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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의 ICJ 제소에 대한 학술세미나 - 일본의 ICJ 제소 배경과 전망 - 발제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3-27 조회수 : 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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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ICJ 제소 제안의 배경 및 전망

홍 성 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지난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본은 한국 측에 독도에 관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독도 문제를 제소할 것을 한국 정부에 제안한 것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번 ICJ 제소 제의는 1954년, 1962년에 이어 세 번째이다. 
1965년 한일간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을 체결한 이후 1990년대 말까지도 일본 정부는 독도문제를 ICJ에 제소하여 다루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6년 2월 13일 일본 외무성 기자회견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http://www.mofa.go.jp/announce/press/1996/2/213.html).
일본의 주된 입장은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는, “양국 정부는 별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간 분쟁은 우선 외교상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調停에 의하여 해결을 도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에 규정된대로 ‘외교적 경로’를 통한 해결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2012년의 ICJ 제소 제안은 시간적으로도 40년만에 있은 일이고, 또한 그동안 일본이 취한 태도와 사뭇 다르다. 
독도문제의 ICJ제소와 관련하여 한국 측에서는 ‘독도문제가 ICJ에 제소할 수 있는 성격의 분쟁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ICJ제소를 유비무환의 자세로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 많은 도서영유권분쟁이 ICJ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아시아에서도 ICJ를 기피하지 않는 현상이 점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ICJ 재판은 결정적이며 일도양단(一刀兩斷) 또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국가의 존립기반과 관련이 있는 ‘져서는 절대 안되는 분쟁’으로 여겨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분쟁 당사자들이 국제재판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하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독도는 독립과 주권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독도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영토주권의 존립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ICJ 제소를 제안하는 의도와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검토는 일본의 독도 도발의 의도를 분석하고 또 대응하는데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ICJ 제소를 제안한 배경과 그와 관련된 제반 논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일본의 ICJ 제소 제안의 역사와 배경

1. 1954년 ICJ 제소 제안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677호 및 제1033호가 폐지되었다. 그 이후 일본이 독도 침입을 시도하였다. 1953년 5월 28일 이후 10월 23일까지 약 16차례에 걸쳐서 일본의 해상보안청 순시선, 시마네현 시험선 등이 독도에 칩입했다. 1954년에는 3월 2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약 9차례 일본의 순시선 및 시험선 등이 독도에 침입했다. 한국 측은 일본의 독도 점유 시도를 막으며, 한일 양국이 독도에서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때로 총기도 사용하였는데, 그 중 최대의 총격사건은 1953년 7월 12일과 1954년 8월 23일에 발생하였다. 
1953년 7월 12일 한국의 독도 경비대가 독도로 진입하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헤쿠라호)에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 각의 등에서는 한국과의 직접교섭(direct negotiation), 미국과 영국에 의한 중개(mediation), ICJ 제소 등의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1954년 8월 23일 한국의 독도 경비대가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오키 호)에 약 10분간 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8월 28일 한국은 독도경비대 막사를 건립하고, 9월 15일에는 독도 우표도 발행하였다. 
1954년 9월 25일 일본 정부는 독도문제를 ICJ에 제소하자고 한국측에 제안해왔다. 그 내용은 “독도문제가 국제법의 기본적인 원칙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영유권에 관한 분쟁인 만큼 오직 공평한 해결책은 국제재판소에 제소하여 결정하는 것”이었다. 1954년 9월 25일자 일본측구술서(No. 158/A5)(외무부, 『독도관계자료집(Ⅰ): 왕복외교문서(1952-76), 집무자료 77-134(北一)』(서울: 외무부, 1977), pp. 74-75). 
이 때 일본 정부는 ICJ를 가장 공정하고 권위가 있는 기관으로 묘사하고, ICJ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1954년 10월 28일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제의가 사법절차를 가장한 또 다른 잘못된 주장의 시도에 불과하다’고 하며 일본의 제안를 거부하였다. 한국의 거부 이유는 이렇다. 즉 “분쟁을 ICJ에 제소하자는 일본 정부의 제안은 사법절차를 가장한 또 다른 잘못된 주장의 시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처음부터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ICJ를 통하여 그러한 권리를 확인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아무런 분쟁도 존재하지 않는데, 유사한 영토분쟁을 조작하는 것은 일본이다.” 1958년 10월 28일자 한국측구술서(위의 자료집, pp. 119-120). 
당시 한국은 일본의 ICJ 제소 제안이 독도에 대해 한국과 동등한 지위에 놓이고자 하는 의도라고 보았다. 
일본은 그들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않자, 1954년 11월 독도문제를 ICJ에 제소하기 위해 UN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를 통하여 한국을 압박할 계획으로 미국측에 그 의사를 타진했다. 관련자료는, [USNARA(미국문서보관소)/Doc. No. 694.95/11-254]-"Office Memorandum from Miss Bacon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to Miss Mc Mullen(Far Eastern Affairs): Japanese Proposal with Regard to Takeshima"(November 12, 1954) ; [USNARA/Doc. 694.95B/11-1654 CS/LGS]-"Memorandum of Conversation: Japanese Proposal to Refer Liancourt Dispute to Security Council"(November 16, 1954) 참고.
하지만, 미국 측의 난색 표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2. 1962년 ICJ 제소 제안

한일 양국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까지 계속된 회담 과정에서 평화선과 어업협정 등에 관해 치열하게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도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 
1962년 한해 동안 일본은 4차례에 걸쳐서 ICJ 제소를 제안했다. 이하 1962년 일본의 ICJ 제소 제안에 대해서는, 조윤수, 영토해양연구 Vol. 4(2012. 12,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pp. 152-157 참고.
그 첫 번째가 3월 한일 외무장관 회담시 일본 고사카 젠타로 외무장관이 한국의 최덕신 외무장관에게 독도문제를 ICJ에서 해결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최 장관은 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21일과 11월 12일에 있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의 1, 2차 회담에서 일본 측은 거듭하여 ICJ 제소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오히라 장관은 ‘양국 국내 정치 문제로 독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교 정상화 교섭 후에는 반드시 이 건을 ICJ에 제소한다는 약속을 한국 측이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회담에서 김종필 부장은 일본측의 ICJ 제소 제안을 거부하면서, 역으로 제3국 조정에 의한 해결안을 제안했다. 그 이유는 ‘ICJ 재판은 승패가 분명히 가려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적당하지 않고, 제3국 조정에 맡긴다면 제3국이 한일관계를 고려하면서 조정 시기와 내용을 탄력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윤수, 영토해양연구 Vol. 4(2012. 12,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pp. 152-157 참고.

마지막 네 번째 제안은 1962년 12월에 있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의 이세키 유지로 아시아국장이 1차안으로 ‘제3의 기관에 조정 의뢰’를 제시하고, 그에 의해서도 일정 기간 동안 해결되지 않으면 제2차 안으로 ‘ICJ 제소’를 제안했다. 한국측은 역시 ICJ 제소 제안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우려하였다. ‘첫째, ICJ에 일본인 판사가 있어 우리에게 불리한 분위기이고, 둘째, ICJ에 제소를 하면 ICJ 규정상(임시보전 조치) 독도의 시설물을 철거하고 경비대원을 철수시켜야 할 우려가 있으며, 셋째, 북한이 이해관계국으로서 소송참가를 신청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계속되는 ICJ 제소 요구에 한국은 ‘국교 정상화 후 제3국 조정에 의한 해결’을 역 제의하기도 했으나, 1965년 4월 한국의 김동조 대사는 ‘조정’안도 거부하였다.

3. 2012년 ICJ 제소 제안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ICJ 제소를 제안했다. 즉 8월 21일 일본 정부는 독도문제를 ‘조용하고 공평하고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별협정(Special agreement)을 통해 ICJ에 제소할 것을 제안했다. Proposal to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o Institute Proceedings before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by a Special Agreement(August 21, 2012) : (1) On August 21, the Government of Japan proposed to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o institute proceedings before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by a special agreement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proposed about conciliation based on the “Exchange of notes constituting an agreement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concerning the settlement of disputes” on the dispute over the sovereignty of Takeshima to settle it in a calm, fair and peaceful way based on international law. (2) …
동시에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기초하여 조정(Conciliation)을 통해 해결할 것도 제안하였다. 
8월 30일 한국 정부는 구상서를 통해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당일 즉시 일본 정부는 ICJ를 통한 해결이 적절하다는 것을 재차 언급하고, ICJ 단독 제소를 포함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포하였다. Statement by the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of Japan on the Refusal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of the Government of Japan's Proposal on the Institution of Proceedings before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by a Special Agreement(August 30, 2012) : (1) … (3) The GOJ intends to continue taking appropriate actions in resolving the Takeshima dispute in a calm and peaceful manner based on international law, including referring the dispute to the ICJ on its own.
일본은 그러한 일련의 조치 내용을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도 일일이 게시하였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 http://www.mofa.go.jp/region/asia-paci/takeshima/index.html
일본은 그 이후 단독 제소가 임박하다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되다가, 2013년 1월 8일 일본 외무장관이 단독 제소와 관련하여 “준비 검토를 하고 있다”고만 말하고, 일본 언론을 통해 ‘당분간 유보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금번 일본의 ICJ 제소 제의는 1954년 및 1962년의 제안과 다른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을 통한 해결도 함께 제안한 점이다. 이전 두 번의 제소 제안은 ICJ제소만 제안했다. 이것은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이 1965년에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ICJ에 단독 제소 신청까지 감행하겠다는 정치적 공세도 함께 한 점이다. 일본의 ICJ 단독 제소 시도는 국제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행위로서, ‘국제법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비우호적인 행위’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Ⅲ. ICJ 제소 제안 이후 일본의 조직적인 독도 도발

일본의 ICJ 단독 제소 신청이 한창 회자되던 2012년 11월 일본은 독도 문제 대책기구로서 이른바 ‘다케시마 문제 대책준비팀’을 만들었다. 전임 직원 3명에 모두 9명 체제였다. 일본의 정권이 지난 2012년 12월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바뀌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한국에서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시기여서, 한일 양국간 우호 근린 외교를 새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일본은 독도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지난 2월 5일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를 총괄 조정하는 ‘영토・주권 대책 기획조정실’(이하 영토대책실)이라는 부서를 내각 관방 내에 설치했다. ‘영토대책실’은 위의 ‘다케시마 문제 대책 준비팀’을 확대 개편한 형태인데, 15명 체제로 되어 있다. 전임 직원이 11명이고, 4명은 내각부 산하에 있는 ‘북방대책본부’의 업무를 겸한다. 
‘영토대책실’에서는 독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중국, 러시아와 영토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尖角)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남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문제도 함께 다룬다. 주된 활동은 이들 영토가 자국의 영토임을 국내외에 알리는 것이다. 즉 이들 영토에 관한 국민 여론 조성을 위한 활동을 기획, 입안하고, 국제사회에 자국의 주장을 확산시키는 활동들을 할 것이다. 
‘영토대책실’은 정부 내에서 독도 문제에 관한 종합 조정과 효과적인 전략을 구상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한 점에서 해외 홍보활동을 하는 외무성, 교과서 독도 기술과 관련된 문부성, 독도 해상을 순시하는 해상보안청 등과도 긴밀하게 연동해 나갈 것이다. 물론 지방정부인 시마네현과도 협의, 연계할 것이다. ICJ 제소 및 독도와 관련된 국제법적인 검토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시마네현에는 이미 2006년부터 총무과에 독도 담당을 두고,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 문제연구회’를 통해 독도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실시하고, 축적된 자료를 ‘다케시마 자료실’을 통해 홍보하고 또 지속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지난 2월 총무과의 독도 담당은 ‘다케시마 대책실’로 변모하였다. 인원이 기존 1명에서 추가로 1명이 증원되어 2명이 독도 관련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또한 ‘다케시마 자료실’은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해양정책연구재단’과 정보교환 등을 연계하기로 합의한 바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난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島根県)은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가졌다. 올해가 여덟 번째 행사였다. 이번 행사가 이전과 다른 점은 일본 중앙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개입, 가담했다. 내각부의 ‘해양정책・영토문제 담당 정무관’(시마지리 아이코, 島尻安伊子)이라는 중앙 정부의 고위인사가 처음으로 행사에 참석하여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주권에 관한 문제로서 정부는 물론 현지인을 포함한 국민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할 일’이라고 했다. 국회의원들도 의원을 겸하고 있는 정무관을 포함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20명이나 참석했다. 그 면면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 전 총리의 아들이자 자민당 청년국장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의원을 비롯한 집권 자민당 의원, 민주당 의원 등 초당적이었다. 
한편 일본은 이미 2008년 중학교, 2009년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등 영토관련 교육을 강화할 것을 기술하였고, 또 2005년 이후 학교 교과서에도 독도 관련 내용을 계속해서 확대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조직적인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도에 대한 국내외 여론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남쿠릴열도 관련 운동과 긴밀히 연계해 나갈 것이다. ‘영토대책실’은 직원 4명이 ‘북방대책본부’의 업무를 겸하고 있다. 특히 일본 내 남쿠릴열도(일본식 명칭은 북방영토)와 관련된 조직은 ‘북방영토 담당장관’이 있고, ‘북방영토문제 대책협의회’라는 특별 법인체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2월 7일을 ‘북방영토의 날’로 지정하여 각 지역별로 ‘북방영토 대책 현민회의’를 개최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더욱이 시마네현에서는 ‘남쿠릴열도 반환요구 운동’을 독도와 연계하여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에 연합 행사를 치루고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아주 잘 갖춰져 있는 일본 내 남쿠릴열도 관련 인프라에 독도라는 콘텐츠를 올려놓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 관련 각종 홍보활동과 교과서 기술을 통해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 간의 대결로 몰아 독도 문제로 인한 양국간의 갈등을 장기화 시키고 있다. 또한 그 전장(戰場)을 국제사회로 확대하면서 한일간 외교적 대립을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행태와 추세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집권 자민당이 정책 공약으로 내세운 정부 주최의 ‘다케시마의 날’ 행사도 밀어붙일 뿐만 아니라, ‘독도 관련 내각부서 설치’, ‘ICJ 일방 제소 강행’도 감행할 것이다.


Ⅲ. 독도문제의 ICJ 제소 불가론

한국이 ICJ규정 제36조 제2항의 선택조항을 수락하지도 않았으며, 또 독도문제와 관련된 조약에 있어서 ICJ의 강제관할권을 인정한 조약에도 가입한 바가 없다. 독도문제의 재판가능성은 오직 한일 양국의 합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독도문제가 국제재판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해결될 것인가 하는 것도 한일 양국 특히 국민들의 의지와 의사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재판의 가장 큰 특징은 ‘결정적’이라는 점이다. J.G. Merrills, International Dispute Settlement, 3rd (e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 293.
국제재판소의 결정은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재판결과보다 분쟁의 종결이 더 중요한 경우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가 국가의 존립기반이 되는 영토에 관한 분쟁에 있어서 재판은 너무 위험하므로 이용될 가능성이 적다. 이것은 판결의 결과가 일방 당사자에게만 전적인 권리를 귀속시키고 타방에게는 영토의 상실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결과를 반드시 얻어내려는 국가들은 재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결과는 사태를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에 ‘져서는 절대 안되는 분쟁’의 당사자들은 재판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재판을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가진 최종판결이 나더라도 판결이 분쟁해결에 항상 바로 효과를 미치지는 않는다. 물론 많은 경우에 국가들이 ICJ에 분쟁을 회부한다고 하는 것은 확정적인 해결책을 구하려는 분명한 목적에서이다. 분쟁당사국 모두가 적극적인 소송당사자라면, 재판소의 판결만으로 그 분쟁이 종식될 수 있다. 재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적대적 행동은 아니고, 제3자의 결정에 따르기로 합의함으로써 분쟁을 비정치화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분쟁당사국의 동의에 의존하여 재판을 하게 되는 국제재판에서는 분쟁당사국간의 적극적이고 원만한 합의 없이는 분쟁을 완전히 해결하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분쟁당사국이 적극적인 자세로 합의를 하여 국제재판에 회부한 경우에는 그 효력이 무시될 가능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과 프랑스간의 망끼에-에끌레오섬 사건을 들 수 있다. 비록 영국이 이 사건에서 승소를 했지만, 프랑스는 ICJ의 판결에 승복을 하였다. 만약 결과를 무시한다면 비용손실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분쟁을 정치의 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되어 해결 가능성을 거의 없게 만든다. Merrills, op.cit, p. 161.
물론 때때로 국제재판의 판결이 분쟁당사국에 의해 이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비글해협 사건이 그 예이다. 이 사건의 일방당사국인 아르헨티나는 1977년 5월 2일 내려진 특별중재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1978년 1월 25일 무효를 주장하고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러자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로마교황청의 중개를 통하여 1984년 11월 29일 양국은 평화우호조약(Treaty of Peace and Friendship)을 체결하고 이 사건의 해결을 보게 되었다. Argentina-Chile: Beagel Channel Arbitration, ILM, Vol. 17(1978), p. 632; J.I. Charney and L.M. Alexander(ed.), International Maritime Boundaries, Vol. Ⅰ(Dordrecht: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996), pp. 719-755. 

따라서 국제재판을 통하여 독도문제를 최종적이고 구속력 있는 해결의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재판 회부에 대해 국민의 의사와 의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요구된다. 만일 독도문제에 대해 특별협정을 체결하여 국제재판에 회부하는 경우에는 특별협정에 비준 동의을 요한다는 규정을 두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얻은 비준서를 교환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규정이 특별협정에 없더라도 우리 헌법 제60조 제1항에 의하여 독도문제의 국제재판을 통한 해결은 주권의 제약 등에 관한 사항이므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독도문제의 ICJ 회부는 외교, 국방,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된다. 따라서 대통령은 현행 헌법 제72조에 따라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여 국민의 의사와 의지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독도는 국가안보와 경제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한국 국민들과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독도는 한국의 주권과 독립의 상징이 되어 있다. 한국민들은 독도문제를 20세기초 일본의 불법적인 한반도 침략에서 비롯된 역사문제로 보고 있다. 역사문제를 국제재판을 통해 풀고자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Ⅳ. 맺음말 : 평화로운 해결방안

1965년 이후 일본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외교 경로를 통해 독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 한편, 현실적으로는 ‘독도가 일본의 시정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ICJ 제소를 제의하는 국제법상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effective control)를 묵인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이 독도에 관해 영유권 분쟁의 존재를 인정토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그 외 일본은 ICJ 제소를 정치적 카드로 이용하고 있다. 1954년 일본의 ICJ 제소 제안을 한국이 거부하자, 일본은 한국이 독도에 대한 주장근거가 박약하기 때문에 거부했다고 하면서, ICJ 제소 제안을 국내외 정치적 홍보카드로 활용했다. 이것은 일본 국회에서 논의된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한일간 해양경계획정 및 어업에 관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일본 의회에서도 독도에 관한 논의가 치열하였다. 그 때 일본의 한 의원(세야 의원)이 ‘독도문제를 ICJ가 다루기에 적합한 문제라고 하면서, 일본측이 제안해도 한국 측이 거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이 점을 협상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UN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그 목적 중 하나로 들고(헌장 제1조 1항), 모든 회원국에 대해 국제분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할 것을 의무로 부과하고 있다. UN 헌장은 분쟁의 ‘계속이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는’ 분쟁의 당사자에 대해서는 ‘우선’(first of all), ‘당사자가 선택하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을 구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수단으로서 ‘교섭’(negotiation), ‘심사’(inquiry), ‘중개’(mediation), ‘조정’(conciliation), ‘중재재판’(arbitration), ‘사법적 해결’(judicial settlement) 및 ‘지역적 기관 또는 지역적 약정의 이용’(resort to regional agencies or arrangement)을 열거하고 있다(UN헌장 제33조). 
UN헌장 제33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는 수단들이 국제관행으로 알려진 거의 모든 분쟁해결 메카니즘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분쟁해결수단은 여전히 이에 확정되지 않고, 당사국이 분쟁해결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개방되어 있다. 당사국들은 급박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바꾸거나, 다른 형태와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 Tomuschat, "Chapter Ⅵ. Pacific Settlement of Disputes: Article 33," Bruno Simma(ed.),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Commentary, 2nd ed. Vol. 1(N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591, para. 34.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수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원칙은 UN헌장 제33조 제1항 후단에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헌장 제2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권평등의 원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되었다. Ibid., p. 591, para. 35.
비록 국가가 평화로운 수단에 의해 그들이 분쟁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 국가들은 어떤 특정절차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 분쟁해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분쟁을 가장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독도문제가 20세기초 일본의 불법적인 한반도 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국제재판을 통한 독도문제의 해결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바람직한 방법은 불법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본 스스로 중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 같으나, 그렇지 않다. 한일 역사에 있어서 교훈이 되는 사례가 있다. 우리 역사는 17세말 일어난 이 사건을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라 하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 일건’(竹島一件)이라 한다. 17세기 말 당시 일본인들은 지금과 달리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불렀다. 1693년부터 1696년까지 한일 양국은 울릉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 3년간의 논쟁 끝에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울릉도)는 조선의 것’임을 인정했다. ‘울릉도는 조선에 가깝고, 일본에 부속된 적도 없으니, 한일간 우호를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그 이후 일본 에도 막부는 마을마다 ‘다케시마’(울릉도) 도해를 금지한다는 경고판을 내걸었고, 1837년에는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어업한 ‘하치에몬’이란 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까지 있었다. 1877년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은 1696년의 결정을 기억하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지령까지 내렸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형성과 동북아에서의 평화 증진을 위해서는 독도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그 해결은 일본이 17세기 말에 있었던 과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중단하는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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