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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 신동아 2013.2월641호 (p404~411)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3-29 조회수 : 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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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부도 교과서의 고구려 지도. 우리 교과서는 장수태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요사’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역사 탐구] - 신동아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요령성 요양은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후 요양이 수도 
●패수도 요양 근처, 발해 중경도 요양에 위치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났고 관련 유적과 자료가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이런 답답함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학자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를 완역했다. ‘요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가 부분 번역했지만 완역되기는 처음이다.
번역 기획은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교수(고고학)가 했다. 복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와 ‘금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 ‘금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스승인 윤내현 단국대 교수와 ‘요사’ 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교수와 협의한 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때라 교육부도 우리 국사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요사’ ‘금사’ 인정 안 하는 중국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非)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학자들은 이에 착안해 동북공정에 맞설 객관적 사료 확보를 위해 1월 중순 ‘요사’ 번역본을 내놓았다. ‘금사’는 내년 말 완역본을 낼 예정이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한4군은 만주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지리지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줘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고 밝혀놓았으니 조선은 곧 기자조선이다. 8조법금은 기자가 만들었는데, 지리지도 ‘그(기자)가 8조법금을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요양에 도읍했음을 재확인했다. 
지리지는 기자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황제가 된 유방(한고조)은 고향 친구이자 부하 무장으로 공을 세운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유방은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그들이 한나라 왕실을 넘보지 않을까 의심했다.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항우 군을 궤멸시킨 1등 공신 한신을 특히 의심해, 몇 가지 혐의를 씌워 그의 허리를 잘라 죽였다(요참형·腰斬刑). 그때 한신이 원한에 사무쳐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한신이 죽임을 당하자 책사 장량은 재빨리 낙향했다. 장량이 은둔한 곳이 오늘날 유명 관광지가 된 장가계(張家界)다. 유방이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해가자 연왕인 노관도 불안을 느껴 흉노의 땅으로 도망갔다. 노관 밑에서 장수를 하던 이가 위만인데, 상사가 달아나자 그도 위기를 느껴 요양으로 도주했다. 지리지는 ‘그때 요양 일대는 빈 땅이었는데 위만이 들어와 왕을 했다’고 밝혀놓았다. 위만조선이 일어난 것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이 때문에 유방의 손자로 7대 황제가 된 유철(한무제)이 해륙(海陸)으로 맹공격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세웠다. 지리지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郡)으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그렇다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웠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의 ‘요(遼)’는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城)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隨)와 당(唐)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양이 고구려 수도 평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이 전진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년).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년) 1월 고국양왕은 후연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魏·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元)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 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 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했음을 보여준다.
407년 ‘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북한도 ‘평양 수도說’ 합세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호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半)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 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 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지도2>는 사회과부도에 표시된 발해의 5경. ‘요사’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대(大)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촉-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지도2>는 우리 교과서의 발해 강역과 5경의 위치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여 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 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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