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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2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1-05-04 조회수 : 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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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6 일본 해군은 왜 이때 ‘독도(우산도)’를 ‘松島’라고 표시하지 않고 ‘리앙쿠르드岩’이라고 표시했는가? 왜 일본은 처음에는 ‘울릉도’를 ‘竹島’라고 부르다가, 독도를 ‘리앙쿠르드岩’이라고 표시할 때부터는 ‘울릉도’를 ‘松島’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竹島’라는 일본 호칭은 사라진 것인가?

A일본에서는 1878∼1880년에 ‘울릉도’와 ‘독도’호칭에 대혼란과 변동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1876년에 무등(武藤平學)이란 사람이 동해 가운데 조선의 ‘울릉도’가 아니면서 자연자원이 풍부한 새 섬을 발견했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외무성에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 즉 송도 개척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조선의 울릉도를 ‘죽도(竹島)’,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송도(松島)’로 부르면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송도(독도)’는 조선의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조건이 풍부하고 사람이 수천 명이나 살 수 있는 새 섬을 발견했다며 ‘송도(松島) 개척’을 청원해오자 해군성에 그 실측조사를 의뢰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조·일수호조규’(1876년)에서 얻은 이권인 조선해안측량권에 의거하여 천성환(天城丸)이라는 군함을 파견해서 1878년 4월과 1880년 9월 ‘송도’의 실체를 두 차례나 실측 조사하였다. 그러나 새로 발견했다는 그 ‘송도’는 다름아닌 조선의 ‘울릉도’였다. 일본 해군은 ‘송도 개척’이란 명목으로 막대한 예산을 사용했고, 또 일본 해군 함정을 처음으로 ‘송도’ 실측 조사에 투입한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武藤)의 ‘송도개척지의’를 각하한 후에도, 조선의 ‘울릉도’를 새로이 ‘송도(松島)’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일본인들과 일본 해군은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松島’가 조선의 ‘울릉도’에 붙여지니, 조선의 ‘우산도(독도)’에는 새 이름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 해군은 조선의 ‘독도(우산도)’에 프랑스 포경선이 붙인 이름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독도(우산도)를 ‘리앙쿠르드岩’이라고 부르고 ‘조선수로지’에도 그렇게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해군성 수로국에 크게 의존하는 일본 어민들도 차츰 해군성의 호칭을 따르게 되어 1880년대부터는 일본에서는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리앙쿠르드岩’으로, ‘울릉도’를 ‘송도(松島)’로 호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어부들은 ‘리앙쿠르드島’가 길고 어려우므로 이를 ‘리앙꼬島’라고 약칭하였다. 종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붙인 ‘竹島’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조선의 ‘우산도(독도)’에 ‘竹島’라는 일본 호칭을 붙인 것이다.

Q 47 일본이 군함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실측 조사하고 ‘죽도’니, ‘송도’니 ‘리앙쿠르드岩’이니 하는 이름을 멋대로 붙이며 해안과 영토를 넘보고 있을 때 조선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A조선 정부도 서서히 각성하고 있었다. 울릉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울릉도에 국민 이주를 허가하여 울릉도 및 독도를 재개척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일본에서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한론’과 대외 팽창이 적극 고취되자, 도쿠가와 막부 시대 말까지 국경을 넘어 울릉도·독도에 건너가지 못하던 일본인 가운데 이제는 국경을 넘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서 목재를 베어가고 고기잡이를 하는 무리가 점차 늘어났다. 이 사실을 1881년 울릉도를 순시(巡視)·수토(搜討)하러 다녀온 조선 수토관들이 적발하여 강원도관찰사를 통해서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조선왕조가 개항한 후에 설치된 새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은 이 문제에 대해 ①일본정부에 항의문서를 보내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침입에 대한 금지령의 실시를 요구하고 ②울릉도 방위와 수호를 위해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에 임명해서 자세한 현지조사를 실시한 후 그 보고를 검토해서 울릉도 ‘공도정책’의 폐기 여부와 ‘재개척’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여 이 대책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국왕도 통리기무아문의 건의를 윤허하여, 이규원을 1881년 5월23일 ‘울릉도 검찰사’에 임명하였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발령 후 출발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면 벌목철이 지나서 일본인들이 철수해버린 다음이 되므로, 출발 예정일을 다음해로 넘겼다. 그 결과 이규원이 울릉도 현지조사를 위하여 정작 서울을 출발한 것은 1882년 음력 4월10일이었다. 이규원은 출발에 앞서 4월7일 국왕을 알현하여 하직 인사를 올렸는데, 이 자리에서 국왕은 울릉도 동쪽 30리 정도에 ‘우산도(독도)’가 있고, 또 ‘송죽도(松竹島)’라는 섬도 있어서 섬이 세 개라는 설도 있으니 이것도 조사해 오도록 하고, 울릉도 현지조사 때에는 사람을 이주시켜 읍(邑)을 설치할 만한 후보지를 조사해 오라고 명령하여, 울릉도 ‘재개척’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Q 48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에 들어가 현지조사를 실행한 결과는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실제로 울릉도에 몰래 침입하여 벌목하고 있었는가?

A일본인들과 본국인(조선인) 상당수가 몰래 들어와 목재를 벌채하기도 하고, 배를 만들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고 있었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배 세척에 102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현지조사단을 편성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1882년 음력 4월29일 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강원도 평해(平海) 구산포(邱山浦)에서 출발하여 4월30일 울릉도 서면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에 도착하였다. 5월1일부터 만 6일간 도보로 울릉도 안을 현지답사하면서 조사했으며, 다음에는 또 2일간 배편으로 울릉도 해안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이 과정에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바위섬 죽서도(竹嶼島: 혹은 竹島라고 통칭)를 찾아내 관찰했으나, 울릉도로부터 49해리나 떨어진 우산도(于山島: 독도)는 울릉도 체류자들로부터 있다는 얘기만 듣고 현지조사는 풍랑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출발 당시부터 풍랑에 겁을 먹었고, 울릉도에 도착한 후에는 새벽마다 풍랑을 재워달라고 산신제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규원 일행은 고대 우산국의 터전이 울릉도(鬱陵島)·죽서도(竹嶼島)·우산도(于山島: 독도) 세 섬으로 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인식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돌아왔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 현지조사에서 검찰한 내용 가운데, 울릉도·독도 재개척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그의 일기와 보고서에서 간추리면 다음 사실이 특히 눈길을 끈다.
(1) 울릉도에 들어가 있는 본국인(조선인)은 모두 140명인데, 출신도별로 보면 전라도가 115명(전체의 82%), 강원도(평해)가 14명(10%), 경상도가 10명(7%), 경기도(파주)가 1명이었다. 전라도 출신들은 남해안 섬이나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한 배에 13∼24명씩 태우고 들어와서 집단별로 막사를 치고 체류하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있었다.
(2) 본국인(조선인)이 하고 있던 작업을 보면, 나무를 베어 배(선박)를 만드는 사람이 129명(전체의 92.2%), 인삼 등 약초를 캐는 사람이 9명(6.4%), 대나무를 베는 사람이 2명(1.4%) 등이었다. 전라도(115명)와 강원도(14명)에서 온 사람들은 13∼24명이 한 집단을 이루어 막사를 치고 살면서 재목을 베어 배(선박)를 만들고 때때로 미역 뜯기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선박)가 다 만들어지면 이 새 배에 미역과 물고기를 싣고 돌아갔다. 경상도 경주에서 온 7명과 함양에서 온 1명(全錫奎: 士族), 경기도 파주에서 온 1명은 산삼과 약초를 캤고, 경상도 연일에서 온 나머지 2명은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3)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모두 78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재목을 베어 실어가려고 들어왔으며, 해안에 나무를 다듬어 판재(板材)를 만드는 곳이 18개소 있었다. 일본인들과 필담을 해보니, 그 응답의 요지는 ①일본의 동해도(東海島)·남해도(南海島)·산양도(山陽島) 사람 78명이 올해 4월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막사를 치고 벌목을 하고 있으며 ②올해 8월에 일본에서 선박이 오면 목재와 판재를 싣고 돌아갈 예정이고 ③조선정부가 울릉도 재목의 벌채를 금지하고 있음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④울릉도가 ‘일본제국지도(日本帝國地圖)’에 ‘松島(송도)’라고 표시되어 일본 영토로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일본인도 있으며 ⑤2년 전에도 울릉도에 들어와 재목을 벌채해 실어 갔고 ⑥울릉도 남포(南浦)에는 울릉도를 ‘일본국 송도(松島)’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4) 검찰사 일행이 울릉도의 장작지포(長斫之浦)에 도달해 보니 해변의 돌길 위에 길이 6척, 너비 1척의 표목(標木)이 세워져 있었다. 그 표목 앞면에는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大日本帝國 松島 槻谷)’이라고 씌어 있고, 좌변에는 ‘메이지 2년 2월23일 기암충조 건립(明治二年二月二十三日 崎岩忠照 建立)’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본인이 1869년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일본국의 ‘松島(송도)’라는 표목을 세우고 간 것이었다.
(5) 울릉도를 재개척하여 읍(邑)을 세우는 경우에 주거지로는 나리동(羅里洞)이 길이가 10여 리요 둘레가 40여 리로 몇 천 호를 거주시킬 수 있고, 이 밖에도 100∼200호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이 6∼7처가 있음을 조사하였다. 또한 포구(浦口)는 14개처가 있으며, 물산은 비교적 풍부한데 대표적 물산으로 43종을 들어 보고하였다.
조선의 중앙정부는 이 현지 조사보고에 따라 1882년 5월 울릉도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Q 49 그러면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이때 어떻게 대응했는가? 울릉도 ‘공도정책’과 ‘수토정책’을 폐기하고 ‘재개척 정책’을 채택하여 시행했는가?

A조선조정은 먼저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항의문서를 보내고, 이어 종래의 울릉도 ‘공도정책’을 폐기함과 동시에 울릉도 ‘재개척 정책’을 채택하였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1882년 음력 6월5일 국왕에게 복명서를 바치고 알현하는 자리에서, 일본인이 울릉도에 ‘일본국 松島(송도)’ 운운한 나무 푯말을 세운 일에 대해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일본 외무성에 항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건의하였다. 국왕은 이를 채택하여 정부로 하여금 즉각 일본공사와 일본 외무성에 항의문서를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모든 정책이 일시 정지되었다. ‘임오군란’이 일단 수습되자,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은 울릉도 ‘재개척’이 시급하다면서 1882년 음력 8월20일 울릉도 재개척 방법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그 요지는 ①울릉도는 바다 가운데 외로이 떨어져 있어도 토지가 비옥하니 우선 자원하는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경지를 개간케 하고 ②개간한 농경지에 대해서는 5년간 면세하는 특혜를 주면 점차 백성들이 모여들어 취락을 이룰 것이며 ③영남과 호남의 조운선(漕運船: 세곡을 실어 나르는 배)은 울릉도에 들어가 재목을 베어 만들도록 공적으로 허락하고 ④울릉도 관리인으로 검찰사 이규원에게 천거받아서 근실한 사람으로 도장(島長)을 임명하여 이주민들의 규율과 질서를 만들어 세우도록 하며 ⑤먼저 설읍(設邑: 읍을 세우는 일)한 다음에는 뒷날 설진(設鎭: 군사주둔지를 세우는 일)할 뜻을 미리 강론하여 강원도관찰사에게 분부해서 이주민을 보호하도록 준비시킨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즉각 이 건의를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음력 8월20일 울릉도 ‘공도정책’은 폐기되고 역사적인 울릉도 ‘재개척 정책’이 채택되었다. 조선조정은 이규원의 천거를 받아 함양에서 산삼과 약재를 구하러 일찍이 울릉도에 출입한 전석규(全錫奎)를 도장(島長)에 임명하고,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준비케 했다.

Q 50 언제 어떻게 울릉도 ‘재개척 사업’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는가?

A울릉도 ‘재개척 정책’이 채택된 음력 8월20일은 이미 가을이어서 재개척 사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 음력 3월부터 본격적으로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왕은 우선 1883년(고종 20년) 음력 3월16일 통리기무아문 참의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에 임명하고, 임지로 떠날 때 일일이 웃어른들에게 인사하는 절차를 면제하니, 편리한 대로 왕래하면서 왕에게 직접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옥균을 ‘울릉도개척사’에 임명하지 않고 ‘동남제도개척사’에 임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국왕이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할 때와 보고받을 때 울릉도(옛 우산국)가 ①울릉도 ②죽서도(죽도: 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바위섬) ③우산도(독도)의 3도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옥균의 직책은 ‘울릉도’ 재개척과 함께 ‘죽서도’와 ‘독도(우산도)’ 재개척도 과업이 되어 동남 여러 섬(울릉도·죽서도·독도=우산도)의 재개척 사신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즉 김옥균의 직책은 ①울릉도를 재개척할 뿐 아니라 ②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바위섬 죽서도(죽도)와 ③우산도(독도)도 재개척하며 ④울릉도·독도 일대의 ‘고래잡이’도 관장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 동해는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다. 김옥균의 ‘동남제도개척사’ 직책에 ‘독도=우산도’ 재개척과 관리가 이미 1883년 3월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옥균이 모집한 최초의 이주민 자원자는 모두 16호 54명이었다. 이에 1883년 음력 4월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이 수백년간 비워두었던 울릉도에 도착하여 마을을 만들면서 농경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Q 51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 김옥균은 울릉도·독도 재개척에 성공했는가?

A김옥균 등 개화당은 ‘근대국가’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울릉도·죽서도·독도에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것을 염려하여 재개척 사업에 열정적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정부 주도하에 강원도·경상도·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주민 지원자를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적극 후원했다. 그 결과 이주민 수가 1883∼84년에는 급속히 증가했다.
(2) 정부와 개척사가 일본측에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침입에 강경하게 항의하여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을 모두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 내무성은 1883년 9월 관리와 순경 등 31명을 태운 월후환(越後丸)이란 배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그 동안 울릉도에 불법 침입해서 거주하던 일본인 254명을 모두 태워 철수시켰다. 그 결과 울릉도에는 일본인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개척사 김옥균의 울릉도·독도 재개척사업의 큰 성과였다.
(3) 개척사 김옥균은 정부의 허락도 없이 미곡을 받고 일본 선적 천수환(天壽丸) 선장에게 울릉도 삼림 벌채 허가장을 발급한 울릉도 도장(島長) 김석규(金錫奎)를 파면하고 처벌했다. 김옥균은 울릉도 삼림을 국가가 외화를 벌 수 있는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했다.
(4) 개척사 김옥균은 조선정부가 울릉도 삼림을 벌채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개화당 백춘배(白春培)를 1884년 8월 일본에 파견해 일본 배 만리환(萬里丸) 선장과 판매계약을 체약했다. 김옥균은 울릉도 삼림 벌채와 임업·어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울릉도 삼림을 담보로 차관 도입을 교섭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 등이 일본에 망명하자 개화당의 울릉도·독도 재개척 사업은 장벽에 부딪혔다.

Q 52 갑신정변 후에 울릉도·독도 재개척 사업은 어떤 장벽에 부딪혔는가? 

A중단되지는 않았으나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민비 정부는 울릉도에 전임(專任) 도장(島長)을 두지 않고, 개항 이전 수토(搜討)제도 때와 같이 평해(平海)군의 월송포(越松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울릉도를 겸임으로 관리하게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정부의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그 열의가 식었지만, 일반 백성 사이에는 남해안 다도해 지방에서 울릉도로 이주하는 백성이 꾸준히 증가했다.
1894년에 온건 개화파가 집권하자 1894년 12월 울릉도 수토(搜討)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전임 도장을 두었다가, 1895년 8월에는 도장(島長)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어 판임관(判任官) 직급으로 격상하고, 초대도감에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했다. 이로서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독립신문’에 1897년 3월 현재 울릉도 재개척 사업 통계가 실려 있는데, 조성한 마을이 12개 동리, 호수가 397호, 인구가 1134명(남자 662명, 여자 472명), 개간한 농경지가 모두 4775두락이었다.

Q 53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철수한 뒤 다시 들어오려는 기도는 없었는가? 

A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95년 후반기부터 일본인들이 다시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여 목재를 공공연히 도벌하여 일본으로 싣고 가는 일이 급증했다.

Q 54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측에서 탐냈다면 경제적 가치가 컸기 때문일 텐데, 조선정부는 왜 이를 벌채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는가?

A청·일전쟁 후 일본은 1895년 양력 10월8일 경복궁을 야습하여 민비(명성황후) 시해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국왕 고종은 일본의 독수(毒手)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11일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들어가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신정부를 조직하고 정사(政事)를 보자, 러시아측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신정부는 친러 수구파 정부로 조직되고, 국왕 고종도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의 이권 침탈요구를 받았다. 이때 러시아는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1896년 9월 “두만강·압록강 유역 대안 산림과 울릉도 삼림의 벌채권”을 러시아 회사(대표 J. I. Briner)에 ‘이권(利權)’으로 25년간 양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울릉도·독도는 조선(대한제국)의 영토지만, 울릉도의 재목은 1896년부터 25년간 제정 러시아가 ‘벌채권’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1896년 9월 이후에는 조선정부는 울릉도의 나무를 벌채하여 외국에 수출할 수 없게 됐다.

Q 55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에게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을 넘겨주었는데, 일본인이 침입해서 울릉도 삼림을 불법 벌채해가서 3국 사이에 국제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는가?

A발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주한 러시아 공사가 여러 차례 항의문을 보내왔다. 특히 1899년에는 러시아측이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울릉도에 들어와서 삼림을 벌채해 실어가고 있으니 이를 금지해 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해왔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측의 항의는 물론, 무엇보다 개항장이 아닌 한국 영토에 일본인이 불법 침입하여 함부로 삼림을 벌채해간다는 데 놀라서 이를 중지시키고, 울릉도 이주민에 대한 행정관리를 위해 1899년 5월 배계주를 울릉도 도감(島監)으로 재임명하여 파견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측과 일본측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배계주와 함께 부산항 세무사(稅務司)로 근무하고 있는 외국인 세무사를 동행케 해서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실태를 관찰하여 보고하게 했다.

Q 56 재부임한 울릉도 도감 배계주(裵季周)와 부산항 외국인 세무사의 울릉도 실태 보고는 어떠했는가?

A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1899년 5∼6월 현재 울릉도에는 일본인 수백명이 떼를 지어 불법 침투해서 촌락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었으며, 선박을 운행하면서 삼림을 계속 벌채해 일본으로 운반해가고 곡식과 물화(物貨)를 밀무역하고 있었다. 울릉도에 이주해온 한국인이 조금이라도 이를 말리면 일본인들은 칼을 빼들고 휘둘러대면서 폭동을 일으켜 한국인 이주민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안도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아울러 울릉도 도감 배계주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들어온 일본인들과 그들의 행패가 결코 가볍지 않으므로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으면 울릉도에 이주해온 한국인들이 이산하고 말겠기에 이를 급히 보고하니 중앙정부가 적극 조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실태를 알게 된 대한제국 정부는 외부(外部)대신이 주한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울릉도에 불법 밀입도(密入島)한 일본인들을 기한을 정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개항장이 아닌 항구에서 밀무역한 죄에 대해서는 ‘조·일수호조규’(1876년) 약정에 의거해서 조사·징벌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구히 근절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9년 9월15일자로 대한제국 외부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울릉도에 불법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삼림을 벌채해가고 행패를 부리고 있으므로 일본 공사관에 요구하여 개항장이 아닌 울릉도에 불법 밀입도한 일본인들을 쇄환(刷還)해 가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Q 57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인들의 불법 입도와 삼림벌채 및 불법 행태를 금지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온 러시아측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는 처음에는 주한 일본공사관을 통하여 일본인들을 철수시키라고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공사의 답장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만일 일본인들의 범법행위가 있으면 한국 관헌이 체포하여 가까운 일본영사에게 넘기도록 ‘조·일수호조규’에 규정되어 있으니 한국 관헌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제국 내부(內部)는 근본 대책 수립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12월에 내무관리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 시찰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측과 제3국 외국인을 포함한 조사단을 파견해서 일본인의 불법 침입과 삼림 불법 벌채 실태를 조사하고, 그 후 울릉도·독도의 행정관제를 개정·격상해 그 행정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에 가장 가까운 일본영사관인 부산 일본영사관의 책임자를 동행시키고 일본측과 교섭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내무관리 우용정을 책임자로 하고 한국측의 부산감리서(釜山監理署) 주사 김면수(金冕秀)와 봉판(封辦) 김성원(金聲遠), 일본측 부산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 적총정조(赤塚正助)와 경부(경찰) 1명, 제3국인은 부산해관 세무사 영국인 라포트(E. Raporte, 羅保得) 등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1900년 5월25일 울릉도로 출발하게 했다.

Q 58 우용정 조사단 일행이 실제로 조사한 1900년 당시 울릉도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밀입도하여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삼림을 벌채해가고 있었는가?

A우용정 일행은 1900년 5월31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1일부터 5일간 울릉도 실태를 조사한 다음 귀경하여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요지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울릉도는 길이가 70리, 폭이 40리, 둘레가 140∼150리인 섬인데, 규목(槻木)·자단(紫檀)·백자(栢子)·감탕(甘湯) 등 귀한 나무들과 각종 수목이 울창하다. 도민들이 개간한 토양은 비옥하여 거름을 주지 않아도 곡식이 잘 자라서 대맥(大麥)·소맥(小麥)·황두(黃豆)·감저(甘藷) 등을 수확해 남은 것은 판매하고 있다. 그간 개간된 농경지 면적은 7700여 두락이며, 호수는 400여 호, 인구는 남녀 합하여 1700여 명이다. 면화(綿花)·마포(麻布)·지속(紙屬) 등도 외부에서 들여오지 않고 자급하고 있다. 흉년에는 학조(鶴鳥)라는 날짐승과 명이(茗夷)라는 식물이 구황(救荒)에 쓰이므로 기아를 면할 수 있다. 삼림이 울창한 데에도 맹수나 가시 돋친 수목의 해가 없다. 다만 지세의 경사가 심하여 수전(水田) 농업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2) 일본인 잠입 체류자는 57간(間)에 남녀 합하여 144명이며, 정박하고 있는 일본 선박은 11척인데, 내왕하는 성선은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다. 작년 이래 일본인들이 불법 도벌한 규목(槻木)은 71주이고, 그 밖에 향목(香木)과 잡목을 도벌한 것은 매거(枚擧)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또 지난 1년에 일본인들이 감탕목(甘湯木) 껍질을 벗겨 생즙을 내 실어간 것이 1000여 통이나 되니 그들이 수년만 더 살아도 산에 가득 찬 수목이 반드시 메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또 일본인들은 폭동과 행패가 매우 심하다. 그러나 도감(島監)은 단신 빈주먹이므로 비록 이를 금지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본인이 울릉도에 1일 와서 머물면 1일의 해(害)가 있고 2일 머물면 2일의 해가 있다. 이번 조사 때 그들은 마지못해 퇴거하겠다고 답했는데, 원래 일본인들의 잠입이 조약 위반이니 일본공사에게 요구하여 철거시킨 연후에야 도민을 보호하고 삼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본 조사위원이 순시하는 중에도 일본 상선 4척이 들어왔기에 이튿날 탐문해보니 도끼와 톱 등을 장비(裝備)하고 벌목 장인 40명과 그 밖에 공장(工匠) 등 모두 70여 명이 하륙(下陸)했다고 한다. 일본영사와 의논하여 일본인이 도벌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으나, 우리 배가 회선한 뒤 어떤 침략과 폭행을 자행할지 걱정이니 이제 모두 철귀(撤歸)시켜야 할 것이다.

Q 59 우용정 조사단 일행의 보고서에 대해 일본측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A일본측은 일본인 철수 의사가 전혀 없었다. 서울의 일본공사관은 시찰위원 우용정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일본인 철환문제를 논의하자는 대한제국 정부의 요청에 자기네 조사위원의 복명서가 제출되지 않았다고 시일을 지연하며 매우 무성의한 반응을 보였다. 울릉도민은 대한제국 내부(內部) 조사위원의 성원을 받고 합자하여 개운회사(開運會社)를 설치하고 개운환(開運丸)을 구입하여 운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공사관은 조사결과에 대해 토의하는 것조차 무성의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울릉도 일본인 철환 요구에 대해 일본측 조사위원 적총정조(赤塚正助)의 보고서는 이미 6월15일자로 제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2개월 이상이나 회답을 끌다가, 1900년 9월 초순 회답문에서 ①일본인이 울릉도에 재류하기 시작한 것은 십수 년 이전의 일로서 울릉도 밀입도의 책임은 귀국의 도감이 비단 묵인했을 뿐 아니라 종용했기 때문이고 ②도벌 운운은 도감의 의뢰나 합의매매이며 ③울릉도 도민과 일본인의 상업무역은 도민의 희망에 따른 것이고 도감이 장차 수출입세를 징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며 ④울릉도민은 본토와의 교통에서 일본인 거류자 때문에 그 편리함을 얻고 있은즉, 일본인 거류는 울릉도민의 불가결의 요건이라는 등 전혀 사리에 닿지 않는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일본인 철환(撤還)을 사실상 거부했다.
이에 대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①울릉도 도감이 일본인의 거류를 묵인 또는 종용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리에 닿지 않고 사실이 아니며 ②도벌이 합의매매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③도감이 징수하는 세는 수출입세가 아니며 ④울릉도민이 일본인 때문에 곤란이 심한데 도리어 편의를 얻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일본공사는 울릉도에 내거하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철환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해왔으나, 대한제국 외부(外部)는 불통상항구(不通商港口)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조·일수호조규 위반임을 지적하고 일본인의 철환을 거듭 강력하게 요구했다.

Q 60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측의 무성의와 방자한 반응에 어떻게 대응 조처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죽서도·독도를 묶어서 하나의 ‘군(郡)’을 만들어 지방행정상 격상시키고, 울릉도에는 ‘군수’를 상주시켜서 섬의 수호와 행정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는 1900년 10월22일 울릉도·죽서도·독도를 묶어서 ‘울도군(鬱島郡)’을 설치하고 도감 대신 ‘군수’를 두는 지방제도 개정안을 의정부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1900년 10월24일 의정부회의(議政府會議: 내각회의)에서 8 대 0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25일자 칙령 제41호로 전문이 6조로 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관보(官報)’에 게재하고 공포했다.
대한제국의 이 칙령에 따라 울릉도는 울진군수(때로는 평해군)의 행정을 받다가 이제 강원도의 독립된 군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울릉도의 초대 군수로는 도감으로 있던 배계주가 주임관(奏任官) 6등으로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사무관으로 최성린(崔聖麟)이 임명되어 파송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제2조의 울도군의 ‘구역은 鬱陵全島와 竹島 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죽도(竹島)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규원(李奎遠)의 ‘울릉도검찰일기’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석도(石島)는 독도(獨島)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 울릉도 주민 대다수는 전라도 출신 어민들이었는데, 전라도 방언으로는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독섬’을 음역(意譯)하여 ‘석도(石島)’라고 한 것이다.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의 민간 호칭인 ‘독섬’ ‘독도’를, 뜻을 취해 한자로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하여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에 칙령으로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울도군(鬱島郡)을 설치하면서 울도군수(鬱島郡守)의 통치 행정지역에 울릉도·죽서도와 함께 ‘石島’(돌섬=독섬)라는 명칭으로 독도(獨島)에 대한 행정지배권을 거듭 명백히 공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Q 61 왜 ‘울도군’을 설치할 때 구통치구역인 ‘독도’의 명칭을 이전처럼 ‘于山島’라고 하지 않고 ‘石島’라고 표시했는가?

A울릉도 재개척 이후 울릉도에 이주한 남해안 어민들이 종래의 ‘于山島’를 바위섬, 즉 ‘돌섬’이라는 뜻으로 ‘독섬’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안 사투리, 특히 울릉도 이주민의 다수를 형성한 호남지방 남해안 어민들의 사투리로는 ‘돌(石)’을 ‘독’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1900년 당시에 울릉도 거주민들은 ‘우산도’를 ‘독섬’이라고 호칭했고, 이를 한자로 번역할 경우 뜻을 취한 ‘의역’일 때는 ‘石島’라 하고, 발음을 취한 ‘음역’일 때에는 ‘獨島’라 표기했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는 바로 뜻을 취하여 ‘石島’라고 표기했다.

Q 62 그러면 이 무렵에 우산도를 ‘獨島’라고 표기한 기록도 발견되는가?

A발견된다. 일본 해군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군함 신고호(新高號)를 울릉도와 독도에 파견했는데, 먼저 울릉도에 들러서 주민들에게 청취조사를 하게 했다. ‘군함신고호행동일지(軍艦新高號行動日誌)’ 1904년 9월25일조에는 “松島(울릉도…인용자)에서 리앙코르드岩 실견자(實見者)에게 청취한 정보. 리앙코르드암(岩)을 한국인은 ‘獨島’라고 쓰고 본방(일본…인용자) 어부들은 ‘리앙코도(島)’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일본에서는 ‘우산도’(독도)를 1882년 이전까지는 ‘松島’라고 부르다가 일본 해군성이 ‘울릉도’를 ‘松島’라고 옮겨 호칭하고 표기한 1882년 이후에는 ‘우산도’의 일본 호칭이 없어졌으므로 ‘리앙코르드島’ ‘리앙코島’라고 호칭했음은 앞에서 밝힌 적이 있다.
위의 일본군함 신고호의 보고는 바로 ‘우산도’, ‘리앙코島’라고 일본 어부들이 부르는 그 섬을 한국인은 ‘獨島’라고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于山島=獨島=리앙코島’임이 명백하다. 더구나 이 행동일지의 기록일자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이전인 1904년의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Q 63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공포는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고 제도화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A그렇다.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 제41호로써 울도군의 행정구역 안에 독도(獨島, 石島)를 명확히 표시한 것은 당시의 만국공법(국제공법) 체계 안에서 대외교섭을 하던 대한제국이 종래의 고유영토인 ‘독도’에 대하여 다시 근대 국제법 체계로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칙령 제41호는 ‘관보(官報)’에 게재되어 전세계에 공표되었다.
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공표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소위 영토편입을 결정하기 약 5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 일본정부가 1905년 일본 내각회의 결정이 당시 국제법상 하자가 없었다는 억지 주장은 바로 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그것의 전세계 공표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임이 명백해진다. 한국 고유영토인 독도(우산도)에 대하여 대한제국은 근대 국제법 체계를 갖춘 칙령 제41호로써 1900년 ‘독도’가 ‘울도군수’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었다.

Q 64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일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도 1900년 대한제국이 근대 국제공법 체계 속에서 울도군에 속한 한국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칙령 제41호를 ‘관보’에도 공표했다. 그런데 왜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하려 했는가? 일본이 독도를 침탈해 ‘영토편입’을 시도한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었는가?

A일제의 ‘러·일전쟁’ 도발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정한(征韓)’을 실현하기 위한 대작업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러시아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1904년 2월8일 인천항과 여수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두 척을 선제 기습공격하여 격침시키고, 이틀 후인 2월10일에는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일제는 이와 동시에 대규모 일본군을 한국정부의 동의도 없이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서울에 침입하여 대한제국 수도 서울을 군사 점령했다. 일제는 1904년 2월23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케 했다. 6개조로 된 이 협정에는 일본군이 러·일전쟁 기간에 한국의 토지를 일시 수용하여 군용지로 사용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 해군은 1904년 2월8일 선제 기습공격 때에는 러시아 군함 4척을 격침시켜 기선을 잡았으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남하하여 1904년 6월15일 쓰시마해협에서 일본 군함 두 척을 격침시켜 러시아측이 동해에서 기선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서둘러 모든 군함에 무선전신을 설치하고 동시에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한국 동해안의 울진군 죽변(竹邊)을 비롯하여 20개소에 해군 망루(望樓) 감시탑을 설치했다. 그 가운데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종래 가치 없는 바위섬으로 간주되던 독도가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군사상 매우 중요한 섬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 해군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면서 독도 주위에 해저전선을 깔아 한반도 북부―울릉도―독도―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전선망 가설 작업을 적극 진행했다. 이때 일본인 어업가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라는 자가 독도에서 해마(海馬; 바다코끼리)잡이 독점권을 한국정부에 청원하려고 교섭활동을 시작하자, 이 기회에 군사전략상 가치가 높아진 ‘독도’를 아예 일본영토로 탈취해서 여기에 해군 망루를 설치하려는 공작이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Q 65 나카이(中井養三郞)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목적으로 ‘독도’의 어업독점권을 가지려고 했는가?

A나카이는 학교교육도 받았으며 1890년부터 외국 영해에 나가 잠수기 어업에 종사한 기업적 어업가였다. 1891∼92년에는 러시아령 부근에서 잠수기를 사용한 해마잡이 어업에 종사했고, 1893년에는 조선의 경상도·전라도 연안에서 역시 잠수기를 사용한 물개·생선잡이 어업에 종사했다. 나카이는 1903년 독도에서 해마잡이를 했는데, 수익이 매우 크자 다른 일본어부들이 알고 경쟁적으로 남획하는 것을 방지하고 수익을 독점하기 위해 독도의 소유자인 대한제국 정부에게 어업 독점권을 이권으로 획득하려고 도쿄로 갔다. 왜냐하면 독도가 한국영토여서 한국정부와 직접 교섭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정부의 알선을 받아 한국정부에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Q 66 그렇다면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나카이가 인지했다는 문헌상의 증거자료가 있는가?

A물론 증거자료가 여러 점 있다. 나카이는 1910년에 쓴 ‘이력서’와 ‘사업경영 개요’에서 “독도가 울릉도에 부속한 한국의 소령(所領)이라고 생각했다”고 명확히 쓰고 있다. 1906년 나카이가 한 설명을 인용해서 1907년 나온 오원복시(奧原福市)의 ‘죽도급 울릉도(竹島及 鬱陵島, 1907)’라는 책과 1906년에 나온 ‘역사지리(歷史地理)’ 제8권 제6호에 수록된 나카이의 증언에서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생각하고 상경하여 농상무성을 통해 한국정부에 ‘대하청원(貸下請願; 차용 청원)’을 내려 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923년에 나온 ‘시마네(島根)현지(縣誌)’(島根縣敎育會 편)에서도 “나카이 이에사브로는 이 섬(독도…인용자)을 ‘조선영토(朝鮮領土)’라고 생각해 상경하여 농상무성에 말해서 동정부(同政府; 한국정부…인용자)에 대하청원(貸下請願)하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Q 67 그러면 나카이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지하고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신청하려던 계획을 일본정부는 어떻게 바꾸었는가? 

A나카이는 한국정부에 독도의 어업독점권을 신청하기 위해 먼저 어업 관장 부처인 농상무성 수산국장을 방문하여 교섭했다. 농상무성 수산국장은 해군성 수로국장과 연락해본 뒤 독도가 한국영토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카이를 해군성 수로국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해군 제독) 간부(肝付)는 독도가 ‘무주지(無主地)’라고 단정하면서,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얻으려면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신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리앙코島)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라고 독려했다.
1904년 9월29일 나카이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서 자기에게 대부해 달라는 ‘리앙코島(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일본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 세 대신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이때도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무부처인 내무성과 농상무성뿐만 아니라 외무성에도 이 청원서를 제출하여 한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일본 내무성은 나카이의 청원서를 받고 처음에는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이 전개되는 이 시국에 한국영토로 생각되는 불모의 암초를 갖는 것이 일본의 동태를 주목하는 여러 외국에게 일본이 한국 병탄의 야심을 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는 등 이익이 적은 반면, 한국이 항의라도 하면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으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내무성은 따라서 나카이의 ‘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각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내무성과는 달리 독도의 ‘영토편입’을 적극 지지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여 무선전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의 군함을 감시하는 데 매우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하는 일이 긴급히 요구된다고 추동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내무성이 우려하는 외교상 문제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확언하면서, 속히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하라고 적극 독려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카이가 청원서를 제출한 뒤 4개월여 동안에 일본정부 내부에서 독도 침탈 문제를 놓고 이론(異論)이 전개되나, 결국 일본 내무성도 독도를 침탈하는 데 가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에 대해서는 나카이 자신이 쓴 ‘사업경영개요’에 잘 기록되어 있다.

Q 68 일본정부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는가? 이때 ‘한국영토 독도’를 어떤 구실을 만들어 지우려고 했는가?

A일본정부는 내무대신으로 하여금 나카이의 청원서를 수용하여 1905년 1월10일자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을 요청하게 했다. 이 요청을 받아서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고 결정했다. 이때 내각회의 결정 원문은 중요하므로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38년 1월28일 각의결정(閣議決定).
별지 내무대신 청의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해보니,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은기도(隱岐島)를 거(距)하기 서북으로 85리에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形迹)이 없다. 지난 (메이지) 36년 우리나라 사람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란 자가 어사(漁舍)를 만들고, 인부를 데리고 가 엽구(獵具)를 갖추어서 해려(海驢) 잡이에 착수하고, 이번에 영토편입 및 대하(貸下)를 출원한바, 이때에 소속 및 도명을 확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해도(該島)를 죽도(竹島)라고 이름하고 이제부터는 시마네(島根)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所管)으로 하려고 하는 데 있다. 이를 심사하니 메이지 36년 이래 나카이란 자가 해도(該島)에 이주하고 어업에 종사한 것은 관계서류에 의하여 밝혀지며,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이를 본방(本邦 ; 일본…인용자) 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함이 무리 없는 건이라 사고하여 청의(請議)대로 각의 결정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한다.”
이 내각회의 결정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근거가 된 것은 ‘독도(리앙코島)’는 “다른 나라가 이 섬을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다”고 하여 독도가 임자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즉 ‘한국영토인 독도’에서 ‘한국영토’를 ‘무주지’로 만들어서 지우려 한 것이었다.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한 것은 나카이의 청원서에는 없는 것으로, 일본 내무성과 내각회의가 만들어넣은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무주지’인 ‘독도(리앙코島)’는 나카이라는 일본인이 1903년 이래 이 섬에 들어가서 어업에 종사한 일이 있기 때문에 국제법상 일본인이 ‘무주지’를 선점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여 이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는 ‘무주지 선점’에 의한 영토편입이라는 당시의 국제공법 규정에 맞추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 이전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 영토’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신라에 통일된 이래 계속하여 한국영토로 존속해왔으므로, 역사적 진실은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동안 한국의 자료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본정부 공문서들 속에서도 독도는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이라는 사실이 다수 나온다.
결국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하면서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하여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1905년 1월28일의 일본 내각회의 결정은 불법이며, 완전 무효이며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즉 독도가 ‘무주지’이기 때문에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지적해둘 것은 최근 일본정부가 1905년 1월 이전에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라는 사실이 많은 증거자료에 의해 실증되자, 이번에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대 이래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 허구에 불과하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고유 영토였다는 증거는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일 일본정부의 주장대로 독도가 고대 이래 일본의 고유 영토라면, 일본정부는 1905년 1월에 와서야 그 이전에는 독도가 ‘무주지’였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점유한 형적이 없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일본에 ‘영토편입’한다고 내각회의 결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Q 69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결정을 해놓고 한국정부에 이를 사전 또는 사후에 조회, 통보했는가? 일본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는가?

A설령 그것이 ‘무주지’라고 할지라도 국제법상 그 ‘무주지’를 영토편입할 때는 그곳이 면한 나라들에 사전 조회하는 것이 요청되고 또 국제관례이기도 했다. 예컨대 일본정부는 1876년 태평양 쪽의 오가사하라섬(小笠原島)을 ‘영토편입’할 때에는 이 섬과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본 영국·미국 등과 몇 차례 절충하고 구미 12개 국가들에 대하여 ‘오가사하라섬’에 대한 일본의 관리통치를 통고했다.
따라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고 한국의 우산도(독도, 석도)로서, ‘영토편입’을 형식상 청원한 나카이와 내무성도 처음부터 이를 한국영토로 인지했으므로, 일본정부는 당연히 한국정부에 이를 사전 조회해야 했고 또 사후 통보했어야 하는데 이러한 절차를 전혀 밟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내각회의 결정을 한 뒤, 내무대신이 1905년 2월15일 훈령으로 시마네(島根)현 지사에게 이 사실을 고시하라고 지시했으며, 시마네현 지사는 1905년 2월22일자의 ‘다케시마(竹島)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 ‘현보(縣報)’에 조그맣게 게재했으며, 이 고시 사실 내용을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 1905년 2월24일자)’이 조그맣게 보도했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고시(告示) 방법은 일본이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결정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에 사실상 비밀사항이었고 세계에도 알리지 않은 조처였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수도 도쿄에는 주일본 한국공사관도 있고 한국인들도 있었으나, 시마네현에는 시마네현청에서 발행하는 ‘현보’나 그곳 지방신문인 ‘산음신문’을 즉각 면밀하게 읽고 독도를 일본이 ‘영토편입’을 결정한 사실을 알아내 서울의 한국정부에 보고할 만한 한국인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Q 70 왜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한국정부와 세계 각국에게 ‘사실상의 비밀사항’으로 해두려고 그처럼 구차한 고시방법을 택했는가?

A‘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도의 일본 ‘영토편입’을 형식상 신청한 나카이도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해군성도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주지’라고 주장했고, 외무성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설치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내무성은 ‘독도’는 ‘한국영토’인데 이 불모의 섬을 러·일전쟁 도중에 일본에 ‘영토편입’했다가 한국정부가 이를 알고 항의해오거나 또 세계 각국이 이를 알게 되면 일본은 한국영토를 침탈하기 위한 야욕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되어 득보다 손실이 클 것이라고 반대했던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무주지’라고 해서 일본에 ‘영토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도록 결정한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나 한국민들이 알게 되면, 이것은 한국 부속령을 ‘침탈’한 것이므로, 아무리 서울과 한반도가 일본군의 군사 점령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의문을 내거나 항의 외교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아직도 한국의 수도 서울에 각국 공사관이 주재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과 분쟁이 일어나면 서양 각국이 일본의 한국영토 침탈을 비판하게 되고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침탈에 대한 의심을 강화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은 ‘독도’의 ‘영토편입’ 결정 사실을 숨기려 한 것이다.

Q 71 ‘독도’를 일본에서 ‘다케시마(竹島)’라고 호칭한 것은 1905년 1, 2월부터인가?

A그렇다. 독도를 임진왜란 후에는 ‘송도(松島)’라고 불렀으나, 해군성이 1882년경부터 울릉도에 ‘송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독도를 ‘리앙코르드島’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들은 ‘리앙코島’라고 약칭하여 부르다가, 1905년 2월부터 ‘다케시마’라는 호칭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 일본인들은 1880년 이전까지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는데, 1905년 2월 이후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호칭하도록 일본정부가 훈령했다.

Q 72 일본정부는 그 후 러·일전쟁 도중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실제로 설치했는가?

A설치했다. 일본 해군성은 ‘독도’ 망루 설치 작업을 1905년 7월25일 기공하고, 동년 8월19일 준공하여 준공한 날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독도 망루에 배치된 인원은 요원 4명과 고용인 2명 등 정원이 모두 6명이었다. 일본 해군은 또한 독도와 울릉도를 연결하는 해저전선을 1905년 10월8일 독도망루와 울릉도 망루 사이에 부설하였고, 독도와 일본 출운(出雲) 지역 송강(松江) 사이의 해저전선을 1905년 11월9일 설치 완료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은 한국 동해안 죽변(竹邊)-울릉도-독도-일본 출운(出雲) 송강(松江)을 연결하는 해저통신망과 해상 감시망루를 설치했다.
일본 해군은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되고 10월15일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전되어 해군 감시 망루가 필요없어지자, 10월24일 독도 망루를 철거했다.

Q 73 일제가 해군성 주도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다는 내각회의 결정을 하여 침탈을 시도하고,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철거하는 등의 작업을 한 사실을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가?

A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대한제국정부에 그런 사실을 조회 또는 통고하지 않았고, 일본 ‘관보’나 중앙 신문에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본은 겨우 시마네현의 관리용 ‘현보’와 지방신문에 고시하는 형식만 취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실효적 비밀조처’를 취했으니,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이를 알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한반도에 불법 상륙하여 한반도를 사실상 군사 점령하고 있었고, 모든 일을 군사상의 비밀로 처리했으므로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가 설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독도’ 주변에 일본 해저전선이 깔린 사실을 당시 대한제국 정부나 한국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점은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이나 국민은 1905년 말까지는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하는 내각회의 결정을 몰랐다. 그러므로 1905년에 나온 지도와 출판물에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분류하여 기록한 것이 여러 점 나왔다. 예컨대 일본 도쿄의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박문관(博文館)은 1905년 6월20일 ‘일로전쟁실기(日露戰爭實記)’라는 방대한 러·일전쟁 승전 기록문집을 냈는데, 그 제76편의 부록으로 1905년 6월 현재의 ‘한국전도(韓國全圖, 34.5×48㎝)’를 부록으로 내면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분류하여 수록했다.

Q 74 그러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A한국측이 일본정부의 ‘독도’ 침탈과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 사실을 처음 안 것은 1906년 3월28일이었다. 알게 된 과정은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정부에 조회해오거나 통보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시마네현 은기도사(隱岐島司) 일행이 ‘독도(竹島)’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자신들이 ‘독도’를 일본에 새로이 ‘영토편입’했고 그 관리자가 은기도사이기 때문에 새 영토를 시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울도군수를 방문하였다고 간접적으로 알려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간접적으로 알린 그 방식과 시기다. 일본정부는 한국영토인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영토편입’해버린 중대한 사실을 1905년 2월 당시에 조회 또는 통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06년 말에도 아직 엄연히 그 이름이 남아 있는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통보하지 않았고, 시마네현 은기도의 말단 지방관리의 간접적인 말을 통해 울도군수가 알도록 한 것이다. 일본정부의 이런 방식은 대한제국정부 영토(독도) 침탈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사건으로 처리하게 하고, 또 현지 지방관이 항의하는 경우에도 이를 일제 통감부가 사소한 일로 처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알리는 것을 극력 회피했던 탓으로 해석된다.

Q 75 일본측은 왜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구태여 1906년 3월 말을 택하여 대한제국 지방관이 알도록 누출했는가? 그 일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A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1906년 3월 말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러·일전쟁을 10월15일 일본의 승리로 종결하자, 바로 무력으로 조선 궁궐을 에워싸고 위협하여 1905년 11월17일 그들이 초안한 ‘을사5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 내용의 요점은 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이 한국 외교권을 행하고 ② 일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여 한국의 정치 일반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통감부가 한국 정치 일반을 감독한다는 것은 한국의 내정을 지휘 감독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한제국의 조약 체결권자인 황제 고종이 ‘을사조약’의 승인과 서명 날인을 끝까지 거절하여 국제법상 이 조약은 성립되지 않은 것인데도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 집행했다. 일제는 1905년 12월20일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했다. 이어서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17일 완전히 폐지되었다. 1906년 2월1일에는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실제로 설치되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고 사무를 시작했다. 이제 대한제국은 1906년 1월17일 외무기관마저 폐쇄되어 국제적 항의를 담당할 기관이 없어진 채, 1906년 2월1일부터는 내정도 일제 통감부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일본측은 이상과 같은 조처를 한 뒤 이런 시간표에 맞추어 1906년 3월28일 시마네현 은기도사라는 지방관을 통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누출하게 했다. 만일 울도군수 심흥택이 이것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더라도 당시 대한제국 중앙정부는 일본 통감부의 지배하에 있고, 외부(외무부)는 완전 폐지되어 대한제국이 일본정부에 외교적 항의를 할 수 없었으므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진 일제 통감부가 일본정부에 항의해야 하는 상태였다. 이처럼 일본은 대한제국이 항의서조차 제출할 수 없도록 완전히 준비를 갖춘 뒤에, 1906년 3월 말을 택하여 일본이 독도를 침탈했다는 사실의 정보를 누출시킨 것이다.

Q 76 울도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28일 울도군청을 방문한 일본 시마네현 은기도사 일행에게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정보를 듣자 어떻게 대응했는가?

A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그들이 떠난 이튿날인 1906년 3월29일(음력 3월5일) 그의 직속 상관인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를 올렸다.
심흥택의 보고에서 주목할 것은 “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 외양 백여리허에 있삽더니…”라고 하여 독도가 자기의 통치군(본군)인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밝혀 항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심흥택은 ‘독도’가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하여 ‘대한제국 영토’이자 자기의 행정 책임군인 울도군에 속한 영토임을 천명한 것이다.
심흥택은 그 다음에 일본인 관리 일행이 자기 관사를 찾아와서 “자운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고 하여 ‘자운(自云)’이라는 표현을 써서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은 일본측의 일방적인 ‘억지주장’이라는 뜻을 담아서 그가 승복하지 않음을 명확히 나타냈다.

Q 77 강원도관찰사는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받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A강원도관찰사는 당시 공석이고 춘천군수 이명래(李明來)가 강원도관찰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직속 상관인 내부대신과 의정부참정대신에게 심흥택의 보고를 논평 없이 충실하게 옮겨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 당시 강원도관찰사가 공석이어서 관찰사서리를 겸무한 춘천군수에게 보고가 도달되는 데 시간이 걸렸는지, 이명래가 내부대신과 의정부참정대신에게 보고서를 올린 일자는 1개월이 지난 1906년 4월29일이었다.

Q 78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내부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당시 대한제국 내부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에게서 일본이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유람하는 길에 토지면적과 인구를 기록해가는 것은 괴이함이 없다고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독도가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이제 보고받은 바가 매우 아연실색할 일이다(遊覽道次에 地界戶口之錄去는 容或無怪어니와 獨島之稱云日本屬地는 必無其理니 今此所報가 甚涉訝然이라)”는 지령문을 써보내, 독도를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말이라고 단호히 부정하고 항의의 뜻을 명백히 표시했다.
대한제국 내부대신의 지령문에 나타난 반응은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일본의 무리한 침섭에 경악해서 항론을 지령문으로 지시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항론으로 지령했다. 친일파 내부대신조차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결정에는 단호히 ‘전혀 이치가 없는 일’이라고 항론을 편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Q 79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참정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대한제국 참정대신도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이제는 일본 영지로 편입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올라온 보고를 다 읽었고 독도가 일본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에 속하나,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來報는 閱悉이고 獨島領地之說은 全屬無根하나 該島 형편과 日人 여하행동을 更爲査報할사)”이라고 지령했다. 
당시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이었는데, 박제순도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일본정부의 주장과 조처에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전적으로 근거 없는 일에 속한 것”이라고 항론을 펴고,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의 그 후의 동태를 다시 조사 보고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Q 80 당시 여론은 어떠했는가? 당시 신문들은 일본의 독도 침탈, ‘영토편입’을 어떻게 보도하고 논평했는가?

A당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는 한국 신문에 대한 사전·사후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를 보도하고 논평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표적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의하고 이를 비판 보도했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1일자 잡보란에서 ‘無變不有’(變없지 아니하다; 變이 있다는 뜻)라는 제목으로 울도군수 심흥택이 내부에 보고한 보고서를 인용보도하면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선 “變이 있다”고 한 제목이다. 국민(독자)에게 ‘變’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관원 일행이 본군(울도군)에 와서 본군에 소속해 있는 독도는 일본속지라고 자칭”했다는 대목이다.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인용하면서 “울도군 소속 한국속지인 독도를 일본 관원 일행이 일본속지로 자칭”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서 울도군에 속한 섬인데 일본관리가 일본 영토라고 자의로 칭했다고 비판 보도하여 항의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이어서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여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어서 이번 보고한 바가 참으로 아연실색할 뿐이다”고 한 내부(내무부)의 지령문을 인용 보도하는 방법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영토편입’을 칭하여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아연실색할 일이라고 일본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편 ‘황성신문’은 1906년 5월9일자 잡보란에서 제목의 활자 크기를 처음으로 평소보다 4배나 크게 해 보도함으로써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단호하게 부정하고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선 ‘울도군수가 내부에 보고’라는 관례적인 제목 크기의 4배에 달하는 특호(特號) 활자 크기다. 독자들이 갑작스러운 특호 활자 크기에 주목하여 먼저 읽게 해서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에는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인용하여 “본군(울도군) 소속 독도가 외양 백여리 밖에 있사온대 본월 4일에 일본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서 자의로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는 일본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한 부분을 비판한 사실이다.
여기서 ‘황성신문’은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에 있는 ‘본군(울도군) 소속 독도’를 주목하게 해서 독도가 울도군에 속해 울도군수 심흥택의 행정을 받고 있는 ‘대한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이어서 ‘황성신문’은 일본 관리 일행이 울도군수 관사를 찾아와서 “자의로 말하기를(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한 부분을 보도하여 일본이 이제 막 독도를 침탈해서 일본영토로 만들고 있다고 폭로하고, ‘자의로 말하기를(自云)’이란 보고서 설명을 인용하여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의 부당성을 지적·비판했다. 결국 당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의 삼엄한 검열제도 속에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간접적 방법으로 비판하고 항의한 것이다.

Q 81 당시 대한제국 국민과 지식인들은 이 보도를 읽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1906년 당시에는 일제의 ‘을사5조약’ 강제집행과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국민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이므로, 국민은 물론 일제의 독도 침탈 사건을 국권 침탈 시도에 대한 저항운동에 포함하여 전개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영토 침탈은 국권 침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기록에 나와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들 수 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屬島)가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 왜인이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다고 심사(審査)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가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라고 하여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임을 명확히 해서 한국 영토임을 밝히고, 이어서 “왜인이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다고 조사해 갔다”고 기록해서 지금 막 일본측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고 있음을 폭로하고 비판한 것이다.
황현은 또 ‘매천야록’에서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도가 그때까지는 울릉도에 구속한(예부터 속한) 섬”이라고 하여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확히 밝힌 점과, 이어서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했다고 하여 독도를 일본인들이 일본영토라고 ‘늑칭’했다고 비판한 점이다. ‘늑칭’은 ‘강제로 칭했다’, ‘억지로 칭했다’, ‘거짓으로 칭했다’ ‘부당하게 칭했다’ 등의 뜻이 모두 들어 있는 용어다. 즉 독도는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울릉도에 부속해온 한국 영토임이 명확하고, 독도를 이제 일본 영토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한 주장, 억지주장임을 황현은 명백하게 밝혀 기록한 것이다.

Q 82 그러면 1906년 이후와 일제 강점하에서 ‘독도’는 어떠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와 당시 한국 국민은,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17일에 이미 폐지되어버렸고, 일제 통감부가 한국 외교와 내정을 지휘 감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독도 침탈에 대하여 항의와 항론을 폈을 뿐 항의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제출할 통로와 기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강점하려 하고 있었고, 독도 침탈은 그 첫 작업이었다. 독도가 한국영토이지만 동쪽으로 일본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먼저 침탈당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한반도 전체가 침탈당하는 위험을 대처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독도를 돌보지 못했다.

Q 83 일제 강점기에 독도는 완전히 일본 시마네현의 부속 도서로 분류되었는가?

A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면서 형식상으로는 시마네현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그렇지 않아 조선 울릉도에 부속한 섬임을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독도를 실질적으로 조선에 부속한 섬으로 취급하거나, 또는 형식과 실제 모두에서 조선 부속령으로 취급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도를 조선에 부속한 섬으로 형식과 실제 모두에서 취급한 문헌의 대표적 예로는 ①‘일본수로지’(일본 해군성 수로부, 1911년) 제6권 ②‘일본수로지’(일본 해국성 수로부, 1920년) 제10권의 상권 ③‘역사지리’(제55권 제6호)에 게재된 통세설호(桶細雪湖)의 논문 ‘일본해에 있는 죽도의 일선(日鮮)관계에 대하여’(1930년) ④지갈성(芝葛盛)의 ‘신편일본역사지도(新編日本歷史地圖)’(1930년) ⑤석미춘잉(釋尾春芿)의 ‘조선과 만주안내’(案內, 1935) ⑥‘지도구역일람도’(地圖區域一覽圖, 일본 육군참모본부, 1936)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은 일본제국이 멸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한국이 일본의 영원한 식민지라고 생각했는지, 독도를 ‘죽도’라고 호칭하면서도 형식과 내용 설명에서 모두 조선 부속으로 기록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극성한 시기인 1936년에 간행된 일본 육군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지도구역일람도’ (1)는 주목을 요하는 지도다. 이 지도의 목적은 소위 ‘대일본제국’을 일본본주, 조선, 대만, 관동주, 화태(사할린), 천도열도, 남서제도, 소립원(小笠原)군도 등으로 원래의 지역별로 집단 분류한 것이다. 이 ‘지도구역일람도’에서는 ‘독도’(죽도)를 ‘조선’과 ‘일본본주’의 어느 쪽에 분류해 넣었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지도상에 ‘독도’를 일본본주에 넣을 공간이 매우 넓은데도 불구하고, 울릉도와 ‘독도’(죽도)를 함께 묶어서 조선구역에 분류해 넣고 독도의 우측에다 ‘조선구역’과 ‘일본본주 구역’을 구분하는 굵은 선을 그었다.
이 ‘지도구역일람도’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제국이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던 1936년에 일본 육군성이 공식 발행한 지도이기 때문에 일제가 군사력으로 강제 병탄한 지역의 원래 주인을 판별하는 데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자료다. 이 자료에서 ‘독도’가 ‘조선구역’에 분류되어 포함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독도’의 원래 주인은 ‘조선’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육군성의 이 일본제국 지역구분지도는 ‘독도’(죽도)를 ‘조선구역’에 포함시켜 분류해서 ‘독도’의 원주인이 ‘조선’이었음을 극명하게 밝힌 것이다. 만일 ‘대일본제국’이 해체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침탈한 지역이 원주인에 돌아가도록 판정하는 일이 외부에서 주어진다면, ‘독도’는 당연히 원주인인 ‘조선’에 반환되어야 함을 이 지도는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독도’의 원주인은 한국(조선)임을 알았고, 또 그렇게 표명한 것이다.

Q 84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일본이 패전하면 침탈한 영토를 원주인에게 반환시키고 일본은 원래의 일본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할 정책을 갖고 있었는가?

A그러한 정책을 갖고 있었다. 우선 1943년 11월20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영국 수상 처칠(Winston S. Churchill), 중국 총통 장개석(蔣介石) 등이 회합한 카이로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카이로 선언’을 합의 발표했다.
“각국 사절단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작전을 협정했다. 3대 연합국은 해로·육로·공로(空路)에서 야만적인 적군에 대하여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했다. 이 압력은 이미 증대되고 있다.
3대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징벌하기 위하여 현재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바다. 위 연합국은 자국을 위해서 이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토확장의 의도도 없다.
위 연합국의 목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이 장악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박탈할 것과 아울러 만주·대만·팽호도(澎湖島) 등 일본이 중국인에게서 절취한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掠取)한 모든 다른 지역에서도 축출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조선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했다.
이런 목적으로 위의 3대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중인 여러 연합국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엄중하고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카이로선언’은 일본에게 반환받고 일본을 축출해야 할 지역으로 ①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일본이 장악 또는 점령한 태평양 안에 있는 모든 섬 ②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중국에게 절취한 만주·대만·팽호도 등 ③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다른 지역 등이었다. 그리고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여기서 한국 영토는 ③의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다른 지역”에 해당한다. 또한 그 시기의 상한은, 1894∼95년 청·일전쟁 때 일본이 중국에게서 절취한 영토를 반환 대상에 포함시킨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이 대한제국으로부터 1905년 2월 독도를 약취한 시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독도’도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섬”으로서 한국에 반환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 것이다.

Q 85 그러면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일본이 약취한 한반도와 ‘독도’는 연합국에 의해 어떻게 한국에 반환되었는가?

A일본이 1945년 9월2일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 도쿄에 연합국 최고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 약칭 GHQ)가 설치되어 일본 통치를 담당하게 되자,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포츠담선언의 규정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측은 즉각 한반도는 한국(주한 미군정)으로 이관했다. 문제는 일본영토로 규정한 “본주·북해도·구주·사국과 우리(연합국-인용자)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 중에 인접국가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을 원래의 다른 나라 주인의 것과 일본의 것을 구분하는 일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드디어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수개월의 조사 뒤에 1946년 1월29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SCAPIN : Supreme Command Allied Powers Instruction) 제677호’로서 ‘약간의 주변 지역을 정치·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관한 각서’를 발표하고 집행했다. 이 SCAPIN 제677호의 제3조에서 ‘독도’(Liancourt Rocks, 竹島)는 일본영토에서 분리 제외되었는데 그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지령의 목적을 위하여 일본은 일본의 4개 本島(北海島·本州·九州·四國)와 약 1000개의 더 작은 인접 섬들을 포함한다고 정의된다.(1000개의 작은 인접 섬들에) 포함되는 것은 對馬島 및 북위 30도 이북의 琉球(南西)諸島다. 그리고 제외되는 것은 ①鬱陵島·리앙코르드岩(Liancourt Rocks ; 獨島, 竹島)·濟州島, ②북위 30도 이남의 琉球(南西)諸島(口之島 포함)·伊豆·南方·小笠原 및 火山(琉黃)群島와 大東諸島·鳥島·南鳥島·中之鳥島를 포함한 기타 모든 외부 태평양제도, ③쿠릴(千島)列島·齒舞群島(小晶·勇留·秋勇留·志癸·多樂島 등 포함)·色丹島 등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이 SCAPIN 제677호를 ‘일본의 정의(the definition of Japan)’라고 표현했다.
SCAPIN 제677호 제3조에서 주목할 것은 그 ①②③의 집단 분류다. ①집단에는 울릉도·독도·제주도를 순서대로 범주화해서 넣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분리되어 한국에 반환되는 섬들임은 울릉도와 제주도에서 명백하다. 즉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로서 ‘독도’(리앙코르드 섬, 죽도)를 원래의 주인인 한국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것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수개월간 조사한 뒤 결정하여 공표한 것이었고,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당시 국제법상의 합법적 기관이었으므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를 원주인인 한국(당시 미군정)에 반환하여 한국영토로 결정한 것은 국제법상 효력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SCAPIN 제677호의 부속 지도에서도 극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미군정으로부터 한반도와 독도 등을 인수받아 이를 한국영토로 하였고, 한국의 독도 영유는 1946년 1월29일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재확인된 것이었으며, 1948년 8월15일부터 동시에 실효적 지배를 다시 하게 된 것이었다.

Q 86 일본정부는 그 후 SCAPIN 제677호는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최종결정이 아니므로 이때 ‘독도’(죽도)를 일본에서 최종 분리했거나 한국에 최종 반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A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 논쟁’을 일으킨 직후인 1952년 4월25일자로 한국정부에 보내온 일본측 구술서에서, SCAPIN 제677호 제6조에 “이 지령 가운데 어떠한 것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 언급된 여러 작은 섬들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고 한 조항을 들어서 이것이 일본 영토를 최종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SCAPIN 제677호에서 강조된 것은 각각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복잡 미묘한 연합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다른 연합국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것이 ‘최종적 결정’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하면 수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필요한 수정을 가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SCAPIN 제677호 제5조에서 “이 지령에 포함된 ‘일본의 정의(the definition of Japan)’는 그에 관하여 다른 특정한 지령이 없는 한, 또한 본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 발하는 다른 모든 지령·각서·명령에 적용된다”고 하여, SCAPIN 제677호의 일본 영토 정의에 수정을 가할 때에는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반드시 특정한 다른 번호의 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을 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한 SCAPIN 제677호의 규정은 ‘일본의 정의’가 미래에도 적용됨을 명백히 밝혔다.
즉 SCAPIN 제677호 규정을 ‘독도’에 적용하면, 제3조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하여 한국영토로 울릉도와 제주도와 함께 반환하되, 제5조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해 한국영토로 반환하는 데 수정을 가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다른 번호의 특정한 지령을 발해야 수정할 수 있다고 하고, 제6조에서는 이러한 (제5조의) 전제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해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은 연합국 정책의 ‘최종적 결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독도’를 일본정부의 주장처럼 일본영토로 편입하려면 반드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다른 특정한 (따라서 다른 번호의) SCAPIN을 발표하여 “한국에 반환했던 독도를 이번에는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요지의 지령문이 발표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Q 87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그 후 SCAPIN 제677호를 수정하여 한국영토로 반환한 ‘독도’를 일본 영토로 반환한다는 식의 다른 특정한 SCAPIN을 발표했는가? 

A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를 발표하여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정치·행정상 분리해서 한국에 반환한 이후 1952년 해체될 때까지 ‘독도’를 일본영토로 귀속시킨다는 내용의 다른 특정한 SCAPIN을 발표한 일이 없다. 따라서 독도는 국제법상으로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에 의해 한국 영토로 재확인되어, 오늘날까지 국제법상의 합법적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에 관련하여 발표한 SCAPIN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를 더욱 보장하는 것이었다.

Q 88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를 더욱 보장하는 또 하나의 SCAPIN은 어떤 것인가? 또 그것과 SCAPIN 제677호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A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1033호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SCAPIN 제1033호 제3조에서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 구역’(통칭 맥아더 라인)을 설정했는데, 그 b항에서 “일본인의 선박 및 승무원은 금후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있는 리앙코르드岩(독도, 죽도…인용자)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며, 또한 동도(同島)에 어떠한 접근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일본인의 독도 접근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것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와 그 영해, 근접수역을 한국(당시 미군정)의 영토와 영해로 재확인하고 일본인이 독도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이요, 독도 주변 12해리 영해와 근접수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금지하여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거듭 명확히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제법상의 합법기관으로서의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SCAPIN 제677호와 제1033호에 의하여 ‘독도’가 한국(당시 미군정) 영토이고 일본영토가 아님을 명확히 결정하고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이 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다른 한반도 영토와 함께 인수, 접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는 SCAPIN 제677호와 SCAPIN 제1033호에 의하여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명확하게 재확인받은 것이었다.

Q 89 이 무렵에 미군이 ‘독도’를 미 공군의 연습장으로 사용했다가 울릉도 어부를 다수 폭사시킨 일이 있었고, 일본측은 미 공군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미공군 연습장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었는가?

A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6월30일 미국 공군기가 독도 부근에서 폭격 연습을 실시했는데, 독도에 출어중이던 한국 어민 30여 명이 희생된 불상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가 주한 미군정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했다는 방증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일본측 주장은 전혀 부당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4월25일 미국 제5공군에 이를 조회하여 항의했다. 미국 제5공군에게서 같은해 5월4일자로 “당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으며, 또 독도는 극동 공군의 연습목표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요지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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