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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회 국민강좌 - 이슬람과 한국 문화
작성자 : 관리자(pooh@designardor.com) 작성일 : 2013-09-30 조회수 : 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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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국학원 국민강좌 안내

○ 주 제: 이슬람과 한국문화(1,500년 교류사) 

○ 일 시: 2013년 10월 8일 (화) 저녁 7시 ~ 9시
○ 장 소: 서울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강당
○ 강 사: 이희수 한양대학교 교수
○ 참가비: 무료 
○ 후원 : 국학운동시민연합, 코리안스피릿, (사)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한민족정신지도자연합회
○문의전화 : 02-584-2010, 010-3782-9560



          <이슬람과 한국문화> 

                 이 희 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hslee@hanyang.ac.kr


1. 동시 패션 시대를 살아간 아랍인과 고대 신라인

우리문화의 깊숙한 기층에는 여러 문화가 중첩되어 있다. 아주 먼 시기부터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바다라는 물길을 따라 들어 온 문화라는 이름의 영양소는 우리를 살찌우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자극제였다. 가까운 동북아와 중앙아시아는 물론, 지구촌 문명젖줄의 가장 먼 맞은편에 있던 아랍과 이슬람의 흔적도 예외 없이 한반도라는 문화 용광로로 흘러들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발굴되는 다양한 서아시아 교역품과 양식기법의 출토, 아랍인의 신라 진출, 경주 괘능의 이방인 석상들, 처용의 존재에 관한 새로운 논의 등은 오래 전부터 멀리 서아시아의 문화가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다는 구체적 증거로 연구되어야 한다.. 경주 괘능 앞의 문인석상은 중앙아시아의 위구르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무인석상은 페르시아계 무슬림 군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토용의 모습에서도 페르시아계나 투르크계 서역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진출을 전해주는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연구는 신라사회의 대외접촉사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다. 
고대 문화교류는 흔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신라 진출이 본격화되는 8-9세기경에는 세계적 대도시인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당나라 수도 장안-신라 수도 경주>간에는 문화적으로 거의 동시패션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상류사회 왕족들이 사용하던 장식품이나 공작새 꼬리털, 비취모, 공예품, 보석류, 여성 소품들과 장신구, 바그다드 일대로부터 전해진 여러 용도의 페르시아 카펫, 모직 말안장, 카펫 장식품, 아라비아 남부의 유향과 몰약, 옥 빗과 에메랄드 제품, 유리제품, 금속 수공예품 등이 중국 장안을 거쳐, 혹은 이슬람 상인들의 직거래를 통해 신라수도 경주에까지 활발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진귀한 수입품과 사치품들은 신라 귀족사회의 고급문화를 일구어냈다. 경주고분에서 발굴되는 무수한 서아시아계 출토품들과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아랍상인들의 교역품 목록들이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동시패션시대>라 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전달되는 고부가의 교역품 수송기간이 바닷길과 낙타를 이용한 육상실크로드를 통해서 6~8개월이면 가능했다는 뜻이다. 교역품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옛 상인들의 열망은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경주시장에 다른 상인들과 속도경쟁을 벌이며 도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육-해상 교역 모두 전속력으로 한 목표시장을 향해 달리는 경우보다는 중간 기착지에서 수많은 교역을 계속하면서 필요한 상품들이 필요한 지역으로 운반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에 이르는 12,000km의 실크로드를 중간 중간 대상숙소의 상황과 낙타의 이동속도, 고대 교역에 대한 역사적 사료 등을 감안하면, 육로로 빠르면 10개월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낙타는 하루 10시간씩 40km 정도를 거뜬히 이동해 갈 수 있다. 이는 꼬박꼬박 끼니를 챙기고 20~30km마다 산재해 있는 카라반 사라이(대상숙소)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서 이동해 가는 경우다. 바닷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속도로는 자칫 사업을 망치기 일쑤다. 만약 1주일만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다른 경쟁자가 유사한 물품을 시장에 이미 풀었다면 그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전 재산과 목숨을 담보하고 험난한 실크로드를 달려온 보답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치명상이다. 그래서 일단 물품목록과 목표지가 정해지면 가장 부가가치가 높고 이익이 많이 남는 물품은 곧장 시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간다. 8개월이면 세계 어느 지역의 물건과 유행, 패션 등이 경주까지 올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낙타는 400kg이 넘는 짐을 가득 싣고 400km를 계속해서 이동해 갈 수 있는 사막의 배다. 17일간이나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놀라운 수송력을 가졌다. 

육로 못지않게 서아시아 문화의 한반도 유입에 바닷길이 결정적 통로역할을 했다. 고대부터 뚫려있던 바다라는 무한의 가능성을 통해 사람이 왕래하고 기술을 주고받으면서 한반도는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었다. 걸프 해에서 출발한 아랍선단은 6개월 후면 중국 동남부 해안에 도달하고, 그곳에 정착해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었다. 때로는 중국 해안가에서 또 때로는 인접의 한반도로 직접 내왕하면서 아시아의 끝과 끝은 그 때부터 서로 나누고 친분을 맺은 사이가 되었다. 통일신라 이전까지는 주로 육상의 오아시스 실크로드가 선호되었던 반면에, 8세기부터는 중국 동남부 해안과 한반도간의 직간접 해상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9세기초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북아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아랍상인들간의 교류는 주로 중국에서의 간접교역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장보고 세력이 몰락하고 시장질서의 교란이 일어나는 9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랍상인들의 직접적인 한반도 진출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아랍 사료의 기록이 빈번히 등장하고, 구체적인 교류의 흔적이 감지되는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미 3-4세기경 중국의 거대한 정크선이 중국해안을 출발하여 걸프해로 항하고, 더 나아가 강을 따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상류까지 항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랍사료에도 5-6세기경 중국의 선박들이 걸프 해의 시라프(Siraf)항까지 도달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6세기까지 중국과 아라비아 사이의 해상교역은 중국상인들의 걸프해로의 직접진출보다는 아랍상인들의 중국진출이 압도적으로 빈번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해상교역은 7세기 이슬람의 성립이후 더욱 빈번해지고 따라서 많은 기록들이 양측의 사료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랍역사학자 마수디(Mas'udi)의 대표작인<황금초원과 보석광산>에 의하면 7세기경 진귀한 물건을 가득 실은 중국상선들이 아라비아 동부와 걸프해로 들어와서 교역을 했고, 이븐 알 칼비(Ibn al-Kalbi)의 언급에 의하면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는 중국시장이 형성될 정도라 했다. 중국인들은 주로 겨울철 북동풍 몬순을 이용하여 중국 남쪽 광동(廣東)지방의 광주(廣州)를 출발하여, 아라비아해로 향했으며, 4월부터 10월 사이에 불어오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하여 회항하는 항해를 반복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직접적인 내왕보다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더욱 경제적이고 실질적이었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도 처음에는 직접 중국까지 가기보다는 인도 말라바르(Malabar) 해안의 케랄라(Kerlala)와 스리랑카, 말라카와 수마트라 해안, 좀 더 북상해서는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근거지로 해서 중간교역의 이득을 챙겼다. 8세기이후부터 항해술과 대양횡단항로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중국의 광주(廣州)까지 직접 내왕하는 교역량도 점차 증가하였다.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머물던 중국 동남부 해안은 한반도의 지척에 있다. 오랜 항해 끝에 중국에 자리잡은 그들이 또 다른 황금시장인 신라를 놓칠 리가 없다. 아랍사료에 보이는 신라에 대한 무수한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2. 고려말 조선초 한반도의 이슬람 문화 

바다를 통한 문화의 흡수와 전파는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퇴조하고 육상 실크로드라는 매력적인 문화전파로가 활성화된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코스트 면에서는 육상보다는 바다길이 훨씬 경제적이다. 복잡한 정치환경 때문이다. 여러 나라로 쪼개져 분열되어 있는 경우에 육로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부담하는 통행료와 세금의 증대로 제대로 수지를 맞추기가 어렵다. 몽골제국은 이러한 걸림돌을 일시에 제거해 주었다. 고려에서 헝가리까지 단 하나의 통행증으로 최대 속도로 실크로드 교역로를 달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은 복속당한 주변 민족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재앙이었지만, 인류 문명의 전파와 과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놀라운 자극의 계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의 삶을 한 단계씩 높이는 계기는 불행히도 전쟁과 교역이 주된 역할을 해왔지 않은가. 몽골의 간섭을 받은 고려사회에서도 이미 세계를 호흡하고 끌어안고 있는 몽골제국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마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로 굳어진 많은 요소들이 몽골지배라는 시대적 아픔의 결과인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첨단의술의 도입, 역법과 학문의 성숙, 의식주를 망라한 다양한 습속과 문화의 도입과 자기화일 것이다. 소주만해도 그렇다. 소주는 당시 ‘아라기’라 불렸는데, 아랍 증류주 ‘알 아락’의 음역이다. 증류주의 대명사인 소주는 재미있게도 술을 철저히 금하는 아랍사회가 만들어 낸 문화적 유산이다. 연금술로 대표되는 아랍의 수준 높은 과학실험의 결과가 알코올 개념을 체계화시키고 실용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을 통해 받아들인 선진 학문과 과학기술은 조선초기까지도 맹위를 떨쳤다. 이슬람 역법을 빌어 우리식 음력을 창안하고, 수많은 과학기기의 발명과 정비에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은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문화전파자 역할을 해왔던 위구르계 두뇌집단들이 고려말에서 조선 초까지도 집단촌을 형성하면서 우리 사회에 그들의 지식과 경륜을 쏟아 내었다. 세종 때의 학문과 과학의 르네상스는 이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분야도 이제 학계가 하나하나 새롭게 조망하면서 정리를 서두를 때다. 

그런데 15세기 중반에 들기도 전에 이슬람 문화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1427년 세종의 외국문화 배척 칙령으로 급격한 동화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신유교주의가 강조되면서 세계관의 초점은 온통 중국이었다. 이즈음 이슬람권을 평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패자로 떠오르는 오스만 제국과 그들과 투쟁하고 경쟁하면서 힘을 키워가던 유럽의 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글로벌 마인드가 무뎌지면서 세계의 흐름의 놓친 결과는 후일 참담한 결과로 나타난다. 

3. 중동을 읽는 굴절의 코드: 오일, 건설, 테러

오랜 단절 끝에 우리가 다시 이슬람 세계를 만나게 되는 시점은 1970년대 초였다. 이미 우리 산업구조가 거의 완전한 석유 에너지 체제로 바뀌고 난 후였다. 지금도 원유의 70% 정도를 중동국가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석유만인가. 넘치는 오일달러 경제의 덕택으로 중동건설시장은 한국에서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연인원 100만 이상의 산업전사들이 숨막히는 열사의 땅에서 땀과 인내를 외화와 맞바꾸었다. 1-2주일의 여행이 아니다. 2-3년간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중동을 보고 이슬람 문화를 익혔다. 보다 나은 삶을 그리며 사막에 고속도로를 깔고, 현대식 빌딩으로 황량한 사막의 신기루를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대우, 동아 같은 굵직한 건설회사들이 세계적인 재벌기업으로 도약한 벌판도 중동이었다. 그 결과 100억불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이라는 장밋빛 꿈이 1978년말에 달성될 수 있었다. 우리의 경제 발전에 중동 시장은 중요한 견인역할을 했고, 지금도 해외 건설, 플랜트 수주의 약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중동 전역은 가전, IT, 자동차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한류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폭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중동은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시대착오적인 민족들이 석유 팔아 거드름 피우면서 부인을 넷이나 거느리고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전형적인 졸부쯤으로 여긴다. 동시에 중동은 낭만과 환상 속에 아득한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아라비안나이트를 통해 접한 표피적 문화의 편견 때문이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의 요술 램프⟫, ⟪하늘을 날으는 양탄자⟫가 중동의 문화코드로 우리 사회 깊숙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상품이나 식당이름에서 서점상호로, 영화 제목에서 최근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작전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1991년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방공망이 마비된 상태에서 24시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퍼붓는 폭탄 투하를 ‘하늘을 날으는 양탄자’를 연상시키는 융단폭격이란 낭만적인 이미지 처리를 했다. 하늘을 뒤덮듯이 떨어지는 가공할 대량 살상무기의 투하, 그로 인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전쟁 게임 즐기듯이 우리도 아무 의식없이 융단 폭격이란 용어에 익숙한 경험은 없는가?   

자살 테러는 또 어떤가? 지구상의 어느 민족이 지금 팔레스타인 인들이 처한 현실에서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무장해제되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조국의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암울하고 극단적인 핍박과 질곡 속에서 그들이 몸을 던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본능적 반응은 아닌가? 모든 것을 빼앗긴 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상대에게 저항하는 것이 왜 테러인가? 그것은 명백한 정당방어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찢겨진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한 생존의 투쟁인 셈이다. 어차피 잃어버릴 것 없이 달랑 몸뚱이 하나 남아 그것마저 던져버리겠다는데, “테러와의 전쟁”이야 말로 너무나 오만한 가진 자의 테러가 아닌가?  

석유에 국가경제의 운명을 걸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도도하고 건방지게 산유국을 대했다. 석유를 직접 산유국에서 가져오기보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석유 메이저들을 통해 들여오는 관계로, 우리가 산유국을 대하는 태도는 메이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미국인들이 생각하고 조작해 놓은 아랍의 이미지를 우리도 판에 박은 듯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미국문화 가치틀이 가져다 준 난치병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셈이다.

이제 중동과 서아시아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그것도 지극히 미국중심으로 왜곡된 현실의 축이 아니라, 우리와의 깊은 역사성과 문화적 교류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편견과 고장관념으로 버리고 가는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사료의 발굴과 재해석으로 함께 하는 협력적 파트너로 다시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5. 결어

우리민족은 대단한 글로벌 DNA를 가졌다. 1500년전 한반도는 세상에 열려있었고 스텝루트-오아시스 루트-해로를 통틀어 세상의 모든 첨단 기술과 문화, 새로운 사상과 가치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단단한 포용의 용광로 속에서 녹여 새로운 우리문화를 창출했다. 서로 다른 색깔, 다른 가치를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저력이야 말로 한국문화의 창조적 DNA이고 역동성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우리문화의 놀라운 원형질에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참고문헌

이슬람과 한국문화(2012, 청아)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2011, 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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