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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 ‘홍익인간’ 이념의 형성 및 계승과 활용방향에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2-11-28 조회수 : 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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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이념의 형성 및 계승과 활용방향에 대한 고찰

               복  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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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국가든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들은 그들이 나라를 만들어야 할 분명한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래야만이 그 국민들이 자국에 대한 자긍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들이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는 계속 해서 논리 보완을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굳이 왜 이래야 하느냐 하는 이유는 정당성 정립의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국가의 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채택된 하나의 이념으로 오랜 기간 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사회를 통치한 대표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은 근대에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살아야 하는 분명한 명분을 제시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은 국운이 융성하거나 혹은 어려울 때마다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단군’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단군은 고조선의 첫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 내건 구호가 바로 ‘홍익인간’인데 이 이념은 오늘날 까지 한국의 중추적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홍익인간의 이념이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졌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건국이념, 혹은 통치이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면 ‘홍인인간’의 개념이 보다 명확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공동의 고민도 함께 해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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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에서 등장한 첫 국가는 고조선(古朝鮮)이다. 이 고조선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은 주지하다시피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이다. 널리 두루 이롭게 하고 서로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 이 나라의 건국이념인 것이다. 이 이념은 온 누리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건국이념이다. 이런 이념이 4300년 전에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고조선시대 유적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글쓴이는 고조선시대를 증명할 고고학문화를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보고 있다. 이 시기의 무덤유적과 동시에 황하유역의 상(商)나라 유적을 비교해보면 두 문화 간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그림1,2참조)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시대의 무덤에는 순장(殉葬)이 없다는 것이다. 순장이 없다는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황하유역의 상나라에서는 순장풍습이 횡행(橫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순장풍습만을 보더라도 사람에 대한 두 나라의 인식차이가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림1. 고조선시대 무덤
(고조선시대 무덤은 순장이 없다.) 
그림2. 상나라 무덤
(상나라는 순장이 많다.)     
고조선을 건국한 민족은 맥족(貊族)이 주축 되었다. ‘맥(貊)’이란 짐승은 정의롭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어 징벌하는 책무를 갖으며 외형상으로는 외뿔이 달린 짐승을 의미한다. 이 맥족(貊族)에 대하여 황하유역에 살던 사람들 역시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우리민족에게도 성인으로까지 추앙되고 있는 공자(孔子)가 이 맥족에 대하여 언급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공자는 우리들의 선조인 맥족을 진실로 싫어했는데 그는 맥족을 미개인이라고 취급할 정도였다. 아마 그 이유는 공자가 그렇게 찬양하였던 동이문화(東夷文化)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는 스스로 이족(夷族)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주(周)나라의 변방이었던 노(魯)나라의 후손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그랬다. 또한 정치하는 사람들 역시 맥족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정치가인 백규가 세제(稅制) 개편을 위해 고민하는 과정을 말하는 부분에서도 맥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백규(白圭)는 자기 나라의 세법(稅法)을 고치는데 5% 세율을 제시한다. 
 백규의 5% 세율에 대해 맹자(孟子)는 매우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것은 맥국(貉國)의 세법이라고 말하면서 맥국의 국가 시스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때 맹자는 맥국은 아무것도 없는 나라이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5%세법으로도 유지할 수 있지만 위나라나 황하유역국가들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이기 때문에 세금을 적게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맹자와 백규의 대화에서 우리는 맹자가 철저한 조직의 통치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철저한 조직 관리를 위해서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 상황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당시 황하유역 사람들과 북방 맥족이 다스리는 나라와는 그 출발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조직의 통치를 중시했던 황하유역의 나라와는 달리 맥족이 다스리는 곳은 철저한 행정조직보다 인화(人和)를 강조하는 이념이 낮은 세율로 나타난 것이고 백규는 인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맥국의 세제를 따르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규의 세제가 실패하면서 당시 중국은 매우 혼란한 시기로 돌입한다.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고 별도의 정부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왕이라 부르며 독립 국가를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상앙(商鞅)의 주도로 민생위주의 개혁정치를 한 진(秦)나라가 통일을 하게 되었다. 
 정치체제 운영에 대한 맹자와 백규의 관점 차이는 고고학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만주지역과 황하유역의 자연조건만을 단순히 비교해보아도 황하유역은 만주지역보다 훨씬 살기가 좋은 곳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확연히 구분되는 사실이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우월한 자연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4세기경의 상황을 보면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그것은 척박한 만주지역에서 황하유역의 사람들의 흔적이 대거 나타나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국가를 이룬 것은 아닌데 두 지역간의 교류로 인한 이동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황하유역에서는 만주지역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주지역에서 황하유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상당수의 황하유역 사람들이 척박한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은 단지 물질적 풍요를 쫒아서 거주지 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런 현상에 가장 현실적으로 부합한 설명이 있다면, 그것은 황하유역사람들이 살던 곳이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제공받았을 수는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어떤 결핍함을 느꼈거나 혹은 그 지역의 정치제도에 속해서는 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생활의 편리함과 윤택함의 상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춥고 척박한 북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같은 맥락으로 물질적 편의보다 정신적 편의를 추구하는 일련의 이동은 역사기록에서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서한(西漢) 때의 위만(衛滿)세력도 그런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나타난 기록처럼 진나라사람이 도망하여 온 것, 서복(徐福)이 진나라를 탈출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룬 전설 등은 중국의 당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중에 우리 역사에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된 것은 기자(箕子)세력과 위만(衛滿)세력들이다. 이들은 몇몇의 개인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단순히 이동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집단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여타 다른 사례들과 다르다. 이동하고자 하는 개개인이 모여 일정 규모의 집단이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단체장이 존재하는 집단 전체가 자신의 거주지를 이탈하여 다른 지역으로 생활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현재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집단 구성원의 이동에 대한 합의가 우선 존재했어야 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조직을 이끌고 생활터전을 옮겨야 하는 대표자 또한 존재하여야 하며 다수의 사람들이 이동하여 생활하려면 그에 버금가는 공간도 필요하게 된다. 때문에 고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와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에 대하여 윤내현은 역사적 사료를 검토해 볼 때 고조선지역으로 넘어온 세력들이 고조선의 후국(侯國)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글쓴이도 긍정적 검토의 가치가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 같은 집단의 이동 현상을 중국학자들은 황하유역 정권이 만주지역까지 진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들의 세력을 넓혔다고 해석한다. 최근 중국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현재 한국의 청천강(淸川江)까지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나 흑룡강성(黑龍江省) 지역까지 올라갔다고 하는 주장도 또한 이런 예라고 할 수 있다.(그림3,4참조) 

    
           그림3. 중국의 만리장성 인식도
    




이런 중국학자들의 확정적 견해는 정상적인 학문을 하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만약 현재 중국정부의 주장대로라면 예전의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역시 당시 만주(滿洲) 땅이 모두 자기들의 영토였다고 말했을 터인데 왜 이(夷)와 맥(貊)을 구분하면서 까지 그곳은 맥(貊)의 땅이라고 하였겠나 하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점에서 현대 중국학자들의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림4. 중국의 한사군인식위치도

 앞서 얘기한 것처럼 중국세력들이 끊임없이 만주지역으로 이동해 오는 이유는 물질적,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환경을 찾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고조선 지역의 생활상이 당시 주변국과는 다르게 정신적인 이상향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수준 높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알맞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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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의 건국인념인 홍익인간처럼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한국 사서(史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는 일종의 만장일치제와 같은 ‘화백회의(和白會議)’제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제도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가 되어야만 진행 중인 안건의 결의사항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만장일치제는 기초적이고 단순한 의견일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을뿐더러 의결권자들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안건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혜안 등의 능력이 필요한 고차원적인 방법이다. 
 이런 제도는 바로 선대(先代)의 고조선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신라본기 권1」에서는 ‘신라는 조선유민(朝鮮遺民)’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제도(制度) 역시 조선의 것을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에서도 5부제도(五部制度), 5경제도(五京制度) 등을 운영하여 절대로 한 세력이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는 멸망할 당시까지도 중앙집권(中央集權)적 경향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권력다점주의(勸力多點主義)는 한 정권의 운명을 매우 길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특징을 갖는데 이런 예는 중국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이 모든 제도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하게 근거를 삼는 것이 ‘주례(周禮)’이다. 이 주례는 주나라 때 예법을 말하는데, 오늘날 수많은 동아시아 사상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연구과제인 동아시아의 ‘종법제도(宗法制度)’ 역시 이 주례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주나라 종법제도의 기본은 권력다점주의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이것을 주나라는 봉건제도라는 체제로 운영하였다. ‘주족(周族)’은 본디 북방민족들이다. 그러므로 주족의 정치방식은 북방민족들의 방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면서 차등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회를 조직하였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나마 주나라는 8백년의 세월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서주’때 만들어진 이 종법제도는 ‘춘추시대’가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공자는 이 서주의 제도를 어떻게든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동시에 본인의 출세를 위한 처절한 노력을 하였다. 즉 그의 목표는 주나라의 예법을 지키는 것인데 공자는 그것이 ‘의(義)’이고, 이 ‘의(義)’를 실천하는 것이 ‘인(仁)’이라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인 맹자는 이같은 공자의 방법론에 반대하였다. 공자는 인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 조류에 맞게 ‘유신(維新)’을 해가면서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맹자는 피를 보아서라도 정치개혁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맹자의 그런 생각은 천명을 통한 역성혁명론을 만들게 되는데 맹자의 이 논리는 훗날 수많은 정치가들에게 자신감과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맹자이후 많은 사상가들은 주나라의 종법제도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른바 유교식 중앙집권정책을 구상하였고 최고 지배자들은 그들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 중 법가와 유가가 합하여져 만들어진 진나라는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는데 이 중앙집권제는 진나라를 처절하게 무너뜨렸다. 진나라의 권력독점이 가져온 폐단을 보면서 진을 이은 ‘서한(西漢)’은 즉각 중앙 집권제를 버리고 기본 틀은 주나라의 방식으로, 일부는 진나라 시스템을 참고하여 봉건제도를 시행하였다. 물론 한나라 초기는 권력다점주의가 시행되었지만, 얼마 후 다시 중앙집권제가 되면서 이른바 진정한 천자국(天子國)이 만들어지고 신분제 사회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유교(儒敎)라는 정치 이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대두되면서 중앙집권화는 강화되고 뚜렷한 계급질서가 운영되는 새로운 방식 즉, 중앙집권과 철저한 신분제가 실시되는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방식은 ‘한세종’인 무제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는데 그는 북방민족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많은 군대를 동원하였고 세제를 개편하였다. 이런 제도의 개편과정은 한무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즉 지속적인 전쟁으로 지방의 군사자원이 중앙으로 몰리는 현상이 발생하고 전쟁을 치루기 위한 세제개편 때문에 지방권력자들의 재정문제가 일어났다. 결국 한무제의 북방정벌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 결과 새로운 시스템의 유가정치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유가정치개념은 비록 새롭다는 의미는 부여되었지만 궁극적으로 권력자들에게는 유리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정치제도였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중국의 이런 정치제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점점 더 그러한 정치체제를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후한이 무너지고 난 후 중국은 약 300년 가까운 혼란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를 우리는 남북조 시기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는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내 전 지역이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이 시기의 권력자들은 길게는 100년, 짧게는 불과 몇 년만을 집권하면서 오직 권력에만 온 관심을 두어 집중하여 일반국민들의 피해가 커졌다. 결국 북방정치 세력은 북주의 이연이 당나라를 세우면서 300년의 혼란상황에서 안정기를 찾는다. 주지하다시피 당은 유학중심의 국가는 아니었고 다양한 사고들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당나라 역시 후기에 들어 기득권층이 득세하고 이 폐단으로 나라가 무너졌다. 이 시기를 중국사에서는 5대10국으로 부른다. 이 시기에 후주 절도사였던 조광윤이 혼란을 제어하고 세운 나라가 송(宋)이다. 송나라는 남방세력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당시 송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국가였다. 이 시기의 한국사는 고려시기였다.    
한국사에서도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철저한 신분제와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강화되는 동시에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는 풍조가 눈에 띄게 나타난다. 고려초기 건국과정에서 건국의 주체인 왕건 및 복지겸을 비롯한 삼한벽상공신들은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 과정은 『고려사절요』에 자세하게 쓰여 있다. 더욱이 광종은 북벌을 성공하여 고려의 영토를 넓혀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당시 고려건국의 사상적 배경은 전통시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사상과 한국화된 불교, 그리고 풍수사상을 기반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토착 이념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말한다. 이 건국과정이 끝난 후 건국의 뒷전에 있었던 중국유학파들이 조금씩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들만이 생각하는 정치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즉 권력은 하늘에서 내려진다는 중국의 사상을 기반으로 고려는 하늘에서 권력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린 권력자를 섬기면서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정치논리였고 그런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개혁이라 여겼다. 때문에 광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최승로는 그 유명한 ‘시무28조’를 올린 것이었다. 최승로는 그 글에서 태조는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광종을 물고 늘어져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고려는 성종때 거란과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미 사대주의 사상으로 조금씩 기울던 고려정부는 엄청난 정책 혼란을 겪다가 서희에 의해서 가까스로 수습된다. 성종이 죽고 나서 천추태후의 실질적인 집권시기에는 다행히 최승로에 의해 흐트러진 고려전통사상이 많이 회복되었다. 
 그 결과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편찬에서 회복된 고련전통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최승로와 같은 유학적인 사상배경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면 조선시대 서적과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그렇지 않다. 비록 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적인 골격은 고려의 정신을 그대로 잇고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김부식은 한국사 정통을 고조선으로 보았다. 조선학자들이 고조선을 무시하고 기자를 큰 기둥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많은 타격을 받았다. 어쩌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상대를 하면서 힘이 많이 빠진 고려가 몽골의 침입으로 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 때 몽골침입 이전의 고려와는 모든 체제에 있어서 다른 것으로 정비하였다. 아마도 최승로가 추구하던 사회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는 정치체제로써 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몽골 침입기에도 철저하게 유학적인 정치제도를 유지하였다. 이에 대해 몽골행정관들은 고려의 그런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려의 정치가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즉 고려의 지배계급들이 고려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 어떻게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는가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였다. 그러면서 몽골은 고려의 노예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고려의 지배계층들이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몽고인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정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에는 고려인들 스스로 자아인식(自我認識)을 하면서 외세침략(外勢侵略)에 대한 저항을 국가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민왕(恭愍王)의 반원정책(反元政策)인데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한 방편으로 불교를 내세우지만 이때 이미 고려는 고조선에 대한 의식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의식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紀)』, 권근(權近)의 『응제시(應製詩)』에 나타나게 된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조선건국 내력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은 그동안 전승되어 내려오던 이념을 압축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후기에 나타난 전통사상에 대한 응집력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이런 응집력은 조선으로 이어졌고, 그 절정은 세종(世宗) 때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의 정치는 모든 나라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자의 발명도 그렇고, 세제(稅制), 사람을 다루는 모든 법령을 전통사상에 입각하여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종은 역사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흔적을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내용 중『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타난 기록은 한국사의 정통성을 그대로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시대에 국운(國運)이 활짝 피었던 것은 바로 세종이 갖고 있었던 전시대의 고유전통 때문인 것이라는 것이 글쓴이이의 생각이다. 
 이런 전통은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다시 철저한 유학정치의 시작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특히『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여 만든『경국대전(經國大典)』은 철저한 유학정치의 기본을 법률로 정해놓은 것이 되었다. 이 경국대전을 근거로 조선이 움직였고 유학이라는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경국대전에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여 주었다. 급기야는 전대미문의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시작되어 한국사상 돌이킬 수 없는 전통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예로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기자숭배사상(箕子崇拜思想)은 픽션을 논픽션으로 만드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훗날 조선의 유학자들은 중국중심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외세, 구체적으로 명에 대한 의존으로써 이러한 사대사상은 조선의 정신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스스로가 동이(東夷)라는 생각에 젖어 중국에 비하여 하등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조선은 무엇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정신때문에 결국 1592년 ‘조·일전쟁(朝·日戰爭)’과 ‘조·청전쟁(朝·淸戰爭)’을 당하게 하는데 조선은 이 전쟁들을 계기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면서 바뀔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한 은혜가 덧붙여져 오히려 더 고착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그 단적인 예가 ‘조·청전쟁(朝·淸戰爭)’의 결과처리 방식이다. 이 전쟁은 조선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치욕으로 기록되는데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조선과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신하들은 명나라가 당하는 치욕에 더 힘들어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흔히 역사적으로 충신이고 지사로 부르는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사람이 인조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그들의 임금은 인조가 아니고, 명나라 황제임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유학적인 사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명이 멸망을 하였지만 많은 조선학자들은 명나라를 흠모하여 ‘만력(萬曆)’이라는 연호를 자의로 해석하여 명나라가 망한지 백년이 지나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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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황에서 18세기 이르러 이른바 실학자(實學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유교라는 같은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으나 한국사에 대한 견해를 서로 다르게 하고 있음 볼 수 있다. 
 즉 친명파(親明派)는 진정한 한국사의 시작을 ‘기자(箕子)’로 보는 것이고, 실학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한국사의 중심을 ‘단군(檀君)’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사유체계정립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실학파들로 분류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자아의식을 분명하게 친명파들과는 다르게 하고 있다. 즉 명나라나 청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런 사고의 차이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율곡이래로 고착화되었던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그 제자들에 의하여 극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조선은 새로운 힘의 논리에 ‘청나라의 존재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이 바로 단군의 부활이었다. 비록 청나라의 힘을 인정 하지만 그 틈새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질서를 생각하는 조선의 새로운 세력들은 통칭 남인이라는 세력으로 형성되었으며 그들은 실용을 통해 살길을 찾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학’이었다. 그리고 생각도 바꿨다. 청나라의 가는 사신을 ‘연행사’라고 하였다. 그전 명나라 사신을 갈 때는 ‘조천’이라고 하였지만 실학시대는 ‘연행(燕行)’으로하여 정상적인 이름으로 사행단을 꾸렸다. 그들의 이런 사상은 정치와 문화 곳곳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른바 서학이라는 종교가 추구하는 방법론과 조선의 윤리가 갖는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그렇지만 이들의 다양한 사상은 훗날 대한제국기와 대한민국건국초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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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이 없는 정치와 미래의 비전이 없는 정치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대한제국의 관리들은 이 나라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지만 대부분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일본세력들에 동의하였다. 아예 일본식으로 하자는 쿠테타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옥균일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었다.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많은 관리들의 염원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1910년을 맞이한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으로 대한제국의 황실주권(皇室主權)이 일본 황실로 이관(移管)되었다. 지독히도 유교적이던 관료들이 만들어 놓았던 결과는 바로 국민들의 항전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민들은 결사항전을 해가며 일본과 투쟁을 하였으나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자 대한제국민들은 바로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워 국체(國體)를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바꾸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국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체가 중국 상해시 프랑스조계에서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이다. 이 신생정부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뭉친 결정체였고, 대일항쟁운동(對日抗爭運動)도 바로 홍익인간이라는 기본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런 이념으로 대일항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오랜 세월을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외래사상을 갖은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홍익인간’ 이념 중시자들은 절대로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중심으로 한 천황 1인 지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임정은 효율적으로 일본과 항쟁을 하였고, 결국 완전한 대한민국의 단독은 아니지만 ‘대일승전(對日勝戰)’이라는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임정의 대일승전은 48년 정부수립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라이름도 임정시기에 정했던 ‘대한민국’을 그대로 썼고 대부분의 정부요직은 임정출신들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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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대일승전(對日勝戰) 후 한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을 겪으면서 6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명실상부한 온 누리의 리더국가로 발돋움 하였다. 한국은 전통시대에 벗어나 온 누리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수많은 국제조약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이름으로 협약을 맺게 되고, 국가발전이라는 당면한 현실에서 수많은 외국과의 교류를 해야 했다. 이런 발전 속도는 과거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을 빼고는 온 누리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 현대사의 기록이다.
 이런 발전이 있었던 것은 한민족이 단순한 경제발전의 목적만을 가지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한 결과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승리감을 맛보기 위한 자아의식의 발로가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아의식의 발로 과정에서 한국은 경쟁상대국으로 늘 일본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말마다 ‘일본도 하는 일을 왜 우리는 못하나?’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그 결과 온 누리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한국의 부상(浮上)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치에서 한국의 위상을 살펴보면 뭔가에 걸려서 더 이상의 한걸음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으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진전이 없이 계속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제자리 현상이 계속되면 발전보다는 상대적인 퇴보로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일본의 경우가 그랬다. 일본은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학(日本學)을 발전시켜 성장과 도약의 발판을 삼았다. 대다수의 일본국민들은 왕을 중심으로 한 일본학에 동의하여 정부정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도 1945년 이후 과거에 만들었던 일본학을 근거로 하여 경제적인 발전을 하였지만 그 한계성으로 인해 1980년대 말부터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이른바 개혁·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등소평(鄧小平)이 주장한 다민족융합의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를 만든 동시에 중화는 세계의 리더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면서 중국은 2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글쓴이는 이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았다. 위에서 본 것처럼 동아시아 3국의 발전은 모두 자신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한국, 중국이 일정부분 고도성장한 것은 둥지를 지키는 이념을 창출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성공하였다. 그러나 둥지를 벗어나 둥지 밖에서 생존할 이념을 만들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국민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이타주의(利他主義)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만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은 이 부분에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중국도 그럴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분명하게 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만들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큰 기쁨을 느끼는 감성이 강하다. 그래서 가수 수와진의 행동에 감동하고, 가수 김장훈에게 감동하여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도 동의하고 온 누리 사람들이 모두 동의 할 수 있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 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바라는 바이다. 이런 이념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그 역사적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념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할 것이다. 
 이 이념으로 통일을 해야 하고, 세계 리더국가로 나서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지금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 스스로 뿐만 아니라 온 누리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민족이 될 것으로 본다. 이것이 국학(國學)이 현재 우리의 고민을 풀어주고 온 누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틀이 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여기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금년 7월25일 (사)국학원주체 학술회의에서 초안을 발표 하였고, 발표가 끝나고 제기된 의견들을 모아 전체적인 수정을 하여 발표함을 알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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