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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79년 전 개천절 날에 빚어진 광주학생운동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08-11-27 조회수 : 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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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전 개천절 날에 빚어진 광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9년 당시는 3·1만세사건이후 표면적으로는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유화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일본은 5000명의 헌병을 추가 배치하는 등 여전히 무단정치를 계속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극심한 경제공황에서 식량부족 타개책을 조선에서 찾고자 조선을 식량기지 화하여 쌀 증산계획과 함께 대대적으로 쌀을 공출해 갔다. 
따라서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화전민과 유랑민이 증가하는 조선인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은 10월 30일 오후 나주역(羅州驛)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 일본학생인 후쿠다스에요시, 다나카 등이 한국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등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등 남학생들이 일본학생에게 따지며 편싸움이 벌어졌다. 
이러한 패싸움과 대치상태는 11월 3일 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로 우리나라 개천절(開天節)이었다. 
한편 이날은 일본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기도 했다. 
이 날이 일본인에겐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축가를 부르며 즐기는 날이겠지만 조선인 학생들은 우리의 개천절을 기념하지 못하고 일본명절을 축하해야 하는 현실에서 비애를 느끼며 기미가요 제창 때 침묵으로 일관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런 기념식을 마친 후 조선학생과 일본학생들 간에 충돌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광주중학교 일본인학생이 광주보고 최쌍현(崔雙鉉)조선학생에게 시비를 걸고 단도로 얼굴을 찌르는 등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이 날의 충돌로 쌍방 간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편 일본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어 신문인 광주일보본사를 광주고보 학생 일부가 습격하여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는 사건도 발생했다.

 사태가 더 커질 것을 염려한 학교와 경찰에서는 달래고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써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조선학생들은 긴급회의에서 투쟁 대상이 일본학생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여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렸다. 
이 회의에서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과 대치중인 광주고보생을 집합시켜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을 결의했다.

 일제는 양면정책이 실패하자 탄압정책의 강도를 높여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을 구속해 송치했다. 
심지어는 최쌍현 등 병원에 입원한 중상자들까지도 체포하고 일본 학생은 불과 7명을 연행하였으나 곧바로 훈방시켰다. 
또한 조선인 부상자에 대한 병원의 차별과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등 일제가 사태를 처리하는 편파성은 극에 달했다.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간의 감정적 충돌이 학교와 학교 간의 충돌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전 호남일대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확대되었다. 광주의 신간회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11월 7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지역별 학생행동지도를 정하고 노동자와 노동단체 지도, 학교 교사와의 연락, 외래동지(外來同志)와의 연락, 운동자금 조달 등 업무를 분담하여 광주학생투쟁을 항일독립운동의 전위대(前衛隊)로 삼고 전국에서 확대되도록 힘썼다. 

 학생들의 불같은 투지와 학생투쟁 지도본부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광주학생운동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비약할 준비를 갖추고 11월 12일 2차 시위를 격렬하게 펼쳤다. 
서슬 퍼런 일제하에도 불구하고 광주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광주시내의 모든 한국인 중등학교가 무기한 휴교되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 500여 명 중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광주고보는 시위참가 학생 300명을 무더기로 무기정학에 처했고 광주여고보도 70여명의 학생을 무기정학에, 광주사범은 38명의 학생을 퇴학시켰다.

 그 날 학생들이 뿌린 격문에는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를 비롯해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한다,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직원회에 학생대표를 참가시키자,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적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전국 학생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였다.

 학생시위는 12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주요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1930년 1월 중순부터는 도시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었다.
그리고 중등학교학생뿐만 아니라 보통학교학생까지 참여했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백지동맹·동맹휴학·격문살포·교내시위·가두시위 등으로 다양해 졌다.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학교 측은 1월 8일 개교하여 진급시험을 치렀으나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 3학년 전체가 백지동맹으로 시험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광주고보생 17명, 광주여고보 학생 15명이 퇴학되고 30일 다시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며 3차 시위를 주도하던 광주고보생 48명도 무더기로 퇴학당했다.

 민족차별교육, 식민지노예교육에 반대한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다.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항한 항일운동이며 광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1930년 중반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학생운동은 비밀결사의 조직형태로 바뀌어 갔으며 이러한 투쟁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된 민족의 자주독립투쟁이었다.

  한편 1927년 2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안재홍(安在鴻)·이상재(李商在)·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유억겸(兪億兼)·권동진(權東鎭)등 34명이 창립한 신민회는 1930년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으로 회원이 늘어 일본에까지 조직되었고 그들은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학생운동탄압을 엄중 항의하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하는 민중대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등 주요 인사 44명을 체포한 일제는 조병옥 등 6명에게 실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렸다.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 만에 신간회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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