 청나라의 봉건독재통치를 뒤엎어 베트남, 한국, 미안마, 인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추동하였다. 아울러 손중산과 중국의 혁명당인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을 보내주었다.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사상, 세계대동의 사상은 아시아 및 세계 여러 나라들에 커다란 영향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시아의 시각에서 본다면 신해혁명은 그 당시 아시아를 휩쓴 민족혁명의 거센 폭풍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레닌은 신해혁명이 아시아민족운동에서의 위상과 영향에 대해 깊이 있게 논술한 바 있다. 무창봉기에서 성공을 거둔 후 레닌은 "줄기차고 엄청난 세계폭풍의 새로운 샘이 용솟음치듯 아시아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列寧選集》제2권,439
"고 지적하였다. 그는 손중산이 영도한 신해혁명은 "낙후한 아시아인들이 자유를 얻고 각성하여 일어나 정치생활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지구상의 4분의1 이상의 인구가 단잠에서 깨어나 바야흐로 광명을 향하여 투쟁을 시작했다 《新生的中國》,《列寧全集》제18권,395
"고 지적했다. 또한 손중산은 아시아가 배출한 "진정 전투적이며 투철한 민주주의 자산계급을 대표”하며 그는 "18세기말 프랑스의 위대한 선전가 이자 위대한 활동가의 동지임에 손색이 없다 《中國的民主主義和民粹主義》,《列寧選集》제2권,425
"고 논술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진행한 민족해방운동은 모두 신해혁명의 영향과 계시를 받았다. 신해혁명 후, 한국독립 운동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혁명당인들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였는데 독립운동을 지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상해 프랑스조계지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중한 두 나라의 공동적수로 되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자 한국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의 구호를 높이 외치며 나라를 되찾고 독립을 쟁취하는 투쟁에 적극 뛰어 들었는데 이는 파란만장한 "한국독립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고 있다. 기나긴 역사시기 재중 한인 망명지사들은 늘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관심하고 지지하였고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한국지사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1919년 4월에 세워진 상해한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근 27년 동안 투쟁을 견지하여 한국독립운동의 깃발과 지도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두 나라의 애국지사들은 아주 일찍 내왕하였다. 1898년, 손중산은 일본에서 한국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 등 여러 사람들을 사귀었는데 1900년 및 1902년 고베에서 두 차례나 박영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지사들은 도쿄에서 동아시아청년협회를 결성하였다. 손중산은 이 조직을 지지하여 늘 박영효 등 지사들과 극동의 여러 문제들을 연구 토론하였는데 그 중에서 한국의 운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손중산과 박영효 등은 "친근한 우의를 맺었고 그때로부터 연박한 학문 및 드넓은 흉금을 가진 이 중국인은 한국인들의 신중하고 충직한 고문이 되었다 (菲律賓)彭西:《孫逸仙傳》,轉引自黃季陸:《國父援助菲律賓獨立運動與惠州起義》,(檯灣)《傳記文學》第11卷,第4期。
"
1909년, 한국지사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일본 전 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민우보> 및 민맹회계통의 신문, 잡지를 비롯한 간행물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고 동정과 지지를 주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압하여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고 공공연히 한국을 강제 병합하였는데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경고를 받았다. 손중산은 "고려가 망하면, 만주도 갈라질 것이고 중국의 운명도 위험하도다! 孫中山:《緻檀香山同盟會員函》,《孫中山全集》第1捲,中華書侷,1981年,第486頁。
"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맹회회원 석영(石瑛)은 오치휘(吴稚晖)에게 "여러 신문마다에 고려가 멸망한 사실을 게재하여 힘껏 학계를 선동해야 한다."는 건의를 내놓았다 《石瑛緻吳稚暉函》,《吳稚暉档案》(09285),檯北中國國民黨黨史館藏,轉引自杨天石《中韓愛國誌士的早期聯係》,《史學月刊》,2007年第3期。
. 당시, 적지 않은 혁명적 간행물에서는 모두 이 정신에 따라 글을 발표하였고 이로써 혁명을 추진하였다.
한국망국 후, 많은 한국지사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해 반일독립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광주에 체류하고 있던 김환재 (金丸斋)는 자진하여 중국혁명당인을 위해 서류를 보존하고 정보를 전달했다. 1911년 무창봉기가 발발한 후 한국지사들은 잇달아 남경,상해 등 지역에 가서 고찰하거나 실제로 중국혁명에 참가하기도 했다. 두 나라 지사들의 연계는 보다 더 밀접해졌다. 같은 해 12월 한국의 저명한 민족독립지사 신규식이 상해를 거쳐 남경까지 가서 선후로 동맹회원 송교인(宋教仁), 진기미(陳其美), 대계도(戴季陶), 황흥(黃興), 손중산(孫中山), 류아자(柳亞子)등을 만났다. 이 기간 신규식은 이름을 신정(申柽)으로 고치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나중에는 중국혁명당의 일원으로 되었다. 閔石麟、睨觀:《申圭植先生傳記》, 韓國魂》,(台北)1955年8月睨觀先生紀唸會,第72頁, 轉引自杨天石《中韓愛國誌士的早期聯係》,《史學月刊》,2007年第3期。

신규식은 다른 한국지사들과 더불어 1912년 초에 남경에 가서 남경임시정부에 성금을 보내줌으로써 지지태도를 알렸다. 육군총장 황흥에게 보낸 서한 중 신규식 등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진술했고 중국혁명당인 들이 원조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며 황흥에게 시를 선물했다. 신규식은 황흥이 청나라의 통치를 철저히 뒤엎어 버리고 안으로는 폭군을 없애 버리고 밖으로는 외래 침략자를 섬멸할 것을 기대하였다. 황흥은 답장에서 "영원히 한국인을 협조하여 그들이 신속히 성공하여 다 함께 자유와 행복을 향수하도록 하겠다"고 표하였다. 申圭植:《韓國魂》,(台北)1955年8月睨觀先生紀唸會,第72頁,轉引自杨天石《中韓愛國誌士的早期聯係》,《史學月刊》,2007年第3期。
신규식은 송교인의 소개로 손중산과도 만남을 가졌다. 같은 해 9월 손중산은 연설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데 대하여 질책하고 비난했다. "일본은 고려를 소나 말처럼 여긴다. 비록 일본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고려인은 나날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추호의 이익도 없다" 孫中山:《在北京濛藏統一政治改良會歡迎會的演說》,《孫中山全集》,第2捲,中華書侷,1982年,第430頁。
고 했다.
중국에 건너 온 한국지사들을 단합하여 함께 항일독립투쟁을 벌이고저 신규식은 1912년7월4일 박은식, 김규식 등과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세웠다. 그 후, 신규식은 "중한공진,개조신아"(中韓共進,改造新亞)를 창의하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세웠다. 국민당인 등이 참가했고 이듬해 8월24일에는 신규식 등의 소개로 혁명문학단체 남사(革命文學團體南社)에 가입하였다. "南社入社書(原件),北京圖書館藏,轉引自杨天石《中韓愛國誌士的早期聯係》《史學月刊》,2007年第3期。
그 뒤로 신규식은 남사의 활동에 여러 번 참가했다.
1918년10월, 국제사회에서는 평화회의의 소집을 계획하였는바 신규식은 중화민국정부 총재 손중산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 한국은 동아시아의 발칸과 같습니다. 동대륙의 워싱턴이라 천재일우의 기회에 우리 한국에 특수한 동감을 가지고 틀림없이 상당한 원조를 주실 것입니다" 申圭植:《上孫中山總裁書》,震壇(週報),第6號。
라고 썼다. 한편, 신규식은 동제사 총대표의 신분으로 군정부의 여러 총재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군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회의에 참석하게 될 중국대표에게도 부탁을 하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대국 및 관계와 목전 정황을 간절히 진술하고저 여러 분들의 공정한 재판을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 서겸은 손중산의 전권대표로 군정부의 정무회의에 참석하였기에 광주비상국회 및 군정부 정무회도 신속히 결의를 채택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919년3월1일, 한국국민들은 반일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일제의 잔폭한 진압을 받았다. 조선 각지에서 폭발한 광범한 군중항의를 역사에서는 "3.1운동"이라고 일컫는다. 4월10일, 한국 지사들은 상해에서 임시정의원을 조직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임시헌장"을 채택하여 민주공화제를 실시한다고 규정하였다. 11일, 한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창립되었다. 같은 달, 신한청년당대표 김규식은 파리평화회의에 청원서를 바쳐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했고 고려를 독립국가로 개조하련다고 서술했다. 김규식이 이 회의에 참가하기 직전 손중산, 장태염, 당소의, 서겸 등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상의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손중산은 "조선 문제는 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일본이 한인들의 요구를 받아 들여 독립을 승인하는 게 좋을듯 싶다" 中國前大總統孫逸仙氏對日本談,新韓青年,第1卷第1號.
는 견해를 내놓았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한국임시정부는 집회를 조직하여 추모행사를 가졌다. 재중 한국지사들은 글을 발표하여 "우리 고려는 오래 동안 일본의 핍박을 받아 숨쉬기마저 어려운데 마치 중국이 열강들이 압박을 받은 것과 별 다름이 없기에 우리 서로는 그야말로 동병상련이요, 손 선생이 동방의 수난민족을 인솔하여 다 함께 전진하였는데 큰 별이 지다니, 희망컨대 앞으로 중산선생의 신도들은 그이의 정책을 드팀없이 받들고 따르도록 노력하자" 伍達光:《孫中山評論集》,上海三民出版部,1925年,第97頁。
고 했다. 
손중산의 서거는 재중 한국지사들에게 있어서 적극적이고 견정한 지지자를 잃어버린 것으로 되었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한국독립당은 "사람과 사람의 균등", "민족과 민족의 균등", "나라와 나라사이의 균등"이라는 "삼균주의"를 내놓았는데 손중산의 삼민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뒤로 연이어 나타난 신한청년당, 대한청년동맹회, 신한민주당의 강령중에도 손중산사상의 그림자가 늘 비껴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살펴본다면 중국은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한국에 극대한 원조를 주었고 그들을 도와서 당파조직을 통일했고 무장역량을 건립해 주었다. 국제적으로 중국정부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힘껏 도움을 주었고 국제사회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손중산은 "아시아주의 모든 민족이 연합하여야만 아시아 모든 민족의 독립운동이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는 피압박민족들에게 "왕도를 토대로","서양의 패권문화를 반대"했고,"모든 민중의 평화, 평등, 해방의 문화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문화를 "대아시아주의"의 핵심문제로 간주했다. 손중산의 사상, 이론 ,실천 및 동맹회 그리고 그가 친히 지도한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 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해혁명이 아시아 특히는 한국에 중요한 영향을 가져다 준 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첫째, 지리, 역사 및 문화전통 등의 많은 원인으로 예로부터 중국에 큰 사건이 일어 날 때마다 한반도에 아주 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근세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공동한 적과 항전을 펼쳤다. 또한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국정, 혁명과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신해혁명과 삼민주의의 혁명성은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에 적합하였다.
넷째, 손중산 등 혁명당인의 혁명정신과 품성은 아시아 피압박민족들에게 동정을 주었고 동시에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시아의 시각에서 신해혁명을 돌이켜 보면 신해혁명의 의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평화공존하고 함께 조화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고 구축하는가 하는데 아주 큰 계시를 주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중화민국의 탄생은 의심할 바 없이 아시아, 특히 중국주변의 동아시아 지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공화혁명의 성공소식이 당시 일본식민지로 전락된 한국에 전해지자 한국혁명의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직접 참가하게 된 원인은 중국혁명이 성공하여 중국이 강성해진 후 한국의 독립운동과 혁명도 중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지 못하자 많은 한국지사들은 신해혁명을 그들의 혁명운동으로 여겼다. 이런 사실들은 당시의 신해혁명이 가진 국제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신해혁명은 단지 중국 한 나라의 혁명이 아닌 온 아시아주의 공화혁명을 추동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2. <진단(震坛)>으로부터 본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

중국혁명, 한국혁명 및 러시아혁명은 20세기 초 극동에서 가장 큰 세 개의 혁명운동으로 일컫는다. 石源華:《韓國獨立運動與中國》,《抗日戰爭研究》編輯部編:《抗日戰爭勝利五十週年紀唸集》,北京:近代史研究雜誌社,1995年,第432頁。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선봉자 역할을 하였다. 갑오청일전쟁이 끝나고 청일 양국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였다.1910년8월,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였으며 이른바 <일한합방조약>을 맺었다. 한국인들은 곧바로 해내외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반항운동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한국독립운동"이다. 그동안 수많은 지사들이 중국에 망명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신문을 창간 발행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하는 사업에 뛰어 들었다. 1919년4월,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는 중심으로 되었다. 한국의 지사들은 손중산이 영도하는 중국의 혁명사업에도 크나큰 경모의 정과 지지를 표하였다.한편 손중산을 지도자로 하는 중국의 혁명지사들도 한국지사들에게 여러모로 되는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나라 지사들은 상호 협력하고 지지하며 의지했다. 주간<진단(震坛)>이 곧 그 역사의 견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단>은 1920년대 한국독립운동시기의 중문 간행물이었다. 1920년대, 한국지사들이 중국에서 창간한 중문 간행물은 주로 <<신한청년新韓青年>>, <<진단震壇 >> , <<광명光明>>등이 있다.
이 간행물은 재상해 한인들이 1920년10월10일에 상해에서 창간되었고 1921년4월24일에 폐간되었다. 주필은 신규식선생이었으며 매주 일요일에 출판되었다. 상해(上海),베이징(北京),상주(常州),무석(無錫),남경(南京)에 대리처를 설립하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에도 통신처를 세웠는데 멀리로 유럽 및 미국에까지 발행이 되어 그 당시 일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진단>은 사설,한국독립운동사,한군전보,한국소식,중국소식,세계소식,통언(痛言),단평,한국명인전기,사회문제,문예,시사평론 등 코너로 구성되었다. 주로 한국인들이 일본 침략에 저항하고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영용적인 사적을 보도하고 일본의 확장야심과 잔인무도한 폭행을 낱낱이 폭로하였으며 한, 중, 일 및 국제사회의 정치, 군사, 외교 등 정세를 평론하였다.
<진단>의 주요 기고인, 작가 중에는 한국인 외에 중국인도 포함되었다. 한국인들로는 박은식(朴殷植),조완구(趙琬九),박찬익(朴赞翊)등이 있었고 중국인들로는 손홍이(孫洪伊),여지이(吕志伊),서겸(徐謙),경매구(景梅九),강항호(江亢虎) 등이 있었다.
<진단>의 창간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당시 한국임시정부는 여론도구가 급히 필요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고압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모든 교육기관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고 14개의 신문 및 30여종의 서적이 봉쇄당하지 않으면 모조리 회수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외래간행물도 마찬가지였고 출판조례를 정하여 "정치와 관련된 간행물의 인쇄를 불허했다" 《韓人之教育掃地》【韓】太白狂奴輯:《韓國痛史》,上海:大同編譯社,1915年,第153頁。
. 한국지사들은 중국에 건너 와서 혁명에 투신하였다. 【韓】閔斗基:《辛亥革命與韓國的獨立運動-以曹成煥給安昌浩的信為中心》,檯北:《韓國學報》,第14期。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고고성을 울린 후 <우리 소식>을 간행하고, 8월에는 <독립>을 창간하였는데 반일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간섭 받는 것이 일쑤였다. 그 뒤로 제호를 <독립신문>으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6월에 운영을 중지하였다. 그 뒤 반년도 안돼서 <진단>이 세상에 나왔는데 "민족자결", "독립평등주장", "국제친선연락", "세계문화주입","광복정세선전" 【韓】申睨觀:《本報創刊辭二》,《震壇》第一期。
등을 취지로 삼았다. 
둘째로, 세계여론의 눈과 귀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후 언론을 조종하였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왜곡하였다. “日本對付吾韓,完全以武力壓製為主腦,故吾韓民之苦痛,世界竟鮮知真相者.即若此次獨立,吾民曾擲無量數之頭顱,而日本傳宣機關,僅言小小部分,且未有認為嚴重者,情形隔閡,遂蔓使歐美諸國” 【韓】申睨觀:《本報創刊辭二》,《震壇》第一期。
상해<민국일보>에서 피력한데 따르면 1919년3월, 한인이 독립을 선포한 뒤로부터 세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소식이 전해오면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주장이 많아서 진상이 가려지고 숨겨지는데 퍽 유감을 느껴 "중국인사 모모 등은 한인의 독립운동은 동아평화와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순치의 친선적 연관이 있다. 당면 만몽의 풍운도 점점 악화되는 판에 한인이 나라를 회복한다면 중국과의 관계가 극히 절실할 것이다. 즉 사리해론인데 중한은 같은 인종 같은 문화권이라, 역시 정의의 도움으로 동지들을 연합하여 주간<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震壇>出版之緣由》,上海《民國日報》,1920年10月14日。
" (茲有中國人士某某等,因韓人複國運動,非特關係東亞之和平,而與中國有脣齒之誼,方今滿蒙風雲正惡,故韓人複國,與中國關係尤切,即捨利害論,中韓同種同文,亦宜為正義之助,爰特聯合同誌,組織《震壇》週刊) 라고 했다.
세 번째로, 세계 여러 나라 특히는 중국인민의 동정과 지지를 쟁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920년대의 상해는 각계 인사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한국지사들의 활동에 무대를 제공하여 플랫폼 역할을 하였다. <진단>의 창간사의 첫머리에 요지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어려움 속에서 손잡고 협력하여 한마음 한 뜻으로 곤난을 이겨내자. 중한이 함께 가는 첫 걸음으로서 협력을 창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本社同人:《本報創刊辭一》,《震壇》第一期。
(攜手共濟,睏處漏舟,耑 賴同心匡救。同人不敏,願本此意,為中韓共進之初步,此對於華人者,深願邦人明達,協力倡導,俾達斯旨)고 했다. 또한 <진단>은 "한국의 올바른 모습과 진상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여 정의의 동정심과 원조를 불러 일으켜 사람을 구원하는 한편 스스로 구원한다는 것이다" 《<震壇>出版之緣由》,上海《民國日報》,1920年10月14日。
(介紹韓事真相於華人,鼓起援助正義之同情心,救人並以自救)
중한 두 나라는 산과 물이 잇닿아 있고 예로부터 외세와 맞서 함께 싸우면서 두터운 친선관계를 맺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후 한인들은 불요불굴의 민족혁명투쟁 속에 앞 다투어 뛰어 들었다. 손중산은 이에 깊은 관심과 주의를 돌리면서 "중한 양국은 동문동종(同文同种)이요, 형제의 나라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관계가 밀접하여 마치 순과 치가 서로 의존하듯이 갈라놓을 수 없다.","한국의 독립운동, 국권회복운동에 대하여 중국은 마땅히 원조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王子毅編著:《韓國》,重慶:商務印書館,1945年,第245頁。
(中韓兩國同文同種,本係兄弟之邦,素有悠遠的歷史,關係輔車相依,不可 鬚臾分離”,“對於韓國複國運動,中國應有援助義務,自不待言)라고 지적하였다.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중국의 지사들은 <진단>을 통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중국의 지사들은 <진단>의 창간을 위하여 붓을 들어 발묵하는 형식을 통해 한인들에게 유력한 성원을 보냈다. 창간호 제2면에는 손중산의 기념사 "진단발간지축: 천하위공. 손문 제"(震壇髮刊之祝:天下為公。孫文題)를 게재했다. 손중산은 1919-1920년,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국지사들과 깊이 사귀였다. 石源華:《韓國獨立運動血史新論》,上海:上海人民出版社,1996年,第30頁。
기념사(제사題詞)도 요청을 받고 친히 쓴 것인데 <진단>이 창간되기 직전에 완성한 것이다. "천하위공天下為公"을 기념사로 쓴 데는 한국이 세계혁명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한다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진단>에는 당소의(唐紹儀)의 “祝震壇創刊,同我太平”,호한민(鬍漢民)의 “是謂不爭 之德,是謂用人之力”,백문위(柏文蔚)의“震壇叢報創刊,共仰明星”,서겸(徐謙)의“私有破則強權滅,祝震壇叢報出版”,강항호의(江亢虎)“題震壇叢報,震旦出友,壇坫出光”,진독수의(陳獨秀)“震壇叢報,東亞之光”,온세림의(溫世霖)“髮揚正氣,震壇報社萬歲”,장인걸(張人傑)의“一鳴驚人”,장중정(蔣中正)의"祝震壇髮達,同舟共濟",우우임(於右任)의"震壇報萬歲,大仁大勇",서소정(徐紹桢)의"驚遠懼邇",뉴영건(鈕永建)의"與有同感,震壇報大興"등 기념사(제사題詞)가 게재되었다. 이렇게 많은 중국의 풍운아들이 외국인이 운영하는 간행물에 기념사를 올려 축하의 뜻을 표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는 그들의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말해준다. 
<진단>은 또 다른 중국 인사들의 축사도 실었는데 그들은 한국인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호소하였다. 손홍이(孙洪伊)는 "단군, 기자가 신명하여 조선을 세웠다. 사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이어온 이천만 후예들은 오늘에 이르러 부진하여 나라가 갑자기 망하게 되었다. 정말 너무나 가슴이 시리고 아픈 일이다. 영국과 미국은 왜서 강대한가? 자결을 하는 민족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끝없이 넓은 한강수, 우뚝 솟은 남산, 나라의 혼과 넋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흥하게 될것이다.”("檀箕神明,粵建朝鮮,裔胃廿兆,綿歷四千,鬍今不振,亡也忽然.傷哉傷哉,唸唸心痠,論我種族,如英與美,論我政治,如魯與衛,英美何強?魯衛和憊?僉曰自決,民族迺偉.......惟韓有人,獨立搴旂,血肉相搏,肝腦塗之,孰主張是,楚雖三戶,亡秦必矣.壯哉貴報,渙汗大號,還我河山,率我英豪,漢水泱泱,南山巍巍,國魂在是,其興也哉”)라고 썼고 여지이(呂誌伊)는“震旦鄰邦,壇君後裔,民廿餘兆,史五千禩,明夷紹箕,洪範錫禹,文化早開,彝倫攸敘,鬍來狼虎,噬同蛇豕,滄海橫流,銅駝荊杞,多難邦興,慇憂智啟,自由鐘撞,獨立旂舉,草木皆兵,河山重締,群策群力,再接再厲,有筆如椽,不畏強御,大聲疾呼,崇論宏議,灌溉新潮,髮揚正義,毛瑟槍長,橫磨劍利,強鋤扶弱,滅興絕繼,價重雞林,洛陽紙貴”라고 썼으며 서겸(徐謙)은 "세계의 민족은 반드시 완전한 자유를 가져야 하고 세계의 나라들은 반드시 완전한 독립을 하여야 하며 세계의 그 어느 한 민족이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온 누리 인류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누리의 어느 한 나라가 독립을 못한다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완전한 독립을 못한 것과 마찬가지고 만약 어느 한 민족이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이 누리의 모든 인간들은 부축하고 도와줘야 하며 그 어느 한 나라가 독립을 못하였다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도움을 주어 독립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와 나라사이의 진리이다."(“世界之民族,必各有完全之自由,世界之國,亦必各有完全之獨立,世界有一民族不能自由,則世界全人類不能完全自由,世界有一國不能獨立,則世界列國亦不能完全獨立。故有一民族不能自由者,世界全人類應扶之,使得其自有,有一國不能獨立者,世界列國應共扶助之,使 複其獨立,此國交之真理也”) 所引題詞、祝詞均載《震壇》第一期。
라고 썼다.
<진단>제8호에는 "내함"(来函)이라는 글이 게재되었는데 손중산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체현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上海通信社來函更正,本社接到孫中山先生來函雲,日前貴社員來談話,文所言是履行馬關條約,蓋此約迺首次認高麗為獨立國者,而由日本髮起迫中國承認者也,後日本迺自取消之,而並吞高麗。今慾讚助高麗獨立,必自履行馬關條約始,貴社員誤文言履行為取消,未免失之毫釐,謬以韆裡,倖為更正是荷雲雲。郃亟更正,並誌謙忱” 《來函》,《震壇》第八期。

이 편지는 <진단> 제6호에 실은 <<손중산 당소천의 외교주장>> ("孫中山唐少川之外 交主張")에 대하여 정정한 것이다. 이로부터 손중산이 <진단>을 읽은 후 이런 반응과 행동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중산 등은 <진단>을 빌어 한인들의 독립투쟁을 기치가 선명하게 지지하였다. 1920년11월8일, 상해통신사 기자가 한국독립 및 중국 산동문제에 관련된 질문을 하였는데 손중산은 세계의 안목으로 문제를 분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적으로 당면의 정세에 비추어 얻은 결론인데 지금은 사자가 토끼를 잡는 식으로 온갖 힘을 다해 이상의 문제에 기울이는 것보다 눈길을 더 멀리 만주 및 고려에 돌려야 한다. 그 첫 번째 방법은 <마관조약>의 무효 및 취소를 요구하여 한인들의 독립을 부축하고 지지하여야 하며, 둘째로 21개조 매국조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해야 하고 산동을 탈취하려는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또한 "21개조 중 在산동 독일인 권리에 대한 조목이 빚어낸 일이다.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만약 우리나라의 담장이 튼튼하다면 산동문제는 연대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현재, 산동 한모퉁이 문제에만 급급할 필요는 없다."(皆此二十一條中承繼山東德人權利一條有以釀成也。該兩步辦法如能辦到,則吾國藩籬已固,山東問題亦即可以連帶解決。故餘意目下殊可不必汲汲山東一隅之問題也。) 《孫中山唐少川之外交主張》,《震壇》第六期。
이에 기자는 두 가지 방법이 아주 훌륭하고 현명하다고 칭하고 나서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 질문하자 손중산이 답하기를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한가지인데 즉 강하고 튼튼한 여론을 조성하여 여러 나라들의 동정을 얻어야 하며 훗날에 열강들이 동정을 표한 후 그 실시책을 정해야 한다. 혹은 국제연맹에 제출하여 공개재판을 할 수도 있다. 공정과 도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승산을 짐작하는데는 어렵지 않다. "손중산은 한인의 독립을 부축할 것을 요지로 말했고 제시한 실시방법과 절차가 그닥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는 진정 소중한 것이다.
한인이 당소의를 방문했을 때 그도 손중산과 비슷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번 연맹회의는 영국, 프랑스, 일본이 가장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의안을 제출하면 아마도 목적에 도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동아시아의 지구적인 평화를 감안하여 국부적인 제안을 제출하는 것을 삼가하는게 좋겠다. 국부적인 제안을 제출하면 안목이 너무 좁기에 동아시아를 아우르면 조선의 독립을 부축할 수 있어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며, 조선이 독립을 맞이한다면 중일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분쟁도 해결될 수 있다. (此次聯盟會議,英法日居重心,提交恐不易達目的,且吾人鬚擴大範圍,為東亞永久和平著想,不宜僅為侷部題,提案。蓋侷部提案,予各國人利已之消,未免目光太小,苟為東亞全部計,則扶助朝鮮獨立,最為必要,因朝鮮獨立,則中日間一切糾紛,均可解決") 《孫中山唐少川之外交主張》,《震壇》第六期。

<진단>은 손중산과 당소의의 주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 한인독립의 지원을 하는 것은 산동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均以為援助韓人獨立,較魯案尤為重要”),"한인 들에게만 친근하여 본국에 소홀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세계의 공정과 도의를 위한 방법이요, 또한 본국의 이익을 위한 방법이며 한인독립을 원조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일로서 의견을 표명하여 나라백성들을 일깨워주었다."(“非親於韓人而疏於本國也,蓋為世界正道計,為本國利害計,援助韓人獨立,實萬不可緩之舉,故髮錶其意見,以促國人之猛省也”)라고 하면서 손중산과 당소의를 중국 "위대한 두 인물"이라고 칭송하여 "전국이 한결같이 한인의 독립을 자신과 관련된 일로, 최선을 다하여 온갖 힘을 기울여야 하며 상호 연락함으로써 간사하고 교활한 일본인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두 나라 국민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이다"(“全國一緻,視韓人獨立為切身之事,儘其全力,互相聯絡,以驅狡鄰於國境之外,固兩國國民應儘之責任也”) 記者:《國民應儘之責任》,《震壇》第六期。
라고 했다.
제4호, 경매구(景梅九)의 논문에서는 한인망국의 비참함을 내세워 중국군벌이 일제와 결탁한 험악무도한 행위를 폭로하여 중국인들이 힘을 합쳐 한국을 구조하는 한편 스스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수호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향후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삼한의 동포들을 힘껏 부축하고 원조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이 하루 빨리 독립을 하여 동아의 두 번째 공화국을 세운다면 한국 국민의 행운일뿐만아니라 중화 4억인 들의 영광이기도 하다"(“我國人自今以往,對於可矜可敬之三韓同胞,亦各勉儘扶持援助之責。庶幾,稍蓋蠻警之前愆,一平義民之公憤,俾韓國早日恢複獨立之原狀,於東亞建立第二共和國,不惟韓國國民之倖,我中華四百兆人亦與有荣焉”) 景梅九:《為韓國近事正告國人》,《震壇》第四期。
라고 피력했다.
중국혁명지사들은 연속 <진단>에 시사평론을 발표하여 중국인들이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며 염황자손의 드넓은 "세계" 안목과 흉금을 보여주었다.
<중화국경일감상>(中華國慶日感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단>이 창간 일을 중화민국 국경일로 택한데는 아주 특수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우리들은 희망 컨데 중화국인들이 국경의 날에 즈음해 한 형제나라가 오늘날 일본폭도들의 잔인무도한 폭행 하에 신음하고 있고 힘써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며, 또한 교활한 일본이 동아시아를 잘라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중화인을 한인처럼 대하지 않을고? 이 시각 온 나라가 환희의 국경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우리들에게 어찌 영원히 우환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중화국민은 한인을 동정하여 그들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吾人希望於中華國人於慶祝國慶之際,曾否憶及有一兄弟之國,方呻吟於狡日暴力之下,力求擺脫者乎,又安知狡日方慾宰割東亞,將以待韓人者待中華乎?嗟乎!此全國歡訢之國慶日,能永保無虞乎?中華國民為自救救人之計,當輸极大同情於韓人,助韓人脫羈絆”) 《中華國慶日感想》,《震壇》第一期。

<우리의 일>에서는 중한 두 나라는 순치가 의존하듯이 서로의 정이 형제처럼 두텁기에 한국의 고통이 곧 중국의 고통이며 중국의 고통도 곧 한국의 고통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는 것은 한국인을 돕는 것보다도 실은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므로 한국과 중국은 계속 한결같이 연계를 하여야 하고 이것 또한 자연의 추세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한 두 나라의 처지가 비슷하고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나 지리적으로 비슷하고 종족과 문화도 서로 같기 때문이라고 천명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중한 양국의 자위와 관계됨으로써 더 나아가서 동양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에 우리들의 일이자 세계 인류 공동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朝鮮運動獨立,就關係中韓兩國自衛,就關係東洋的和平與世界的和平,所以我說是我們的事,並且可以說是世界人類的事”) 姚作賓:《是我們的事》,《震壇》,第一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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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중한 두 나라는“辅车相依,唇亡齿寒”의 이웃사이이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중한 두 나라는 모두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강탈의 목표가 되었고 두 나라 인민들은 이에 대응하여 투쟁을 진행하였다. 역사적인 정감과 현실적인 조우 그리고 지리적인 원인으로 양국 지사들은 투쟁과정에 서로 지지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공화혁명의 성공소식이 당시 일본식민지로 전락된 한국에 퍼지자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중국혁명당인들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상해 프랑스조계지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이 시기 재중 한인 망명 지사들은 늘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관심, 지지하였고 중국의 혁명당인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한국지사들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중국의 지사들은 주간 <진단>을 통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진단>은 두 나라 지사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지하며 성원을 보내준 역사의 견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 애국지사들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는 중한양국 외교사에서 중요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한외교 역사상의 불후한 豐碑로 남아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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