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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 이주한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12-31 조회수 :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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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2013년 12월 10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주한

1. 왜 한국사는 죽어있을까?
인간은 기억으로 산다. 기억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언어를 꼽는다. 언어력을 상실한 이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잃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정체성은 마음대로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곧 기억이다. 일제가 한국을 영구히 식민으로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치밀하게 왜곡한 이유다. 사람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지 과거에 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1945년,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로 승계되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친일파 손에 청산되면서 한국사 원형과 진실은 철저하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됐고, 조선사편수회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과학적 역사학은 ‘신념이 앞선 관념론’, ‘국수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사는 죽었다. 

2. 고조선이 없으면 한국이 없고 우리가 없다
2-1. 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적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 신화가 전하는 내용과 역사적 배경은 엄격히 분리해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앙일보》, 2012년 9월 18일

2-2.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고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측에서는 느닷없이 고조선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고조선과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유와 내용을 찾아볼까요?

고조선은 우리 민족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국가로서, 그 건국에 관한 내용은 고려 시대의 삼국유사, 제왕운기와 조선 시대의 동국통감 등에 나타난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경에 건국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조선은 요령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영역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범위를 통하여 요하 유역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 평화교육 자료집 경기도 교육청 2012, 

2-3. 기원전 7세기 전후한 시기의 고조선을 초기 고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조선은 일정한 정치체나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역집단이나 종족집단에 불과한 상태였다.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2-4. 이 책에서는 단군조선 문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단군조선은 고조선이 국가체제를 갖추었을 때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건국신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를 통해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대 신화의 요소를 빌려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단군조선은 단지 신화일 뿐, 역사적 사실로서 그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2-5. 단군 신화는 말 그대로 단군과 관계된 단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화이다. 그리고 신화와 역사는 별개의 것이다.
-송호정,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2004, 121쪽

송호정 교수는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일보》, 2003년 2월 12일

신화의 뿌리는 역사이고, 역사의 원형은 신화다. 신화는 민족 고유의 세계관과 가치관, 우주관과 인생관, 삶의 원형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역사의 보고寶庫다. 
신화와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논리는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했다. 유럽 학자들은 인종적으로 열등한 이집트나 오리엔트 인들이 그리스 땅에 도래해 정복왕조를 세우고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일으켰다는 그리스 신화의 기록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실증주의를 내세워 그리스 신화를 허구로 몰았다. 

2-6. 평생 신화를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역사학자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신화가 갖던 가치를 거의 그대로 갖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입니다”라는 말에서 보듯 그가 생각하는 신화는 역사의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2-7.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
-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003

2-8. 그러나 고조선사가 한국 고대사의 한 시기이고 첫 국가인 만큼 이제는 고조선사의 실상이 무엇이고 한국 고대사 전체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고고학자료와 문헌자료를 종합한, 진지하고 치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특히 고조선사 연구의 최종적인 판단은 문헌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이때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후대의 믿을 만한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송호정 교수 논문의 마지막 결론부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2008. 

2-9.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명목으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일대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반가(班家:양반가), 세가(勢家:세도가)를 뒤졌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에 관한 기록을 포함한 조선 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 등이었고.....자신들의 한국지배에 필요한 일부 서적만을 남기고 모두 분서焚書하였다.
다음 해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1차 전국 서적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문정창은 광복 후 발간된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 조선강점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서희건,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권, 고려원, 1986,).

2-10. 식민사관의 대전제, 핵심 명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역사는 짧았고, 영역은 좁았다.
2. 한국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3. 한국민족은 주체성이 없어 타민족의 영향과 지배를 받아야 발전했다.
4. 한국은 천여 년간 사회적·경제적으로 정체된 사회였다.
5. 한국민족은 열등하고, 사대성과 당파성이 심하다.
6. 일본의 한국지배는 필연이고 당연하다. 
7. 한국은 일본 통치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대전제요, 핵심명제다. 물론 한국주류역사학계는 절대 이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현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런 전제를 바탕에 깔아두고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르다. 

2-11. 이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국 주류 역사학계 ‘부동의 정설’이 수립된다.

1.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2. 위만이 고조선을 통치하면서 고조선은 비로소 국가로 성장했다.
3.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
4. 중국과 일본의 지배로 한국은 발전했다.
5.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모든 이론과 견해가 이런 대전제에 입각해 있다. 절대 그들은 이 견해를 벗어나는 경우가 없다. 이 이론과 견해에 맞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한국의 역사를 구성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이미 정해진 프레임에 맞추느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사실史實을 부정하고, 중국과 일본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말한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비학문적 수단까지 동원해 정설을 사수해왔다. 정설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설의 논리를 역사학적 방법으로 검토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1차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3. 한사군은 한국사 원형을 가르는 척도
3-1. 한사군 문제는 한국사 원형을 가르는 척도다. 한사군의 위치와 성격에 따라 한국사의 기본 틀이 완전히 바뀐다. “한국사는 주체성이 없어 주변 민족의 지배와 간섭,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왔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타율성에서 벗어나 발전했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이다. 

3-2. 단군조선은 역사가 아닌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고, 고조선은 원시적인 부락이었다가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온 위만에 의해 겨우 국가로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곧 망해 중국 한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설치한 한사군 식민 통치를 통해 한국사는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정교하게 이론화한 한국사의 출발이다.

3-3.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를,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니 일제 식민지배는 한국사의 숙명이라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다. 한사군=한반도설을 앞세운 타율성론은 한국사는 만주의 부속역사라는 만선사관을 창조하고 그에 입각해 사대주의론·반도적성격론을 만들어냈다. 한국 주류 식민사학계는 고조선은 멸망 당시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고 전제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어서 국가로 성장했다가 바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3-4. “중국이 기원전 16세기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고조선은 원시적인 부락집단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사군, 특히 한반도 평양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400년 이상 존속하면서 한국에 선진 문물을 전해준 결과 한국사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3-5. 이와 관련해서 2011년 2월 27일 SBS 스페셜에서는 3·1절 특집으로 〈역사전쟁-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사군의 위치가 한국사 최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확정한 세키노 타다시 조사단의 유물을 한 번도 재검증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직접 유물검증에 나선 것이다.

3-6.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위치를 중국 고대 사서들은 일관해서 ‘요동’으로 기록했다.
《한서》〈설선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후한서》〈최인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광무제본기〉,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사기》〈하본기〉주석,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   리)장성의 기점이다.

3-7. 주류역사학계는 한국의 발전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진·한 교체기에 위만이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온 후, 기원전 194년 왕검성을 공격해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36쪽, 2003

3-8. 중국의 마대정馬大正은 ‘중국의 동북변강 연구’에서 “우리들이 종사하는 학술 연구는 순수한 학술 연구가 아니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학술 연구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연구지 학술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정자, 《고대 중국 정사의 고구려 인식》, 서경문화사, 2008, 15쪽

4.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4-1. 오히려 한국 고대사학자들을 한국인의 가면을 쓴 일본인이라고 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나는 이미 1985년에 이병도(서울대), 이기백 (서강대), 이기동(동국대) 등의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일본인 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 일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이병도, 이기백 씨는 화답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고, 이기동 씨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아직 가타부타 회답을 주지 않고 있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4-2.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등을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학자 ,즉 문헌고증자라고 칭찬하였는데 그 증거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다므기, 2011

최재석은 다음과 같은 한탄을 덧붙였다.

4-3. 솔직히 말하여 나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불가사의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병도 선생부터 시작하여 이기백, 김철준 교수를 거쳐 이기동 교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이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고 법석을 떨어도 다른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킨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학자들이 침묵만 지키는 것은 권위주의 위계질서가 엄존하여 스승이나 선배의 글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 이외의 다른 고대사학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 나에게는 늘 불가사의로 보인다.

4-4. 그리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고대사학자 노태돈 교수에게도 한 마디 하겠다. 고대사학자라면 여기에 대하여 한 마디 정도의 논평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것은 강도에게 훈장을 주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4-5.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면 임나일본부를 사실로 만들 수 없고 황국 일본이 고대부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기에 쓰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신라는 4세기 후반 나물이사금 때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초기 고대국가를 이룩할 단서를 잡았으나 고구려의 간섭 속에 이루지 못하고, 5세기 전반 눌지마립간 때에 와서 단위 정치체인 6부를 왕권에 종속적으로 연합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다.     
-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5. 역사를 바꾸면 역사가 된다
5-1. 1941년 6월, 당시 일본의 법무대신 야나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문제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은 겉으로는 복종하고 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저항하고 있다. ……나는 히틀러 총통의 유태인에 대한 정책과 마찬가지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은 깡그리 어느 외딴 섬에 격리시켜 한 놈 빠짐없이 거세해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제 말기까지 한국민중의 저항의식은 일제를 두렵게 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fact를 전하는 귀중한 1차 사료다.

그 나라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모든 촌락에서는 밤만 되면 남녀들이 한곳에 모여 서로 노래를 즐겼다. 성격이 깨끗하고 밝으며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먹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권 30. 위서 동이전 고구려.

삼국지 한韓조도 우리 민족의 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춘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다 같이 모여서 일하고 모두가 함께 신명나게 놀았다. 일제를 겪으며 식민사관이 파괴한 제일 큰 폐해는 바로 우리 민족의 공동체 정신이다. 한국민족은 공동체 가치를 우선했고, 거기서 역동성이 나왔다. 그 역동성은 민족 저변에 살아 꿈틀거리며 한국사의 주요 전환점을 일궈냈다. 

5-2. 식민사관 논란은 단순히 역사학계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관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교육·젠더·법·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 모든 문제가 식민사관에서 비롯하지는 않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없다. 식민사관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세계관이 식민사관을 재생산한다.

5-3. 거창고등학교 전성은 교장은 그의 저서 《왜 학교는 불행한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식민지 국가에서 하던 정책을 그대로 따라하는 비인간적인 제도이다.”

일제는 한국을 침략한 이래 한국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했고, 한국의 교육 전반을 장악했다. 일제 식민사관과 교육시스템은 식민 지배를 영구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요 무기였다. 일제는 경성제대를 설립해 조선의 상류층 일부를 조선총독부 하급관리로 편입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총독부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며 일제에 충성했다. 일제는 황국사관에 입각해서 주어진 지배가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일부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바로 경성제대 출신들이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과 역사, 사상과 문화를 저급하게 여기고 민족을 부정하거나 열등감을 조장하는 교육을 시켰다.

5-4. 자연과 인간, 사물에 대한 주체적인 회의와 사유를 거세했다. 이것이 따지지 말고 외우는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진 연원이다. “요컨대, 조선 교육은 이치를 캐는 자를 되도록 적게 해야 한다.” 이것이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이었다. 한마디로 천황에 대한 노예의식을 가슴깊이 새기는 교육이었다. 

5-5. 한국의 교육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능가하는 학벌서열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력한 신분 질서체제 장치다. 중세 유럽의 주홍글씨처럼 소위 남보다 못한 학벌은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낙인이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서 온 힘을 다해 구명정에 올라타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처럼, 난파한 한국사회에서 ‘학벌서열’은 생존을 걸고 붙들어야 할 구조선이다. 하지만 그 구조선도 이미 침몰 중이어서 항구로 가지 못할 운명이다. 이런 시스템을 숙주삼아 식민사학이 정설로 행세해왔다. 식민사관의 문제는 교육 자체에 있다.

5-5.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이요, 역사관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꿈은 희망이 되고 사실이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역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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