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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한중 화해 협력 사례지역 답사기 [2편]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7-08 조회수 :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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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만 무성한 독립유적지, 서일기념비는 어디에?

역사 속 한중 화해 협력 사례지역 답사기 [2편] 

   
승인 2013.07.07 00:17:22 우대석 사무처장 | culture@ikoreanspirit.com

(1편 바로가기 클릭 )

일본군 만행

우리 답사팀은 청산리전투 현장과 삼종사묘를 참배했다. 이어 백포 서일이 갑작스럽게 불행한 일을 당하고 조천(朝天)했다는 밀산으로 향했다.
(편집자 주 : 한국선도(韓國仙道)에는 육체를 버리고 궁극적으로 하늘과 하나 되는 것을 ‘조천(朝天)’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서일은 독립전쟁을 철저히 준비했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통솔, 연합하여 청산리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병력과 화력 등에서 일본군에 비해 현격한 열세에 있던 독립군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 형식의 전투를 지속적으로 펴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한 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북만주 일대에 있는 조선족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했다.

나아가 중국은 독립군 활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거센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오히려 독립군을 돌봐준다는 일본군 밀정의 정보를 접하고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작정한다. 이것이 바로 훈춘사건(琿春事件)이었다.

일본은 중국 마적과 내통하여 일부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무력으로 대대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일본군의 중국 내륙 진격이 청산리전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일은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군이 살 수 있는 방안은 일본군의 주력부대로부터 되도록 멀어지는 것이었다. 가능한 러시아 국경 근처까지 최대한 멀리 이동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독립군은 약 1천5백리(600여 km)를 수개월 동안 걸어서 러시아국경 근처인 밀산으로 이동했다.

   
▲ 서일은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국경 인근으로 이동했다. 사진은 독립군 이동 경로를 나타낸 것이다. 


러시아 국경 인근 도시인 밀산 십리와로 이동해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밀산은 러시아 영토였다. 이곳은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사는 것이 쉬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재집결한 독립군 제 부대는 1921년 12월 경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한국민회군, 독군부, 신민단, 의군부, 대한정의군정서, 광복단, 혈성단, 야단 등)를 결성해 [대한독립군단]이라는 정식명칭으로 새롭게 조직됐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사령은 김규식, 참모총장은 리장성, 여단장은 이청천, 중대장은 김창준, 전근식, 윤경천, 오광선 등이 위촉됐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밀산조선족백년사에 따르면 약 3,500명이었다. 그곳에는 국내 이 모씨의 지원으로 항일유적비가 일부 조성되었다.

풀만 무성한 독립유적지

   
▲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인근에 세워진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도 적고 예산이 부족해 기념비 주위는 무성한 풀로 뒤덮이고 있었다.

이날 만난 밀산시장과 부시장은 때마침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극진히 맞이했다.

그들은 밀산시가 청산리전투의 진정한 영웅인 서일이 마지막 생을 마감한 곳일 뿐만 아니라 항일독립군이 최초로 당신의 조국인 조선을 건너와서 근거지를 마련한 곳이기 때문에 항일유적지의 고향이면 성지聖地로 바르게 알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 우리를 극진히 대접한 김향란 밀산 시장(가운데 여성) 


이에 대해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도 적극 동의했다. 김 위원은 “밀산이 항일독립군의 최초 근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곳이 러시아와 중국, 조선 3국의 국경지역이었다. 당시 조선으로부터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일운동하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이 곳에서 수년간 둔전제를 실시하여 식량을 직접 조달하고 병력을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 홍범도 장군이 만든 홍범도 농수로가 남아있다.

   
▲ 홍범도 장군이 만들었다는 홍범도 농수로 


선도수련법으로 조천하다

일부 병력은 밀산에 남고 주력부대는 사회주의 독립군세력과 연합을 꾀하면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 곳이 바로 자유시(알렉세프스크)이며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자유시참변은 독립군 간의 주도권 쟁탈 및 러시아군의 무장해제 조치 와중에 벌어진 유혈충돌로 서일의 대한독립군단 등이 완전히 와해되는 사건이었다. 현존하는 밀산 조선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서일은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 국내 다수 학자들은 서일이 자유시까지 동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은 병력을 추스르고 재기로 준비하면서 남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던 서일에게 큰 불행이 닥친다. 서일이 인근지역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나선 사이에 친일 중국마적이 독립군 근거지를 기습한 것이다.

   
▲ 서일은 구한말과 일제시기 단군신앙의 대종교 핵심인물로서 실질적인 대규모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자료) 
서일이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독립군 근거지는 쑥대밭이 되었고 부하들은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몹시 상심한 서일은, 스승인 나철의 편지 두통을 가슴에 안고 1921년 음력 8월 27일 저녁 외출 후 돌아오지 않았다. 대종교와 밀산조선족오백년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 유언시를 남기고 300여 미터 떨어진 인근 야산에서 선도수련 최고의 경지인 폐식법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서는 아래와 같다.

"귀신은 울부짖고 도깨비 날뛰는데
 하늘땅의 밝은 빛 가뭇없이 사라졌네
 독사가 물어뜯고 메돼지가 달려들제
 사람들 피흘리고 살점을 뜯기누나
 해는 지고 앞길이 막막하거늘
 인간세상 어디로 가야 할소냐?"

이때가 1921년 8월 27일(음력)이다. 서일의 시신이 발견된 때는 12일 째인 9월 9일(음력)이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일본의 다른 기록에는 마적의 유탄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음독자살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일본기록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우리를 안내한 밀산시 맹고군 전 부시장 등의 증언에 따르면, 폐식법으로 자진自盡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 근거는 3가지다. 서일이 마지막 조천한 곳이 확실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 현지에 생존한 증인들이 있다는 점, 유언시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 서일이 마지막 생을 마감한 조천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서일은 반드시 누운 지세로 몸에 상처 하나 없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듯 했다. 또한 조천한 이튿날은 궂은비가 내렸는데 의복은 젖은 흔적이 없었다. 6일간 누워있는 시체에는 잡벌레가 접하지 않았다. 과연 서일은 하늘의 수명에 따르고 신선의 은혜를 입어 진정으로 조천을 하였던 것이다.

후손에게 남은 과제

밀산시 현지 교포들은 오래전부터 서일의 마지막 조천지에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산이 없어 진행을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국내에서 많은 사람이 왔다 갔지만, 하나같이 서일 기념비 조성에 노력하겠다는 말만 했지 정작 연락해 온 사람이나 단체는 한 군데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 서일의 조천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흰 상의를 입은 분이 맹고군 밀산시 전 부시장이다. 맹 부시장 오른쪽 첫 번째는 필자, 두 번째는 김동환 연구위원이다. 밀산시 한인회는 이 곳에 서일기념비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으나 예산문제로 추진이 안 되고 있다고 밝혔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서일에 대해 "청산리전투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공식 인정한 군대가 북로군정서다. 그 군대를 총지휘한 사람이 백포 서일이다. 마땅히 건국의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표다."라고 말했다.

   
▲ 밀산시가 선물한 밀산조선족백년사 
맹고군 전 부시장이 선물한 밀산조선족백년사 47쪽에는 서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일은 1919년 조선 3.1운동 후에 현천묵, 조성환, 리장녕, 김좌진, 리범석, 김규식, 계화, 정신 등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지고 <북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총재를 담임하였다. 군사인원의 양성과 사병들의 훈련을 위하여 사관학교를 건립하고 무기를 해결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전부의 심혈을 기울였다."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는 작년 9월 26일 한글회관에서 열린 백포 서일 학술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간도한인들은 그를 북로군정서의 총재 또는 대종교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김좌진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좌진 장군도 백포 서일은 총재라 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 이는 단순히 서일이 독립운동가나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간도한인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서일이 나철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종교적은 물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깨달음을 알려준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서일도 나철 버금가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정리=윤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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