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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국민강좌 - 한국과 일본의 천손문화 비교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1-03-31 조회수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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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국제 뇌교육대학원 석좌교수


한국과 일본의 천손문화 비교


‘단군’모시는 태양신 제사의식 신라 천일창 왕자가 일본에 가져갔다.

패전 후의 일본의 역사연구 중 가장 주목되는 학문적 성과가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였던 도쿄도립대학 교수 오카 마사오(岡正雄, 1898 ~1982) 박사의 다음 같은 연구 발표였다. “단군 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3종의 보기’(寶器)를 주어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했다. 그와 같은 조선 신화를 가져다 본뜬 것이 다름 아닌 일본 신화의 ‘3종의 신기(神器)’였다.”고 단정했다. ([日本民族文化の源流と日本國家の形成] 1949). 뒤를 이어 일본에서는 민족학자뿐 아니라 역사학자며 신화학자들도 줄지어 올바른 한일 관계사의 역사 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일본 고대역사에 보면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 왕자가 최초로 일본에 ‘곰신단’(熊の神籬)을 가져감으로써 일본 왕실에는 비로소 일본의 신도(神道)가 개창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신궁(神宮)이 섰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일본 제11대 스이닌천황(垂仁, BC. 29~AD.70) 3년 3월에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왜나라에 건너왔다.”고 했다. 이 당시 천일창 왕자는 신라에서 ‘곰신단’(熊の神籬)이외에도 옥(玉)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 등 일곱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

옥(玉)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이 천황가 삼신기(三神器)의 실체라는 오카 마사오 교수의 주장에 앞서 일찍이 도시샤대학 사학과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교수가 “곰신단은 고조선의 ‘태양신’(日神)을 모셔다 제사지내는 하늘의 제사 종교의식(天的宗儀)”이라는 연구논문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즉 단군 신앙이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 왕실로 전래된 것을 다음처럼 시사했다.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의 이름은 ‘태양신’(日神)을 모셔다 제사지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동탁(銅鐸, 종 모양으로 생긴 구리쇠의 왕실 제구<祭具>, 필자주) 내지 동검 제사(銅劍祭祀, 왕실에서 ‘구리쇠 칼’을 제단에 모셔놓고 제사지내는 일, 필자주)로 상징되는 하늘의 제사 종교 의식(天的宗儀)을 신라에서 가지고 와서 활약한 것이다.”([三品彰英論文集]第4卷,1943).

이세신궁의 단군 역사와 신앙을 말살,‘천조대신’을 신주(神主)로 위작

 
좀 더 구체적으로 천적 종의(天的宗儀)를 풀어보면 그것은 상고시대 조선 민족이 곰신(熊神)을 받들며 신단에다 단군을 모시는 천신 제사의식(天神祭祀儀式)이었다고 본다. 이 제사 의식에서는 제단에 제물과 함께 칼이며 동탁 등을 진설했다고 보련다. 천신 제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늘의 신을 해의 신(日神), 즉 태양신(太陽神)으로 상징해온 것을 의미한다고 보련다. 그런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신라 왕자 천일창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延烏郞)으로 추찰하는 주장도 나온 것이다.
도쿄대학 사학과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郞) 교수 등이 “<삼국유사>(권 1)에 신라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이 일본에 건너와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 세오녀(細烏女)도 뒤따라 건너와서 귀비(貴妃)가 되었다.”는 역사 설화를 지적한 것은 조선상고시대 단군 천신제사 의식이 일본으로 건너간 발자취를 규명하는 역사 연구와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 연오랑은 신라 아달라왕(154삼국유사 재위, <삼국사기>) 4년인 서기 15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일본 건국 최초의 왕을 신무천황(神武)이라고 한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사학과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교수는 “초대 신무천황과 그 뒤를 이은 제9대 가이카천황(開化天皇, 개화천황) 까지 모두 9명의 천황은 일본 역사책에서 조작된 왕들이었다.”고 폭로 비판했다.(津田左右吉 [古事記及日本書紀の新硏究]1924, 外). 그것은 당시 새롭고도 중대한 역사론의 전개였다.

일본의 국수적 황국 신도가들이 에도시대(1603~1867) 후기부터 일본 역사를 약 6백 년 위로 더 만들어 연장 상향 날조했다는 것이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교수 등 양식 있는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의 통설이다.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쓰다 소키치 교수의 그런 과감한 비판은 조선을 강점하고 만주와 중국 땅까지 침범하고 있던 당시 일제 군국주의자들을 크게 당황케 했다. 그들 관헌은 쓰다 소키치 교수를 강제 연행했고 또한 그의 주저서 4권을 서점가에서 즉시 압수 판매금지 처분시켰다. 그뿐 아니라 쓰다 소키치 교수를 “일본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죄로 금고 3개월의 유죄 판결했다.” (三省堂 [人名辭典] 1978).

사실상 일본을 건국한 최초의 왕으로 고찰되는 인물은 스진(崇神)천황이다. 그러나 황국신도가들이 조선 삼국시대의 개국시기보다 일본이 훨씬 더 앞섰다고 위장하느라 그들의 역사를 상향 조작 날조(ねずまさし[天皇家の歷史]1973)한 일 때문에 사실상의 초대 일본 왕이었다는 스진천황의 정확한 지배시기를 알 수 없다.

<일본서기>에 보면 스진천황은 제10대 천황(BC.97~30)으로 매겨져 있고 스진천황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제3왕자 스이닌(垂仁)천황(BC. 29~ AD.70)이다. 일본의 국수적 황국신도가들은 역사를 추켜올리면서 이세신궁(伊勢神宮)을 ‘기원(紀元)2600년 만세일계 천황가’의 천하 최고 성역(聖域)의 신궁(神宮)이라고 강조해왔다. 이는 단군 조선 역사와 신앙 말살책에서 비롯되었다. 즉 성지인 이세신궁이 본래 신라 천일창 왕자의 곰신단에 의하여 일본 최초의 신궁(神宮)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은폐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도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궁(神宮)’이라는 호칭조차 일본에서 최초로 발상된 것이 아니었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일본의 신궁(神宮)이라는 호칭 그 자체조차 조선이 일본보다 더 빠르다. 신라는 지증왕(500~513 재위) 때 신라 시조 박혁거세 강림 탄생의 성지(聖地)인 나을(奈乙, 경주의 옛 이름, 필자주)에다 신궁(神宮)을 세웠다.”며 신라에 의하여 일본에 신궁이 처음으로 선 것을 밝혔다. (上田正昭 [石上神宮と七支刀]1973).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지 100년을 맞은 치욕의 8월29일에 이번 두 번째 원고를 쓰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불법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우리 국민을 분노시키고 있다. 그들이 언제까지 강제 병합을 버틸 것인가.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조상이 일찍이 상고시대 일본 땅에 공고하게 심었던 우리 국조 단군왕검의 천신 신앙에 대한 역사를 바로 익히도록 힘쓰자.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왕실 최고의 사당 이른바 국가 신도의 성전이라는 이세신궁을 세웠을 때 본래 이곳에 모신 신은 단군왕검을 신봉하던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그 터전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역사를 뒤집은 것은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역사를 조작한 ‘황국신도(皇國神道) 2천 6백년 만세일계의 천황’이라고 하는 역사 날조 당시의 처사였다. 그들은 일본 이세신궁의 단군 신앙을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라고 위작(僞作)했다. 대다수 일본인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반역사(反歷史)의 죄악이다.

19세기 말엽,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주신은 본래 부여의 영고신(迎鼓神), 고구려 동명신(東明神), 예(濊)의 무천신(舞天神) 등등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神道は祭天の古俗/신도와 제천의 옛 풍속]1891).

이 논문에 당황한 일본 군국주의자들(倉持治休 등)은 구메 구니다케 교수댁을 기습하여 일본도(日本刀)를 교수의 목에 들이대고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 교수는 끝내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했다([東京日日新聞] 1982. 3. 4일자).

살벌하기 그지없던 19세기 말엽 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학문의 자유와 양심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연구론을 발표했으나 극단적인 극우 반한 세력들의 가택 습격까지 받은 것이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강압적으로 구메 구니다케 교수를 도쿄대학의 현직 교수직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그뿐 아니라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사학회잡지>와 <사해>는 판매금지 처분했다. 당국의 압박뿐 아니라 황국 신도가며 극우 역사가는 박사를 불경이라 매도하며 황실(皇室)의 이름을 빌어 사회적 압박을 가했다.”(무카사카 이쓰로 向坂逸郞[嵐のなかの百年/폭풍 가운데 백년‥學問彈壓小史]1962). 이렇듯 극단적인 황국 신도가들은 조선 단군 역사 말살책에 광분했다.

구메 쿠니다케 교수, “이세신궁은 본래 단군 받드는 조선민족의 모든 신을 제사모셔온 사당”발표후 핍박받아


근년에 와서도 황국사관은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식 있는 일본역사 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가토 아키라(加藤 章) 교수는 “생각하자면 전후사(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 속에서 역사교육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황국사관’으로부터 껍질을 벗는 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국사교육(일본 강점기의 잘못된 신도주의 황국사관 교육, 필자 주)에 대한 틀 바꿈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에 학습 지도요령이 거듭하여 개정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표나 내용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이웃 나라이면서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 측으로서는 자각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일이 시행되어 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저하게 행해진 일본 제국주의 비판 하에서 자라난 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사이에는 한국에 대한 역사교육에서 커다란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논문<日韓歷史敎育交流のなかで/일본과 한국 역사교육교류에 대하여>, 1993).

<일본서기> 기사에서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은 신라 왕실과 신라계 스진왕가의 밀접한 혈연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들이 곳곳에 많아 그 당시 천일창의 존재가 왕에 필적하는 신분이었음을 살피게 한다.” (다니가와 겐이치 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 集英社, 1979).

그렇다면 과연 그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인가라는 추찰도 동시에 앞으로의 연구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신앙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에 천신 제사 의식이 등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곰신단(熊の神籬)을 가리켜 18세기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데이칸(藤貞幹, 1732~97)은 그의 역사 고증 저서인 [쇼코하쓰]([衝口發],충구발)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라고 단정했다. “곰신단(熊の神籬)의 신리(神籬, 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社, 사당)이니라. 무릇 신리는 그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 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로다. 신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말(新羅語)이며, 신라어를 그 당시 일본에서 빌려서 쓰게 된 것이로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신리도 천일창이 조상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것이다.”


이처럼 도데이칸은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민족인 한국 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신단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이두(吏讀)’가 일본 고대에 일본어 표기법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은 이두에 의하여 일본말의 한자 표기법인 ‘만엽가나(萬葉假名)’가 일본에 생겼다는 것은 일본강점기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小倉新平) 교수가 밝힌바 있다. ([吏讀の硏究], 1925).

해마다 11월 23일 저녁이면 곰신단에 의해 일본 고대왕실 신상제(新嘗祭) 제사에 조선신 신주들 세분을 모셔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황실의 왕실법도(<延喜式 연희식> 전50권, 927년)에도 밝혀져 있다. 즉 ‘한신韓神’이라는 제목의 축문에는 원신(園神, 신라신) 한 분과 한신(韓神, 백제신) 두 분의 신주를 제사 모시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겨레가 동이(東夷)이며 고조선과 부여(扶餘, 만주 벌판)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추수를 감사하고 제사 지낸 영고(迎鼓)며, 고구려 때의 동맹(東盟.東明)이나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 등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거행했던 제사축제였다. 농본(農本)시대에 가장 고맙고 또한 두려운 존재는 하늘의 조상인 천신이었기에 결코 잊지 않고 외경하며 숭앙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농경시대는 햇빛과 비를 잘 내려주시는 ‘풍백, 운사, 우사’등 우리의 하늘 신을 우러렀고 쇠붙이를 달구어 삽, 괭이 따위 농기구며,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대장간이며 철기(鐵器)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고 했거니와 곰신단을 모시고 아울러 전쟁 도구인 칼을 가지고 왜(일본)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강력한 무력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천황가의 신보인 옥과 거울도 가지고 건너감으로써 왕도(王道)를 형성하는 삼박자를 빈틈없이 갖추었던 것이다.

그가 신라인 스진왕조의 제2대 왕인 스이닌천황에게 찾아갔다는 것은 스이닌천황을 신라 왕족으로서 승인하고 일본 열도의 신라인 정복 왕조를 공고하게 떠받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의 신 환인(桓因) 등 천신(天神)의 후손인 천손족 (天孫族)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 역사인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등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그 점은 일본 <고사기>의 신대(神代) 기사 등과 함께 일본 고대 사학자들의 공론이기도 하다. 왜나라 최초의 정복왕인 스진천황의 숭신(崇神)이라는 휘(왕의 이름)에도 ‘신을 숭배한다.’는 천신신앙사상(天神信仰思想)이 구체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본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祐) 교수는 천일창왕자가 스진왕조 때 칼이며 옥과 거울 등 신보(神寶)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옛날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자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神寶)를 천황이 갖추어서 갖는 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으로서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단정했다.(水野 祐[天皇家の秘密/천황가의 비밀] 山手書房, 1977)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단군의 천신 신앙과 고대 일본 지배의 왕가 형성을 진솔하게 시인하는 증언이다.

“삼족오”(三足烏)가 우리 조선 상고 단군시대 민족의 ‘해의신’(日神)의 표상이라는 것을 고증하는 사진들을 밝혔다. 특히 일본 천황이 등극할 때 입었던 이세신궁 천황가 큰사당에서 대상제(大嘗祭) 천신 제사 때 입은 붉은 윗도리 제복(祭服) 왼쪽 어깨위의 삼족오와 오른 쪽 어깨 위의 달신의 표상인 두꺼비가 역연한 것을 독자 여러분들은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것이 고구려며 백제에서 이미 일본 고대에 앞서서 우리 한민족의 해의 신, 달의 신으로서 숭앙되었다는 역사의 발자취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6세기말부터 백제 여성 제33대 스이코(推古, 592~628 재위)여왕이 등극한 이듬 해 1월, 나라(奈良)의 아스카 땅에서 한창 건축 중이던 백제인들의 7당 가람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의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왜왕실의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百濟服)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扶桑略記] 13세기)고 하는 역사 기사(사진 참조)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고대 나라 지방의 아스카(飛鳥) 땅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주인공은 백제 여성인 스이코 여왕이라는 것은 일본 학자들의 정설이기도 하다.

일본 ‘아스카 문화’라는 것은 스이코 여왕 시대의 ‘백제 불교 문화’를 일컫는다. 그런데 더욱 크게 주목할 것은 일본 왕실에서 입었다는 고대 왕실 왕복이다. 왕의 곤룡포의 왼쪽 어깨 위에는 역시 해의 신 상징인 ‘삼족오’가 수놓여져 있고 오른 쪽 어깨 위에는 또한 달신의 표상인 두꺼비가 또렷하다(사진 참조). 지난 1989년에 지금의 아키히토천황이 등극하던 천신 제사 때 입은 것과 똑같은 내용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황국신도 국수주의자들은 우리 고조선 단군 상고사 말살에 광분했던 것이다.

백제에서 일본 아스카로 건너간 건축가를 비롯하여 기와박사와 여반박사, 화공 등 수십명이 왜의 선주민 인부 수백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불교 문화를 꽃피우던 구다라(백제) 왕족들의 야심 찬 아스카데라 건설의 대업을 이룩하던 시대에 여왕과 만조백관들은 무엇 때문에 백제 옷(百濟服)을 입었다는 말인가를 굳이 반문할 필요가 있을까.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세이조대학 사학과 교수는 “조메이천황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新撰姓氏錄硏究] 1970년)라고 진솔하게 연구 발표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硏究])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그 책을 직접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SBS-TV 방송 [특집 역사전쟁, 2편] 2010년 9월5일 밤 11시 10분부터 방영). 이 자리에는 우에다 교수의 애제자인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학 일본문화연구소장·교토시역사자료관장 겸직) 교수도 배석해 있었다. [신찬성씨록]에 제30대 “비다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기록이 들어가 있기에 스이코 여왕의 부군이자 배다른 친오라비였던 비다쓰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면 스이코 여왕도 어김없는 백제 여성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사기] 연구를 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외래 사상이며 유교를 철저하게 배척했다([直毘靈]). 그는 신화시대며 고대로의 소위 복고(復古) 사상을 외치면서 고문서와 금석문 등 고고학적인 연구로 저명한 고증학자(考證學者)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7)의 저술([衝口發])을 격앙하여 능멸하며 일방적으로 배격 비판했다([鉗狂人]).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반한적(反韓的)인 배타적 국수주의의 신봉으로 이른바 조작된 황국신도의 ‘고대 정신’(古代精神)을 내세우면서 토테이칸에게 짐승을 묶는 ‘솨사슬을 목에 맨 미치광이’라고 야유하는 그런 끔찍한 제목의 책자인 이른바 [겸광인](鉗狂人)을 써냈다.

그야말로 이성을 망각한 발광적인 작태였다. 반한(反韓)의 기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횡포 이를테면 토테이칸이 여러 가지 고서의 고증 등 연구로서 일본어의 실체에 대하여 “우리 일본의 언어는 그 중 십중팔구가 상고 시대의 한국음과 한국어 또는 서녘의 음(音)에서 건너왔다”(本邦のは言語、十中八九は上古の韓音韓語、或は西土の音の轉ずるもの也.[衝口發])고 한국으로부터 일본어가 큰 영향을 받고 성립된 사실(事實)을 밝히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그의 연구에 대해 다음처럼 격노하며 국수적 황국 사상에 치우쳐 배격했다.

“황국언(皇國言, 그 당시 일본어를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른바 ‘황국언’이라고 최초로 일컬었음, 필자주)은 신대(神代) 초기로부터 비롯된 스스로의 황국언으로서 그 경사스러움도 묘하다. 또한 여러가지 ‘북녘 오랑캐 한어’와는 함께 논할 수 조차 없다”(皇國言は神代の始より、おのづからの皇國言にして、其めでたく妙なる事、諸の戎狄言と、同日に論ずべきにあらず。[鉗狂人]).

이렇듯 그는 한국어를 무턱대고 능멸하며 융적언(戎狄言) 즉, ‘북녘 오랑캐 말’이라고 비하했다. 이것은 일본어의 뿌리가 된 상고시대 조선어에 대한 그의 극단적이 콤플렉스의 노정이다. 그의 이런 편향된 부정적 논술에 대하여는 뒷날 고를 달리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련다.

일본 국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단군신화, 가야신화가 일본 개국신화의 모태(母胎)라는 사실"

한결같이 ‘기원 2600년, 만세일계의 천황’을 표방한 이들 에도시대 배타적 황국신도가들은 조선의 삼국시대(신라 B.C. 58년 개국, 고구려 B.C. 37년 개국, 백제 B.C. 18년 개국 등) 역사 보다 일본이 6백년이나 먼저 앞서서 나라를 세웠다고 거짓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변조한 것이 “신의 나라 일본(神國日本)은 B.C.660년에 신의 아들 진무(神武)천황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목청을 돋우웠다.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첫 진무(神武) 천황이 기원 2600년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황국신도가 꾸며낸 진무천황(神武天皇)이라는 이름의 초대천황은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은 날조된 가공의 왕이었다(津田左右吉 [古事記及日本書紀の新硏究] 1924,외 여러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등 미도학파(水戶學派) 등 국학자들이 가장 크게 두려워한 것은 단군신화며 가야신화가 그들의 개국신화의 모태(母胎)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대일본사]는 처음부터 조선의 단군신화며 가야신화는 철저히 뿌리쳐 외면한 채, 그들의 개국신화인 천조대신과 그의 외손 니니기노미코토(瓊瓊오尊, 이하 니니기)가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강림 신화(降臨神話) 만을 크게 떠받들었다.

거듭 밝혀두자면 일본 역사를 6백년 위로 조작 연장시킨 내막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삼국시대(신라, 고구려, 백제 건국 등) 보다 일본이 월등히 600년이나 먼저 앞서서 국가를 세운 신도(神道) 국가라는 것을 내세우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처사에 대해서 도쿄대학 사학과 마에다 카즈요시(前田一良) 교수는 “미도학(水戶學) 이외 유학(儒學) 출신의 일부 사람들은 유학 이론을 앞세워 신국일본(神國日本)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의 존엄성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유학의 비판자라고 하는 자세로 나타난 국학(國學)도 한 층 더 열렬하게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역설했다. 그 까닭에 가모 마부치(賀茂眞淵)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 등에 의하여 완성된 국학은 존왕론(尊王論)을 발전시키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고 마침내 그것은 뒷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7년 부터임, 필자주)을 실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간주되고 있드시, 확실히 국학 사상이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와 같은 힘을 갖게 되는 원동력으로서 형성되어 온 것인가. 거기에는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이웃나라 학문에 대한 배척이며 이제 또 하나는 국학의 문헌학적 성격이다”([古代の理想化]『日本の建國』1957)라고 집약적으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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