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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연안문명 -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 이형구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4-01-15 조회수 : 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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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연안문명-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이형구(선문대학교 석좌교수 · 고고학)

1. 발해연안문명은 고대 동방문명의 중심

1) 한국 민족·문화의 원류 
최근, 중국에서는 만주 지방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일찍이 발해(渤海)를 중심으로 중국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를 포함한 발해연안(渤海沿岸)의 고대문화를 ‘발해연안문명(渤海沿岸文明)’이라 명명하였다. 유럽에서는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서양문명이 탄생한 것처럼 동양문명의 중심은 발해연안으로 탄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문명 즉, 이집트문명、그리스문명、로마문명이 일어나 서양문명의 요람이 되었듯이 동양에서는 발해를 중심으로 발해연안의 산동、요동、한반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예전에 동양문명의 중심을 황하(黃河)문명으로 보았는데, 황하도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해를 ‘동양의 지중해’의 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山東)반도、서부의 하북(河北)성 일대、북부의 요녕(遼寧)성 지방、북동부의 요동(遼東)반도와 동부의 길림(吉林)성 중남부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까지 60여 년간 중국의 동북지방―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이른바 동삼성(東三省)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시기적으로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에 이르고 있고, 각 시기마다 중요한 유적、유물들이 수없이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발해연안 동북부、중국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내몽고자치주 동남지역 포함)、길림성、흑룡강성 지방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다.
발해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필자는 일찍이 ‘발해연안문명’을 탐색하기위하여, 발해연안의 요서 ․ 요동 지역、만주 지방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 유적、청동기시대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문헌)를 수집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를 토대로 1982년 6월 25일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해연안 북 ․ 동부지구(만주) 구석기 문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동방학지』52호, 연세대학교, 1986)
발해연안 북부의 요서․ 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는 한국 민족·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1950년대 이후 30여 곳에서 많은 구석기시대의 문화 유적과 인류화석(人類化石)이 발견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요동반도의 중국 요녕성 영구현(營口縣, 지금의 大石橋市) 금우산(金牛山) 동굴유적、본계시(本溪市) 묘후산(廟後山)동굴 유적이 있다. 이들 두 유적에서는 북경원인(北京猿人, 혹칭 北京原人)과 비교되는 곧선 사람인 직립원인(直立猿人)의 화석이 발견되어 동북아시아 구석기시대 고인류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금우산 동굴유적에서는 전기 구석기시대(28만 년 전)의 인류화석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금우산 인류 화석은 직립인(直立人)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금우산 직립인’ 혹은 ‘금우산인’이라고 명명하였다. 또 금우산 동굴에서는 불탄 목질과 불탄 재가 발견되었다. 금우산인 화석은 몽고인종(蒙古人種;Mongoloid)의 고유 특징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인종을 이른바 아프리카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북경대 呂遵諤 교수, 1989)
1978년 압록강으로부터 100㎞ 정도 북쪽에 위치한 본계시 산성자촌 묘후산 동굴에서 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과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보고자(張鎭洪교수)에 의하면 묘후산 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돌도끼(석부)、찍개、긁개 등의 제작기법과 유사하다고 한다.(李亨求 譯 ; 「묘후산」『동방학지』64, 연세대, 1989)
발해연안의 중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大凌河)유역의 중국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합자동(鴿子洞)동굴 유적、요동반도 묘후산 동굴 7․8층 유적 그리고 해성현(海城縣) 선인동(仙人洞)동굴(지금의 小孤山동굴) 유적 등이 있다.

2) 발해연안의 인류화석과 한민족
대릉하 유역의 합자동 유적에서는 동굴의 저부 4층에서 약 10만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고, 그 위 3층에서 불탄 층이 발견되고, 그 위의 2층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맨 위 1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이른바 홍산문화) 이래 청동기시대(이른바 하가점하층문화)、서주 및 춘추전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한 동굴 안에서 계속 인류가 생활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예로 평양 부근의 룡곡동굴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룡곡동굴 유적의 아래층에서 신인(현생인류) 단계의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화석〔룡곡인(龍谷人)이라 칭함〕이 발견되고, 그 위 층에서 신석기시대의 인류화석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진화 ․ 발전 단계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現生人類)의 신인 단계 인류화석은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발해연안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대릉하 ․ 요하 ․ 압록강 ․ 송화강 ․ 두만강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6개소에서 인류화석이 출토되었다.
요동반도에서는 금유산유적〔위층〕과 묘후산의 동동(東洞)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바 있고, 1978년에 발굴된 압록강 하구의 요녕성 동구현(東溝縣) 전양동(前陽洞)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전양인(前陽人)의 년대는 18,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류가 곧, 오늘날의 인류와 같은 현생인류이다.
일설에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퍼져 나왔다고 하지만 고대 인류의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진화 과정을 원인(猿人) 단계로부터 고인(古人)단계를 거쳐 현생인류로 진화한 신인단계, 그리고 신석기시대인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동방인류 즉, 동이족(東夷族)으로 성장 발전하여 발해연안문명을 창조하게 된다.

2.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

1) 사해(査海) ․ 흥륭와(興隆窪)문화의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하게 되는 시기이다. 그것이 바로 토기(土器)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류 최초의 혁명이다. 토기에 물을 담아 집 안에서도 먹게 된 시기를 신석기시대라 하여 석기만을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와 구분된다.
지금으로부터 15,000~10,000년쯤 전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발해연안(渤海沿岸)에는 강이 생기고 물이 모여들어 발해가 생기고 한반도 양쪽에는 서해와 동해가 생기게 되어 오늘날과 비슷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인류들은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어 쓰다가 어린이가 흙장난 하듯이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붙이거나 띠를 만드는 따위의 덧대는 행위를 하게 되고, 차츰 토기의 겉면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발해연안에서 이 시기가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8,000년 쯤 전이다.
발해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전 경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발해연안에서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으로는 요하 하류의 발해연안 서부의 황하 하류의 자산(磁山) ․ 배리강(裴李崗)문화, 북부의 대릉하(大凌河) 상류의 사해(査海) ․ 흥륭와(興隆窪)문화 그리고 신락문화, 광록도 소주산(小珠山)하층문화, 요동반도 압록강하류 후와(後窪)문화가 있다. 한반도에는 대동강 유역의 궁산 ․ 남경유적, 재령강유역의 지탑리유적, 한강 유역의 암사동유적, 한반도 동북부의 서포항유적, 그리고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유적,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유적 등이 있다. 이들 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기원전 6,000~4,000년 경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가고,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 ․ 몽골 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고 믿었다.(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일지사, 1973, 1986)
필자는 과거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시 사해(査海)유적과 내몽골 적봉시 흥륭와(興隆窪)유적의 신석기시대 초기 문화를 찾아 나선 바 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중국에서는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국부적인 개념이다. 이들 문화는 요하뿐 아니라 대릉하유역과 산동반도·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를 포괄하는 발해연안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사해、흥륭와유적도 대릉하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들 문화를 발해연안문명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해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의 유적이다. 1982년 중국 정부가 전국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때 발견되었다. 흥륭와는 지금은 내몽골이지만 1979년 재편되기 전까지만 해도 요녕성이었다. 
사해·흥륭와문화는 황하 하류의 이른 시기의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황하 하류의 자산· 배리강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7,000년 전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해 유적과 흥륭와 유적은 1994년 중국 정부가 전국 단위의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중국에서는 중국 고대 문명을 황하문명(黃河文明)이라 부르는데, 더 넓게 보면 장강(長江) 하류、광동성 주강(朱江) 유역、신강성(서부) 일대、황하 유역、요하 유역, 이렇게 5개 문명권으로 나눈다. 필자는 황하하류와 요하유역、한반도의 발해연안을 포괄하여 발해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사해 유적은 사해유적은 요녕성 부신시 대릉하상류 사해촌에 위치해 있다. 발해연안의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문화 가운데 하나로 빗살무늬토기가 특징이다. 그 전에는 자산·배리강의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았는데, 사해와 흥륭와 유적에서도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 
두 번째는 옥기(玉器)였다. 중국은 옥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귀걸이 장식품인 옥결(玉玦)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옥제 귀걸이)이 이와 똑 같다.(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몇 해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서 옥결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박물관측 기록에는 지금으로부터 6,000넌 전의 유물로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았다.이런 류의 옥결은 일본에서도 나왔다.
세 번째는 용(龍)의 형상이다. 중국은 용 토템이고 동이족은 새 토템이다. 중국에서는 중원에서 용 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요녕에서 용이 나왔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마지노선이었는데 연산산맥(만리장성) 넘어 사해에서 용이 나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명나라까지는 만리장성 이동은 동이(東夷)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 사해에서 나옴으로서 이곳이 동양문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사해유적은 주거유적 60여기가 도시계획된 것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아주 규격화되어 있다. 방형주거지 사이에 주먹만 한 할석(割石)으로 덮은 19.7m길이의 용의 형상이 발견되었다. 이 용의 형상은 지하 1.2m 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들어 올려 지상에 같은 모양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사해유적의 용 형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원문화의 시작이 중원이 아니라 동방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농업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다. 사해유적에서 이런 용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최초의 사람이 동이인(東夷人)이다.
 흥륭와유적은 사해유적으로부터 100㎞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지리상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지류인 망우하(牤牛河)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사해와 흥륭와는 대릉하 상류이다. 흥륭와유적은 행정상으로 요녕성(遼寧省)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興隆窪)촌이다. 1982년 중국사회과학원의 지표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1983년 발굴조사 시 170여 기의 반지하식 집자리로 구성된 대규모의 취락지가 발굴되었다. 문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이곳에서 많은 토기와 석기、옥기가 발굴되었다. 밑바닥이 없는 토기인 통형도관(筒形陶罐)도 나왔는데, 이는 무덤 주위를 두르는 장식으로 일종의 종교시설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나온 옥결(玉玦)이 특징이다. 
 흥륭와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채색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는 주로 빗살무늬 계통으로 “之”자형 빗살무늬와 “人”자형 빗살무늬, 사선 빗살무늬 및 교차형 빗살무늬 등이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늬는 “之”자형 빗살무늬이다. 교차형 빗살무늬는 삿자리를 짜듯이 교차하면서 베푼 삿자리형 빗살무늬로서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심선문(深線紋) 빗살무늬와 매우 유사하다.
흥륭와유적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이 가는 모래가 섞인 표면이 거친 붉은 색 혹은 갈색계의 토기로서, 그릇 모양은 주로 큰 독(罐)류와 단지(鉢)류 등이다. 그리고 이들 토기의 소성(燒成) 온도는 그리 높지 않고, 모두 수제이다. 
흥륭와유적은 간혹 홍산문화의 유존이 흥륭와문화층을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의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2)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의 기원
흥륭와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이외에 소량의 석편석기와 타제석기 및 마제석기류의 석마봉、석마반、반상기 등 곡식 가공도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밖에 낚시바늘、골추(骨錐) 등 어로기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흥륭와문화는 발해연안 서남부의 자산-배리강 문화와 마찬가지로 농업경제 생활을 위주로 하면서 수렵생활을 겸하는 사회로 추정된다.
흥륭와유적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목탄을 이용한 C¹⁴측정연대(미작수륜교정)는 5290±95 B.C. 로 나왔다. 이의 나이테(수륜) 교정 년대는 기원전 6,000~5,000년 으로 편년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연대로서 발해연안 서남부 지역의 자산-배리강 문화 연대와 같은 시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연안 북부의 신석기시대 문화 가운데 사해문화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이다. 따라서 흥륭와유적은 사해유적과 함께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을 찾는데 매우 귀중한 유적 이다.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발생은 대략 기원전 6,000년 내지 5,000년경으로, 이시기는 기원전 5,000년 내지 4,000년경에 출현하는 동유럽이나 시베리아(Siberia)의 빗살무늬토기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선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방법이나 그릇 모양이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와는 계통이 서로 다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유형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기원전 6,000년경부터 2,000년경까지)유행하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의 동질성은 민족의 동질성과도 통한다.

3. 발해연안의 옥문화-용(龍)의 형상화-

1) 사해. 흥륭와의 옥결(玉玦)과 홍산문화의 옥결 및 은(殷)의 옥룡
 고대의 동방에는 크게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족(漢族, 중화족)과 한족(韓族, 조선족)으로 대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하는 토템(totem)을 가졌는데, 화하족인 중국 민족은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조(鳥)〕를 토템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민족은 모두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데 용은 곧, 중국민족의 상징일 뿐 아니라 황화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의 본향인 황화 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바로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방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용의 형상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옥(玉)으로 만들었는데, 용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길 “옥은 돌 중 에서도 아름다운 것〔石之美者〕”을 가르킨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갈고 닦지 않으면 옥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시경(詩經)』소아(小雅)에 이르기를 “他山之石可以爲錯”이라고 하였다. “옥을 쪼고 갈려면 다른 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로부터 옥을 완성하는 과정〔조탁(彫琢)〕을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유하였고, 그 완성된 옥을 군자의 다섯 가지 덕목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기(禮記)』에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라 하였다. 그리고 옥은 장식으로서의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와도 관계가 있어 그것을 매장함으로 영생(永生)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용의 형상을 갖춘 가장 오랜 시기의 옥장식〔일명 옥룡(玉龍)이라고 함〕이 1972년, 발해연안 북부 서요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유역의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랍촌(三星他拉村)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옥룡은 흑록색 옥석을 재료로 용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크기가 26cm나 되며, 용의 모양은 ‘C'자형을 하고 있으며, 꼬리가 거의 한 바퀴 돌았다. 용은 입을 꼭 다물고 코는 높이 치켜세우고 있어 마치 용머리가 전진하는 모습이고 목덜미의 길이는 날아가는 듯 유려하다. 그리고 몸체의 중앙에 작은 구멍을 뚫어 실을 꿰어 목에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옥룡이 출토된 지점에서는 발해 연안 신석기시대 문화유형의 하나인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이것의 시기를 짐작 할 수 있다. 홍산문화 시기는 대개 기원전 3500년경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홍산문화 시기에 대릉하 유역에서는 앞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요녕성 건평현 우하량 돌널무덤에서도 용 모양의 옥장식이 한 쌍 발견되었는데, 이 용 모양은 삼성타랍촌 출토의 옥룡보다 매우 간결하게 추상화되었다. 이 용 모양 옥장식은 얼굴이 마치 짐승의 모양을 닮고 통통한 몸은 한 바퀴를 감돌았다. 그리고 머리 부부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실을 꿰어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출토 당시 주검의 어깨 밑 부근에서 각각 발견되었기 때문에 귀고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하량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용 모양 옥장식과 같은 옥기가 서요하 유역의 적봉시(赤峯市)、파림좌기(巴林左旗)、오한기(敖漢旗) 그리고 대릉하 유역의 릉원현(凌源縣) 삼관전자(三官甸子)、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건평현(建平縣)、조양시(朝陽市)、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斗溝)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점이 특색이다.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은 대릉하 유역에서 서남향하여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대릉하 유역에서 용 모양 옥장식과 함께 출토된 새 모양 옥장식〔鳥形佩飾)도 함께 유행했다. 이와 같이 대릉하 유역의 용과 새 모양의 옥제 조각의 전통이 은에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은의 선조가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가지고 있는 동이(東夷)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편, 대릉하 유역에서 동남향으로 내려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에 용 모양의 옥장식이 유행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옥장식을 ‘굽은 옥’ 혹은 ‘곡옥(曲玉)’ 또는 ‘구옥(勾玉)’이라고 한다. 신라에서는 황금제 왕관이나 귀거리와 허리띠 장식에 곡옥이 장식되었다.
 만주 지방에서는 요동반도의 여대시 곽가촌(郭家村) 유적〔아래층〕에서 기원전 3000년경〔C¹⁴측정연대:5015±100〕의 송록석제(松錄石製) 곡옥이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길림성 영길현 동해강(東海崗) 돌널무덤, 왕청현(汪淸縣) 천교령(天橋嶺) 돌널무덤 및 신화려(新華閭) 돌널무덤에서 곡옥이 출토되었다.
 
 2) 발해연안 옥문화와 한반도의 옥결과 옥룡 
 한반도에서는 천하석(天河石)으로 만든 만월형(彎月形) 곡옥이 함경남도 북청군 죽평리,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 대전시 괴정동, 충청남도 아산시 남성리, 부여군 연화리․ 송국리, 충청북도 제원군 황석리, 경상북도 영덕군 오포리 등 유적의 주로 돌널무덤이나 고인돌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 대평리 옥방(玉房)유적에서 옥기를 제작하던 옥기공방(玉器工房), 즉 옥방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돌무덤에서 굽은 옥이 출토되는 것은 대릉하 돌무덤에서 출토된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과 일맥상통한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까지도 출토되고 있는 비취 곡옥이 일본에서도 구주 지방과 관서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와 일본의 곡옥의 조형(祖形)에 대하여 용이나 짐승의 태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경유도 있지만 대개 짐승의 이빨로 만든 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만주 지방이나 한반도의 곡옥은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에서 기원한 용 모양 옥장식이 곡옥으로 연변(演變)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곡옥의 조형을 옥룡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조형상의 문제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방에서의 용에 대한 신앙적인 관념의 세계가 중국의 심장부인 중원 지방을 크게 벗어나 동방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한민족과 가까운 동이 지역에서 형상화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옥을 숭사하는 습관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한다는 생각과 당시 고대 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예(禮)의 원형이다. 특히 용은 하늘을 숭배하는 고대 농업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옥으로 사물을 조각했다는 사실은 곧, 문명 발생의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만리장성 동쪽의 발해연안에서 동방문명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인류가 얼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아마도 귀고리〔이식(耳飾)혹은 이환(耳環)〕이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금과 달리 남성이 여성보다 더 호사스러웠다. 이것을 우리는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라 고분출토의 금 귀고리이다.
 중국에는 신석기시대 유물로 ‘결(玦)’이라는 일종의 환상옥석(環狀玉石)이 있다. 이와 같은 유물은 중국의 동남 연안 지구와 산동반도,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일본에도 분포되어 있는데, 이를 귀고리하고 하고 패식(佩飾)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竹旺面) 문암리(文岩里) 유적에서 신석기시대〔기원전 5000년경〕의 옥결(玉玦) 한 쌍이 출토되었다. 1987년에는 경상북도 청도군 사촌리(沙村里)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옥결 1점이 반파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한편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옥방 유적을 발굴한 결과 청동기시대의 이른바 송국리형(松菊里形)의 집자리 24기를 비롯하여 4기의 저장용 수혈(竪穴) 및 1기의 석관묘가 확인되었다. 송국리형 집자리는 내부 중앙에 길이 약 30cm정도의 대추형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양 끝부분에 길이 70cm 정도의 기둥구멍〔주혈(柱穴)〕을 갖추었다. 구덩이의 바닥은 단단하게 처리되었으며, 주거지 내부는 대체로 모두 모루돌〔대석(臺石)〕․ 갈돌〔지석(砥石)〕을 갖추고 있으며, 석기가 토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석기의 경우 완성품보다는 파손된 석기나 미완성된 반제품(半製品), 석기재료가 대부분이다. 이로 보아 대추형 구덩이는 석기를 제작하던 작업공(作業孔)으로 추측된다. 간혹 옥기(玉器)를 제작했던 흔적도 보인다. 이런 형태의 작업장을 저자는 ‘공방(工房)’이라 하였다.
 옥방유적의 공방형 집자리의 작업공 내부에서 마광 옥기편, 옥기 쇄편, 유공 옥기편, 옥을 가공하는데 사용된 대석, 옥을 가는 옥마석, 갈돌, 숫돌 등과 함께 옥기 제작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는 드릴(drill)형 착공구(鑿空具)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옥기공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이 지방의 ‘옥방(玉房)’이란 마을 이름과 부합되고 있다. 옥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공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기 제작과 옥기 제작은 별개의 공방에서 따로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옥방에서는 공방형 집자리 이외에, 생활유구、지상 건물지、수혈 유구、야외 노지、매장 유구、경작 유구 등으로 이루어지는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취락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군(群)을 이루며 일정한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장방형 집자리가 각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밀집도나 배치상에 있어서 매우 규칙적인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공간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남강 유역의 다양한 집자리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내부구조와 출토유물 등을 종합 분석하여 그 기능과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완형의 황옥제(黃玉製) 용형(龍形) 곡옥(曲玉)의 발견은 장식적인 용도 외에 당시 사회의 신앙과 관련된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 D구역 생활면에서 곡옥형(曲玉形) 청동제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남강 유역 문화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청동기이다.
 옥방유적의 장방형 집자리의 내부에서 출토된 목탄(木炭) 2점에 대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방사성탄소(C¹⁴)연대측정을 의뢰한 결과 각각 기원전 1590~1310년과 기원전 1620~1400년으로 측정되었다. 옥방유적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1600~1300년으로 나타났다. 기원전 6세기 또는 4세기경으로 보던 것에 비해 무려 10~5세기가 상회하고 있다. 이 점은 앞으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문화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4. 발해연안의 돌무덤(石墓)과 동이민족 

 1) 대릉하 유역의 돌무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랜 시기의 인류의 무덤은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의 인류와는 달리 주로 동굴 생활을 영위하였는데, 동굴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동굴 안의 방바닥을 파고 흙을 덮은 뒤 돌을 주워 모아 주검을 덮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주검의 주위에 붉은 흙을 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행위는 곧 영생을 바라는 산 자의 기도이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땅을 파서 매장한 다음 흙으로 덮는 흙무덤(토광묘)을 사용하였으나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면 인간의 주검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돌을 둘러쌓아 축조하였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인 동이족(東夷族)에게는 돌을 사용하여 인간의 주검을 보호하는 풍습이 생겼다. 이것이 돌무덤(석묘) 이다.
‘동이족’이란 중국 측에서 보면 동방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항상 중국민족과 대치되고 있었다. 동이족은 발해연안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주로 산동 반도를 비롯하여 만주 지방과 한반도의 고대 민족을 일컬었다.
동이족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다른 민족과 달리 주로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돌무덤(석묘)이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돌넛널무덤(석곽묘)、돌널무덤(석관묘)、고인돌무덤(지석묘)、돌방무덤(석실묘)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인 돌널무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땅을 파고 지하에 판자와 같은 널찍한 돌(판석)을 마치 상자모양으로 널(관)을 짠 이른바 수립식(竪立式)돌널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판석을 중첩하여 네 벽을 쌓고 뚜껑을 덮은 이른바 첩체식(疊砌式)돌널무덤이다. 
돌무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九州) 지방과 유구(琉球) 열도에까지 분포되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무덤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고 있다. 마치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널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동북아와 인접한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적석총 계통인 이른바 열석묘(列石墓)와 돌널무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한 ․ 일 학계에서는 한반도 돌널무덤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재래의 기존 학설에 대하여 다시 생각게 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널무덤과 그 구조와 축조 방식이 동일한 돌널무덤양식이 발해연안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이들 돌널무덤의 축조시기의 가장 이른 시기가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한다.
1983~85년에 중국 요녕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紅山文化) 시기의 적석총 유적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다. 1908년, 일본인 도리이 료죠(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조사한 후 홍산문화는 1935년 일본 동아고고학회가 적봉시(赤峰市) 홍산후(紅山後)에서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에는 「적봉제Ⅰ기문화」라고 하였다가 1954년에 윤달(尹達)의 『중국신석기시대』에서 홍산문화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홍산문화는 돌무덤 이외에 채도를 비롯하여 “之”자형 빗살무늬토기 ․ 세석기 및 농경도구를 대표적인 문화내용을 하고 있다. 분포지역으로는 발해연안의 중국 내몽골 동남부 ․ 요녕성 서부 ․ 하남성 북부 ․ 길림성 서북부 요동반도 ․ 한반도 등이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4500년~3000년으로, 그 후에는 부하문화(富河文化) ․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이어진다. 
홍산문화는 대릉하 유역 중상류지역인 능원(凌源)、건평(建平)、객좌(喀左) 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건평현과 능원현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적석총이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유적은 북경-심양-단동-부산을 잇는 철도가 지나는 곳이고, 북경-심양 고속화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유적은 철도를 놓을 때 많이 훼손되었고, 고속화 도로를 놓을 때에도 돌무지무덤의 뒷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1981년 처음으로 지표조사를 하고, 198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유적 부근에는 요녕성 고고문물연구소 우하량공작참(牛河梁工作站)이 설치되어 유적보존과 발굴조사를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적석총의 대표적 유적으로 제2지점 적석묘지다. 이 제2지점 적석묘지 가운데에서도 제1호 적석총(Z1)은 3단형 계단식 적석총(일종의 피라미드)을 만들어 중앙의 석곽 안에 석관이 놓여 있으며, 그 석관에서 용형옥결(일종의 곡옥)이 나왔다. 제1호 적석총 유적의 좌우로 여러 적석총이 있고, 서쪽에는 27기의 석관묘가 있다. 이들은 수립식과 첩체식이 함께 분포되어 있는데, 판석을 세워 쌓은 이른바 수립식 석관묘는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석상식(石箱式) 석관묘와 같은 묘제(墓制)이다. 석관묘 안에는 주로 옥기가 수장되었으며, 묘 주위에서는 “之”자형 빗살무늬토기와 채도가 발견되고 있다. 
1990년대, 우하량 제 2지점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구릉에서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금자탑(金字塔)이 발견되었다. 폭 60m의 사각형 기단에 7층까지 높이 10m 정도인 무덤과 전면에는 제단이 설치된 제사 유적이다. 바깥은 돌로 쌓았고, 안에는 흙으로 쌓았다. 
1983년, 대능하 유역 동산취(東山嘴) 유적의 발굴은 요녕성 경내의 홍산문화 유적에 대하여 진행된 첫 번째의 정식 발굴이었고, 수확도 예상 밖이었다. 이 유적은 객좌현 현성 소재지(大城子鎭)에서 동남쪽으로 4㎞지점의 대릉하 서안 산등성이의 중앙 평평하게 돌출된 대지(臺地)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남북 길이는 약 60m이고, 동서 너비는 약 40m이며, 강바닥에서 50여m 높이에 있으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있다. 이곳에서도 석축으로 쌓은 재단을 비롯해서 적석총과 석관묘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의 하나이다. 이 유적 내에 돌로 쌓은 석체건축(石砌建築) 유구가 일정한 분포규율을 나타내고 있다. 중심부의 북부는 4변에 돌을 쌓은 방형 건축유구의 동서길이는 11.8m이고 남북너비는 9.5m이다. 중심부위 남부에는 직경 3m정도의 돌로 쌓아 만든 2기의 원권식석단(圓圈式石壇)이 있는데, 이를 무덤 혹은 제단으로 보기도 한다. 동산취 재단의 C¹⁴ 측정연대는 B.C.3500년으로 측정되었다. 
최근 2001년에 적봉시 초모자(草帽子) 제사유적에서 동산취 유적과 비슷한 유형의 제사유적이 발굴되어 이번 기회에 답사하여 확인하였다. 제사유적 안에는 적석총이 있고, 그 안에 석관묘가 있다. 이 초모자 유적은 B.C.3000년 전 유적이다. 
이들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는 모두 만리장성 이동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발해만 북쪽에 유입되는 대릉하(大凌河)는 발해연안 이는 곧, 발해문명이 잉태한 곳이다. 또한 대릉하 유역은 고대문화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강이다. 그리고 대릉하 유역은 고대 조선 즉,고조선의 역사 전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2) 발해연안의 돌무덤과 한반도 돌무덤의 기원 - ‘시베리아전래설’의 허상(虛想)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서에서 요동을 지나 한반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도시기와 과도지점을 거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우하량 제 2지점 1호 적석총의 동쪽에 있는 원형 적석유구는 발견 당시 원형 적석총으로 추정하였는데, 적석 외곽에는 통형도관을 두르고 있는 이 유구를 최근에는 제단(祭壇)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형 적석유구는 최근 경남 진주시 남강유역 옥방(玉房)유적에서 발굴된 청동시대 원형 적석유구와 매우 유사하다. 
적석유구나 적석총은 여러 단의 석축으로 싼 적석 안에 돌곽(석곽)을 두고 다시 돌널(석관)을 묻은 석관묘를 축조하는데, 이런 유형은 요동반도나 압록강 유역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초기 적석총 무덤에 까지도 그대로 이어진다. 집안 국내성 일대의 고구려 계단식 적석총이 이와 같은 유형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한성 백제 시기의 적석총도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총이다. 특히 대릉하 유역의 돌널무덤 즉,석관묘는 기원전 2000년경에 요동반도에서 고인돌무덤(支石墓)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적석총이나 동산취 적석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500년경이고, 적봉 초모자 석축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연대는 한반도 안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무덤이 기원전 700년경에 시베리아로부터 몽골 ․ 만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퍼져 내려왔다고 하는 『한국고고학개설』의 종래의 주장 보다 훨씬 앞서는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다량의 돌무덤이 발견된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C¹⁴ 측정연대가 기원전 3500년경으로 나오는데 반해 시베리아의 돌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경으로 추정된다. 대릉하 유역 우하량 원형 적석유구의 축조 연대는 시베리아 알타이지방의 페시체르킨 로크 Ⅰ(Peshcherkin LogⅠ) 원형 적석유구보다 무려 1500년 내지 1000년이나 빠르다. 그리고 대릉하 유역은 지리적으로도 시베리아보다 가깝다. 그러므로 돌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발해연안에서는 고대 인류의 장례를 주관하는 성소가 사막(沙漠)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연해지구나 강 연안 지역에 있다. 이것은 바로 고대 인류의 생활 터전이 물과 밀접한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인류가 남긴 문화유산의 원형은 사막이나 동토(凍土) 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동방문명의 중심은 더운 몽고(蒙古) 사막이나 한랭한 시베리아(Siberia) 지방이 아니다. 발해연안문명은 따뜻한 발해연안이지  

<<참고자료>>
곽대순: 『홍산문화』, 문물출판사, 2002
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72 ,1986.
이형구: 「한국석묘문화」『한국학보』50 ,1988.
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도서출판 까치, 1991.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이형구·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성안당, 2009.
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비밀-발해연안문명의 여명을 밝히다-』, 새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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