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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대외진출 - 윤명철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12-31 조회수 : 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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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대외진출


                   尹明喆 (동국대 교수. 해양문화연구소소장 )



프롤로그

우리 역사는 해양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역사가 속한 채 활동해온 보다 큰 단위인 동아시아는 중국이 있는 대륙, 그리고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와 한반도, 일본열도로 구성이 되어있다. 때문에 북방과 중국에서 뻗쳐오는 대륙적 질서(유목문화, 수렵삼림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와 남방에서 치고 올라가는 해양적 질서가 만나는 접합점이다. 소위 한반도를 중심축으로 일본열도 사이에는 동해와 남해가 있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는 황해라는 內海(inland-sea)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열도의 서부,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양자강 이남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東中國海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으로 인하여 내부적이건, 대외관계에서건 역사가 발전하는 데에 해양적인 역할이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서 명멸했던 모든 종족들과 국가들은 이 해양의 영향을 어떠한 형태로든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양적인 특성을 통해서 역사상을 살펴보고 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 동아지중해의 해양 환경

동아시아의 역사를 육지위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동아시아는 현재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와 소위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로 구성되어있다. 그런데 한반도를 중심축(core)으로 하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광대한 넓이의 동해와 비교적 폭이 좁고, 넓지 않은 남해가 있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는 황해라는 내해(inland-sea)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제주도 포함)와 일본열도의 서부(큐슈지역),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양자강 이남에서 복건성 지역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동중국해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다. 이른바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anean-sea)의 모습을 띄우고 있다. 
이렇게 해양을 포함한 자연지리적인 환경의 영향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북방과 중국에서 뻗쳐오는 대륙적인 질서(유목문화, 농목문화, 수렵삼림 문화 등을 공유하고 있다.)와 남방에서 올라가는 해양적 질서(해양문화, 남방문화)가 만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각 지역 간에 일어났던 교류는 거의 해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가 해양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졌고, 각 지역 간 혹은 나라들 간에 일어난 교섭이나 전파, 그리고 경로 또한 해양과 밀접한 관계사 있다. 
다른 바다도 그러하지만 특히 황해는 좁고, 거리도 짧아(중부는 약 300~400km 정도)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해안 전체, 그리고 만주남부의 요동지방을 하나로 연결하였으며, 해상상태도 안정되어 흡사 호수 같은 성격을 지니면서 인접한 모든 나라들이 무리 없이 공동으로 활동할 수 있는 場의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부터 인간과 문화의 교류가 빈번했고, 그 결과 비교적 共質性을 토대로 친연성이 강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다 주변의 나라들이 흥망을 되풀이하고 국제질서가 격렬하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해양질서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 지중해의 한가운데(中核)에서 모든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양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 민족의 위치가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고, 과거에는 해양활동이 남달리 활발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도 해양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해양은 육지보다는 더욱 자연환경이 불안정하고, 인간들에게 익숙하지 못했다. 해류·조류·계절풍, 해안선의 움직임, 해상상태 암초 등등 자연조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전 근대사회에서 기계를 이용한 동력도 발달하지 못했고, 해도도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못했고, 해양상태를 관측하는 시스템도 부족했으므로 해양활동을 한다는 것은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자연의 흐름은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육지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먼 거리를 항해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장소로 이동시켜 주고, 때로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과 문화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2 해양문화의 특성 

해양활동이 우리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해양문화의 특성과 메커니즘에 대한 전제가 필요하다. 해양문화와 역사상을 이해하는데 육지와 농토에 터를 잡고 정주적 성격(stability)을 가진 농경민의 인식과 생활방식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뒤따른다. 
해양문화의 특성을 살펴보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은 자체의 세력들로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호족성이나 중앙정부에 귀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무정부성을 지니고 있다. 해양세력들이 호족적 성격을 띄우고, 무정부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해양문화의 메카니즘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둘째, 해양문화는 모방성, 공유성이 강하다. 해양에서는 다른 지역이나 나라, 문화 간에 교류가 빈번하기 때문에 주변 문화와 共通性이 많다. 정치적으로 제약이 훨씬 덜하고, 교류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또한 해류, 조류, 바람, 해상조건 등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므로 해양민들 사이에는 기술과 경험의 공유하는 일이 서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셋째, 해양문화에서 전파하는 일과 이동하는 일은 비조직성을 띄고 있다.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면 기술이 필요하고, 규모가 소규모이고, 또 비조직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불규칙적이어서 연속적이지가 못하다. 넷째, 해양문화는 불보존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담당자가 해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해양민이거나 지방 세력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기록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남기는 유형문화가 적을뿐더러, 설사 있었다 해도 바다 속에 가라앉아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불보존성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기록과 유물이 없다고 해서 해양문화가 부재했거나 발달하지 못했다는 식의 역사해석은 곤란하다. 이러한 몇 가지 전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시할 경우에는 고대의 해양역사가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물론 문화를 해석하는 데에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한다. 
이 지역에서는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海洋力의 강약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집단의 성격과 국가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그 바다를 통해서만이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이 상호간에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면 자연스럽게 소위 한반도는 이러한 해양질서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양활동이 활발하고, 역사발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용한 반도가 아니라 오히려 해양활동이 미약하고, 바다에 포위되어, 소극적이고 제한된 공간으로서의 반도라고 인식한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독자성과 고유성이 미약한, 시대에 따라서는 대륙의 부수적인 주변부 역사로서 인식했다. 특히 모든 분야에 있어서 中國(애매모호하고, 시대적 구분이 불분명한 개념)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필자는 적어도 문화의 교류에 관한한 ‘還流시스템’이라는 이론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바 있다.) 

3 동아지중해의 해양활동

 <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해양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선사사대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남해는 부산 근처나 울산과 대마도 등에서 이미 약 6000~7000년전부터 한일 지역 간에 교섭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동해북부의 서포항, 황해의 단동 등 압록강 하구 및 요동반도 및 산동반도 북부 등에서도 역시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해는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다도해가 많아 일찍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할 여건을 갖추었다. 특히 황해는 수심이 얕은데다가 중국지역과 만주지역, 한반도가 만나는 공동의 해역으로서 일종의 내해(inland-sea)이어서 바다가 매우 안정되고 교류에 매우 유리하였다. 
동아시아의 바다들은 쿠로시오 황해난류 대한난류 동한한류 등 해류의 흐름과 방향이 거의 일정하고, 바람은 계절마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계절풍지대이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동아시아 해양은 일찍부터 지역 간에 항해하는데 유리하였다. 동아지중해의 전반적인 문화형태와 해양유적지들의 분포로 보아 처음으로 해양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황해의 양쪽 연안에 환상형으로 포진한 동이족이었다. 특히 황해서안, 즉 현재의 중국 해안에 거주한 동이족은 해양문화를 발전시켰으며 해양을 통해서 벼농사와 고인돌문화 등을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 원조선과 열국시대>

고조선은 황해북부해안을 끼고 발전하였는데, 특히 요동반도와 서한만, 대동강 하구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고조선의 무덤으로 알려진 기원전 6~7세기경의 崗上무덤과 약간 늦은 시기의 樓上무덤 등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데, 특히 강상무덤은 현 대련시 해안가에 있어 해양호족세력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현재 산동반도의 봉래와 요동반도 끝의 여순지역을 잇는 묘도군도 등을 오고가며 활동하였으며, 또한 발해만에서 서한만으로 오고가는 선박들을 관리하고 통제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강상무덤에서는 보배조개 등이 나와 중국과 교역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에 산동의 齊 등과 교역을 하였다. 管子에는 조선의 명산물인 文皮가 교역품이었음을 기로하고 있다.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에 벌어진 전쟁은 이러한 황해북부 해상권을 둘러싼 역학관계의 재편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의 동방진출과 경제권의 확대는 위만조선의 성장은 양 지역 간의 갈등을 야기했다. 결국 양 국은 격돌하였고, 전투는 수륙양면전이 펼쳐졌다.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의 소국들이 있었다. 그 소국들은 최근에 계속해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들 외에도 삼국지·후한서 등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활발한 해상활동이 있었다. 각국들 간의 교섭은 물론이고, 州胡(현재의 제주도) 일본열도의 소국들 및 중국 등과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교섭을 하였다. 三國志 韓傳에는 三韓이 鐵을 매매하고 있었으며 교역의 범위는 바다건너 州胡 와 倭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다. 州胡國이 배를 타고 왕래를 하면서 韓의 國中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辰韓이 생산한 鐵을 교역하고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이 소국들은 대부분이 해안가 또는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해양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나루국가(해양폴리스)이다.

일본열도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해당하는 야요이(彌生)문화(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후 3세기까지)가 무덤양식이나 토기 농기구 무기 등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갔음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발견되는 인골은 한반도 남부의 것과 동일하여 주민이 집단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동은 남해동부에서 큐슈북부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통로 외에도 한반도의 각 지역, 특히 동해남부에서도 출발하여 일본열도 혼슈남단지역으로도 도착하였다. 물론 바다를 건넌 이러한 대이동은 해양문화가 발달해야 가능하다. 

 < 삼국시대>
고조선의 뒤를 이어 건국한 고구려는 초기에는 만주지역에 동맥처럼 발달한 송화강 압록강 혼강 등 큰 강을 이용한 내륙수군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전기부터 현재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을 장악하여 황해북부로 진출하였다. 중국남방과 교섭한 첫 번째는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동천왕 때(233년)양자강 하구 유역인 建康(현 남경)의 吳나라와 교섭한 것이다.

오에게 초피 1000매와 鶡鷄皮 10具 등과 각궁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손권은 의복진보 등 사치품을 보냈다. 고구려는 말 수백필을 주었으나 오의 사신은 타고 온 배가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 고구려는 해양문화가 가장 발달한 吳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해양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양국 간에 교섭이 이루어진 항구는 서안평이었다.
서안평은 압록강하구에 있으며, 고구려가 황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 해구이다. 서안평은 중국세력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및 일본열도의 일부세력과 중국과의 교섭은 낙랑을 중간거점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남과 서의 양 방면에서 중국세력이 압박을 가할 경우에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면한 외교‧군사적 목표는 요동연안 혹은 근해항로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서안평은 고구려의 생존이 걸린 지역이었다. 233년 이후 237년까지 오의 손권과 교섭할 때 서안평 유역은 고구려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런데 東川王이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했고, 이어 위와 고구려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전기에 추진된 해양활동은 주로 고구려 국가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서안평 쟁탈전과 남쪽의 낙랑 대방을 축출하는데 두어졌다. 그 결과 요동반도 이남의 해상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과 교역상의 이익을 흡수했다. 이렇게 추진된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의 성장 및 북진과 서로 부딪혀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 항해는 고구려와 오나라의 중간에 있었던 화북의 魏나라를 피해서 먼 바다에서 근해항해를 하면서 장거리 외교를 한 것으로서 뛰어난 항해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후 고구려는 황해를 남북으로 오고가며 중국의 남·북조국가들과 활발한 교섭을 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과감하고 전격적으로 국가발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우선 군사력을 동원해서 영토 확장 정책을 펼치고, 외교노선을 다변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22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끊임없이 정복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즉위한 첫해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고, 뒤이어 9월에는 북으로 진격하여 내몽골의 거란(契丹)을 정벌한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공격한다. 즉위와 동시에, 그것도 남과 북을 공략한 것은 전쟁 수행능력과 군사작전능력이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그와 함께 정책방향 혹은 정복대상이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을 동시에 지향하는, 즉 전방위 정복활동이었음을 반증한다. 
그에게 있어서 북방은 국가생존과 직결된 지역이었다. 특히 요동지방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어서 즉위 기간 내내 주력했다. 요동은 중국을 동북부로부터 압박할 수 있고, 북방종족들의 물밀듯한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1차 방어선이며, 북방종족들과 결탁하면 중국 북부를 협공하거나 쉽게 견제할 수 있다. 소위 군사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목’이다. 요동정복은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압록강 하구나 두만강 하구 지역을 통째로 장악한 것과 같다. 그 외에도 요동반도는 철을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의 매장지이며 물류거점뿐 아니라 생산지이기도 한 경제전략지구였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황해 동안의 연근해항로를 확보하면서 황해 중부이북의 동쪽 바다를 안전한 內海(inland-sea)로 삼아 영역권화할 수 있다.


한편 태왕은 고구려의 원향이며 뛰어난 명마와 질 좋은 담비가죽이 생산되는 북부여의 원토도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이어 즉위 21년(411년)에 친정군을 이끌고 진군해서 두만강 하구 유역에서 연해주까지 걸쳐 있는 동부여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이 작전으로 인하여 연해주 남부바다의 일부와 동해항로의 일부까지도 영역에 포함시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얻게 되었다. 
태왕이 붕어할 때까지 쉴 새 없이 추진한 정복 작전의 결과로 고구려는 대륙의 남부, 한반도 중부 이북의 북부지역 등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하여 중핵이 되고, 거기에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한 명실 공히 해륙(海陸)국가가 되었다. 고구려는 곳곳에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하여 질서의 축(軸)을 세우고,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自國) 중심(core)의 거대한 망(網, net)을 구성하고 동아시아 삼각축의 하나로서 명실 공히 중핵국가가 되어 조정능력을 가지며 한민족 질서의 패자가 되고자 하였다. 
장수왕은 이를 계승하였다.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물론 이 당시에도 수군작전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해상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였다. 북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동몽골 지방인 지두우지역을 유연과 공동 분할지배를 하고자 하였다. 4세기부터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그 흔적들이 혼슈남단의 지역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열도로도 진출을 하여 6세기 중반에 이르면 해양을 매개로 일본열도와 본격적인 해양외교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대부분, 만주전체, 요동반도 그리고 동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을 겸비한 제국적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지중해의 중핵에서 자연스럽게 분단된 남북조(현재의 상해정권과 북경정권)와 동시등거리외교를 벌일 뿐 아니라 북방의 유연(현재의 러시아 혹은 몽골)과 동맹을 맺어 송과 연계해 북위를 압박하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다국간(多國間) 외교를 전개했다. 물론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북중국정권은 물론 남조정권과 교섭하는 것마저 해상통로를 막아 통제하고 조정했다. ‘동시등거리외교’와 ‘다핵 다중방사상외교’를 펼치면서 태왕의 구도인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을 충실하게 완성하여, 정치 외교적으로 강국이 되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비류와 온조의 정착과정도 해양과 관련이 깊다. 또한 전기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풍납토성으로 추정) 등은 일종의 河港도시였다. 경기만으로 흘러드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의 하계 망을 장악하면서 이른바 경기지방을 배후지로 삼았으며 바다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으며, 필연적으로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4세기 초에는 북으로 고구려를 쳐서 오늘날의 황해도 해안지방까지 장악하였다. 이는 육지의 영토를 확대하는 목적 외에도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대중교통로의 확대 및 교역상의 이점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예성강 하구 및 황해도 지역에는 전 시대부터 중국와의 교섭을 주도했던 세력들과 그 문화의 토대가 남아있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생존을 건 전쟁을 벌인 데는 이러한 해양질서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 전쟁의 승리 이후 백제는 중국의 북부지역과 바다를 통하여 교섭을 활발히 하였고, 또 직접 진출한 흔적이 있다. 
한편 남쪽에서는 마한을 정복하고 서해남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부터는 서해남부의 여러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제주도를 영향권 아래에 넣었으며, 해상으로 일본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영토를 팽창시키는 방식이나 통치방식을 해양과 관련지어 변화시켰던 것 같다. 그 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대왕의 압박과 공격을 받고 경기만을 빼앗겨 수도를 남으로 이전하였다. 그 결과 해양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고, 중국의 북조정권과는 외교교섭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동성왕 시대부터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황해 남부는 물론 남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탐라가 백제에 복속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송 제 양진 등 남조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하여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문화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더 활발해져 일본에서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불교 등 문화가 발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제동맹의 승전물인 경기만을 신라에게 도로 빼앗기므로써 해양활동은 다시 위축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급속한 성장과 나·당 동맹을 허용하므로써 패망의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나당 수군의 금강 상륙작전으로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은 항복하였다. 이후에는 왜군을 동원하는 등 국제적인 연계 속에 부흥운동을 시도하였다. 역시 해양을 활용하는데 실패하여 고구려 및 일본열도와 신속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백왜군과 나당군의 최후 결전은 역시 백강구전투 즉 해양전에서 벌어졌다.  


가야는 弁韓·辰韓 등의 해양적 전통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김해 거제도 고성 등은 일찍부터 해양문화와 대외교역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한반도의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거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본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물과 건국신화 등 가야적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가야가 한반도에서 멸망할 때 까지 가야와 일본열도간의 교섭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해온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국가설이나 일본인들이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임나일본설’ 등은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해양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알고, 양 지역 간의 관계를 지중해적 질서와 성격을 토대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해양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동해는 바람과 해류 등 항해조건이 안 좋은데다가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굴곡이 없어서 적당
한 항구시설이 없었다. 그런데 신라는 경주를 해항도시로 삼고, 포항 감포 울산을 외항으로 삼으면서 때문에 해양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왜로부터 빈번하게 침략을 당했으나 반대로 일본신화에 스사노노미코도나 천일창 등 신화나 이즈모 등에서 신라계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본열도 진출이 활발했다. 그 외에 비조직적인 주민들의 진출도 있었을 것이다. 
김이사부의 동해 북부해안 진출과 우산국 정벌로 해양활동의 전기를 마련하고 낙동강 하구 장악, 한강유역과 경기만 장악을 계기로 해양활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외교·군사·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중국지역과 교섭을 빈번하게 하였다. 당나라와 맺은 동맹은 해양을 이용한 비밀외교로서 성사된 것이다. 또한 백제 공격은 당의 대규모 군이 황해를 건너 중부해상권을 장악한 신라의 수군과 연합하여 감행된 것이다.


삼국시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단순한 육지위주의 질서, 영토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한계가 있다. 자연 지리적으로나 정치적·경제적으로 보아 동아시아의 역사는 지중해적 성격을 토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특히 이 시대의 한일 관계는 국가와 국가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 국가와 주민간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또한 정치와 군사의 관계만이 아닌 문화와 경제 간의 관계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한반도의 각국들은 먼저 주민들의 비조직적인 대량이주를 통해 일본열도의 각 지역에 진출하였고, 후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진출하였다. 
자발적으로 진출한 주민들은 마치 페니키아나 그리스 사람들이 지중해연안을 항해하면서 신천지를 발견하고 개척하는 과정과 유사했을 것이다. 먼저 상륙한 지점을 항구를 만들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안가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리스 인들이 해양폴리스들을 건설하였듯이 소국들을 세웠다. 그 소국들은 점차 커지자 母國격인 한반도의 각국들은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이주정책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열도의 몇 지역에서는 해양조건에 따라 몇 개 지역에서 친 가야, 친 백제, 친 신라계 등의 더 큰 나라들이 만들어졌고, 결국 그 국가들은 격렬하게 통합전쟁을 벌이면서 모국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통일 사업이 점차 완료되가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서 모국과의 관계는 재정립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통일세력은 독립성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한반도 각국은 물론 중국세력 등과 국제적으로 등거리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한 반면 모국인 한반도의 각국들은 서로 싸움을 하다가 결국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을 완료하였다. 이 신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은 일본열도로 망명을 하였고, 일본의 통일세력 역시 한반도와는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형성된 모자관계를 완전히 끊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하였다.   


 <동아지중해 국제대전>

7세기는 5세기에 결정된 국제질서가 다시금 재편되어 가는 시대이다. 국제대전의 성격을 지닌 高隋戰爭, 高唐麗爭, 그리고 소위 신라가 주도한 삼국통일과정은 각 각 다른 전쟁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진 동아지중해의 국제대전이다. 또한 해양활동이 동아시아에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아지중해국제대전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을 위한 국제대전의 산물이다. 주축은 고구려와 신흥중국세력이었지만 백제 신라 말갈 거란 선비 등 동아시아 모든 종족과 국가들이 참여하였다. 다만 국가의 이익과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서 정치․군사적인 입장은 변화하고 있다. 상황의 전개에 따라서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발발이고,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과정이며, 소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전쟁은 완결로서 계기성을 갖고 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어 676년까지 신라와 당군, 더 엄밀하게 표현하면 신라를 주축으로 한 한민족연합군과 당군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 신라에 계림도독부, 그리고 고구려에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당으로서는 국제질서의 재편전략을 목표로 수립하고 자국이 주도한 국제 전쟁이었음을 반영한다.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동아시아에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기본질서가 수립되었다. 즉 통일중국인 唐, 한민족 국가인 신라 및 발해의 성립, 그리고 신흥국가인 일본의 탄생과 발전이다.
둘째, 이 국제대전의 과정에서 각국이 가진 해양활동능력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각 나라 사이의 외교적인 입장과 성과는 교통수단인 해양활동능력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군사적인 측면, 그리고 전후에 신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도 해양능력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전쟁 이후에 해양력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여 신라 및 일본은 당의 체제 속에서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  
셋째, 마지막 완결단계인 소위 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신질서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해양활동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황해가 동아지중해 전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해양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되면서 신해양질서가 구축되었다. 그 힘은 북방의 돌궐 말갈 등으로 연결되는 유목문화 중심의 대륙질서에 견제역할을 하였다. 또한 당과 통일신라 발해 일본을 해상으로 연결시키는 환황해문화가 특히 활발해졌다. 이 후에 장보고가 조직화한 범신라인들을 주축으로 한 황해․남해․동중국해와 발해인들이 장악한 동해에서는 교역 문화교류 등 비정치적이고, 비군사적인 교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명실 공히 동아지중해역은 남북국이 주도하면서 더욱 빈번한 교류의 장이 되었다.
넷째, 이 전쟁은 우리민족에게 매우 의미 있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와 발해 두 나라 사이에는 갈등이 지속되고, 해양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주도권을 일부 상실하므로써 도리어 주변국들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형국이 되면서 동아지중해국가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동아지중해에서 해양로의 확보를 발판으로 담당해오던 정치․군사적인 중핵조정역할을 상실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는 주변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뿐 만 아니라 고구려에 종속되거나 혹은 영향 받았던 주변종족들이 도리어 우리를 압박하는 존재로 변신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한륙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립하는 남북국시대가 되었으며, 동아지중해 전역은 당을 중심으로 한 신질서가 수립되었다. 왜국은 새롭게 편성된 국제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새롭게 설정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에서 新秩序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海洋文化의 역할이 심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신라>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고 남북국 시대가 전개된 이후 통일신라는 삼국의 해양문화를 토대로 삼아 매우 활발했다. 초기에는 당과의 전쟁을 위해서, 또 일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해군력 증강에 힘을 썼다. 그 후 동아지중해의 바다에서 군사적 긴장이 풀리면서 외교 문화 경제적 목적을 위한 해양활동이 활발해졌다. 
신라는 통일을 이룩한 저력과 자신감 있는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국제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전기에는 주로 당나라와 산동반도의 등주항을 통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등주(봉래시)에는 발해관 신라관이 함께 있었다. 초기에는 신라와 당나라 간에 약간의 긴장관계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공식적 비공식적인 교섭은 이루어졌고, 특히 교역은 비교적 활발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玳瑁․紫檀․沈香․孔雀尾․瑟瑟․毬𣯜․翡翠毛 등 ‘남해박래품’은 당에서 수입한 것이다. 
신라는 일본과 시기에 따라서 변화는 있었지만 교역은 활발했고, 특히 민간인들은 공식적이나 비공식적으로 바다를 건너다니면서 물건들을 사고팔았다. 752년에 일본이 국가사업으로 추진한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가 완공되고, 불상이 완성되었을 때에, 신라정부는 축하사절을 빌미로 假王子인 金泰廉 이하 700명의 대사절단을 파견하여 6월부터 平城京에서 대대적인 교역활동을 하였다. 신라와 일본 간의 군사적인 충돌상황이 발생할 것 같았으나 현실화되지 않았다. 
신라는 일본무역을 거의 독점하였기 때문에 당나라나 서역, 아라비아 등에서 일본으로 들어오는 물품들도 역시 신라를 거쳐야 했다. 신라는 아라비아․페르시아 등 이슬람교권 상인들과 교역을 했다. 몇몇 문헌에는 아랍․무슬림 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견문에 관한 기술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다. 한편 당에서는 이른바 ‘재당 신라인’들이 상업적으로, 때로는 외교사절의 역할까지 하면서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대운하주변과 남방인 절강지방에서 북경을 잇는 대운하의 주변에 정착하여 운하경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운수업, 조선업, 항해업, 소금 만드는 제염업, 숯굽는 일 등 주로 환금성이 강한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운하주변과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 해안가에 신라방 신라소 신라촌 등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상인들이나 사신들을 위해서 지은 신라관 신라원 같은 건물도 있었다. 신라인들은 서역인 등 외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는 국제도시인 양주에도 거주지를 이루고 있었다. 
재당신라인 출신인 장보고는 신라정부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을 설치하여 황해, 남해, 동해 및 동중국해의 모든 항로를 장악하면서, 상인들과 해양민들을 조직하였다. 즉 국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동아지중해 서쪽(環黃海圈)의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는 거점도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을 시키면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신라정부와 국적이 다른 신라인의 민간상인조직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본거지를 군항이며, 자유무역항으로 만든 청해진에 두어 재당신라인과 재일신라인, 본국신라인을 동시에 관리하고, 역할분담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일정한 연계성을 가지고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게끔 함으로서 동아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9세기 전기에 신라의 해적이 일본열도를 침입하였다. 869년에는 신라의 해적선 2척이 일본의 하까다를 습격하였다. 870년에는 역시 신라해적이 豊前國의 공물선에 실린 絹綿을 약탈하였다. 이어 893년과 894년에도 큐슈북부와 대마도를 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민간인들의 해양활동 또한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매우 뛰어났다. 


 <발해>

발해는 고구려의 해양능력을 이어받아 초기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건국 초기인 732년에 무왕은 張文休로 하여금 수군과 함선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등주를 공격하고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일본과는 727년을 개시로 공식적인 기록만 발해가 일본에 34회, 일본이 발해에 13회 파견하는 등 빈번하게 정치 경제적 교섭이 있었다. 특히 9세기에 이르면 한번에 100명이 넘는 사절을 파견하기도 한다. 발해와 일본은 역사와 신라를 경계해야하는 지정학적인 역학관계상 해양외교를 통해서 협조 내지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전기를 지나면서 교섭은 경제적인 목적을 띄고 이루어졌다. 민간인들의 접촉과 교역도 활발해서 민간인 1100으로 구성된 발해선단이 도착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루어진 교역의 내용과 품목을 보면 양국 간의 교역의 성격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역역조 현상이 심해서 일본정부는 발해사신선의 횟수와 숫자인원 등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발하고 능동적인 교섭은 자연환경이 험악한 동해를 건너다니는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해양능력이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발해인들은 한겨울에 북풍계열의 바람을 활용하여 동해북부를 사단하여 원양항해로써 혼슈중부의 니가타 노또반도 쓰루가 등에 도착하였다. 쓰루가에는 지금도 발해 사신들이 묵었던 객관이었던 게히신궁(氣比神宮)이 있다. 동해항로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희생도 많이 뒤따랐다. 그 외에 압록강의 하구인 박작구(현재 단동)에서 항해를 시작해서 서한만으로 빠져나가 서쪽으로 요동반도를 타고 연안 항해를 한 다음에 여순에서 묘도군도를 타고 내려가 산동반도 북부의 등주항에 도착하는 항로가 있다. 초기에는 당의 공격로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교섭로로 사용되었다.  



<고려>

고려를 세운 왕건은 백선장군이었고, 해군대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해양세력이었다. 후삼국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은 경기만 세력 남양만 세력 당진 등 세력, 금강하구 영산강 하구 및 서남해안 세력 그리고 섬진강 하구 세력 등 대부분이 해상세력들이었다. 왕건은 예성강하구와 경기만일대의 해양세력으로서 수전을 통해서 후백제에 대한 기선을 제압하였다. 후백제의 견훤도 절강 지방의 오월국과 바다를 통한 교섭을 하였다. 고려와 송은 거란족의 나라인 요를 견제하기 위하여 정치외교적인 교섭이 절실했고, 또 문화의 교류와 교역도 필요했다. 그런데 요가 북방에 있었으므로 양국은 바다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고려와 송의 해양을 통한 외교 및 교역은 고려사회 및 동아시아의 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약 160여 년 동안 고려는 송나라에 57번의, 송은 고려에 30번의 사신을 보냈다. 평균 2년에 1번 꼴로 빈번하게 사신단이 오고 갔다. 물론 고려와 송나라의 교섭은 지리적인 특성으로 보아 해양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송나라에는 고려관이 곳곳에 세워졌다. 
고려와 송나라는 엄청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보통 100명에서 300명을 태운 사신선들은 곧 공무역선이었다. 1078년에는 송이 100종이 넘는 품목과 6천 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 역시 그에 상당하는 물건을 보냈다. 소동파는 고려와 무역하는 일이 피해가 심하다고 매우 비판적이었다. 
민간상인들도 활발하게 무역을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재의 福建·廣東·浙江의 상인들이 고려에 많이 왔다. 북송 시대의 전기(1017~1090년)에만 약 100명 이상의 송 상인들이 고려에 온 기록이 있다. 두 나라 간에 상인들이 오고간 것을 통계해 보면, 1012년부터 1278년까지 266년간 송나라의 상인이 129회에 걸쳐 약 5000여명이 왔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실로 엄청나 숫자이다. 오늘날의 아랍인인 서역상인들도 많이 왔다. 후기에 들어서고, 남송이 성립되면서 고려는 중국의 강남지방과 활발한 교섭을 하였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이어지는 조운의 거의 대부분은 바다길을 활용한 것이다. 13세기 들어서면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 등에서 바다를 근거지로 항전했다. 후에 삼별초정부는 진도 제주도 등에 세운 일종의 해양왕국으로서 4년간 고려정부와 몽골을 대상으로 항쟁을 했다. 여몽연합군이 일본열도를 침공할 때 고려는 주도적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병력을 동원하였다. 1274년 1차 공격 때는 900척의 배를 4개월 반이라는 빠른 시간에 건조하였다. 후기에 들어서서 왜국의 침입을 받으면서 국가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왜구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 해양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조선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 정벌 등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또한 조선술에도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형태의 선박을 건조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해양문화는 천시되고 수군활동도 미미해졌으며 空島정책을 취하는 등 민간인들의 대외해양활동을 원천적으로 금하였다. 조선은 바다를 막고, 지중국적 질서만을 채용하여 오로지 중국과의 교섭만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주변부로 전락하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해양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초기의 일방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결국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의 승리 덕분이다. 거북선은 매우 독특한 기능을 보유한 함선으로서 조선의 해양능력을 단적으로 웅변하는 선박이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해양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 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해양의 중요성과 역할이 거론되었으며, 해양력은 동아의 역학관계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제너럴 샤먼호사건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해양의 중요성을 깨달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운양호 사건으로 불리는 강제적인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일본의 식민지화는 해양력 및 해양질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아시아는 완충지대 없이 한반도의 땅과 바다에서 양극질서가 직접 대결하는 양상을 띄웠다. 첨예한 군사대결 속에 바다는 막히고, 그 결과 교류와 교역의 지중해적 질서는 사라졌다. 20세기는 유일한 연결통로인 바다가 폐쇄되고 단절되어 동아지중해권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에필로그
 

역사학은 사실을 찾아내고, 고증하여 엄숙한 진리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 놓쳐버린, 혹은 사실마저 보듬어 안은 진실을 이해하고 느끼려는 해석학이란 측면이 있다. 물론 해석에도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흔히 오해하듯이 몰가치적인 태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대상을 전체로서 파악해야한다. 우리 역사학은 그동안 육지, 그것도 한반도라는 라는 한정된 시각과 통념에 사로잡혀 해양이라는 중요한, 의미있는 장르를 소홀히 하였다. 육지위주의 질서로 볼 때 우리는 지리적으로도 주변부에 속해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해양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세 지역 간에 이루어진 사람들의 이동과 물자의 교류, 온갖 갈등과 환희들은 해양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적어도 고대사에 관한 한, 특히 고구려역사에 관한한 역사의 영역은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해양을 포함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이해 또한 모든 것을 동시에 포괄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 연관계열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특히 국제관계의 경우에는 정치 외교 군사는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필자는 이러한 목적에서 ‘海陸史觀’이라는 용어를 차용해서 논리를 전개 시키고 있다. 또한 역사학은 미래학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전환기에서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한 집단의 미래가 결정지어지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역사학의 역할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활동무대의 확대와 인식의 확장, 주변학문의 발달로 인하여 역사학의 내용과 의미는 물론이고, 연구방법에도 변화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역사는 구체적인 해양교통로와 해양의 메커니즘이 역사상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때로는 동아시아의 전면적인 질서재편과정에서 해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양력은 한 나라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잘 활용하면 주변으로 진출할 수가 있고, 교역 등 경제력을 향상시킴은 물론 주변 각국들 간의 역학관계를 조정할 수가 있다. 




 참고문헌 
 윤명철 지음 

한국해양사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고구려 해양사연구
광개토태왕과 한 고려의 꿈
장수왕 장보고, 그들에게 길을 묻다.
윤명철 해양논문 선집 8권 (학연)
해양사연구방법론 (학연)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외 



  한민족이 생성하고 발전한 역사의 무대는 한반도만이 아니다. 한반도와 만주일대 그리고 해양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공간을 동아지중해라고 모델화시킨 후에 역사를 해석해오고 있다. 따라서 반도사관이나 내륙사관이 아니라 해양과 육지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해륙사관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발전한 국가들은 고구려를 비롯하여 자연환경을 활용할 목적으로 해륙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를 항구도시로 선정하고 만드는 작업니다. 또 하나가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일본열도를 비롯한 외부지역으로 진출하고, 해양을 매개로 무역과 문화교류 등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해양의 중요성은 21세기 에 들어서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미 해양은 영토개념으로 확대되었고, 자원의 산지, 물류의 교통망으로서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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