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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회 국민강좌 - 환단고기 어떻게 볼 것인가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2-01-31 조회수 :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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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어떻게 볼 것인가.

             박성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환단고기』의 범례와 구성
『환단고기』에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 네 고기가 들어 있다. 첫째 <삼성기>는 상하 두 질인데 하나는 安含老 다른 하나의 元董仲이 찬한 것이다. 둘째 <단군세기>는 행촌 이암의 저술이다. 북부여기는 범장, <태백일사>는 이맥이 지었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이암과 이맥이다.
행촌 시중 이암(1297~1364)은 고려 말 몽고의 침략을 받고 권신들이 고려를 몽고의 속국(행성)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반대하여 상소하기를
1) 하늘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 나라를 가지고 나라로 삼고 또 각기 그 풍속을 가지고 자기풍속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國界를 헐어 섞지 말라. 민속 또한 마찬가지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 이래로 天子를 칭하여 祭天行事를 지내왔다. 지금 일시 남의 수레 밑에 있으나 이미 혼과 정과 혈육이 같고 그 근원이 한 조상을 모시고 있다.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 항我國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2)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어찌 국호까지 폐할 수 있는가. (我國雖小 國號何可廢也) 우리天授太祖께서 창업하시면서 고구려의 다물정신을 이어받았으나 아직 幽營의 땅(중국의 산동성과 하북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보수적인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위서론을 폈다. 아래 글 가운데 原始國家란 말이 있어 위서라는 것이다.
杏村侍中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그러나 위 글은 원시국가라 번역해서는 안 된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하여 “국가체통의 시작과 뿌리를 밝혔다“고 읽어야 한다.
이암의 저술가운데 農桑輯要이 있는데 이색이 서문에서 좋은 책이라 추천하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 되는 것은 이명과 범장이다. 이암은 寶山 太素庵에서 素佺이 神書를 많이 가졌다는 소리를 듣고 李茗, 范樟과 같이 찾아 가서 환단 시대의 眞訣을 얻어 읽고 단군세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다. 이명은 진역유기를 썼고 이 책을 읽고 숙종 때 규원사화가 나왔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소전의 신서에서 유래한 책이다.
범장은 신라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이암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북부여기> 되었던 고기로 휴애 거사 范樟이 찬한 책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李陌이 찬한 책으로 한 말의 선비 해학 이기가 감수한 책이다. <태백일사>에는 천부경을 비롯하여 삼일신고, 가림토, 치우천황 등 진귀한 기록이 담겨있다. 특히 이 고기들을 撰한 사람이 이암 이맥 등 고성 이 씨지만 진사 白寬黙 (태천 사람) 등 백씨도 집안에 물려받았고 이 진사 亨拭(삭주) 그리고 桂延壽(선천) 등 모두 서도와 북도의 북한 사람들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도는 지역차별을 받던 곳이다. 진사란 향시에 합격한 지방의 유생들로서 과거 합격을 포기한 지식인들 요즘으로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데 비판적인 재야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저항심이 강하고 사회적인 불만이 가득 찼던 지방의 지식인으로서 조선왕조가 망하자 주자학에 물든 기호와 영남의 세도가와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에 입각한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위정척사파와 서학을 받아들인 개화파가 일찍부터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새로운 세력이다.
김구와 이승만 같은 사람을 연상하면 되지만 나철, 이기 그리고 단군 사상을 그것은 일반적인 개화사상이 아니라 모화도 반대요 개화도 반대하는 사람들로서 우리 고유문화를 기초로 한 근대화를 바라던 민족주의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사가 환단고기 범례에 명시되어 있다. 그 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1) 자아인간의 발견이요 이를 인간의 主性이라 하였다.
自我人間之發見主性而大賀也 자아 인간의 主性 발견이 기쁘며
2) 민족문화와 민족의 이념의 발견이다.
民族文化之表出理念而大賀也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여 크게 기쁘며
3) 세계인류 공존 평화의 발견이다.
世界人類之對合共存而大賀也 세계 인류의 대합공존으로 크게 기쁘도다.
4) 그 중심에 환단 시대 이래로 전수되어 온 우리 고유의 31心法과 太白眞敎가 있었다. 오호라 환단 이래로 三一心法이 相傳하여 太白眞敎로 중흥하자.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냐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고기가 대부분 북한에서 보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평양은 고려시대에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곳이요 단재가 이 난을 1천년 래 대사건이라 하였다. 사대파와 자주파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두가 북한 땅에서 보존되었던 고기인데 그중 단군세기와 고성 이씨 가문에서 보존해 왔던 것을 桂延壽란 평안도 선비가 발견하고 이를 해학 이기에게 가서 감수를 받아 홍범도 오동진이 도와서 출판했다는 것이다.
북한 땅은 선비들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이들이 유배지에서 살면서 독서로 무료한 세월을 보냈고 그 중에는 별아 별 기서와 참서가 많았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귀경할 때는 모두 현지에 두고 떠났다.

2) 민안부와 천부경
고려 말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가 소장했던 「천부경」이다. 민안부는 조선건국을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한 분이었다. 작자 미상의 杜門洞書院志를 보면 閔安富 號農隱 麗興人 入頭流山 官禮儀判書, 初入杜門洞 後遁居 湖南이라 적혀 있다. 한자 이전의 갑골문자로 쓴 「천부경」말고도 「삼일신고」「소도경전본기」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말의 역사를 남긴 또 한분인 元天錫은 호를 耘谷이라하며 치악산에 들어가 기록을 남긴 분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많은 사서가 없어졌다. 발해가 망하면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은 유명하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많은 고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일부 나오는 고기가 수록되어 있으니 이맥의 『太白逸史』에서는 表訓天詞  大辯經 高麗八觀記 (환국본기 제1 ) 朝代記 1 2 3 4 三聖密記 密記 1 2 (환국본기 제2) 震域留記의 神市紀 1 2 三聖密記 朝代記 1 2 密記 大辯經 1 2 三韓秘記 1 2 晉 天文誌 高麗八觀記 그리고 史記의 封禪書 魏書의 勿吉傳 (이상 시시본기 제3) 이 그것이다.
             
3) 환국과 단국
『환단고기』의 역사 세계는 환국과 단국에서 시작된다. 일연도 昔有桓國)이라고 하였으나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환단고기󰡕는 파내류波奈留산 아래에 환인씨가 세운 나라로 천해(바이킬호) 동쪽의 땅이며 그 넓이가 남북이 5만 리요 동서는 2만 여리에 이르렀다. 거기다 환국의 역년歷年은 3,301년 또는 63,182년이라 하였다. 이어 환웅이 환인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오늘의 동북삼성)에 신시를 세웠다. 일명 배달국이라고도 한 신시는 18세를 전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비로소 단군이 단군(神人)으로 아사달에 수도를 정하여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단군은 환인이 환웅에게 가르친 현묘지도를 득도得道하여 백성을 교화(接化群生)하였다고 라 하였다. 현묘지도는 본시 환인이 환웅에게 교시하였던 가르침이었다.
『환단고기』의 이 기록을 허황하다고 하여 국내 역사가들은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는 인류의 역사는 10만년이나 된다고 하며 지금 인류는 그 수명을 다 살아서 멸종 위기에 있다. 그리고 지구는 그 형성과정에서 지형과 지도를 여러 차례 바꾸어 舊大陸에서 新大陸으로 그 지도를 바꾸었다. 지금의 지도는 신대륙의 지도이다. 구대륙 시대에는 오늘의 희마라야(흰 머리) 산맥이 깊은 바다였다. 또 그 동안 여러 차례 빙하기가 지나고 지금은 간빙기間氷期에 해당하는데 앞으로 기후가 다시 추워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니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매우 불안한 것이다.  이같이 길고 긴 10만년 인류 역사에서 5000년 역사란  20분지 1에 지나지 않는다.

4) 치우 환웅 그리고 고구려 백제의 중원 평정
신시의 14대 환웅 치우천황蚩尤天皇이 중원을 정복했다. 치우가 싸운 상대는 漢族의 시조인 黃帝(軒轅)이었다. 치우를 인정하게 되면 중원이 漢族의 영토가 아니라 본시 우리 민족의 강역이 된다. 환웅의 생존연대는 중국의 삼황시대에 해당하며 중국의 오제시대 이전에 우리가 중원을 지배했던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사의 시초는 엉망이 된다.
 그러나 중원은 당시 한족의 땅이 아니라 동이족인 염제炎帝와 신농神農 그리고 치우의 땅이었다. 그런데 헌원(황제)이 등장하여 신농 땅을 침략하였다. 그 때문에 神農이 쇠퇴하여 같은 동이족인 치우가 맞서니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최초의 동서양 전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동서양 전쟁이란 동이족과 서하족의 싸움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최치원의 글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 전성기에 강병 1백만 대군을 발동하여 남중국의 오와 월(吳越)과 북중국의 제와 노(齊魯) 나라를 정벌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을 점령한 사실은 『환단고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치우 환웅이 중국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을 점령한 것은 그 이전의 환웅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25사 동이전을 보면 동이족이 매우 무강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기사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부여인은 활과 창칼로 무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옥저와 예맥인은 매우 씩씩하고 보전步戰에 능하다.“ “삼한 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강인하고 용맹하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곽을 쌓아놓고 늘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적이 침략해 오면 모든 벼슬아치들이 스스로 나아가 싸운다. 백성들은 후방에서 군량을 날라 병사들을 먹였다.”

5) 민족 고유문화의 발견       
(1) 홍익인간 이화세계
『환단고기』는 또 우리나라에 민족고유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간혹 간접적으로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으나 『환단고기』처럼 자상하고 많지 않다. 가령 『환단고기』의 「삼한관경 본기」에 보면 천황天皇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경계하기를
첫째 부모를 공경하라(父母可敬) 둘째 처자를 보호하라(妻子可護) 셋째 형제를 사랑하라(兄弟可愛) 넷째 장로를 존경하라(老長可隆) 다섯째 약소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라(小弱可惠) 여섯째 백성을 믿어라(庶衆可信)고 하였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의 풍류도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뿌리이고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의 가르침에 유래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천범天範을 내리시기를 너희가 태어난 것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부모를 옳게 모시는 것이 하늘을 모시는 것이다. 또 그것이 나라까지 그 힘을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충효이니라. 도道는 반드시 하늘(天)에 있으니 화가 있어도 먼저 벗어나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에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이 없고 질투함이 없고 음란하지 말아야 한다. 『환단고기』에는 또 산목算木과 투전목鬪佃目 서산書算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가림다加臨多 38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다, 신시(배달국)에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에는 書算이 있었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 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었던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고 남해각서南海刻書를 설명하고 있다.
환국에서 신시와 단군조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현묘지도 즉 선도仙道가 발전하였다. 일명 신교神敎라고도 하는 우리 고유의 종교가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선인도로 이어져 발전하다가 외래삼교를 수용하여 한국화韓國化하였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선도는 가야국으로도 계승되었고 가야의 참시선인旵始仙人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부시도武士道를 전하였다. 가야금도 일본으로 건너가 샤미셍三味線이 되었다.
(2) 선도문화의 계승 발전        
우리나라 민속은 대부분 단국문화의 유속이었다. 삼국시대에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삼교의 유속이 아니었다. 설혹 외래 유속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단군유속에 귀화하여 혼합된 것이다. 그 하나가 아기를 얻은 후 이 아이가 잘 자라게 해달라고 삼신할머니에게 비는 습속이다. 그리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여 가을에 추수한 신곡을 그릇에 담아 농신農神에게 제사 지내는 습속이 그것이다. 또 새로 터를 잡아 집을 지을 때 행하는 성조 굿도 우리나라 고유의 유속이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이라 하고 벼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業이라 하였다. 산을 군생통력群生通力의 장소라 하고 업을 생산 작업의 신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라고도 한다. 집터에 빌기를 또한 터주 대감土主大監이라 하고 집에 빌기를 성조대군成造大君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을 이루는 신이다.  그밖에도 부모가 죽어서 장례를 지내는데 마지막 하관 때 산신제가 있고 먼 길을 떠날 때 신단수 아래에서 지내는 이별의 제사가 있다. 먼 길을 떠날 때 무사하기를 비는 일이나 여비에 보태 쓰라고 주는 풍습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선물로 화답하는 행위가 다 예부터 내려오는 유습인데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묘 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를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각기 제祭가 있으니 제는 반드시 날짜와 재齋를 골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다. 풍어제는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소도가 서면 반드시 다섯 가지 계율은 읊었으니 이것을 오상五常이라 했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서 글을 읽고 활을 쏘는 연습讀書習射를 시켰다. 그리고 말을 타고 치마예절馳馬禮節 격투하고 검술을 익히며 노래와 권박 그리고 도술(歌樂拳撲 竝 刀術) 을 익혔으니 이것을 육예六藝라 하였다.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었나니 충, 효, 신, 용勇, 인仁의 오상이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혼인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며 예절을 익히며 노래 부르며 격투와 검술을 익히는 것 등 여섯 가지 기예였다.
상고시대에는 모든 읍락에 삼노三老가 있어 지도자로 모셨고 나라에서는 육정六正이 있어 국사國士로 모셨다. 모든 읍락에서는 자율적으로 三老를 모셨는데 삼로는 일명 삼사三師라고도 하였다. 삼로는 덕을 갖춘 자와 재물을 베푸는 자 그리고 지혜 있는 자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名師 덕우德友가 그들이다. 또한 육정이 있었으니 모가 이들에게 사사하였다.
상고사회에서는 또 화랑花郞과 여랑女郞이 있어 나라의 기둥 역할을 담당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이들을 국수國粹라 하였다. 박은식은 국수가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특수한 의상을 입고 환웅의 신상에 경배를 하고 살생유택의 계율 등 세속오계의 가르침에 따랐다.
원화源花는 여랑을 말하며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았다. 모자를 쓰는데 있어서도 의식이 있는데 “큰 나무를 모시어 환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이 신령스런 나무를 웅상雄常(환웅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환웅이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살생에 법이 있었으니 살생을 함에 있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었다. 예부터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지 않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에서였다. 살생유택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나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신라 때 생긴 오계가 아니라 그 이전의 환국과 신시 그리고 단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습이었다.

6. 맺 는 말
『환단고기』는 1만 년 전 太始이후 환국의 역사와 신시의 역사를 거처 단군조선 부여 그리고 삼한 등 여러 나라시대와 고구려와 대진국의 역사를 거쳐 高麗國 本紀까지의 상고사, 중고사 그리고 하고사를 모두 관통하고 있다. 史學이란 말이 나온다고 해서 위서라 한 사람도 있다. 經學에 대해 사학이라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의 관례이다, 단재가 말했듯이『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시야에서 역사를 보는 것은 콩알만 한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통해 보는 우리의 역사는 엄청나게 크고 긴 역사세계를 보는 것이다. 콩알만 한 눈으로 보는 역사관을 小韓史觀이라 한다면 『환단고기』라는 확대경으로 보는 역사는 大韓史觀이라 할 것이다. 두 사관은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역사처럼 보이나 둘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제왕운기』 등 사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환단고기』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두 계열의 사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둘로 둘 것인가. 하나는 재야 하나는 강단 사학이라 하면서 언제까지나 외면하도록 버려 둘 것인가. 
물론 『환단고기』에 기술된 역사세계를 일자 일획도 고치지 않고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단지 위서라는 한 마디 말로 외면하고 2000년사를 수정 없이 받아 들이라 고 강요는 것은 보다 더 옳지 않다.『환단고기』의 역사 세계도 가필된 부분이 있으면 도려내야 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흑수와 백산 사이에 자리했던 神市(배달국)를 덮어놓고 부정할 것이 아니다. 중국 桓仁에 한 번 가 본 사람은 거기 고구려가 나라를 세워 환인이라 명명한 사연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도 반성할 점이 많다. 오늘의 한국사는 너무나 작고 좁고 연약한 소국사이다. 한 발작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 소한국사요 유불도 외래삼교가 들어온 뒤의 2천년사이다. 이런 민족의 이력서를 가지고 어디에다 명함이나 내놓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역사를 가지고 힘깨나 쓸 수 있겠으며 땅에 떨어진 국민의 사기士氣를 북돋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소한국이 아니라 대한국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 소한국사 삼서(小韓國史 三書 즉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역사세계를 걷어차고 『환단고기』가 그린 동북아 대국의 6000년 역사를 읽어 우리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힘차게 사대주의와 일제식민사관의 족쇄를 벗어 버리고 올바른 민족사의 틀을 잡아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앞문으로 공격해 오는 중국과 뒷문에서 으르렁대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또 그보다 더 무서운 서구중심사관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역사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익 우익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지금 여당과 야당으로 갈리어 與是野非의 싸움을 되풀이 할 때가 아니다. 미지근하고 하품 나고 졸음까지 오는 기록의 연속. 이것이 조선 역사의 외형이다. 거기다 오늘의 우리들은 역사를 모르는 불구자요 미성년자이다. 육당 최남선이 한 말이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하품하는 오늘의 정치 언론 경제를 모두 털어버리고 지금이야 말로 『환단고기』의 역사 세계와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을 젊고 발랄한 우리들의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어떤 다른 물질적 유산보다 더 소중할 것이다. <이상>
   
  서기 2012년 단기 4345년 1월 10일 국학원 강좌

                 박성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의 한국사 비판 

           단군 논쟁  ~ 머 리 말 ~

정부는 중고등 학교에서 다시 한국사를 가르치겠다고 발표하였다. 도대체 자기 나라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나라가 주권국가인 이상 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런데 한군데 있으니 바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50년간이나 독립운동을 하여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은 다물의 나라가 아닌가. 그것도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독립한 나라가 아닌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대가로 우리는 남북분단의 아픔을 안고 다시 60년을 지내고 있다. 그런 나라인데 어떻게 해서 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단 말인가.

1) 옛날 그대로 국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어느 정권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정신이 나간 것이다. 고려 말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독립국이었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몽고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우리 고려만은 독립국이었다. 그때도 매국노가 있어서 고려를 폐지하고 몽고의 소국 행성으로 만들자고 한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망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서유럽까지 몽땅 몽고군의 지배를 받을 뻔한 판국이었는데 고려 한 나라만은 독립을 유지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인데 단 한 번도 국민에게 그런 역사를 가르친 일이 없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국사를 다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먼저 곰곰이 생각하고 국사교육을 다시 시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근대화니 민주화니 하는 구호 아래 자기 나라 역사를 가르치는데 소홀하였다. 심지어 세계사가 중요하지 국사는 어디다 써먹느냐고 주장한 학자가 있었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나라가 국사 없는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제정신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을 손자에게 가르치지 않기로 했겠는가. 반세기나 외적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의 설움에 피눈물 흘려야 했던 나라 백성이 반세기가 지나자 벌써 그때 그 일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건망증이라 하기보다 역사적 치매라 해야 할 것이다. 50년 넘게 독립운동을 해서 겨우 나라를 되찾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정신이 몽롱해졌는지 문교당국이 자기 나라 국사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 교과서문제를 가지고 그동안 얼마나 일본을 비난했던가. 어제 그저께까지만 해도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두 나라의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극비리에 밀실 토론을 해왔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나라가 국사교육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으니 일본이 놀랄 수 밖에 없다. 바둑을 두다가 갑자기 상대가 돌을 던진 것이다. 세가 불리했던 것이 아닌데 돌을 던졌다. 그러니 일본이 한국을 만만히 보고 독도는 일본 땅 위안부는 창부, 강제징용은 월급 받고 노동한 사람들 하면서 마구 근대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한,일 간에 싸우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 틈을 타서 「동북공정」이라 하여 발해사는 물론 고구려사, 신라, 백제사까지도 자기네 속국의 역사라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은 지난 날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생하였다. 지금은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합세해서 한반도문제를 6자 회담에다 걸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문제를 남들의 힘을 빌려 해결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는데 스스로 국사교육을 포기하니 이러다가는 100년도 못가서 또다시 열강의 노리개가 될 것이 아닌가.  100년 전 대한제국을 속여서 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국사 책을 압수하여 불 쏘시개를 만들었고 그래도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우리 국사를 왜곡하여 한국인의 정신을 뻿어버리려고 하였다. 그 나라 국민의 정신은 국사에서 오는 것인데 그런 국사를 마치 남의 역사나 되는 것처럼 한국사라 하지 않나 머리와 손발이 잘린 채로 역사를 가르치지 않나 정말 기막힌 문교정책을 하는데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지난 날 일제가 만든 『조선사』에는 상고사라는 머리가 없고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침략한 팔다리가 잘렸는데 그런 병신이 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되는가. 일제는 단군을 일본 천황족의 시조 천조여신의 동생이라 하였었다. 다시 말해 일본 천황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 기록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단군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역사를 배우다가 겨우 36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지만 한국사는 여전히 광복되지 않고 빙빙 돌아서 좌편향 우편향하다가 마침내는 국가교육 을 폐기하였던 것이다. 
국사과목이 없어진다고 하는데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소수의 학자들이 항의하기는 하였으나 그 목소리가 모기소리와 같아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던 날 장지연이 『황성신보』에 “오늘이야 말로로 크게 통곡할 날이다(是日也放聲大哭)”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백만대군의 함성보다 더 큰 소리였다. 장지연이 그런 언론인인데도 좌편향 역사학자들은 장지연을 친일파라 하여 반역자의 대열에 세워 처형하였다. 요즘의 대한민국에서는 국사교육이 없어진다고 하는데도 통곡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100년 전의 망국과 오늘의 망국은 같은 망국이지만 그 모양새가 다르다. 오늘의 망국은 주권의 상실이 아니다. 주권은 살아있으나 정신이, 나아가 자국 역사는 물론 문화가 쇠망하는 망국인 것이다. 국사는 국가의 몸체요 뼈대이다. 그런데도 나라 안에 우는 이가 없었다. 100년 전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외치는 장지연과 같은 언론인도 없고 사학자도 없는 것이다. 도리어 돌아가신 장지연 선생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은 너무 안락하게 살아서 도끼자루 썩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망국을 개탄하는 학자가 없고 우리가 잘 산다고 자랑하는 정치인들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그 옛날 신라가 망할 때 최치원 선생이 미리 눈치를 알아차리고 가야산 속에 들어가 숨었다. 그때 신라의 서울 경주에는 초가집 하나 없고 사절유택에서 호강하는 부자들만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사절유택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옮겨가면서 사는 별장을 말한다. 신라는 그러다가 망했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적혀있으니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 때와 같다고 경고하는 학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학자가 없고 가르치는 교사도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런 글을 쓴다고 해도 걱정하는 사람을 보고 그런 기우는 버리시오 하면서 비웃는 사람만 있는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의 주모들은 일제히 가게 문을 닫고 술을 팔지 않았다. 너무 분하고 슬퍼서 장사를 집어치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거사를 청산한답시고 국가예산을 탕진한 좌편향 사학자들이 감히 장지연 선생을 친일파로 몰아 처단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는 국사 교육이 영어,수학, 국어, 아니 영어 교육에 밀려 폐지된다고 하는데 이런 망국 현실을 보고도 통곡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국사를 교육하지 않는 나라”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는 데 한국이 그 유일한 나라가 된 영광(?)을 안았다. 한류韓流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 고유의 춤사위가 무엇이며 노래 가락이 무엇인지 모르고 남의 것을 가지고 한류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춤이 누구의 춤인지 아는가. 그리고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라를 팔고 욕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1997년의 외환위기가 오드래도 우리는 제2의 망국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2)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최근 다행히 국사를 다시 가르친다고 하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초등학교 학생과 그 학부형들은 아이들 점심 못 먹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하고 대학생들과 그 학부형들은 등록금 반값 운동에 정신이 나아가 국사 교육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물론 등록금이 이렇게 많이 올랐는지 필자도 몰랐다. 아무리 돈값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대학 등록금이 1년에 1천만 원이라니 말이 되는가. 배추 한통에 2만원한다는 소리보다 훨씬 무서운 사건이다. 지난 날 대학을 우골탑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소 대신 자가용차를 팔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의 등록금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국사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일이다. 이 문제는 자녀를 어느 고등학교 어느 대학에 보내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아이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어떤 선생에게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취직만 잘 해달라는 것이 오늘의 학부형들의 소원이라면 나라가 망한 것이다.
우리 아이 학교에서 국사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놀라는 학부형이 없다.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대번 항의가 빗발 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전적으로 교과부와 대학을 믿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교과부가 무엇인가. 어찌 교육이 과학과 같은 부서에 속하게 되었는가. 그것부터가 잘못이다. 과학은 과학이고 문ㆍ사ㆍ철 인문교육은 따로 이다. 그런데 그런 이질적인 분야를 통합한 이유는 오로지 정부의 기구를 축소하여 예산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업자가 많아 기구도 늘리고 사람도 더 써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실직자가 많아서 교육부와 과학부를 분리시켜 좋은 인재를 더 길러야 할 처지에 놓였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하려면 교육도 알고 과학도 알아야 한다. 어디 그런 사람이, 인재가 있는가. 현재 교과부장관이 그렇게도 유능하단 말인가. 과학 하나도 다스리기 어려운데 교육부까지 맡을 수 있다는 것인가.
국사교육 하나 다스리지 못한 인물에게 과학을 어떻게 떠맡길 것인가. 국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또다시 국사교육을 맡기게 되었으니 일이 잘못될 것이 뻔하다. 국사 교육을 다시 시작한다는 소식에 기뻐만 할 것이 아니라 꼭 알아둘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국사는 우리나라의 본시 역사가 아니라 지난 날 일제가 가르친 『조선사』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국가교과서가 다시 등장하여 수업이 되풀이 된다면 하나마나 한 것이다. 상고사가 없고 밤낮 침략만 당하고 있었다는 국사만 되풀이 가르친다면 가르치나 마나 한 것이다.

3) 좌편향에서 우향우 하는 것인가.
한국사를 다시 가르치겠다는 학자들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이란 일본 말을 흉내 내고 있지 않는가 ? 자학이란 말은 일본극우세력이 쓰는 말이다. 왜 그런 말을 아무 여과도 없이 그대로 써야 하는가. 학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아니면 단어실력이 없어서 따라 하는 것인가. 다른 말이 얼마든지 있다. 왜 우리말을 쓰지 못하는가. 이 말은 바로 우리가 비판하던 일본 극우파들의 말이다. 그런 말을 내로라하는 한국의 언론인과 역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복창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흉내 낼 것을 흉내 내고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지 그런 일본 야쿠자(깡패)의 말을 흉내 내어서야 되겠는가. 국모 명성황후를 죽인 자가 바로 일본 야쿠자(깡패)들이었고 그들의 피 묻은 칼이 지금도 일본 구마모토(熊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데 ‘나는 못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가서 보라. 여비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국사교육을 다시 시작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국사교육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그동안의 우리나라 역사교과서가 좌편향 하였으니 이것을 우편향의 역사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10년간 좌경향정권이 세상을 뒤흔들고 나니 국사는 북한 교과서를 닮아갔고 우리 교과서와 교사가 남북 어느 편의 교과서와 교사인지 모르는 경지에까지 도달했었다. 특히 현대사 부분에서 심했다. 그래서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를 고치겠다는 것이 금번 국사교육부활의 주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가 현대사에서만 상처가 나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상고사 부분부터 다시 재검토해서 고쳐야 한다. 현대사만 고친다고 해서 머리 없는 귀신이 사람으로 환생하겠는가.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을 필자는 한국사 비판이라 하였다. 최근 행정부의 고위층 관리가 “오만 군데“라는 말을 잘못 썼다가 국회의원들에게 호된 공격을 받았다. 오만 군데서 압력을 받았다는 것은 오만五萬이나 되는 곳에서 압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오만 군데란 누구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고 국회의원이 다그쳐 물으니 국무총리가 대답하기가 난처했던 것이다. 말을 잘 못한 것이다. 도대체 국무총리란 사람이 국화의사당이란 점잖은 자리에서 이런 속어를 썼으니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러나 오만가지 오만 군데란 말은 우리 한국사에 대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사는 오만 군데에 상처가 나 있는 것이다. 비단 현대사에만 상처가 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의 오만 군데가 상처투성인 것이다.
상고사는 한국사의 머리다. 한국사의 머리는 한국사의 몸체를 움직이는 사령부나 다름이 없다. 다리 없는 장애자는 홀로 수레를 타고 집을 나아가 혼자 돌아올 수 있어도 치매에 걸린 노인은 혼자서 집에 돌아올 수 없다. 미아가 되는 것이다. 우리 상고사는 어디서 시작되는지 그 기록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들어내고 있다. 길게는 우리 역사가 6천년 역사라 하지만 보통 5천년 또는 4천년 역사라 한다. 그러나 더 짧게는 2천년 또는 1천5백년까지 줄여서 말하는 학자가 있으니 이렇게 들쑥날쑥 열골 같은 역사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왜 이렇게 길이가 다른가. 아니 나이가 다른가를 적어도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4) 대원군의 애국심을 배워라.
보통 우리나라 역사를 반만년 역사 즉 5천년 역사라 한다. 그 시원을 살펴보면 1919년의 3.1독립선언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2월 1일에 만주 길림에서 제일 먼저 발표되었다는 독립선언서(조소앙 집필)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우리 대한은 태고 이래로 우리 대한의 한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 역사의 내치와 외교는 한 왕 한 황제의 고유주권이요 한의 주권 일부라도 이민족에 양도할 이유가 없고 우리 한은 완전한 한인의 한이니라.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Korea is for the Koreans and not for other races. The interior administration and foreign intercourse are the inherent right of the Korean rulers and Korean government).

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대한은 무시(태고)이래로 반만년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무시란 태초부터 라는 말로서 영어로는 "처음부터"란 뜻이다.
그 뒤에 나온 3,1독립선언서에서도 5천년 역사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다고 명언하고 있다.

우리는 오천년 역사와 2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We make this proclamation, hawing back of us 5.000 years of history, and 2,000,000 of all united loyal people.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서 조선왕조 말로 소급해 올라가면 5천년이 4천년으로 바뀐다. 요즘 프랑스로부터 외규장각 도서를 건너 받아 150년 만에 돌아온 우리 문화재를 환영하였다. 우리 외규장각은 강화도에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습격하여 저항하는 조선수군을 물리치고 우리 문화재를 강탈하고 배에 싣고 갔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하는데 대원군은 그때 프랑스와 미국 군함을 물리치면서 시를 지었다. 그 안에
  “우리에게 4천년 역사가 있는데 달리 또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는 말이 있다. 얼마나 씩씩한 말인가. 그러나 4000년이란 숫자는 기자가 동래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를 말한 것이다. 대원군은 단군조선 1000년을 빼고 우리 역사를 4000년 역사라 한 것이다.
역사의 길이를 재고 연대를 측정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기록이 중요하다. 고고학적 발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기록이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기록한 사서로는 1) 『삼국사기』 2) 『삼국유사』 3)『환단고기』가 있다. 그밖에도 많이 있지만 위의 네 책은 우리나라 상고삼서上古三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서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달리 기록하였다.
1) 『삼국사기』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한 해 이전에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었다고 하였다.
2) 『삼국유사』도 단군의 고조선건국 (서기 전 2333년) 이전에 환웅의 신시 그리고 환인의 환국이 있었다고 했다.
3)『환단고기』는 우리 역사의 시작이 환인의 환국 이전의 나반과 아만까지 소급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역사를 2000년으로 잡았고 그보다 더 짧은 역사로 잡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였다.
이처럼 현대사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바로 시작의 문제이다. 시작을 모르면 끝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런 중대한 상고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100년도 안 되는 현대사문제를 고치려 드는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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