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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유래 - 이종호 선생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4-06-04 조회수 :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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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유래(국학원 2014. 04. 27)
<세계 3대 정복자 아틸라(훈족)와 한민족의 친연성>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회장, 과학국가박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세계 각지에서 몰려 온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스페인이라는 국가에서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스페인旗보다는 노란색의 카탈로니아旗가 공식, 비공식 장소를 막론하고 더 많이 눈에 띄였다. 
이런 일이 벌어진 요인은 올림픽을 주최한 바르셀로나가 카탈로니아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과거에 아라공 왕국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의 국경으로 보아 스페인 남부 지역의 2/3, 프랑스 남부 지역의 1/3 정도를 포함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카탈로니아 안에는 나름대로의 자치적인 국가도 있다. 대통령이 있고 각 지역마다 시장도 있는데 스페인 측의 수도는 바르셀로나이고 프랑스 측의 수도는 뻬르삐냥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 사람들은 프랑스나 스페인旗보다 카탈로니아旗를 먼저 걸 정도로 자신들이 카탈로니아인이라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카탈로니아 지역은 세계적인 명사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잘 알려진 피카소와 살바도르 등이 그들이다. 이탈리아의 제노아 태생으로 알려진 콜럼버스가 DNA 유전자 추적과 필적 감정결과 카탈로니아 귀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올림픽의 황제로 불린 사마란치 전 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카탈로니아인 이라는 점이다. 
그는 1992년 하계 올림픽을 바르셀로나 시에서 열기로 했을 때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스페인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사실 올림픽 개최 주체는 엄밀히 말해서 국가가 아니라 도시이다. 1988년 한국에서 개최된 올림픽도 공식 명칭은 ‘1988년 한국 올림픽’이 아니라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사마란치가 집요하게 카탈로니아를 앞세운 것은 카탈로니아인 들이 다른 지역의 스페인인이나 프랑스인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 사람들은 민족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다른 지역의 스페인인 및 프랑스인들과는 전혀 다른 민족임을 내세우며 살고 있다. 고유한 언어와 문자도 갖고 있어 이 지역의 대부분의 고속도로 표지판은 프랑스어 또는 스페인語가 아니라 카탈로니아語로 적혀있다. 
이들은 카탈로니아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현재도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분쟁지역에서와는 달리 무력사용은 하지 않는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도 독립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가 프랑스의 소도시인 뻬르삐냥을 세계의 중심지로 생각한 것도 카탈로니아 독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의 역작인 대형 그림이 뻬르삐냥 기차驛舍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민족과 민족성은 매우 첨예한 문제이면서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민족ㆍ한국인은 누구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그동안 우리가 단군과 단군조선이 실재했느냐 아니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민족 또는 한국인이 어째서 다른 민족 또는 다른 나라 사람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우선 ‘한국인’과 ‘한민족’의 개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데 한국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인은 한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entity)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뿌리는 한국 민족형성 바로 전 단계를 가리킨다.’
  
민족은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한민족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공통의 문화요소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한민족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뜻은 매우 많다. 같은 혈통에, 생김새가 비슷하고, 행동도 비슷하고, 같은 말을 쓰는 등 여러 공통점이 한민족이라는 말에 압축돼 있다. 한민족의 ‘뿌리 찾기’란 결국 지금 한민족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인의 영역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유전자 풀은 어떤가? 밝혀내는 작업이다.
물론 어느 종족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분리된 경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떠난 고향과 언어도 달라지고 풍습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 뿌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간에 떼어낼 수 없는 공통점을 다른 민족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 무엇인가는 정의하는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민족의 경우 한민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소련이 등장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중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의 봉건주의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등장한 소련은 그 후 70여 년간 민주주의 진영과 함께 세계의 양대 축을 이루며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모태가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전체주의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다고 복기대 박사는 설명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며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들의 민족을 단결시킨 것도 유태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계속 대를 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자부심이 근간이 되어 몇 백만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10억이 넘는 아랍과 당당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민족은 중요하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 변방사를 따지더라도 수많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점철되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국에 동화되었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그 유명한 만주족도 중국 본토 전역을 장악하며 청나라를 건설하였지만 결국 중국에 동화되어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인들이 수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광복투쟁을 했던 것도 한민족끼리 뭉쳐 살려는 염원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힘을 얻는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의식에서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선조들이 어떻게 하여 한국인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에게도 조상이 있는 이상 이것은 인간의 조상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 강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한국인의 유래’로 현재 한국말을 쓰면서 한국인으로 분류되는 한국인의 원천에 대해 설명한다. 이 주제에는 한국인이라는 민족의 구성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인류의 기원부터 출발한다. 근래의 눈부신 과학 분야에서의 연구로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기본 틀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동안 한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멀지 않은 시기 즉 상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과학이라는 잣대로 풀이하자는 것이다. 기록이 없는 우리의 상고사를 과학의 잣대로 풀이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상고사 분야에서 과학적 성과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중국은 ‘중화5천년’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들의 역사를 1000년이나 올린 것은 근래의 과학적 성과가 없었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중화5천년’의 기치를 들게 만든 중국 북방 문명에 대해 중국의 항춘송 교수는 『적봉고대예술』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몽고 적봉지구와 중원 황하유역, 長江 中下流는 중국고대문명의 발원지이다. 적봉은 역사상 제1차 문화를 창조하여 중국고대문명발전사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중략) 기원전 3700년경에 시작한 홍산 문화는 중국 북방지역에서 찬란한 문화가 태어났음을 보여주며 ‘중화문명’을 5000년 전으로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기원전 2200년경의 북방조기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밀집된 도시가 건설되었고 노예제도가 생겨났다. 이를 성방노예제(城邦奴隸制)라고 부른다. 서주, 춘추전국시대 전기인 3500년 전에서 2300년 전에 내몽고 적봉초원에서 유목민족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동호가 이곳의 주인으로 이들은 하가점상층문화를 만들었으며 이를 동호문화라고 한다.’
  
한 마디로 한민족의 선조인 東夷가 중국의 역사를 5천 년 전으로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특히 중국은 홍산 문명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홍산 문명의 근거지인 우하량에 ‘신비의 왕국’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기원전 2700년경 탁록에서 벌어졌던 東夷의 치우와 화하의 황제 간에 벌어졌던 ‘탁록전투’를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며 차제에 황제도 동이족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의 역사가 우하량 홍산 지역에 있었던 ‘신비의 왕국(여왕국)’으로부터 출발했고 신비의 왕국보다 다소 후대이기는 하지만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견된 유적을 근거로 당시 국가가 존재했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처음 듣는 한국인은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부 학자들이 부단히 단군조선이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이와는 역으로 국가가 실존했다고 단언하여 설명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과학적 연구 결과는 2007년 3월에 발간된 교육인적자원부의 교과서 『국사』에서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를 기존에 알려졌던 것보다 최대 1000년까지 앞당기고 고조선 건국도 공식 역사로 편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과서 『국사』에 설명된 핵심은 명쾌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라고 적었던 부분을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한 것이다. 고조선이 소위 ‘카더라’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들어간 것이다. ‘건국하였다고 한다’와 ‘건국하였다’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단군이라면 촉각을 권두세우며 비난 일색이었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특히 교과서 속의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한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는 그 어떤 집회나 항의도 없었다. 단군이 상상의 인물 즉 신화에 의한 거짓말이 아니라 ‘참’이라고 확정적으로 단정했음에도 그동안 단군을 인정할 수 없다고 줄기차게 항의하던 일부 종교단체에서도 이에 대한 변변한 반대성명조차 없었다는 것은 이들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무언의 뜻으로 볼 수 있다. 10여 년 전에 단군상을 훼손하던 것과는 천양지차인데 대체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중국은 현 영토 내에서 일어났던 역사는 모두 자신들의 역사로 간주하고 있다. 심지어 몽골의 칭기즈칸까지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이런 시각에서 고구려도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는 민족이 韓民族이다. 韓民族은 한국이라는 독립국이 있다는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를 근거로 하여 한민족이라는 유대와 의식이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중국이 현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났던 과거는 당시의 여건이 어떠했든 현 중국의 체제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작위적인 해석이라는 지적한다. 사실상 과거 로마의 영토를 볼 때 현재 30여 개 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프랑스, 영국, 그리스, 이집트, 트라키아 등이 로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막상 현재의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의 영토 면적을 볼 때 매우 작은 면적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경우만 해도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고 이집트의 경우도 로마의 유적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현재 프랑스와 이집트가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라고 해서 과거 로마에 속해 있었음을 부정하면서 그들의 역사에서 로마의 역사를 프랑스 역사로 갈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종족과 민족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했다. 이동 과정에서 한민족과 중국인의 영화는 다른 길을 걸었다. 시대에 따라 축소와 팽창을 거듭하는 것이 영토인데, 현 영토를 기준으로 뿌리가 다른 역사를 흡수한다고 그들의 역사로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중국이 아닌 적대국이라고 생각하여 부단히 전쟁을 벌인 지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는 설명에 모순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이런 내용이 기본적으로 그동안 한민족을 온통 곤욕으로 몰아갔던 상고사의 단편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우리의 알려지지 않는 상고사의 과학적 성과를 기본으로 한민족 국가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다룬 후 우리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분야를 조명한다. 

서유럽의 중세 서두를 장식하는 훈족(Hun)의 유럽 침입은 서양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375년, 유목 기마민족인 훈족이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켜 찬란한 로마 문명 즉 ‘팍스로마나(Pax Romanza)’가 476년 게르만 민족인 오토아케르(Odoacer, 433~493)에게 멸망되는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침입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근거지에서 쫓겨난 동, 서 고트인 즉 게르만 민족들이 각지로 분파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당시의 국경이 대부분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 서유럽의 국경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훈족의 활약은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다. 훈족은 4세기 말 갑자기 나타나 유럽을 완전히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5세기 중반, 세계 3대 정복자(다른 두 사람은 칭기즈칸, 알렉산더 대왕임) 중 한 명인 아틸라(Attila, 395~453)는 서로마제국의 밀라노(Milano)를 점령한 후 서로마제국을 접수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서로마정복을 선언한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제국도 곧바로 사라졌다. 
아틸라를 비롯한 훈족의 신상명세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아틸라의 사망 후 얼마 되지 않아 훈제국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500년 동안 서구인들은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인 관점에서 훈족을 다루었다. 유럽인들은 야만인 훈족을 경멸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기독교인들은 훈족을 이교도 무리로, 그들의 지도자인 아틸라를 신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 보낸 도구로 보았다.
근래 훈족에 대한 연구는 주로 훈족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유럽의 각국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 제시된 많지 않은 자료와 훈족이 지배했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분석들이 주인데 이들의 결론은 그야말로 놀랍다. 훈족의 서방 이동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비교 검토한 후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의 최동단 즉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 말이 실감이 가지 않는 사람은 무슨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아틸라가 근거했던 동유럽은 한국으로부터 7,000~8,000킬로미터나 떨어져있으므로 거의 2천 년 전의 한국 고대사가 유럽과 연계되리라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 유럽이 훈족의 침공에 의한 게르만민족 대이동으로 재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무슨 큰 중요성이 있느냐고 푸념할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흉노(훈)에 대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던 20여 년 전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극동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훈족이 로마제국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는 훈족이 어디에서부터 연유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훈족의 원류로 아무르 강(흑룡강)과 최동단인 한반도(Penisular of Corea) 사이에 산재한 흉노 등 여러 부족을 거론하였는데 특히 훈족의 본류는 한반도이며 이들이 서쪽으로 향하면서 훈족이 되어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켰다고 적었다. 기번이 『로마제국쇠망사』를 편찬했을 때는 18세기 말로 조선의 영, 정조 때 인근 즉 거의 250여 년 전에 유럽인들이 훈족의 원류를 한국인이라고 적었다는 것을 들으면 그동안 한국사라면 동양의 한 부분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기존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역사관을 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데 놀랄 것이다. 
흉노는 물론 훈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데다가 한국에서 이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인데 프랑스의 모리스 부비에 아잠(Maurice Bouvier-Ajam)이 1982년에 출간한 『아틸라, 신의 징벌(Attila, le Fleau de Dieu)』은 더욱 놀라운 자료를 발표했다. 그는 훈족의 서천 이동경로를 보여주면서 훈족은 한국인이 거주하는 한반도에서 시작했다는 지도를 삽입했다. 그가 제시한 지도에 의하면 훈족이 한반도에서 흉노, 유연, 파미르고원, 카스피 해, 볼가강, 흑해를 거쳐 다뉴브강에 이르렀으며 이어서 다뉴브강을 넘어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켰다고 적었다. 
그는 한국인이 유럽으로 서천(西遷)하게 된 이유로 인구가 증가하던 차에 중국의 압력을 받아 만주를 거쳐 흉노지역을 넘어 유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적었다. 특히 인종적으로 보아 한국인과 훈족은 전혀 다름이 없다고 적었는데 그 특징으로 전투에서 겁 없이 용감하며 끈질긴 것은 물론 신속하고 수비에서 악착같다고 적었다. 아잠이 적은 한국인의 기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아잠은 또한 두 민족의 예술품은 물론 사용한 도구들이 유사하다고 적었는데 특히 1924년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金鈴塚)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 토기(국보 제 91호)에 있는 동복(銅鍑, cup cauldron)을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열거했다. 기마로 생업을 유지하던 기마민족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성과 생존법,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말에 갖고 다니는 동복인데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김해 대성동 47호. 높이18.8cm
철기시대 전기 분묘유적(墳墓遺蹟)에서 발견되는 대형화분(大形花盆) 형태의 동제(銅製) 용기로, 원래의 용도는 고기를 삶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중국 한(漢)나라의 銅器와 다르고 북방 스키타이 계통으로 생각되는데, 그릇의 크기는 대체로 높이 약 18㎝, 입 지름은 약 13㎝로 솜씨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여 측면 양쪽에 주합선(鑄合線)이 남아 있으며, 양쪽 또는 한쪽 어깨에 고리가 세로로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광복 전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 1점은 입 지름이 다른 예와 달리 2개의 큰 고리가 입 가장자리에 수직으로 부착되어 있어 시베리아지방의 북방계 유물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동복은 출토지역이 북한에 편재되어 있으며, 그 형태와 크기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철제품으로 대체된 철복(鐵鍑) 또는 철제귀달린단지(鐵製耳附壺)들이 분묘 유적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된 바 있다. 그 가운데 1점은 족대(足臺)가 달렸는데, 동복의 출토지 및 각 유물의 크기와 형태 등을 비교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출 토 지 
크기(높이×입지름)단위 : ㎝ 
형태
평양부근
18.3×19.3㎝
쌍고리 구연에 부착
평양 동대원리(東大院里) 허산
16.8×11.4㎝
외고리
평양부근 (일본 개인소장)
16.4×11.8㎝
쌍고리
출토지 미상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8.1×13.8㎝
쌍고리 파손
함경남도 소라리(所羅里) 토성
 
토성
김해 대성동(大成洞)
 
쌍고리

동복은 세형동검(細形銅劍)의 최말기 형식 및 한식 철기와 함께 발견되므로 그 사용연대는 대체로 B.C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韓國靑銅器文化硏究(尹武炳, 藝耕産業社, 1991)
• 韓國靑銅遺物의 硏究(尹武炳, 論文集 2-3, 忠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1975)
출처 
고고학사전, 2001.12, 국립문화재연구소 표제어 전체보기



동복의 원래 용도는 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는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용기로 무리 중에서 족장으로 추대되면 동복을 받아 항상 말안장에 얹어 놓고 다닌다. 일반적으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대형 동복의 경우 높이는 50 ~60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킬로그램이 넘는 것도 있다.
동복은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다수 발굴되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몽골의 노인 울라 고분군(Noin Ula, 고분 212기가 발견된 노인 울라(몽골어로 ‘왕후(王侯)의 산’)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방 약 100킬로미터 지역에 있다)를 비롯한 북몽골 지대의 도르닉나르스, 알타이 산맥의 데레츠고에, 볼가 강 유역의 오도가와 그 지류인 가마 강 유역의 페룸, 서우랄의 보로쿠타 지방, 남러시아 돈 강 유역의 노보체르카스크,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도 발견되었고 중국의 북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된다.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 동복이 발견되는 것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이 이들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된다. 첫째는 동으로 된 용기 형태이며 둘째는 금관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간주되는 국보 제91호의 기마인물상과 같은 토기 형태이다. 기마인물상 토기는 신라의 경주 근교인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되었는데 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이다. 



기마상의 주인과 하인이 말을 타고 있는데 이들의 뒤 쪽에 동복을 갖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 솥처럼 생긴 것이 바로 동복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出字形 장식)과 녹각형상(鹿角形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에게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현대 유럽을 재편한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의 단초가 한반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유럽인들의 글에 어리둥절하는 동안 1945년에 태어나 자유베를린방송사 편집자인 동시에 TV 다큐멘터리와 방송국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Jens-Peter Behrend)와 1944년 생으로 미국 코넬대학과 베를린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 박사(Eike Schmitz)는 독일 ZDF방송이 추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의 ‘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 375년 유럽을 강타하여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케 한 훈족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유럽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인 훈족의 근원을 찾자는 의도다.
그들의 결론도 기번과 아잠의 결론과 같다. 이들도 훈족의 서방 이동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비교 검토한 후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의 최동단 즉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그들은 그 증거로 인공 변형된 머리인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 동복, 복각궁 등을 들었다. 이것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시기 전에 이미 한국과 유럽 간을 연결할 수 있는 이동 경로가 있었다는 추론을 이끌어 낸다. 필자는 한국과 프랑스까지 연계되는 이 이동 경로를 ‘코훈로드(Korea-Hun Road)’라 부른다. 이 이동경로가 훈족과 한민족과의 친연성(親緣性)이 끈끈히 맺어지는 연결고리가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과 북방기마민족과의 연계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1년에 이미 지적했다. 단재는 <조선일보>사의 연재기고문인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서 ‘ 여진·선비·몽골·흉노(훈) 등의 본래 아(我)의 동족이며 흉노는 조선의 속민이었다.’라고 적으며 기마민족국가인 고조선에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흉노 등의 종족이 되는데 특히 흉노족이 흩어져 돌궐·흉아리(헝가리)·터키·분란(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고 설파했다. 또한 북흉노가 흑해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코트를 압박하여 유럽의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켰으며 이로부터 200여 년 후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적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흉노가 조선의 속민이었다는 내용을 적고 아틸라에 대해서도 적었지만 얼마 전만해도 한민족과 흉노 등 북방민족과 연계되어 있다면 한민족이 오랑캐냐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단재가 이런 내용을 가감 없이 적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문화민족으로 자부하면서 남다른 자존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의 지식인 중 지식인인 단재가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단재가 이런 글을 적으려면 이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에드워드 기번이 250년 전 경에 훈족과 한반도의 연계를 적었다는 것은 당대에 유럽에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많은 유럽의 자료들이 한반도와 훈족을 연계하는 것에 힘을 얻은 필자는 코훈로드를 따라 동복은 물론 편두, 훈족의 이동로에서 발견된 황금보검(보물 제635호) 등 고고학적 유물과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여 훈족의 지배집단의 일부가 한민족일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특히 역사시대로 들어 온 이후(기원전 3세기부터), 흉노(匈奴)의 흥망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위치를 잡은 가야, 신라 등의 형성과 연관되며 이것이 북방 기마민족의 유럽으로의 서천(西遷)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고리를 찾았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집단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한민족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외침(外侵)만 받았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졌는데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세계 3대 정복자(다른 두 명은 칭기즈칸과 알렉산더임) 중 한 명인 아틸라이므로 그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는 한국인에게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395년 다뉴브 유역을 지나던 중 수레 속에서 태어난 아틸라는 기원 4세기말에서 5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사람이므로 아틸라에 대한 자료 수집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퍼즐이 남아있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수많은 퍼즐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 퍼즐을 맞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에 도전할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계속 자료들이 축적되어 이들이 수정되고 보완될 것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이정훈, 신동아, 2008년 4월
『Attila, le Fleau de Dieu』, MauriceBouvier-Ajam, Tallandier, 1982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ward Gibbon, Penguin Classics, 1994 
『역사의 비밀』,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오늘의 책, 2001
『조선상고사』,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기번, 이종호 엮음, 지만지, 2011
『황금보검의 비밀』, 이종호, 북카라반, 2013
 
<강의 개요>
  
한국은 단 100년 사이에 수많은 변혁을 걸어왔다. 일제의 침략과 점령 기간이 있었으며 해방이 되어서도 남, 북으로 갈라졌고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대전란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10대 경제대국에 들어갈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서구인들은 경제를 포함한 한국의 그 대단한 발전과 성장 자체를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로 여긴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인의 어떤 속성과 자질이 그처럼 세계를 놀라게 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는가 의문을 표시한다. 
이에 대한 대답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국인의 교육열,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국가관과 도덕성 그리고 근면성 등을 들고 있다. 한국인의 근면성이 얼마나 해외에서 인정받는가는 쿠바의 화폐에 한국에서 시공한 발전 설비가 들어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를 대입하든 한국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한 원동력은 한민족 즉 한국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원천은 여러 가지이지만 한국인들의 지혜와 능력이 똘똘 뭉쳐 발휘되어 놀라운 결실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한민족 또는 한국인들은 누구인지가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뜻은 매우 많다. 같은 혈통, 같은 생김새, 같은 행동 등이 그 구성요소이다. 물론 한 종족이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지역으로 갈라져 나가 오랜 세월이 흐른 경우 그들이 떠난 고향과 언어와 풍습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 뿌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간에 많은 공통점, 좀 더 정확히 말해 다른 종족보다 구별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한민족,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국이 대체 어떤 속성과 자질을 갖고 있기에 그처럼 세계를 놀라게 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국인의 교육열과 근면성, 그리고 유교적 사상으로 무장한 국가관과 도덕성 등을 들고 있는데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우리나라가 다른 어떤 민족보다 많은 면에서 우수한 독창성과 창의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한민족이 우수하다는 단적인 설명은 여러 면에서 오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보다 설득력이 있는 우리를 찾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인류의 발생과정 속에서 한국인의 뿌리와 함께 감성적이고 창의력 직관력이 우수한 한국인의 특성을 분석하며 이어서 그동안 한민족을 온통 곤욕으로 몰아갔던 상고사의 미스터리 즉 한민족 국가 성립 등을 과학이라는 잣대를 통해 다룬 후 우리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분야를 조명한다. 
서유럽의 중세 서두를 장식하는 훈족(Hun)의 유럽 침입은 서양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375년, 유목 기마민족인 훈족이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켜 찬란한 로마 문명 즉 ‘팍스로마나(Pax Romana)’가 476년 게르만 민족인 오토아케르(Odoacer, 433?493)에게 멸망되는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침입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근거지에서 쫓겨난 동, 서 고트인 즉 게르만 민족들이 각지로 분파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당시의 국경이 대부분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 서유럽의 국경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근래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 훈 족의 원류가 한민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이들을 한민족과의 친연성과 연계하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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