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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역 한중 협력의 과거‧현재‧미래 - 코리안스피릿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7-01 조회수 :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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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운동시민연합은 중국연변 후사모와 공동으로 지난 14일부터 19일까지 '역사속 한중 화해 협력 사례지역 답사'를 개최했다. 국학원과 국학연구소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한민족 고대 역사 유적지부터 항일무장투쟁 현장을 답사했다. 코리안스피릿은 우대석 국학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의 답사기를 4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후사모

6월 14일 오전 9시 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2시간여 만에 연길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있지만 연길국제공항은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시설과 서비스는 매우 열악했다. 화장실 변기는 망가진 채 그대로 있었고 공한 직원들의 서비스 태도 또한 친절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상황하에서 비롯된 관료주의 의식이 매우 뿌리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중국이 선진국 대열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 후사모 장학금 전달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연변 ‘조선족’은 우리민족공동체로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고대에 연변 일대는 북옥저와 고구려 및 발해 그리고 단군조선-숙신-읍루-물길-말갈-발해-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공동체의 역사무대였다. 근대사의 공간에서는 우리민족이 개척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히 벌인 곳이다. 현대사의 공간에서도 우리민족공동체의 성원인 연변‘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앞으로 맞게 될 통일시대에는 이곳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연변 조선족은 한반도 평화통일에 종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적 자원임을 이번 답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연변을 포함한 북간도의 조선족(재중동포)은 항일무장투쟁의 살아있는 현장을 지켜왔다. 지금도 뜨거운 애국심으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통일을 바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후손들이 우리의 진정한 역사를 잊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민간단체 차원에서 역사․문화 강의, 장학금제도를 통해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아가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남북한의 정치상황이나 사회현실 등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국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현실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남한은 주로 성숙하지 않은 정치상황에 많은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은 폐쇄적이고 열악한 경제현실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 연변대학교 사학과 강수옥 교수 역사강의

특히 우리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이경호 씨는 연길시 공무원으로 재직 중인데 후사모(후대를 사랑하는 모임)의 회장이고 실질적으로 후사모를 이끌어 가는 핵심인물이다. 그는 연변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천부경과 삼일신고 관련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민간단체 활동을 통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널리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특히, 조선족 2, 3대들이 뿌리를 잃지 않도록 정기적인 모임과 장학금제도 등을 통해 조선족 간의 유대강화에 노력하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또 다른 나라에서 한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이어나가려는 애국심에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 2013년 후사모 제6회 정기모임에 참석한 국학운동시민연합 관계자 


▲청산리전투 전적비

도착한 당일, 청산리전투의 현장과 청산리 전투의 가장 핵심인물이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백포 서일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청산리 전투지역은 깊은 협곡을 따라 수 십 리를 들어간다. 양쪽으로 험한 산이 줄을 잇고 있었고 협곡의 끝은 멀기만 하였다. 그 중간에 청산리전투 전적비가 우뚝 서 있었다. 기념관은 완공되지 않아 조금은 쓸쓸하게 서 있었다. 이곳은 김좌진 장군과 관련한 단체가 세운 전적비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기념비 설명문에도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실명이 씌어져 있었다.

   
▲ 청산리전투 전적비 앞에서

일반인들은 청산리 전투하면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기억한다. 물론 김좌진과 홍범도가 청산리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김좌진 장군 등이 어떻게 세계 최강이라는 만주 관동군을 포함한 일본 정규군 2만 5천 명을 상대로 1,2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자료가 드물다.

신용하 교수가 2003년에 펴낸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 등의 저술에서 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해소되기 했지만 아직도 진실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 같다.

최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길영 박사가 『백포서일 연구』를 주제로 한 학위논문을 통해 어느 정도 진실을 밝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기사 바로가기 클릭 )

우리와 함께 간 임찬경 박사(국학연구소 연구원, 연변대 박사학위)는 이 부분에서 의문점을 해소해 주었다.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려면, 전쟁 자체도 중요하지만 전쟁을 효과적으로 치루기 위한 사전준비가 완벽해야 가능한 것이다.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독립군이 정규복장을 하고 있었고 계급과 상하복명이 뚜렷하였으며 총기류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군사물자 준비가 가능했을까? 이러한 준비를 김좌진과 홍범도가 모두 했을까? 독립군 부대 간 연합세력으로 대항했고 만주지역 한인(조선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청산리전투 전적비에는 백포 서일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단군정신으로 무장한 독립군의 리더

만약 이런 준비를 가능하게 했던 세력이나 인물이 있었다면 당연히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당시의 여러 자료와 현재 살아있는 조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그 세력은 단군의 정신으로 무장한 대종교와 핵심적인 지휘자 백포 서일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로 허가받아 군자금을 정식으로 징수했으며 그 군자금으로 체코제 현대식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고 사관양성소를 세워 군인으로서의 기본소양을 교육했다.

이러한 준비 속에 감히 범접치 못하는 카리스마로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상명하복, 제대로 된 지휘체계, 복장, 무기와 현지 조선동포의 적극적인 협조를 구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물론 현장의 지휘사령관으로서의 김좌진이나 홍범도도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좌진은 당시 백포 서일의 지휘를 받았다.

   
▲ 왼쪽은 홍암나철, 백포서일, 무원 김교헌의 삼종사묘. 북간도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에 있다. 오른쪽은 왕청현 십리평 대한군정서 사령부 사관연성소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이범석의 자서전에 의하면 김좌진이 백포 서일을 뵈러 가면 무릎을 꿇고 대좌하였다고 한다. 이는 대종교의 상하체계로서의 위치도 있었지만 그만큼 백포 서일은 당시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지휘자 위치에 있었다고 본다.

이것을 흑룡강성 밀산시 부시장을 지낸 맹고군(현재 밀산시청 상임고문)씨가 증언해 주었다. 그렇다면 김좌진이나 홍범도 못지않게 백포 서일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김좌진과 홍범도를 욕되게 하지 않는 길이요, 우리 후손이 해주어야 할 의무라고 본다.

백포 서일은 독립군(대한군정서)의 지휘와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총재부와 사령부를 분리했다. 부대의 위치도 약 30리 정도 떨어져서 세웠다.

지금으로 보면 총재부는 국방부인 셈이요, 사령부는 육군본부다. 당시 중국군이 조사한 기록을 토대로 보면, 대한군정서의 지휘체계는 서일이 총재를 맡았고 부총재에 현천묵, 사령관에 김좌진, 사관교관에 나중소로 기록되어 있다.

현지 조사결과, 사령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있었고 총재부는 그 곳으로부터 약 30여 리 떨어진 덕원리(지금의 유수천)에 위치하였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각기 다른 곳에 배치한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탁월한 선택이라고 평가된다. 만약 일본군이 기습할 시, 전멸을 막을 수 있고 대규모의 조직을 눈에 안 띄게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당시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지명도 많이 바뀌어 쉽게 찾을 수조차 없었다.

   
▲ 대한군정서 총재부가 위치했던 자리로 추정되는 장소. 왼쪽부터 이명학 국학운동시민연합 사무국장, 우대석 사무처장, 정길영 박사,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임찬경 연변대 박사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는 우리의 자긍심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루 빨리 표지판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정리=윤한주 기자>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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