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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바른 역사와 국학의 의미
2017-04-08 237
3.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지나 간 기억이며 미래지향적인 학문이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역사가 있고 민족에게는 민족의 역사가 있다. 만약에 개인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송두리째 잊어버린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의 지나 간 기억을 누군가 왜곡시킨다면 그 사람의 두뇌는 왜곡된 정보체에 의해 큰 손상을 입게 되고 그 정보체로 인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왜곡시키게 된다. 그리고 왜곡된 정보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출력될 때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지구의 생명에 까지도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기억상실증이 걸린 사람이나 지나 간 기억이 왜곡된 사람은 과거의 기억만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어떤 개인의 역사도 이러하거늘 우리는 그동안 우리민족의 역사를 얼마나 바르게 알고 배워왔는가? 혹여 누군가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배우지는 않았는가?

영국의 E.H 카아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크로체는 “역사는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므로 과거는 단순한 과거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밀접한 관련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조망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를 진단하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경영하거나 사회적으로 지도적인 지위에 오를 사람들은 우리 국사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흔히 『역사는 반복 한다』『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을 한다. 이런 말들은 역사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아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에서는 고위공직자들 사이에 역사배우기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도 이에 못지않다. 일본정부는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한・일 한・〮중 간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과 중국은 역사적 사실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면서까지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이웃 국가들의 역사교육이 이러함에도 우리 역사학계에는 국사를 따로 가르친다는 것은 국수주의적이며 세계화 추세에 역행한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어 한심스럽다. 세계화를 최선봉에서 이끌어 가고 있는 미국은 200여년 밖에 안 되는 역사임에도 인디언의 역사까지도 발굴하면서 미국역사를 독립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EU로 통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들의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역사교육을 볼 때 우리도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철학) 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세계화도 각국의 문화나 전통 등이 존중되는 가운데 추진되어야 다양성을 띈 하나로 발전하는 것이지 각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버리고 어떤 강대국의 것을 따르거나 또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TV드라마나 소설 등이 많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보니 많은 국민들이 정사(正史)는 잘 몰라도 사극(史劇)이나 역사소설의 내용은 잘 알고 있다. 모 방송국에서 방송한 “주몽” 역사드라마를 보고 어느 초등학생이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송일국(주몽 배역)이라고 한 것은 웃지 못 할 현실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고 나라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 철학 역사를 가르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우리는 국토를 잃었으나 자기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손 대대로 유지함으로써 나라를 다시 일으킨 사례를 알고 있다. 반면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를 상실한 민족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례도 가까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킨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들은 2천여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았으나 역사와 조상들이 물려준 정신과 문화 등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고 역사가들은 기술하고 있다. 이는 역사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골백번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한편 한때 강성하여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여진족이 지금은 한족(漢族:중국민족)에 동화되어 흔적이 없어졌음은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과거를 가진 우리에게 경각심과 함께 교훈을 준다.

세계를 둘러보면 문명국가 중 자기나라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있을 까 의심된다.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 특히 교육을 맡고 있는 공직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모르고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배움으로써 우리 선조들이 남긴 경험 지식 등에서 지혜를 얻게 되어 한 층 더 발전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4. 국학이란 무엇인가?

국학이란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 문화, 철학 등을 포함한 종합학문이다. 국학은 민족혼의 상징으로서 한문화, 혼문화, 얼문화, 홍익문화, 양심문화, 완성문화, 기(氣)문화, 율려문화, 신명문화라고도 한다. 국학은 기를 살려주고 혼을 살려주고 신명을 살려주기 때문이다. 국학의 뿌리는 우리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인 '선도(仙道)', '풍류도(風流道)', '신선도(神仙道)' 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핵심은 홍익철학과 천부경이다.

국학은 평화시대에는 예술혼으로 승화되어 문화민족을 만들었고, 구한말에는 의병활동으로 승화되어 나라를 구했고,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승화되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1998년 남한은 IMF라는 경제적 위기와 북한은 기아라는 민족적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에는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건립운동으로 승화되어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였고,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는 붉은악마의 열정으로 승화되어 스포츠 강국으로 만들었고, 2007년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 때에는 자원봉사운동으로 승화되어 민족의 어두운 검은 그림자를 청소했다.

역사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국학의 기원을 보면, 한민족은 1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손(天孫) 문화민족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이 자랑스런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민족 고유의 창세신화가 있고, 민족의 3대 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있다는 것과 1만년의 유구한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 여러 번의 왕조가 변했지만 민족혼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창세신화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삼국유사, 한단고기 등에 의하면 B.C. 2333년에 단군이 조선(朝鮮)을 건국하였으며, B.C. 3897년에는 한웅(桓雄)이 배달국을 건국하고, B.C.7197년에는 한인(桓因)이 한국(桓國)을 건국하였다.

서기 2012년은 단기 4345년이며 한웅이 배달국을 건국한지 5909년이며 한인이 한국(桓國)을 건국한지 9209년이 된다. 따라서 한인의 한국(桓國)역사를 토대로 보면 1만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고 단군의 역사를 토대로 보면 반만년의 역사가 된다.

신시(神市) 배달국은 고대 한국의 광명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1565년 동안 지속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배달국 신시개천의 역사를 우리는 진정한 한민족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신시 개천의 단군사화는 후술하기로 한다.

배달국은 인류 시원의 문명국인 한국시대 한인 천제의 정통성을 계승한 장자국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천제(天祭) 의식을 통해 감사드리고, 신(神)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을 다스렸다. 신(神)의 가르침은 오늘날 선도수행을 하면 체험하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message)를 전하는 것을 한국 시대에서는 이신설교(以神說敎)라 하는데, 이를 줄여서 ‘신교(神敎)’라고 불렸다.

신교는 우리민족의 삶과 함께한 토종 종교로서 환국에는 신교, 배달국 시대에는 배달도, 단군조선 시대에는 풍류도라 불렸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대학자이며 천부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고운 최치원(서기 857년~) 선생은 <난랑비서문>에서 “우리나라에 고유한 현묘한 도가 있어 풍류도라 한다. 이 정신의 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본래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생명을 접화하여 교화시킨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서기 857년~)의 난랑비 서문》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 나라에 지극히 오묘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 라 한다.

設敎之源 備詳神史
설교지원 비상신사
- 풍류風流는 종교의 근원인데 신사神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 이 도는 유불도 3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만물을 살린다.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 충효를 숭상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 지극한 자연스러움(無爲)을 추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 악(惡)을 행하지 않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불의 가르침과 같다.

최치원 선생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유교, 불교, 도교 3교(敎)에 정통한 학자로서 한민족의 고유정신인 풍류도를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가림토문으로 전해져 오던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天符經)을 한자(漢字)로 번역하였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등 나라를 이끈 엘리트들은 민족 고유의 국학과 선도수련을 연마한 선인들로서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다. 신라의 화랑들이 실천윤리로 배운 선도정신이나 고구려 교육기관 태학(太學)에서 가르친 학문이 모두 우리 고유의 국학, 곧 '선도'였다.

선도(仙道)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실천함으로써 얻어 지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바로 선도문화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국학은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동안 쇠태하기 시작하였고 단군조선 말기부터 도입된 유교와 삼국시대 이후 도입된 불교 등 외래문화가 2천 년 동안 지배문화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는 재야(在野)에서 선맥(仙脈)의 형태로 끊어질 듯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한민족의 큰 섭리가 있다.
한민족의 큰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창세신화와 역사시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민족의 창세신화는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세신화에 나오는 마고시대 이후의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단고기와 부도지 등 역사서가 발견되면서부터는 한인․ 한웅․ 단군시대는 역사시대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 나고 있다. 천만 다행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한인․ 한웅․ 단군시대는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실현하는 정신문명의 시대가 꽃피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47대 고열가 단군은 청동기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이 경쟁과 지배의 욕구가 극심해지는 것을 한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열가 단군은 물질문명의 한계를 느낄 때 다시 정신문명의 시대를 부활하겠다고 약속하고 한민족의 백성들에게 천화(天化)의 법을 폐관하였다. 고열가 단군은 외세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화의 법을 전수해 주는 것을 막을 내리 것이다. 고열가 단군은 폐관이후 구월산으로 선도수련을 통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였고 자손들의 영혼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천화의 법을 폐관한 이유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과 목적을 전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폐관할 때 오히려 뜻있는 사람들이 때가 되어 천화의 법을 복본(複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열가 단군의 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고열가 단군의 큰 사랑을 안다면 어누 누가 통곡하지 않으리오.

고열가 단군이 폐관한 이후 주몽은 다물(多勿)정신으로 단군조선의 유민을 모아서 옛 고토를 회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한민족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한단고기에 의하면, 배달국의 5대 태우의 천황(BC 3,511년)의 12번째 아들 태호복희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3황 5제의 시조가 되면서 음양오행사상을 전파하였고 그 정신은 공자의 유교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또한 태호복희의 여동생은 여와는 수메르(메소포타미아) 전지역으로 전래되어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 하남성 회양현 태호 복희묘에 있는 여와전의 여와상은 창조신으로 결혼제도를 통하여 인류를 번손시킨 여신(女神)으로 중국에서 숭배 받고 있다. 배달국 14대 치우천황(BC 2,706) 때 선도수련의 대가(大家)인 자부선인이 황제 헌원에게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전달하였다. 삼황내문경은 선도수련의 지침서로서 훗날 노자의 도교(道敎)와 한의학의 바이블인 황제내경의 원형이 된다. 배달국 15대 치액특 천황(B.C. 2,597년) 때에는 티베트 지역과 인도지역으로 전래되었다. 훗날 인도의 요가 수행과 불교로 발전되었다. 

이렇듯 한웅시대와 단군시대에는 홍익정신이 사해일가(四海一家)로 전래되었다. 홍익정신은 인도로 가서 석가모니로 하여금 인도식의 홍익정신인 자비를 통하여 3천년을 역사하였고, 중국에서는 공자로 하여금 중국식의 인(仁)을 통하여 2천 5백년을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가서 예수로 하여금 이스라엘식의 홍익정신인 사랑을 통하여 2천 년 간 역사하였다. 인도로 간 홍익정신은 불교라는 옷을 입고 역수입되었고, 중국으로 간 홍익정신은 유교라는 옷을 입고 역수입되었으며, 이스라엘로 간 홍익정신은 기독교라는 옷을 입고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조각났던 인류의 역사가 지구 최악의 상태를 맞이하여 완성을 꿈꾸며 다시 어머니 품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한국학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사적인 큰 흐름은 중국 명나라 때(1583년) 진사벼슬을 했다고 전해지는 주장춘의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에도 잘 나타나 있다. 주장춘은 <진인도통연계>에서 인류의 중심을 중국 고대의 성산(聖山)인 곤륜산(崑崙山)의 4지맥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했고, 인류의 문명을 통일시키는 유교, 불교, 기독교 성자들의 도맥(道脈)을 이은 원리를 밝혔다. 또한 마지막 도맥은 금강산의 정기를 타고 한국에서 꽃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주장춘의 진인도통연계는 후술한다.

아무튼 지구촌의 대 혼란기에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인류의 모든 정신이 우리나라에 다 들어 와 있으며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한국에 다 있다. 종교문제, 민족문제, 정치문제, 경제문제, 인종문제, 환경문제 등 이 모든 것이 우리나라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래문화의 극성 속에서 국학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1만 년의 역사를 이어져 왔다. 고열가 단군이 폐관한 이후 우리민족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한 연단(鍊鍛)의 긴 세월을 견뎌 내야 했다. 그래서 국학은 그냥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새로운 문명의 시원사와 그 태동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어떤 섭리와 사명이 있는 역사이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유는 알아야 된다.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인류와 지구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정신문명을 열어가는 그 소명(召命)이 우리민족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있다면 그것은 국학이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100년 전, 구한말 일제침략 하에서 민족이 갈 길을 잃었을 때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과 독립운동의 대부 홍암 나철 선생이 홍익철학에 바탕을 둔 국학부흥운동이 일어나서면서 국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이 세상에 다시 출현을 한 것은 섭리적인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45년 광복 후 국학을 부흥시키고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한국역사의 큰 축을 이룬 불교와 유교, 기독교의 영향으로 진정한 국학은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5년 이후에는 한문화운동연합의 창시자인 일지 이승헌 총장을 통해 현대 국학운동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1999년에는 전국 유명공원과 초중고등학교 369곳에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을 기증하여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부 종교단체로부터 많은 음해와 핍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한문화운동은 현대 국학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국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2002년에는 민족교육의 전당인 국학원이 설립되고 2008년에는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을 설립되었다. 국학운동은 개인에게는 자신의 뇌 속에 강재이뇌(降在而腦)로 내려와 있는 신성(神性)을 밝히고 위대하고 거룩한 홍익정신을 자각하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공적으로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일본, 영국, 러시아 등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한민족의 국위를 선양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국학운동 회원들은 한민족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과 지구경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5. 국학과 한국학

1) 국학과 한국학의 차이

국학과 한국학의 차이는 주체별, 내용별로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주체별로 구분하면, 국학은 우리민족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탐구하는 역사, 문화, 철학 등의 종합학문이며, 한국학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국학을 얘기할 때 한국학이라고 한다. 미국은 미국의 국학이 있고 일본은 일본의 국학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용별로 구분하면, 국학은 우리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정신과 1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 역사 철학 풍습을 의미한다. 즉 국학은 한민족의 최고(最古)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바탕으로 이어져 온 학문이다. 한국학은 외래의 문화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화된 것으로 홍익의 의미와 천부경을 바탕으로 두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국학이라고 했으나 진정한 의미에선 국학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특히 안동에 소재한 정부출연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국학진흥원)’에서 정의하는 국학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 1501~ 1570)을 중심으로 한 한국 유교문화를 연구하여 계승 발전시키는 기관이다.

정부출연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한국학의 대표적인 중심기관으로 ‘장서각’이 있으며, 조선조 왕실에서 소장했던 자료들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국내에서 국학과 한국학을 구분하자면 대한민국의 민족혼인 홍익정신과 천부경을 논하면 국학이고 논하지 않으면 한국학이다. 한국학은 우리나라 상고사인 단군, 한웅, 한인은 물론 마고시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특색이다.


2) 한국학이 된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도입

다음백과 사전 등을 통해 검색한 내용을 정리한다.

① 유교(儒敎)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 (BC 551경~479경)가 창시한 사상이다. 유교는
맹자·순자로 계승되어온 후 한(漢) 무제(武帝)와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BC 136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한국 유교의 시원에 대해서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BC 12세기경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범금팔조(犯禁八條)을 우리 사회로 교화했다는 이른자 기자동래설이다. 둘째, 고조선과 인접한 춘주 전국시대에 연(燕)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설이다. 셋째,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설이다. 우리 땅에서 나오는 유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 고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구려 소수림왕 AD 372년에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太學)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의 획기적인 의미이다.
백제에서는 유교 사상이 깊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래하였다.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의 순수비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의 임신서기석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 자세를 보여 준다.

고래 시대는 과거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의례제도 등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비가 확산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이는 유교적 역사의식도 이 시대 유교사사의 심화양상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는 유교 즉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하였다.

유교는 국가지배층과 연결되면서 교육시스템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비해 국내 도입시 저항을 받지 않았다.

② 불교(佛敎)

기원 전, 5세기경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시한 종교이다.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AD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AD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 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불교국가에는 없는 칠성각과 산신각이 있다. 이것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건국시조인 한웅을 모시는 한웅전(桓雄殿)이 있었다.

한웅전(桓雄殿)은 원래 한웅(桓雄) 신상을 모시는 곳이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바뀐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이면 석가전(釋迦殿)이라고 불러야지 왜 '큰 남자의 전당' 이라는 뜻인 '대웅전(大雄殿)'이라고 부를까? 게다가 베트남이나 중국, 일본의 절에는 대웅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불당(佛堂)이나 법당(法堂)이라고 한다. 한국 불교는 전통신앙인 선교(仙敎 : 단군조선의 종교)를 밀어내고 국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도교 도입

한반도로 도교가 전래된 첫 기록은 기원후 624년의 고구려(BC c.37-AD 668) 영류왕(재위 618-642) 7년 때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에서는 천존상(天尊像) · 도법(道法)과 함께 도사(道士)를 파견하였다. 파견된 도사는 노자(老子)의 도법을 강의하였는데 영류왕과 수천 명의 고구려인들이 강의를 들었다. 이듬해인 625년에는 고구려에서 학인들이 당나라로 파견되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왔다.

고구려의 도교와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643년과 650년의 기록이 있다. 643년의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2년에는 당시의 실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당나라에서 숙달(叔達)을 포함한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한 사찰에 이들 파견된 도사들을 거처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 사원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SBS 국민드라마 ‘연개소문’에서의 도교(道敎)의 문화침투 상황》

고구려 영류왕은 수나라,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의 70년 전쟁에서 평화시대를 열기 위하여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을 사용한다. 이에 당나라(당태종 : 이세민) 의 사신은 고구려를 문화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당나라의 국교(國敎)인 도교(道敎)을 고구려의 국교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이에 연개소문(배역 : 유동근)은 당나라 사신에게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

- 연개소문 : "무릇 종교는 믿는 사람의 자유의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인데 어찌 강요를 하는가. 게다가 고구려에는 예부터 전해온 선도사상이 있거늘 어찌 그 아류인 도교를 강요하는가? "도교는 우리 동이민족의 정신인 선도사상에서 전해 변형된 아류인데 어찌 그것을 강요한다는 말이냐"

- 당나라 사신 : 그게 무슨 말이냐?

- 연개소문 : 너는 사마천의 사기도 못 봤냐?

④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를 漢字로 표기한 것을 기독교(基督敎) 라고 하는데 기독교의 범주에는 가톨릭(천주교), 동방정교(정교회), 성공회(영국 국교회), 개신교(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안식교) 등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져온 교회는 오직 가톨릭과 동방정교이며 개신교는 1517년 종교반항자 루터로부터 생겨난 종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가 수많은 저항을 받으면서 1831년에 처음으로 천주교 교구가 설치되었다. 현재 그리스도교 인구는 1천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3) 일부 한국학의 폐단

외래종교와 사상이 도입되면서 국학은 이리채이고 저리채이며 생채기투성이가 되었다. 국학은 그동안 중독(中毒), 왜독(倭毒), 양독(洋毒) 등 삼독(三毒)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왜곡되고 축소되어 왔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독생자’라 칭송하고, 불교인은 ‘부처는 삼천대천세계의 대스승’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정작 우리나라를 건국한 단군왕검은 신화(神話)로 만들고 곰의 아들로 폄하하여 왔으며,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패륜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 시대에 왜 국학이 필요한 지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6. 국학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의 사료를 근거로 만든 역사란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1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계승한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어찌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었겠는가? 우리나라 고대사가 부족한 이유는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화를 침투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축소하고 왜곡하고 말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우리는 국학의 참모습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의 전화(戰禍) 속에서 수많은 사서(史書)가 불타 없어져 버렸고, 또한 그들의 왜곡된 역사기록으로 인해 역사의 맥이 단절되고 뿌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재야사학자와 민족사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로 삼독(三毒)을 들고 있다. 즉 사대주의사관에 의한 중독(中毒),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왜독(倭毒), 그리고 지금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증주의 사관에 의한 양독(洋毒)의 피해에 의해서 국학이 왜곡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1880. 12. 8 ~ 1936. 2. 21)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말살하고 왜곡한데도 원인이 있지만 바로 우리나라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했다. 즉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과 삼국유사를 지은 승 일연과 조선시대 동국통감을 지은 서경덕 같은 우리나라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했다.

고려 인종(AD 1,35년)때 묘청의 자주적인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하면서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집권했고, 고려는 중국의 정신적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은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데 있다. 이 사건이 바로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으로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다.”라고 갈파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은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대사건”이라고 했던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단군조선 폐관(閉關) 이후 2천 년간 우리나라는 주변국들의 침략과 지배, 간섭 등으로 점철된 역사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바른 역사이고 잘못된 역사인지 잘 모르고 있다.

일본의 36년 동안의 역사왜곡에는 치를 떨면서 중국의 2천년 동안의 역사왜곡에는 무덤덤하고 오히려 호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역사는 지나 간 기억이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를 정화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는 민족혼을 회복하고 바른 역사를 창조하는 지름길이 된다.
다음은 국학을 왜곡한 삼독에 대해 알아본다.

1) 사대주의 유교(儒敎)사관에 의한 왜곡 : 중독 (中毒)

유교사관의 도입은 단군조선 말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연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유교의 사상이 이렇게 깊다보니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가 국학이라고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 (BC 551경~479경)가 창시한 사상이다.

공자는 자기의 조국인 노나라를 춘추시대의 정통중심국가로 기술하였으며, 노의 은공으로부터 애공에 이르는 춘추기록 242년 동안 시해(弑害) 당한 임금이 다섯이나 있었고 내쫓긴 왕도 있었으나 <춘추> 에는 그 사실들을 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분명한 왜곡으로 당시 노나라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며, 주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도 아니었다.

공자의 생각으로 자기 조상의 사당이 모셔진 노나라는 중원대륙 전체와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스승이 은폐시킨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었고 누가 혹시 물어도 춘추를 방패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에 대해 ‘존자(尊者)와 친자(親子)의 허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예(禮)다’라는 말로 변명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한편으로는 정확한 역사 기술방법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경우와 같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손해될 것은 숨기고 자국을 높이는 자기중심의 역사서술 방법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춘추필법에 의해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철저하게 지나(支那) 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기술했다.
이에 따른 후세의 지나(支那 : 中國) 사가(史家)들의 세 가지 버릇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첫째, 제나라의 허물 된 것은 말하지 않는다 (爲邦避隔: 위방피격). 둘째, 저는 높이고 남은 낮춘다 (我尊他卑). 셋째, 제것은 상세히 말하고 남의 일은 줄여서 말하는 것 (祥內略外: 상내약외)을 말한다. 이러한 춘추필법에 의해 쓰여진 중국 중심의 역사책들에 의존하여 <삼국사기>를 비롯, 소위 말하는 우리의 정통 사서들이 쓰여졌던 것이다.

복애자는 <규원사화 (揆園史話) 서문 (序文)에서,

「조선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 <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 <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춘추>나 <강목> 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중국은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역사와 자기들의 진정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였는데, 진시황은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중국역사의 뿌리가 바로 동이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8년 뒤인 B.C. 213년에 우리 동이족의 역사가 담긴 모든 서적을 불태우게 했고, 이듬해에는 진시황을 비난하던 신선사상의 방사 (方士=道人) 및 그 문하생 460여 명을 검거하여 도읍인 함양에서 갱에 생매장하였다. 그 후에도 중국은 우리 역사를 말살. 왜곡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된다.

유교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계속 성장하였는데 조선 5백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부끄러운 역사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와 철학을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치부하여 억압했다. 사문난적이란 우리의 역사와 철학은 성리학(유교)의 교리를 어지럽힌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비난하는 말이다. 특히 세조는 단군시대와 그 이전의 찬란한 역사가 실린 고서古書인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와 조대기朝代記, 대변설大辯設, 지공기志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삼성비기三聖秘記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 도증기道證記, 통천록通天錄, 지화록地華錄 등 수많은 역사서를 읽지 못하도록 금서령禁書令을 내리고 책들을 거두어들였다. 하물며, 조선왕조 때 ‘사대주의’에 빠졌던 정부 관료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명나라의 속국 조선이라는 뜻)’ 정승판서 누구누구라고 돌비석에 자랑스럽게 새겨 놓았다.

중국의 역사문화 침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은 요하지역(현 만주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1천여 년이 앞선 홍산문화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중국 학자들의 논리대로 정리된다면 신석기 이래로 만주지역 일대는 모두 중국 역사로 편입된다. 2333년 단군 역사는 당연히 중국 황제의 후예가 되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마저도 중국의 방계역사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동북공정의 실체이다.

▶ 분서갱유와 진시황 저격사건의 진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실시했다. 그런데 분서갱유라 하면 유교의 서적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진시황을 비난하던 유교의 선비 또는 유학자들 460여명을 검거하여 갱에 생매장 살해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먼저 분서, 즉 유교의 서적을 모두 모두 불태워 버렸다면 오늘날 전해오는 유교의 경전들을 어떻게 보존해 왔다는 말인가?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명령한 까닭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8년 뒤인 B.C. 213년(진시황 34년)에 함양궁에서 연희를 개최했는데 복사(僕士)라는 관직에 있던 주청신이 군현제도를 예찬했는데 반해 제나라 사람 순우월이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양한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진나라는 진시황의 중앙집권제를 통하여 통치했던 최초의 나라였는데 제나라 사람 순우월이 비난한 것이다. 승상 이사는 진시황에게 상주하여 분서를 단행하게 했다.

분서란 동이족이며 단군겨례의 후손인 춘추전국 각 나라 역사서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 신선사상, 즉 동이족 계통의 문헌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헌에서 단군과 한웅의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한국(한국)의 문화는 유교문화로 둔갑하고 말았다.

갱유 또한 유교의 선비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신선사상의 방사(方士=道人) 및 그 문하생 460명을 매장한 것이다. 진시황은 신선설을 믿어 방사를 신임했는데 그 중의 후생.노갱 두 사람이 진시황을 비난하고 도망쳤는데 그 동료가 숨겨주었으므로 수도에 있는 방사들을 잡아다가 산채로 묻어 죽였다.

신선사상 즉 동이문화의 탄압은 한나라 때에도 계속되었으며 유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다. 유교는 왕 또는 천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중앙집권을 하는 통치자에게 유리했는데 그것은 중국 중화사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춘추제국은 역사와 족보를 잃어버리고 단군조선과의 유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진나라가 6국(춘추제국)을 통일하자 회사(지금의 황하와 장강일대)에 있던 오랑캐(동이족)들이 모두 나라와 조상을 잃어버리고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시황의 탄압에 대하여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과 한나라의 장량(張良)의 진시황 저격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2) 일제 식민주의 사관에 의한 왜곡 : 왜독(倭毒)

조선시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그 동안 우리에게서 문화를 배워갔던 일본인들에게서 36년간을 피맺힌 식민지교육을 당했다. 일제는 역사를 왜곡하면서 우리 민족이 무능한 민족이며, 그래서 일제의 통치를 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조선 사람들을 세뇌시키려 했다. 그리고 국조 단군왕검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우리나라를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기 시작을 했다.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서적을 일제 수색했다. 그 다음해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서적을 약탈해 갔다. 그 때에 우리 민족의 역사책 같은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 그에 관한 서적이 일본에 수없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일제침략기에의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서 수집해 태운 책이 3일 동안 경복궁에서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그 정도의 양이면 거의 모든 책들이 불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상당수의 책들이 다시 복원,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양심 없는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토대의 붕괴를 우려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일제는 약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한다.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료를 수집해서,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한다. 그래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 <조선사>를 일제가 만들었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사람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도이다.
이병도는 이완용의 질손(姪孫)으로 당시 이완용은 고문 역할을 했다.
이병도는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의 수서관보(촉탁보조원)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그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0원 미만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가 <조선사>편찬을 위해서 쓴 돈이 100만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즉, 그 책을 쓰는데 쌀 10만 가마 이상의 돈을 들여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일제가 왜곡한 식민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의 강단에 있는 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의 굴레를 쓰고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된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역사탐구>

◈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으로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창설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일본. 한국의 학자 몇 명을 위원 또는 고문으로 하였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1923년 사료수집. 편찬방법 등을 심의하고 방침에 따라 《조선사》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보다 완벽을 기하고 권위있는 기관을 설치할 필요를 느껴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었다. 이 회는 회장. 고문. 위원. 간사로 조직하고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어 32년부터 38년까지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20종, 《조선사료집진》3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을 식민사관에 입각한 내용들로서 한국인을 우민화(遇民化)하고 자기 비하시키는 등 역사의식에 왜곡된 악서였다. <출처 : 인터넷 백과사전>

◈ 조선사편수사업개요 <“조선인은 조선사 모르게 하라” - 일총독 >
- 일본의 식민사관은 한국을 침탈하기 이전에 준비됐다. 그 정체를 밝혀주는 자료가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편찬하여 그들끼리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다.
“일.한 합방이 된 이 마당에 그들의 역사를 잃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옛날을 생각하게 하여 독립국시대의 구몽(舊夢)에 따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자고로 사적이 많으며, 조선인은 예로부터 독서와 작문력에 있어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민족을 무지몽매의 영역에까지 억압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문명 세태에서 불가능하다. 그런데 고래의 사서(史書)는 현대(합방후)와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시대의 옛 꿈에 빠지게 할 폐단이 있고, 신작들은 일. 청, 일.러 간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등 그 사서들이 심히 고혹케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못 읽도록 절멸하는 것은 오히려 비밀리에 이에 전파하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러한 사서들을 대신하여 공명. 적확한 새 사서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읽게 하는 것이 동화(同和)의 효과를 가져오는 첩경이며, 여기에 바로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새로이 하는 주된 이유와 취지가 있는 것이다.”

- 일제의 조선사편수 취지이다. 여기서 조선사료 인멸의 증거가 드러난다. 또한 조선사 편찬을 놓고 그들 내부에 이견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데 목표를 둔, 3대 기본 요강이란 것이 있다. 우리 나라가 1919년 3월 독립운동을 일으킨 뒤에 제등실(齊藤實,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하면서 교활하게도 조선사람을 반 일본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  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  (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 니, 그때에 일본 서적, 일본 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무서운 저주(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  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일제가 조선사를 편수하는 그 근본정신이 이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래서 ‘금서룡’이라는 자가 고대사를 맡게 되는데,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다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고대사를 말살한다. 일본은 ‘일본’이란 국호 자체를
A.D. 670년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는데, 자기들의 역사를 고무줄처럼 막 늘여서 B.C. 660년부터 시작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단군의 역사’가 있으면 자기들 역사보다 더 앞서게 된다. 그래서 일제는 가장 먼저 우리 나라의 국조(國組)와 상고사(上古史)를 부정합니다.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신화란 단어를 만들어 유포하고, 우리를 곰의 자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한, 일제는 <삼국유사> 대목을 조작해서 고대 한국이란 나라의 실제를 슬그머니 한 개인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즉, 한국->배달국->단군조선 7천년의 역사를 한인->한웅->단군 3대의 이야기로 축소해 버렸던 것이다.


▷ 원본 : 옛날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 조작 : 옛날에 한인이란 사람이 있었다.

현재 출간된 대부분은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환인의 서자'인 것으로 기술돼 있다. 하지만 문제의 因으로 되어 있는 판본을 보면 덧칠한 흔적이 확 표가 난다. 일제시대 이마니시라는 일본 사학자가 변조한 것이다.
변조 이전의 삼국유사를 보고 정리한 동경제대 발간본에는 ‘인(因))자가 아닌 '국(國)'자로 분명히 기술돼 있다. 한민족이 단군 조선 전에 이미 '환국'이란 나라를 형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제가 왜곡했다는 분석이다.


법학자들로서 반세기 또 상고사 연구자로서 사반세기를 꼿꼿하게 살아온 최태영 박사는 최근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를 통해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 권두의 기이(奇異) 제1의 ‘석유환인(昔有桓因)은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일본사람들이 변조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반도사관을 주입한다.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번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한반도에만 국한되어 살았던 민족이다‘라는 반도사관을 주입하는 것이다. ’한반도다‘라는 말도 일제시대부터 나온 얘기다.

그리고, 세 번째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유랑민들이 떠돌아 들어온 곳이 한반도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유랑해 온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만 일삼는 나라로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누어져 싸움박질만 하고, 고려시대에는 음탕한 역사가 진행됐고, 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이라든가 사화라든가, 이렇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맨 싸움만 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추진력이 없이 살아온 미개민족이기 때문에, 대동아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일본이, 당연히 합방해 가지고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는 것이 식민사관의 목적이다. 일제시대 때 역사를 그렇게 배웠던 사람들이 쓴 것이 지금도 한국의 역사교육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탐구>
◈ 일제의 우리역사 왜곡 논리 :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은 그들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한국인의 열등감을 조성하여 독립정신을 근저하여 제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식민주의사학은 대체로 타율성론(他律性論), 정체성론(停體性論),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세 가지 논리로 정리된다.
1) 타율성론 : 한국사회는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며
  그 이후의 역사도 계속 식민지적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는 허황된 논리
2) 정체성론 : 한국 역사에서는 발전적인 역사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1900년대 한국 상황은 일본의 10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논리
3) 일선동조론 :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는 논리로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희석시키기 위한 논리


다음은 최근에 일본인 학자들이 당시 100세가 된 원로 법학자이자 역사연구가이며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최태영 박사(1900-2006년)에게 한 충격적인 고백의 내용이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는 것을.... 일본이 이렇게 빨리 문명화된 것은 다 역사가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청일, 러일전쟁 이겼다.” <일본인 학자들 고백>

☞ 이 증언은 ‘KBS 대화, 세기를 넘어서 - 최태영 박사편, ’99년 5월 14일‘에서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역사적 자긍심과 피해의식의 효과를 충분히 알고 그들의 입장에서 잘 이용했음을 뒷받침해주는 사실들이다.

최태영 박사는 “일본 사람들은 다 알고 속이는데 우리는 모르고 속고 있다. 우리만 모르고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 일본인들이 왜곡해놓은 대로 속고 있다” “ 일본땅에서 직접 일본인들의 역사기록을 숨겨놓은 현장을 목격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사서의 대부분이 일본 황실도서관(정창원)에 주로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3) 실증주의 사관에 의한 왜곡 : 양독 (洋毒)

광복 후 우리는 미군에 의한 군정시대를 맞게 되었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주입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그 영향으로 우리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비합리적, 미신적,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군정시대가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군정에서 실시했던 교육정책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있다.

실증주의 사학 또는 랑케사학이다 해서 ‘ 유물이 안 나오면 안 믿는 ’는 것이다. ‘파편조각이라도 하나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주무대가 중국이다. 거기에 중국사람들이 발견한 고고학 자료들만 해도 무수하게 많다. 그것을 가져다가 역사를 써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양독, 즉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대주의 사관이라든가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바탕 위에서 나오는 완전히 괴물 사학인 것이다.
역사는 철학, 인류학, 언어학, 서지학, 연대기학, 고고학 등의 복합 학문이며, 역사적 사실과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론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학은 19세기 잠시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방법론인 실증주의에 의한 역사방법만을 고집하고 있다. 즉, 땅을 파서 뼈다귀가 나오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 아니면 역사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는 가능한 방법론이나 5천년이 넘는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에서의 이러한 역사증명은 상당히 위험하다.

☞ 일제 식민지 교육학자들은 민족말살론을 위해 이러한 학문법 만을 가르쳤고 일제침략기 조선총독부의 “역사편찬회” 회장이었던 “이병도”가 해방후 미국의 힘을 빌려 당시 학문의 메카이던 서울대에서 역사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비극적인 오류가 시작된 것이다.

※ 중국고대의 기록에 남아있는 동이족의 뿌리

다음은 중국인들에 의해 기록된 중국사서에 남아있는 동이족의 모습이다.

*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고사변-
* 3황5제의 8대 임금들이 숙신(註; 조선의 옛 이름)에서 일어났다. -산혜경-
* 태호복희의 성은 풍씨이며 고대 동이족이다. - 역대제왕록-
 -1989년판 중국 상해출판사
*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 사마천,史記-
* 은나라는 이(夷)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華-中國漢放)의 나라이다.
 - 사마천,史記-
* 치우(註: 배달국 14대 환웅천황)는 옛 천자(天子)이다. - 사마천,史記-
* 천자(天子)의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 되었으니,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예로부터 천자(天子)라 한 것이다.
 -중국의 학자 채용이 <독단> 에 남긴 기록 -
*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가 된 것이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
* 夷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며 활궁(弓)자와 큰 대(大)에서 따온 글자로 그사람은 어질고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 설문(設文): 자해(子解) -
*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살펴보면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역시 크다.
- 설문(設文): 대부(大部) -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중국민족의 조상은 동이족이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제왕들이라는 3황5제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것, 그리고 동이족이 원래 뿌리민족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 한자의 전신인 갑골문자로 유명한 “은나라의 시조가 동이족이며, 그 은나라가 동이족의 나라”라는 것이 중국의 정통 사학자인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한 내용이다. 시조도 그 나라도 동이족의 국가인데 어째서 거기서 나온 갑골문자가 漢族(한족)문자이고 그 역사도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는가?

아직도 단군조선이 신화속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 한국인이 많은데 중국의 사마천 조차 치우(천황)이 옛날 천자의 이름이라고 기록(史記, 二十五史)하여 배달국과 한웅천황이 實在 했었음을 알수 있다. 또 동이족은 동쪽 오랑캐로, 자기들 중국 漢족들은 중화로 높여 불렀지만 애초의 동이족의 뜻이 ‘큰 활을 소는 군자들’ 이었음을 그리고 그 동이족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어질며 큰 것을 따르는 대인들이었다는 사실과 그 자랑스런 후손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역사가 중국문명의 뿌리였다는 증거의 결정판은 현재 (1997년) 중국 북경대학교 엄문명 주임 교수의 증인이다. “중국의 상고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이다”
             - 이중재 者 잃어버린 상고사 중에서 -

결국 중국 고대의 많은 기록은 우리 동이족이 중국 고대문명의 주인공임을 밝혀주고 있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은 약소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을 가르치고 전수해준 뿌리이며 스승의 나라였고 그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광활한 중원대륙이었음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韓國仙道 수행 전통에서 바라본 대종교 선도수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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